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의 바람(23 : 형주를 얻고 나서)

[白華郞]

"뭣이라고? 끝내 유비에게 형주를 넘기겠다고?"


"그렇습니다. 누님."


"이럴 수가, 게다가 우리 유종 공자까지 그에 찬성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제 한 가지 방법뿐입니다."


"어쩔 참인가, 아우는?"


채부인의 눈이 독사처럼 빛났다. 채모는 소리를 죽여 그녀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다 듣고 난 채부인은 무릎을 쳤다.


"어서 서두르게."


"예. 누님. 심려 놓으시고 기다리십시오."






다음 날, 신야성으로 돌아가던 유비와 유성은 길 위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자객이라고? 유종아. 그 말이 사실이냐?"


"예. 다행히 아버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만, 그가 자살하는 바람에 배후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으음……."


"스승님, 부탁드립니다. 배후인을 찾아주십시오."


"내게 부탁하는 거냐? 왜?"


유성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느낌 때문에 톡 쏘아붙이고 말았다. 유종의 눈에 금새 눈물이 고였다.


"스승님은 가능하시지 않으십니까? 제발……."


유성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유종의 눈물어린 부탁을 무시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즉시 전 운조와 표국과 4영신군에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지존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유성은 잠시 무림으로 돌아갔다. 이유 모를 조급함 때문에 서두르고 싶어서였다.


딴 때 같으면 옥명을 내렸겠지만, 유성은 마음이 급했다. 그의 예감은 좋지 않다는 신호를 강력히 보내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 유기는 강하 태수로 임명을 받아 강하성을 향해 떠났다. 유성은 거기까지 들었을 때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그는 자객의 시체를 인계해 와서 조사를 진행시켰다.


"옷에도 아무런 흔적이랄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몸에 문신 같은 것은 없었나?"


"있었사옵니다. 왼쪽 팔뚝에 흑룡이 새겨져 있었음을 보았사옵니다."


"흑룡이라……. 나에 대한 반대 세력인가……?"


유성이 스스로 내세운 그의 상징은 백봉(白鳳). 흑룡과는 완전히 반대 개념이다. 그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곁에 있던 사마온이 여쭈었다.


"4영신군에게 겹으로 지존령을 내리심이 어떠하실른지요?"


"글쎄……. 그렇지만 이상한 게 있네. 아무리 봐도 너무 계획적인 느낌이 들어. 게다가 예감이 너무 나빠."


"……하오시면?"


"하운 자네가 가서 양양성의 사정을 살피고 와 주게. 특히 유표의 주변에 대해서……. 아무래도 뭔가 있어. 채씨 일족들이 뭔가 하고 있음이 분명하네. 그리고 이란은 나와 함께 시체를 다시 검시하세.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필요하네."


"예. 전하."


하운이 곧 양양성을 향해 은밀히 떠나갔다. 유성은 한숨을 쉬며 다시금 시체를 보관한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전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유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채모가 유언장을 발표했는데, 형주를 유종에게 물려준다 하옵니다!"


"!"


유성은 벌떡 일어났다. 언젠가처럼 몸에서 검은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그의 분노는 언젠가처럼 그 대상이 정확했다.


"으윽, 채부인! 이 여우! 어린 아들을 속이고 나를 속여? 감히!"


그것이 미사엘의 분노인 줄, 간교한 계집에게 속은 천사장의 분노인 줄 다른 사람들이 알 리 없었다. 물론 하운을 제외하고는.


유성은 생애 처음으로 이를 갈며 물었다.


"유경승의 사인(死因)은?! 알아보았는가!"


"예. 주군. 독살이 분명하였사옵니다."


"그렇겠지! 제길, 속았어! 유종을 이용한 채모 일당의 계략이야! 틀림없이 그간의 일은 모두 날조되어 천하에 알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숙부님께서는 신망을 잃으시고 형주의 실권은 채씨 일가에게 쥐어진다. 그렇게 두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서둘러 채비를 하라! 신야성으로 돌아가야겠다."


"예. 주군!"


"저 자객의 시체는 증거물로 남겨 두어라! 이란, 백송! 책임지고 시체를 보관하라!"


"예, 주군!"


유성은 번개처럼 말을 몰아갔다.


"감히 날 농락하다니……. 유종을 이용해서 나를 조롱하고, 무림의 사람들을 엉뚱한 일에 몰아넣어?


채부인, 채모 형제들.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지존령을 다시 내린다. 즉시 전 무림에 공포하라. 그 계집은 이제부터 무림의 공적(公敵)이다! 쫓지는 말되, 눈에 띄는 대로 선참후보(先斬後報)를 명한다!"


유성의 명령 - 서릿발같은 명령이었다. 주현이 물었다.


"주군, 채모 형제들은 어찌 하실 요량이시옵니까?"


"'어둠'에 합쳐진 자들은 인간으로서 대접하지 않는다. 하나의 소도구로 만들어 줄 것이니, 그들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오면 곧 영을 전하겠사옵니다."


"으음!"


즉시 주현과 적영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그리고 유성은 하운을 대동하고 그 날 밤으로 신야성으로 돌아와 곧장 오익대사를 소집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들은 깜짝 놀랐다.


"지금 뭐라고 했나? 독살이라고?"


"틀림없네. 하운과 백운(백영신군의 백운)이 직접 시체를 보았네. 아주 지독한 맹독에 당하셨다고 하더군. 내 알기로 유언장은 이미 채씨 일가의 손에 들어가 있네. 아니, 지금쯤 불쏘시개가 되었겠지."


최주평이 말했다.


"결국은 태평의 말대로 되었구만."


"아아, 그렇게 되지 말았어야 했네."


자정이 되도록 그들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유성은 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 눈을 뜰 줄 몰랐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 힘으로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보다 너는 아버님의 기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편지를 다오. 오늘 밤 등불로 신호할 테니 데리러 와 달라고. 채모는 틀림없이 형주를 조조에게 넘긴다. 네가 아버님의 기업을 지키고 싶다면 우리와 한 약조를 지켜다오]


[물론입니다. 스승님. 숙부님께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흐흐흑……]


[울지 말아라. 하운이 연락을 받으러 갈 것이다. 몸조심하고 있거라. 그리고 진짜 유언장은 어찌 되었느냐?]


[진본은 미리 작성하여 아버님의 도장을 찍고 강하로 가 계신 형님께서 몰래 가지고 가셨습니다]


[됐어. 아주 잘 했다. 하운을 곧 보낼 테니 너무 염려 말고 기다리거라]


유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종의 곁에 흑영신군 소속의 군장 하나를 심어놓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가슴을 내리 쓸었다. 방금의 전음도 그가 전해준 것인 것이다. 그는 아직까지 의논이 끝나지 않은 친구들에게로 갔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반 시진 정도 보냈을까. 하운이 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전하. 긴급한 연락입니다."


"긴급한 연락이라니, 어디서 왔는가?"


"양양성입니다."


순간 방안이 조용해졌다. 유성이 들어온 이후 침묵을 지키며 그를 주시하던 제갈량이 물었다.


"양양성에서……? 유종으로부터인가?"


"그렇습니다. 여기……."


유종으로부터의 연락이라는 말에 좌중이 소란해졌다. 다들 공명과 유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성은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소리내어 읽었다.


"어디…….

<신야에 계신 숙부님과 스승님께 문안드립니다. 우선 이 못난 유종을 용서하십시오. 뒤늦게 알았으나 어머님과 외숙부께서 하신 일인지라 손쓸 틈이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독살당하신 것은 저의 책임이 큽니다.


저는 지난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그대로 적어 아버님의 도장을 찍어 비밀리에 강하로 가 계신 형님께서 가지고 가시도록 하였습니다. 형님께 연락하시면 보존된 아버님의 유언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합니다만 몸을 빼내기가 어렵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오늘밤에 등불로 신호할 테니 데리러 와 주십시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부디 후일에 이 죄를 물어주시기를……. 못난 조카, 제자 유종 드립니다>."


더 이상 회의를 할 필요가 없었다. 명분은 충분했다. 유성은 당장 차비를 했다. 네 사람은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직접 갈 셈인가?"


"그렇다네. 거기 그 푸른 꾸러미 좀 집어 주겠나? ……내가 가는 것이 가장 좋아. 채부인 정도라면 유종을 조종하는 것도 별 일 아닐 테니 말일세."


공명은 속으로 채부인이나 채모가 지난 번 세류를 죽인 그 '암흑' 이라는 '힘'에 속한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유성이 흠칫 놀라 그를 쳐다보는 것은 모른 채…….


"단검은 그렇다 치고, 그 봉은 왜 가져가는가?"


"하핫, 이건 보통의 금속으로 된 봉이 아닐세. 이 붉은 보석은 용의 심장이지."


"뭣!"


하운이 곁에서 도와 주다가 말했다.


"주군, 그 힘을 사용하시려 하시옵니까?"


"'그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야. 그나마 지금은 그들이 덜 날뛰는 시기이니 다행이지만, 나중에는 정신없이 써야 할 지도 모르지."


"알겠습니다. 하오면……."


하운은 품속에서 고리 같은 것을 꺼내더니 유성이 든 봉의 머리 부분의 작은 고리에 채워 달랑거리게 했다. 유성은 씩 웃었다.


"고마워. 미리 준비해 두라고 한 것은 다 되었나?"


"예. 주군."


"그럼, 먼저 출발하도록. 어쨌든 소란을 일으키고, 내일 아침에 끝내는 것이다."


"예. 주군."


하운, 주현, 이란 세 사람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석도가 물었다.


"어쩔 셈인가?"


"비밀 통로로 미리 들어가 있다가 호응하기로 했네. 기대하라고."


그리고 유성은 곧장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한밤중, 한 마리 하얀 나비가 성루에서 성벽으로, 성벽에서 나무 꼭대기로, 나무 꼭대기에서 나무 꼭대기로 날아다녔다.


양양성, 유성은 기척을 지우고 모습을 감쪽같이 감춘 다음 녹아들듯이 성내 관소로 숨어 들어갔다. 유종의 방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 생각대로 약을 먹였군! 지독한 계집 같으니……. 제 자식을 이렇게 만들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방 곳곳에 보이던 살기들이 사라졌어……. 하운이 일을 잘 해낸 모양이군. 좋아 - 그럼 유종아. 가자꾸나.'



그의 손에 들린 미스릴 봉이 한 차례 움직이자, 유종의 잠든 몸이 스르르 떴다. 소리 하나 없이 공중을 날아 유성의 팔에 안긴 유종은 깊이 잠들어 깨어날 줄 몰랐다. 유성은 망설임 없이 용언의 능력을 발했다.


'……깨어라(awake)!'


그러자 약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것과 동시에 유종의 눈이 반짝 뜨였다.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방 전체에 강력한 환상 결계와 실드가 쳐지고 있었다. 용언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막을 만큼의 결계와 실드라면, 미사엘은 여기 있으니, 또 한 사람 용언을 제어할 수 있는 존재인 하운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실드의 기운은 주현과 이란의 것. 그들은 제대로 호흡을 맞춰주고 있었다.


"일어났구나."


"스승님……! 와주셨군요."


"그래……, 약을 먹었던데, 몸은 괜찮으냐?"


"예. 괜찮습니다."


"자아, 그럼 출발하자. 조금 특이한 방법으로 갈 테니까,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놀라지 말아라. 알겠니?"


"예. 스승님."


"그럼, 간다. 모두들 철수해라! 하운, 예정대로 움직여라!"


방의 한구석에서 인기척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성문 쪽에서 갑자기 까마귀가 요란스레 울어댔다.


유성은 유종과 함께 마법으로 모습을 감췄다. 환상 결계 덕분에 누가 들어와 봐도 깊이 잠들어 있는 유종의 모습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느낌까지 그대로 속는 지독한 결계이니 적어도 내일 정오까지는 유효할 것이다.


방문이 열리며 검을 든 채모가 들어왔다. 그는 침상 쪽을 한 번 보더니 이불을 잡아 잘 덮어 주고는 나갔다. 유종은 고개를 돌린 채 보지 않고 있었다.


유성은 재빨리 그의 뒤에 붙어 서서 방을 나왔다. 창문을 열어 두면 진짜 유괴사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유성의 봉이 반짝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은 성벽 위에 반짝하고 나타났다.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눈앞에 손을 흔들어 봐도 군사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숙부님, 용서하십시오. 흐흐흑……."


"일어나게, 조카. 조카의 잘못이 아닐세."


유비는 엎드려서 우는 유종을 달랬다. 공명이 말했다.


"이제 유종공이 여기에 있으니, 채모 일파를 정리하고 양양성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럽시다. 서둘러야겠소."


내일 아침이면 유성의 모든 마법은 풀린다. 이미 그렇게 설정을 해 놓은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신야성은 뜻밖의 공격을 받았다.


"쏴라! 뭣들 하느냐? 쏴라!"


화살이 마구 날아들었다. 성내의 백성들은 우왕좌왕, 병사들도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유성이 직접 성루에 올라가 외쳤다.


"채모! 그대는 제국의 태제인 나에게 화살을 겨눌 참이냐!"


화살이 멎었다. 채모가 얼굴을 드러내고 외쳤다.


"전하! 태수님을 돌려주소서! 어젯밤 황숙의 군사들이 어린 태수님을 강탈해 갔사옵니다! 어찌 의를 배신한 저들과 함께 하고 계시옵니까?"


유성은 핏 웃었다.


"유종을 데려온 것은 나다."


"예에?!"


채모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쳐갔다. 그는 직감적으로 유성이 자신들의 음모를 알아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계속해 귓전을 때렸다.


"그 아이는 내 제자다. 제자가 스승의 명을 받고 온 것뿐인데 무슨 일로 소란을 피우는가? 내 사촌아우 유봉도 여기 있고 강하로 내려간 유기도 불렀다. 제자들에게 할 말이 있어 급히 오게 한 것인데, 숙부님께서 유종을 강탈해 오셨다니 무슨 말이냐?"


"하, 하지만……!"


"후훗 - 어쨌든 그대, 잘 왔느니라. 형주를 노리는 독사 한 마리를 지금 여기서 잡는구나. 유종아. 나머지는 네가 처리하거라. 난 이만 들어가련다."


"예. 스승님."


유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어렸지만, 녀석은 잘 성장해 있었다. 채모가 외쳤다.


"태수님! 무사하십니까?"


유종은 씩 웃었다.


"나는 태수가 아니오."


"태수님!"


"닥쳐라! 아버님을 죽인 독사! 어린 나를 내세워 형주를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강하에 계신 형님께 자객까지 보냈지!"


"!"


채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괴월과 문빙은 채모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유종은 다시 외쳤다.


"아버님은 나와 형님 앞에서 그리고 여기 계신 태제 전하 앞에서 숙부님께 형주를 맡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소. 이 내가 증인이오. 그리고 아버님을 죽인 독사가 지금 누구에게 독을 품고 있는지 보시오! 형주의 충신들이여!"


채모는 이제 덜덜 떨기 시작했다. 문빙은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들고 채모를 베어버릴 태세였다. 채모의 아우인 채중, 채화, 채훈 등이 상황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현 태수인 유종의 발언은 이미 그들에게서 사람들의 마음을 떠나게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그대는 내 아버지의 신하로서 주인의 기업을 역적에게 넘기려 하였다! 백송 장군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유종이 돌연 백송을 부르자 놀란 것은 채모 형제들이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공명이 유성 곁에서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자네가 태제로서 유종의 증언을 인정한다는 의미겠지?"


"맞아. 형주 내의 일이 아니고, 제국의 후계자로서 내가 결정하는 일이야. 자, 유종. 내 이름으로 명을 내리거라."


"예. 전하. 장군! 저 독사의 목을 베시오!"


백송은 이미 완전무장을 하고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종의 말이 떨어지자 성문이 곧장 열리고 백송이 달려나갔다. 언젠가 장무와 진손을 칠 때 여실히 증명했던 그의 무공이었다.


"백송, 여기 있습니다. 네 이놈. 거기 꼼짝 말고 있어라. 내 너의 목을 가지러 가리라!"


겁에 질린 채모는 그 길로 아우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따르는 군사는 수십 기도 채 되지 않았다. 문빙, 괴월 등은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항복했다. 본래 형주에서도 알아주는 충신이었던 그들이었다. 유종이 말한 형주의 충신들이란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 날로 유비는 양양성에 입성하여 강하에 가 있던 유기가 가져온 유언장을 공표하고 형주의 인을 받았다. 유기와 유종은 태수 바로 밑의 요직에 임명되었으며, 그 날로 두 사람은 유성과 함께 상소문을 작성하여 정오가 지나 유성이 허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가지각색이었다.


"괜찮을까요? 허도로 가셨다가 돌아오시지 못하시면 어쩝니까?"


유봉의 말에, 공명이 놀라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전쟁이 시작되면, 잠시 이 곳을 떠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다른 이들도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공명은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당연합니다."


공명의 대답에, 이번에는 유봉이 놀라 버렸다. 곁에 있던 관평과 유기, 유종도 놀랐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조조는 조심스러운 사람입니다. 함부로 천하 사람들의 인망을 잃을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지요. 하지만 이번 전쟁을 거치지 않고서는 조조를 얻을 수 없다고 전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조조를 얻는다고요?"


"아직까지는 제 예감입니다만……. 그것이 이유가 맞다면, 전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하께서 이 곳에 계시면 안 되지요. 전하께서 여기 계시면 제국의 후계자를 치려 한다고들 할 테니 말입니다."


"……!"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그렇게 책임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전하께서는 제가 아는 누구보다도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춘추는 젊으시지만, 만물의 이치를 깊이 깨달아 알고 계시지요.


또 그러면서도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밝은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십니다. 다들 받기만, 얻기만 바라는데 저 분은 주고 싶어하시지요. 아름다운 성품이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받기보다는 주고 싶어하고,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고 싶어했던 것이 유성의 평소 지론이자 행동 생활 방침이었다.


누군가를 본받고자 하는 느낌이 강했지만, 그것은 아무리 캐물어도 알 수가 없었다. 지고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그는 마음에 묻어 둔 채 유일한 혼자만의 보물로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허도에서는 여전히 조조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었다. 삼공 제도를 폐지하고 승상에게로 권한을 일원화한 조조는 새로운 인재의 등용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모개, 최염, 사마의 등이 그들이었다.


특히 사마의는 크게 쓸 재목이었다. 자는 중달(仲達). 하내 온(溫)땅 사람으로 학식보다도 임기응변에 뛰어난 그의 재주가 조조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순욱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보고 있었으나 아직은 한직에 두고 있었다.


그날도 조조는 순욱과 함께 정원을 거닐며 의논을 하고 있었다.


"강동과 형주의 싸움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손권은 곧 강하에서 철수했고, 유표 또한 군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승상의 남정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최근에 제갈량이라는 선비를 새로 영입하여 군사로 등용한 모양입니다. 그 동안 군사력을 상당히 키워 놓아 그 수가 3만에 달하고 하나같이 정예군이라 합니다."


"대단한가 본데, 처음 듣는 이름이오. 어떤 사람이오?"


"자는 공명, 도호는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고 합니다. 낭야 양도 사람으로 조실부모하여 숙부인 예장 태수 제갈현이 그를 양육했습니다. 양양의 융중 땅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는데, 그 재주가 가히 하늘을 주름잡고 땅을 뒤집을 만하다 하여 와룡이라는 도호를 얻었다고 합니다. 수경 선생 사마휘와 태제전하의 안목이라고 합니다."


"아아……. 과연 중앙의 정보력. 그렇지만 그래도 그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한데요."


"!"


갑작스런 음성에 막 모퉁이를 돌아가던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췄다. 황급히 뒤돌아보니 정원 한가운데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누구냐?!"


"흐음, 동백꽃의 향기가 좋아졌군요. 오래 못 뵈었습니다, 두 분……?"


"전하!"


두 사람은 황급히 계단을 내려와 유성에게로 다가가서 부복해 예를 올렸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아아, 얼마 전에요.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예, 전하."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시킨 일도 아니고 의례적으로 허리를 굽힌 것도 아니었다. 변해가고 있는 젊은 황제와는 또 다른 위엄과 기품이 풍겨나는 유성의 분위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유성은 씩 웃었다.


"일어나세요. 그 동안 정말 훌륭하게 잘 해 주셨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조조는 몸을 일으키며 빙긋 웃었다.


"아직 새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하."


"물론이지요. 새장을 부수지도 않았는데 새가 자유로울 리가 없지요."


유성은 조조가 뭐라고 하건, 이미 그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그의 미소는 그러한 그의 뜻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래 왔다는 듯 정원을 걸으며 담소하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명의 능력은 관중에 비교할까……. 아니, 아니. 주나라를 진흥시킨 강자아(강태공)나 한나라를 왕성하게 한 장자방에 비교하겠습니다. 두 분도 잘 아시는 서원직이 일찍이 '나는 반딧불이요, 공명은 보름달이다'라고 까지 극찬한 인물이 바로 그지요.


그리고 최근에 새로 영입한 인물은 공명만이 아니고 석도와 최주평이라고 사마휘 선생님 밑에서 동문수학하던 친구들도 두 명이 더 있어요. 군사력도 잘못 알고 계시던데, 3만이 아니라 6만입니다. 허위 보고가 상당한 것 같군요."


대번에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위 보고라니! 명색이 중앙 정보국 역할을 하는 그들의 정보망인데 허위 보고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은 치욕이나 다름없는 일, 아니 정말로 부끄러워 얼굴을 가릴 만한 일이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감.히. 유성의 미모에 대고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유성을 추종하고 있는 그들이 어찌…….


"어쩌시겠습니까? 군사를 내야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유황숙은 형주목에 오르셨거든요."


"예?"


두 사람은 또 놀라고 말았다. 유성은 생글생글 웃었다.


"유표는 유언으로 유황숙께 형주를 맡겼어요. 유기와 유종도 함께 그 자리에서 그것을 바랬고, 나는 지금 막 폐하께 숙부님의 형주목을 정식으로 윤허받아서 나오는 길이었지요. 그 윤허장은 벌써 전서응으로 날렸고 말입니다."


"그, 그럴 수가……."


"참, 공명이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를 공격해 온다면 첫 번째 싸움에서는 내 능력을 보여 줄 것이고, 두 번째 싸움에는 신야성을 내어줄 테니, 처음에는 10만 군사 정도로 한 번 와 보라고 하더군요.


대장은 하후돈 정도면 될 것입니다. 수군 훈련이 아직 덜 진행됐을 테니 그의 말대로 하도록 하세요. 손권을 끌어들여 수전을 치르기에는 아직 부족하니까요."


순욱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왜 이런 것을 말해 주는 것인지.


마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를 내리고 어디 공격해 보라고 하는 그런 분위기였지만, 조조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조조는 오히려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요. 잘 해 보세요. 이번 싸움은 전적으로 공명이 맡을 것이고 나는 여기 머물며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거니까요. 아마 공명은 새로 얻은 형주의 민심을 다스리는 것을 도와드리는 데만도 꽤 바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고마워요. 승상께서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두 사람은 다정한 얼굴로 손을 마주잡았다. 유성은 따뜻한 눈길로 조조를 바라보았고, 조조는 날카롭게 유성을 쏘아보며 뭔가를 잡아내려는 사냥꾼의 눈길과 비슷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대조적인 눈길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궁을 나온 유성에게는 한 가지 일이 더 남아 있었다. 품안에 황제의 교지를 하나 숨겨 두었던 그의 걸음은 공융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나절은 기다릴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공융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내 생각대로구나.'


"안녕하십니까?"


공융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태제전하! 소신의 집에 어떻게……."


"조용히.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우선 차나 한잔 주시지요?"


"아, 예. 예. 어서 들어오십시오."


유성은 공융의 집에 들어와 앉자마자 차가 나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말했다.


"방금 조조에게 유황숙을 치지 말라고 말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합니다."


"잘못하셨습니다. 반드시 참소하는 자가 있어 내일이면 당신의 집이 몰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요."


유성은 싱긋 웃었다. 공융이 그리 대답할 줄은 이미 짐작하고 온 것이다. 그는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준비해 온 것이 있지요."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자, 무릎을 꿇고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황제 폐하의 교지예요."


"예엣?!"


"나는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환경을 만들어나갈 것이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듣지 못했나요?"


언젠가 왕자복, 오자란 등에게 선언하듯 했던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유성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고여 있었다. 수십만은 족히 될(본인은 모르지만) 유성의 추종자들이 생애 단 한 번이라도 보기를 소망한다는 그 부드러운 미소였다.


공융이 네 번 절하고 받아 보니, 그것은 자신을 태제의 글공부 스승으로 임명한다는 교지였다. 그는 놀란 얼굴로 유성을 바라보았다. 유성은 빙그레 웃으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제자가 스승을 뵙는 예였으나, 그것으로 공융은 빼도 박도 못할 유성의 사람이 된 셈이었다.


"절 받으십시오. 스승님."


"저, 전하……. 어인……. 받자옵기 민망하옵니다."


황망하게 마주 절을 하는 공융이었다. 사제간의 예를 보고 나자 유성은 다시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저와 함께 태제궁에서 지내시게 되실 것입니다. 전쟁이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면 그 때는 함께 여행을 떠나도록 하시지요."


"여행이라면, 어디로 말씀이옵니까?"


"천하를 구하느냐 구하지 못하느냐가 걸린 도박을 하러 가는 여행이지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틀 뒤에 황궁에서 사람이 나올 테니 준비하도록 하세요. 저도 그 때 다시 뵙겠습니다."


"이제 또 어디로 가실 예정이신지요?"


"전에 황도에서 사귀었던 벗들을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하오면!"


유성은 그리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나갔다. 공융이 따라나가며 배웅하다가 말했다.


"조 승상은 유황숙을 치고자 합니다. 곁에서 돕지 않으십니까?"


"도울 사람은 충분합니다. 이미 저의 친우인 공명과 의논을 다 해 두었습니다. 저는 잠시 황도에 머물 예정입니다. 그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공융의 집을 나온 유성은 천천히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노상에서 그는 뜻밖의 얼굴들을 만났다. 물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지는 않았다.


'저건……. 도망쳤던 채모 형제들이 아닌가? 현운도 함께 있네? ……잘 해낸 모양이군. 워낙에 수군법에 밝은 사람이니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잘 부탁하네. 현운.'


이미 저 여남성에서부터 무림맹의 소개로 유성의 신하가 된 현운이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채모 형제들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까지를 모두 내다본 유성이 현운을 미리 채모 형제들과 친하게 해 두고, 현운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했던 것이라면…….


[전하? 가까운 곳에 계시군요]


[맞았네. 잘 되어가는 모양이군]


[예. 하온데 전하께서는 어찌 이런 곳에……?]


[들를 곳이 잠깐 있어서. 끝까지 잘 부탁하네. 그럼 화용가도에서 기다리겠네]


[예. 전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수고하게. 자네도 건강해야 하네]


전음으로 대화를 마친 유성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고였다.


'모두가 뜻대로 되어가고 있다. 모두가……. 이제 남은 것은 동남풍이다. 그 일만 잘 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손권에게도 슬슬 압력을 넣어야 할 터인데……. 역시 경제적인 움직임이 낫겠지?'





한편, 현운과 채모 형제들을 만난 조조는 뛸 듯이 기뻐했다. 수군 훈련에 전념하고 있는 그로서는 뛰어난 수군 장수들인 그들이 가뭄에 단비처럼이나 반가웠던 것이다.


게다가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현운은 오히려 황하와 장강의 흐름의 변화의 세세한 것까지 파악하고 있어, 그 재능을 인정하여 수군 대도독에, 채모는 부도독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운조를 움직이는 남궁 세가와 화랑 맹가에 의해, 이 내용은 즉각 강동 땅의 손권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즈음, 강동의 내정은 꽤나 시끄러웠다.


"유비는 정식으로 형주목에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태제전하께서 유비를 떠나 환궁하셨으니 조조는 틀림없이 형주를 치고 이 강동과 강남의 52주까지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군 훈련을 계속하고 수군법에 밝은 이들을 등용하여 수군의 대병을 맡긴 것만으로도 그 속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아니 되옵니다. 최근에 국고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은 무리입니다. 화친을 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랬다.


언제부터인지 엄청난 속도와 방대한 양의 재정난이 동오를 덮치고 있었다.


강남과 강동 땅의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것은 중원 전체의 경제가 흔들거린다는 것과 같은 일이었건만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북쪽은 별 이상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 준비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을 뚫고 항복해야 한다는 주항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러나 손권이 어떤 인물인가? 아버지 손견, 형 손책에 이어 3대에 걸쳐 손씨의 기업으로 다져온 강동과 강남 땅의 대인(大人)이다.


쉽사리 조조에게 항복하여 항장(降將)의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 빈약해지는 재정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이 현실이 그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한편, 이제 정식으로 형주목이 된 유비는 석도, 최주평, 백학, 백송과 함께 형주의 서쪽과 남쪽의 고을들을 돌아보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병권은 새로이 군사로 영입한 제갈량과 서서에게 맡겨 곧 있을 조조의 남정에 대비하게 한 뒤였다. 조조의 출병 소식과 유성이 황궁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은 그 때 확실히 전해졌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형주 남부의 호남 4군에서만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장수로는 황충, 위연, 마속이 있었으며 선비로는 마량, 마직 형제가 있었다. 마씨 집안의 다섯 형제가 모두 뛰어나다 하는데 이 세 사람이 그 중 둘이었다. 특히 마량은 흰 눈썹을 지녀 백미라 불렸는데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였다.


유비의 보검과 패인을 받은 공명도 여유 있게 하후돈의 10만 대군을 박망파에서 맞을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총 병력은 6만. 신야성에서 길러 둔 병력만을 출병시키는 것이었다. 형주목에 오르면서 육군 30만, 수군 40만, 군선 7천 척 등을 영입하였으나,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은 다르게 보면 하후돈을 깔보는 뜻도 되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하후돈이었다. 막 북벌에 참가하고 돌아온지라 승리에 들떠 있기도 했다. 조운이 이끄는 2만 병력을 보고 차갑게 비웃으며 박망파 깊이까지 쳐들어갔다.


관우는 1만 군사로 예산에, 장비는 역시 1만 군사로 안림에 매복한 상태였다. 관평과 유봉이 박망파 뒤편에 불을 놓는 역할을 맡았다. 눈속임으로서의 일차 매복은 이젠 제법 장수 노릇을 하게 된 유기와 유종이 맡았다.


길이 좁아지고 수목이 우거질 때였다. 한줄기 불꽃이 피어 오른 것은 추격에 정신이 없다가 불현듯 위험을 깨달은 하후돈이 막 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사방이 순식간에 불길에 싸였다. 아군끼리 우왕좌왕하는 군사들을 다스릴 힘이 놀란 장수들에게는 없었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불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친척 동생인 하후란이 장비의 창에 죽고, 3, 4만을 간신히 보전한 하후돈은 삼면에서 쳐들어오는 관우, 장비, 조자룡의 군사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간신히 두 번째 포위망을 빠져나오니 남은 군사는 채 몇천이 되지 않았다.


유성의 말대로 공명의 능력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 첫 번째 전투였다. 싱겁게 끝났지만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한편, 황도의 태제궁은 주인인 유성을 오랜만에 맞아 활기를 띄고 있었다. 조그만 행궁 크기(유성이 이것저것 주문해서 다 줄여버렸다)에 지나지 않는 데다 정작 주인인 유성은 뒤꼍에 초려를 마련하여 그 곳에서 거의 모든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공융을 스승으로 모신 유성은 갖가지 병법과 사서 오경을 익히고 또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정치와 처세에 관한 것들을 배움에 여념이 없었다. 또 엄연히 근위대의 수장으로서 황실 경비의 역할도 감당했고 중원 사방으로 날아가는 전서응과 전서구 또한 무림과 황실과 세상을 오가는 백의칠령들에게 맡겨두고 전쟁터의 소식과 무림의 일을 전해 들었다.


"신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서남쪽을 돌고 돌아오신 황숙께서는 강릉에 지휘부를 차리고 계십니다."


"번성과 양양성을 잇는 전선은 관우님과 장비님께서 맡으셨으며, 조승상의 남정군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강릉도 최전선에 들어갈 듯 합니다."


"호남 4군에서 새로이 얻은 황충과 위연, 마속 세 사람도 강릉과 번성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매일같이 소식이 전해져 왔다. 전선의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갔지만 유성은 황궁 안 초려에 앉아서도 상황을 주르르 꿰고 있었다.


아, 물론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했다는 것은 아니다. 유성은 얌전히 황궁에 머물며 공부도 하고 근위대 훈련을 핑계로 무예 연습도 하면서 지냈다. 당연히, 태제의 스승으로서 황실의 비호를 받은 공융의 집안도 무사했다.



"참으로 대단하시옵니다. 이제 겨우 두 주가 지났는데 사서를 다 외시다니요."


공융의 칭찬에, 유성은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잘 지도해주신 덕분이옵니다."


"아닙니다. 이 사람의 성과라기보다는 전하께서 정말로 뛰어나신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도 매우 기뻐하고 계시옵니다."


"다행이군요. 형님께서 기뻐하시다니……. 아, 곧 미시초(오후1시경)입니다. 훈련이 있는데 오늘도 참관하실 것인지요?"


"물론입니다. 전하의 성취를 바라보는 것은 이 사람의 기쁨입니다."


어느 새 상당히 친해지기도 한 두 사람이었다. 붉은 빛깔의 태제의 정복에서 보통 때에 입는 백색 무복으로 갈아입은 유성은 이미 정렬이 끝나 있을 연무장으로 향했다. 손에는 유봉들을 가르칠 때에 사용했던 철목검이 들려 있었다.


연무장에는 기합 소리가 요란했다. 1천 명이나 되는 근위대를 유성은 자신의 수족처럼 문제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가 된 듯 군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둘씩 짝을 지어 대련을 하게 할 때면, 유성 자신도 직접 참가하여 땀을 흘리곤 했다. 진기를 쓰지 않기 때문에 격렬한 움직임에는 땀이 나는 것이다.


"대공자께서 돌아오시니 이제야 이 몸들이 사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을. 그리들 생각해 준다니 참으로 고맙네."


"이렇게 함께 땀을 흘려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심해서 신경을 못 써준 때문이지. 그 점에 대해서는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네."


공융은 거리낌없이 근위대들과 어울리며 밝은 얼굴로 대화하는 유성을 신기함 반 존경스러움 반으로 쳐다보았다.


대공자라는 무림의 애칭으로 서슴없이 부르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처럼 유성을 대하는 근위대들이 전혀 버릇없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런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전 같았다면 무례하다고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는 새삼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일까……?'


그 때였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순식간에 연무장이 조용해지며,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이 몰렸다. 하운이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유성은 춤추듯 즐겁게 움직이던 철목검을 멈추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급보라니?"


"하구성이 함락되었사옵니다!"


"뭐?!"


하구성 -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형주 땅에서 손권의 세력권으로 향하는 위치에 있어 강하성과 함께 동쪽 방비의 사령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땅이다.


그런데 조조군은 형주를 공략하기 시작한 지 18일만에 그 하구성을 함락했다는 것이다. 유성은 감탄하며 말했다.


"야아……! 과연 조승상. 더욱 그를 갖고 싶어지는군!"


"전하. 번성과 양양성, 강릉성도 최전선에 들어갔습니다. 형주의 2할 정도가 넘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강하 태수로 나가 계신 유기 공자께서 위험하십니다."


그 말에 유성은 움찔했다. 유기는 그가 아끼는 제자였다.


"유기가……?! 으음, 폐하께 가겠다. 소류, 청양조. 나를 따라오게. 하운은 내 방에 가서 준비를 해 주었으면 하네."


"예. 전하."


"스승님께서도 간단히 여행 준비를 해 주십시오. 이번에 돌아올 때는 치세의 바탕을 완전히 마련한 다음일 것입니다."


"예. 전하."


유성의 지시 아닌 지시에 따라 사람들의 움직임이 급해졌다.




"어서 오게. 아우. 모습을 보니 훈련 중이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폐하."


"무슨 일인가? 낯빛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군."


그 동안 황궁에서 함께 생활해서 그런지 눈에 띄게 밝아져 있는 황제였다. 유성은 미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굳은 목소리를 짜내었다.


"근위대의 비밀 출전을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유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옛날 천성검황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영웅처럼 일컬어졌던 유성의 무위(武威)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중한 사람을 검림혈천(劍林血川)의 전쟁터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바늘처럼 찔러오고 있었다.


"소제가 가야만 하옵니다. 허락해주시옵소서."


"이번 전쟁이 끝나면 아우의 약속이 지켜지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기다림의 끝이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


유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속에서 황금으로 만든 패를 하나 꺼내어 유성에게 건넸다.


"천하 명검을 다 가진 그대에게는 보검보다도 이것이 도움이 될 것일세. 명하노니, 태제는 부디 몸을 조심하여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길을 다녀오도록 하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가 건네준 것은 황족의 호패 - 쌍룡이 새겨진 호패였다. 어디서나 권위를 나타내고 명분을 만들 수 있는 황족의 호패를 얻게 된 것이다. 오히려 늦은 바가 있었지만, 유성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 출발하려나?"


"지금 곧 가겠습니다. 백성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그리하게."


"하오면,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유협의 방을 나온 유성은 서둘러 여장을 챙겼다. 웬만한 것은 차원의 틈새에 모조리 넣어놓고 다니는지라 챙길 것도 별로 없었고, 몇 권의 병서와 애검 파르레시아, 미스릴 봉 정도였다. 공융도 함께 출발했다. 근위대는 일단 흩어지게 해서 날짜를 정해 강하성으로 모이도록 했다.


"어디로 먼저 가실 계획이십니까?"


"강하성에 여장을 풀고, 한꺼번에 양쪽을 상대해야지요."


"승상의 남정군과 오나라를 한꺼번에 말이옵니까?"


"그렇습니다. 조만간 정보가 빠른 쪽이 먼저 사신을 보내 오겠지요. 자, 서두르지요."


강하성을 바라보고 떠나는 그들의 모습은 전장터로 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잔치자리에 가는 사람들처럼 빛나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