바라춤 / 임석재
묵향이 은은하다. 족자簇子에 걸린 많은 글들이 나를 반긴다. 예전에 필묵을 가까이할 때가 머리에 스친다. 펼쳐진 하얀 서지書紙를 대하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먹을 품은 붓끝이 종이에 닿았을 때 바로 나아가지 않는다. 가는 듯 뒤로 물러선다. 역입逆入이다. 돌아 나온 붓이 그제야 획을 긋는다. 서두르지 않고 용필用筆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었다.
둘러보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라춤’을 쓴 족자 앞이다. 굵은 획이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인다. 검은 용이 깊은 물 속을 박차고 올라 용틀임을 하며 날아오른다.
내리그은 두 선을 가로지르며 ‘바,라’ 두 글자가 흐르듯 내려온다. 글자 사이의 성글음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라’의 모음에 이르러 붓은 잠시 끝을 드러냈다. 그러나 붓은 그 끝이 다 드러남이 아니요, 반듯이 세워 매듭을 짓는다. 절節이다. 중봉中峰으로 먹물을 모아 뼈를 이루어 “l”가 내려와 잠시 뜸을 들이고 살포시 가로로 점을 누르듯 찍어 ‘라’를 이룬다.
붓이 허공에 들리 운다. 살짝 휘돌아 내려앉은 마지막 ‘춤’은 신명 난 한판의 굿이다. 비스듬히 왼쪽으로 기울어진 몸으로 앞으로 나아갈 듯, 머물 듯 들썩인다. 마침내 휘몰아친 강풍을 타고 용이 승천하며 ‘춤’은 날렵한 ‘ㅁ’을 돌아 끝을 아래로 뻗쳤다. 용미龍尾가 살짝 구름 아래로 그 모습을 드리웠다.
이제 단아하고 맵시 고운 궁체의 본문에 눈길이 머문다. 성글었던 서제書題에 비하여 이백 여 자字의 글씨가 밀밀하게 여백을 채웠다. 성기고 빽빽함이 어우러져 소소밀밀疎疎密密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가득 찬다. 한 자字 한 字가 모두 나름의 아름다움을 다소곳이 뿜어내되 강하거나 억세거나 투박하지 않다. 부드러운 곡선의 자태가 매끄럽고 우아하다. 궁궐의 여인들이 주로 썼던 궁체는 소박하면서도 품위가 느껴진다.
서제인 ‘바라춤’에 다시 눈길이 간다. 진한 먹물로 휘몰아쳐 쓴 강한 힘에서 바라의 징명한 울림이 들린다. 바라를 든 승려의 춤이 이제 글씨로 살아나서 붓으로 공양을 드린다. 이승의 업과가 태산처럼 쌓였으되, 아직도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영혼에 대한 징비懲毖련가. 바라춤은 잠시 세속에 찌든 내 마음의 티끌을 돌아보게 한다.
서제와 본문을 번갈아 들여다본다. 승천하며 용틀임치는 서제와 소沼에서 흘러내린 여울에 조약돌인 듯 오밀조밀 단아한 본문이 심산유곡深山幽谷의 한 폭의 그림이다.
몇 걸음 옮겨 석란石蘭에 발길이 머문다. 거무스름한 바위 밑에 다소곳이 난초가 피었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송이가 옅은 회색으로 봉긋하게 부풀어 있다. 달을 그리되 구름으로 달을 나타내듯 꽃봉오리에 눈길이 머문다. 활짝 피어 맑은 향기를 뿜어내는 난꽃과 어울려 숙熟과 미숙未熟, 성成과 미과未過의 조화가 아름답다.
마침 집에도 여름 지나 찬바람이 일어서인지 소심素心이 꽃대를 내밀었다. 언제 피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난이다. 어디서 인지 희미한 향기에 이끌려 다가가 보면 벌써 꽃이 매달려 있다. 벌어진 세 개의 꽃잎, 그 안에 양팔을 벌린 듯 두 개의 꽃잎이 안겨 있다. 갈색의 점점點點이 안으로 인도하듯 찍혔으되 노란 두 언덕이 살짝 도드라져 관능을 불러일으킨다. 노랗되 아주 노란 것이 아니요, 잎의 녹색이 물든 연초록의 살짝 부끄러운 색이다. 화지에는 농담濃淡으로 그 색을 꾸미었는데 담백하게 번진 세세함이 은은隱隱하다.
화제畵題에는 ‘지란芝蘭이 숲 속 바위에 아무도 몰래 피었으되 그 향기를 잃지 않는다.’ 하였다. 그래서 더욱 난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일 게다.
다시 발길이 바라춤으로 향한다. 신석초 시 ‘바라춤’에서 옮겨 쓴 본문은 이랬다.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는 티 없는 꽃잎으로 살아여러 했건만 내 가슴속에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거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긴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이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으슥한 골짜기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 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마음에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며칠이 지나도 눈앞에 글이 어른거린다.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 본다. ‘티 없는 꽃잎’, ‘구슬픈 샘물’, ‘맑은 거울’이니 하는 시구詩句가 마음에 오롯하다. 흘림이었던가 정서正書였던가. 수많은 글이 살아온 길에 아득하다. 산다는 것은 흰 종이에 글씨를 써 내려가는 것과도 같으리니 때로는 반듯하기도 하였지만 종종 삐뚤빼뚤 허물 많은 일들을 새기며 살기도 했다.
남은 여백이 얼마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처음 서지를 펼쳤을 때의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금 여백을 채워야 할 때다. 글씨를 마칠 때도 붓을 오던 방향으로 살짝 되돌아가듯이回峰, 삶의 반추로 여백을 값있게 하라고 ‘바라’는 다시 내 귀를 울린다.
첫댓글
글 속에서 묵향이 느껴지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