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부터 교지 관련 일로 인쇄소에 들락거린 덕분에
나는 편집과 인쇄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가리방(がり版)을 직접 긁고 등사기를 밀어서
고등부 찬양대의 악보를 손수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학 때에는 마스터 인쇄라는 방식이 국내에 소개되어
그걸로 찬양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런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컴퓨터 시대에도 출력 장치인 프린터에 신경을 많이 쓴 편이다.
처음에는 거금 100만원을 들여서 9핀 도트매트릭스 프린터를 구입했고,
새로운 프린터가 나올 때마다 어김 없이 한 대씩 구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그 프린터로 한 권씩의 책을 만들어 보았다는 것이다.
대학 강단에서 교재가 필요하거나, 내 논문을 인쇄할 때
그 프린터들을 활용했다.
첫 번째로 나왔던 것이 내 박사논문의 기초가 되었던
창가 연구에 관한 소책자였다.
이것은 9핀 프린터로 출력하고 마스터 인쇄를 해서 제본한 최초의 책이었다.
지금은 9핀 프린터도 찾아보기 힘들고, 그걸로 찍은 인쇄물도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서가에는 그 9핀 프린터가 여러 시간에 걸쳐서
지익지익 하는 소음을 내며 만들어낸 책자가 꽂혀 있다.
9핀 프린터 다음에 나온 것이 24핀 프린터였다.
속도도 빨랐거니와 인쇄 품질도 월등했다.
이것으로는 87년 무렵에 내가 짰던 폰트 유틸리티 프로그램의
사용안내서를 만들었다.
그 뒤에 나온 것이 40핀 프린터였다.
금성(Goldstar) 상표로 나온 노란색 프린터였는데,
도트매트릭스가 아니라, 감열 프린터(thermal printer)라고 해서
특수 리본에 열을 가함으로써 종이에 잉크가 묻어나게 하는 방식이었다.
(요즘 은행의 대기 번호표 프린터도 바로 이 방식이다.)
조용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40핀에 이르는 섬세함에 반했던 나는
이전에 만들었던 9핀 프린팅 책자를 40핀 프린팅 책자로 변환하였다.
물론 내용도 보완을 했다.
40핀이면서도 천으로 된 리본을 안 썼기 때문에
그 선명함은 청타에 육박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다가 80년대 말에 꿈의 프린터가 나왔는데, 바로 레이저 프린터였다.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인 내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내가 박사학위논문을 작성 중인 때였기 때문에
인쇄비 대신 레이저를 사겠다는 나의 꼼수에 아내가 쉽게 넘어가 주었다.
'창명'이라는 브랜드의 300dpi 레이저는 OPC 엔진을 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래한글의 레이저 프린터 버전(1.51)이 나오지 않은 때라
부득이 나는 그래픽 방식이 아니라 폰트 방식으로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89년 12월에 제출된 내 박사 논문은 아마도 국내 최초의 레이저
인쇄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인문사회계에서는)
전북대학교에는 나밖에 레이저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그 뒤로 여러 교수들이 내 레이저를 이용하여
박사논문을 출력하였고, 그 덕에 아마도 레이저 프린터 값은 충분히
뽑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600 dpi가 맘에 들고, A3까지 출력하는 것이 필요해서
HP 레이저젯 4MV도 샀고,
지금은 간단히 신도리코의 블랙풋이라는 600 dpi 16PPM 기종을 사용하고 있다.
가끔씩은 1200 dpi 생각도 없지는 않으나 그냥 여기서 머물기로 작정했다.
대신 컬러에 대한 필요 때문에
여러 차례 잉크젯 프린터를 구매하였다가,
잉크값의 압박에 별로 많이 사용을 못했는데,
최근에는 무한잉크를 사용할 수 있는 엡손의 R320, R230 두 대를
운용하고 있다.
가끔씩은 공씨디에 인쇄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컬러에 빠지다 보니 20만원대로 떨어진 컬러 레이저에 관심이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잉크젯으로 우선은 만족한다.
앞으로, 아주 조용하고, 신속하며, 깨끗하게 출력되는
소모품 값 걱정이 없는 프린터가 나온다면
그때는 제 일착으로 바꿀 생각이다.
언제 나올지는 모르지만...
첫댓글 9핀 프린터는 사용은 못 해 보았고 24핀부터 쓴 거 같습니다. 써멀 프린터를 아시는 분이 별로 없고 시중에서는 그런 걸 잘 팔지도 않지요. 원래 캐드용으로 나온 것인데.......저도 프린터라면 거의 안 써본 것이 없는데 여러 종류를 정말 많이 사용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