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
1) 시뮬라크르와 현대문화
현대사회는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80년대까지가 이른바 근대화의 시대라면 87년 이후가 본격적 의미의 ‘현대’라는 것이다. 그 현대사회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이미지 시대다. 이미지 시대는 여러 가지 있지만, 여기서는 매체의 발달로 스마트폰, 인터넷, TV 등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들이 등장한 것과 그 이미지들의 지각 방식이 매우 복잡해진 것을 이른다.
이 이미지의 시대를 조금 폭넓게 말하면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된다. 시뮬라크르는 그것이 이야기 되는 방식이나 맥락에 따라 주로 이미지와 연관되지만, 그 이미지에다 한순간에 벌어지는 사건이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바뀌는 감성적 언표들을 더한 개념이다.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 『소피스테스』에 있는 말을 그대로 음역한 것인데, 컴퓨터로 simulation을 한다고 할 때, 그 시뮬레이션이 바로 simulacre에서 온 말이다. 마치 image가 있으면 imagination을 한다는 말과 같다.
시뮬라크르는 현대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가장 명료하게 나타내는 개념인데, 존재론의 문제, 미학의 문제, 사회학의 문제, 세계를 둘러싼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시뮬라크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고전적인 본질주의 철학(현상 너머에 참실재가 있다.-태양이 지구를 돈다)과 니체 이후에 전개되는 반본질주의(오로지 생성이다. 현상 속에 본질이 있다. 진짜 실재는 개체다)의 대결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쓴 후기 대화편 『소피스테스』에서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소피스트는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철수는 언젠가 죽고 마는 개체individual지만, 사람은 영원하니까 개체가 아니라 보편자다. 이 보편자를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 했다. 그리고 이데아와 개체는 모방관계mimesis라 했다. 이렇게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 에이코네스Eikones라 불렀고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아이콘icon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아이콘의 특징은 일반적인 기호와 다르게 이데아와 꼭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수를 보고 그린 ‘철수 그림’이나 철수를 본떠 만든 ‘철수 인형’은 철수 이데아를 덜 닮았고, ‘철수’라는 글자는 철수 이데아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덜 닮았거나 아예 담지 않은 것을 플라톤은 에이돌라eidola라고 했고 이 말에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아이돌idol, 우상이란 말이 나왔다. 이 우상이 바로 image, imago다. 그런데 플라톤에 따르면 소피스트들은 이데아와의 관계에서 에이코네스eikones가 아니라 에이돌라eidola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짜, 영상,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으로 규정한 것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다. 플라톤은 그리스가 멸망의 길에 접어들어 가짜가 판치는 시대를 산 사람이다. 그래서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짜란 무엇이고 그 판단 기준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진짜는 영원하다는 것이었다.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을 견디면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참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시간의 지배를 받아 변한다는 것은 그만큼 물질성을 띄고 있는 것이기에, 시간의 지배를 안 받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물질적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다. 철수도 영희도 시간이 가면 늙고 마침내 죽는다. 그러니까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물질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물질성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식론적으로 바꿔 말하면 감각적sensible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게 이데아다. 그 이데아를 우리에게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보여준 예가 수학이다. 우리는 원을 정확히 그릴 수 없다. 우선 원을 그리는 선에 두께가 없을 수 없고, 조금도 비뚤어짐이 없이 둥그렇게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원을 인식하는 것은 원이라는 본질 개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데아와 현실 사이에 수학을 넣으면 이해가 된다. 이 수학에서 더 가면 형태도 없는 순수개념, 순수존재인 이데아가 나오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런 이데아가 있다고 전제한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해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이 이데아일 수는 없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데아가 될 수는 없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어떡하든 인간은 이데아에 가까이 가야 한다. 그러니까 플라톤 이야기는 이데아를 설정해야 이데아를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아는 하나의 이상理想 ideal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현실을 피하기 위해 이데아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기 위한 장치로 이데아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그리스식의 플라토니즘적인 사유를 하면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영원한 것에만 가치를 두기 때문에 시간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것은 그만큼 가짜고 헛되고 심하게 말하면 나쁜 것이 된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감각으로 포착하는 것이 중요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청춘남녀 사이에 “사랑해!” 한마디면 한순간에 서로의 감각이 열려 애인 사이가 된다. 그래서 이미지가 우리 삶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매우 중요한데, 플라톤식 구도 속에서는 그 이미지가 폄하될 수밖에 없다. 현대철학자들이 플라톤에 불만이 많은 것은 영원적인 것, 보편적인 것, 필연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순간적인 것, 우연적인 것, 감각적인 것들은 무가치하고, 헛된 것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 현대사회의 연속성과 판타지
플라톤적인 사고를 극복하면서 이미지나 순간을 폄하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다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시뮬라크르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보기엔 가상현실은 가짜고 그림자지만,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시뮬라크르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종의 존재론적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시뮬라크르는 결국 사건의 철학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문제점은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를 하지 못하고,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을 일종의 이데아의 타락으로 치부한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에는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건은 막연한 생성과는 차이가 있다. 생성‧변화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해되지만, 사건은 흐름으로써의 생성과는 다르게 개별성individuality을 가진다. 흐름은 마디, 매듭이 없어 너무 막연하다. 그런데 사건event은 그냥 흐름이 아니라 개별성을 가진다. 그 때, 접 때, 이 때, 그 시절 이런 식이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연인들이 호수 가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데 호수 물결이 살랑댄다. 이것도 사건이다. 그때 호수에서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그러면 잉어가 튀어 오른 것이 사건이 되고 물결이 살랑댄 것은 배경이 된다. 그때 호수 옆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면 잉어가 튀어 오른 것은 살인사건의 배경이 된다. 사건은 이렇게 다른 것을 배경으로 밀어내면서 솟아오른 것을 말한다. 그런데 다른 것들과 같은 지평이라면, 아무리 격한 운동성이 있어도 그것은 사건이 아니다. 예컨대 도둑이 많은 동네에 또 도둑이 들었다면 그건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반대로 도둑이라고는 없는 평화로운 동네에 좀도둑이 들었다면 그것은 사건이 된다.
또 사건은 항상 의미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띄고 읽힐 때에 하나의 사건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의미가 투영되었을 때 사건이 되기도 한다. 판사가 형을 언도하면 그 사람은 실체적으로는 바뀌는 것이 없지만 순간 죄인이 된다. 5년형 언도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갑자기 길어지거나 얼굴 모양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사건이 일어나서 의미로 읽히기도 하지만, 의미가 개입함으로써 사건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사건과 의미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뮬라크르라는 단지 세계에서 발생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시뮬라크르를 조작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시뮬라시옹, 시뮬레이션 시대가 온 것이다. 정보, 컴퓨터, 인터넷, 영상, 게임 이런 것들이,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지각하고 이미지를 읽어내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조작하고 탐미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식의 변화는 세계라는 개념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전통사회에서 문제가 된 것은 현실과 초월세계다. 플라톤은 개체들과 이데아, 동양에는 현실세계와 천天의 세계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세계관은 현실세계와 초월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근대에 오면 초월세계가 부정되고 대신 미시세계micro world(양자, 중성자, 전자, 박테리아)가 등장한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 현실세계도 초월세계도 미시세계도 아닌 제4의 세계가 등장한다. 그게 바로 가상세계simulacre다. 가상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현대문명의 이해에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가상현실에는 양면성이 있다. 우선 존재론적으로는 대단히 흥미롭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차원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꿈, 환각체험, 무의식체험을 통해 창조적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심지어 의학에서 ‘공황장애’의 치료법으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그러나 윤리적 정치적으로 대단히 위험하다. 사람들을 조작하고 자본의 틀 속에 몰아넣고 현실 속에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 살도록 만든다.(정신분열, 자아의식 몸과 마음의 분열) 마치 근대에 물리학이 발달하니까 갖가지 문명의 이기가 생기는 반면 핵폭탄을 만들어 수십 만 명을 한꺼번에 죽였듯이 시뮬라크르도 존재론적인 흥미진진함과 윤리적, 정치적 위험성이 공존하는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현대에 새롭게 이야기되고 있는 시뮬라크르는 사건의 측면이나, 가상현실의 측면에서 논의를 낳고 있는데, 또 미학적인 측면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미학이라고 번역하는 aesthetics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감성론’으로 번역하고, 『판단력비판』에서는 ‘미학’으로 번역한다.(애초에 미학이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감성론으로도, 미학으로 이해되는 이중성을 극복하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다. 그런데 감성sensibility은 옛날보다 훨씬 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는데, 역으로 미학은 점점 더 경계가 흐려진다. 말하자면 감성론과 미학이 점점 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근대적인 의미의 예술개념으로 재현되지 않는, 감성론과 미학의 구분을 떠난 새로운 감성학aesthetics이 오늘날 필요하다.
또 하나는 현대예술이 아페이론apeiron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왔다는 점이다. 아페이론은 이데아와 대조적인 말이다. 이데아는 영원해야 하는데, 영원하다는 것은 반드시 타자를 배제해야 한다.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 자기가 변한다. 그러니까 타자와 관계를 끊어야한다. 이렇게 타자를 배제하는 것은 순수pure하다는 것이다. 타자를 배제해서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을 자기동일성self-identity이라한다. 이것이 이데아의 성격이다.(여기서 자기동일성은 일상의 것이 아니고 철학적인, 논리적인 의미에서의 자기동일성을 말한다)
이데아가 가지는 중요한 성격은 불연속성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완벽한 불연속성의 세계다. 그런데 불연속성이 깨져 연속성이 오면 관계와 운동이 발생한다. 예컨대 춥다는 것은 방 안의 공기와 내가 관계를 맺은 것이다. 어떤 존재들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불연속을 이루면, 거기에는 관계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도 물리적 관계를 피할 수는 없다. 그 관계를 피하는 유일한 세계가 이데아다.
모든 것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있으면 인식이 안 된다. 끊어줘야, 마디가 있어야 인식이 된다. 매듭 없는 흐름의 세계는 강물이다. 완벽한 연속성의 세계다. 어떤 동일성self-identity도 성립할 수 없는 세계다. 붓다는 우리가 가진 모든 분별적인 자기동일성이 다 거짓이라고 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보면 붓다의 직업이 뱃사공이다. 붓다가 강물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잘 묘사가 되어 있다. 분별이 없는 완벽한 생성의 세계다. 플라톤을 포함한 그리스 문화는 이 아페이론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러니까 그리스 예술은 아페이론에 명료한 형상을 입혀 끊어주는 것이다. 돌멩이는 아페이론이다. 그것을 조각하는 것이 형상을 입혀 끊어주는 것이다. 기타도 기타줄이라는 소리의 연속체를 코드를 잡아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문화는 흐물흐물한 연속적 흐름(apeiron)에 마디를 주는 것이다. 그런 식의 그리스의 문화 이념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다. 명확하고 완벽한 자기동일성self-identity을 가진 이데아들의 세계다. 가장 clear한 세계다. 그래서 서구사람들은 clear한 것을 좋아한다. 이어지고, 흐르고, 얽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clear한 불연속성을 가져오는 방법 중의 하나가 수 또는 기하학이다. 그래서 아페이론이라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모든 것을 생성이라고 보는 붓다의 생각이라든가, 모든 것을 역易이라고 보는 동양의 생각은, 마디를 두는 분석적 사고가 아니다. 예컨대 양복은 몸에 맞춰 잘라 만든다. 그러나 한복은 몸에 헐렁헐렁하다. 혁대도 서양 것은 구멍이 뚫어져 있으나 동양의 것에는 마디가 없다.
시간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것은 물질성이고 그래서 감각기호화하려는 물질성은 폄하되었다고 했는데, 물질성이 폄하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아페이론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페이론을 새롭게 사유한다는 것은 물질의 연속성 자체를 주목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제는 명료하게 끊어지는 불연속성만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연속성도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시뮬라크르가 갖고 있는 맥락은 오리지널original과 대비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 시대는 오리지널의 개념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다. 나주 곰탕집에 가거나 창평 국밥집에 가면 모두가 원조집이다. 다들 원조라는 말을 쓰는데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오리지널이라는 개념이 없다. 이렇게 오리지널과 카피가 아닌 버전들만 있는 문화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문학이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플롯을 가져다 쓰면 표절이었다. 예를 들어 미셀 트루니에Michel Tournier, (들뢰즈와 고교동창)의 『방드르디』는 『로빈슨 크루소』와 내용만 반대지 스토리는 똑같다. 원래 『로빈슨 크루소』는 ‘로빈슨 크루소’가 흑인 ‘프라이데이’를 문명화시키고 말도 가르친다. 그런데 『방드르디』(프라이데이가 불어로 방드르디다)에서는 ‘방드르디’가 오히려 ‘로빈슨 크루소’를 가르친다. 표면적인 내용은 같은데 핵심적인 내용은 전혀 다르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제국주의적 작품인데, 『방드르디』는 이것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시뮬라크르 시대는 오리지널이 없는 시대다. 오리지널이 있고 그것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감각을 넘어선 본질이 있고 그것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아이들은 인생을 가짜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애들이 진짜 사자를 보고 그 다음에 사자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TV에서, 그림책에서, 영화에서 사자를 보거나, 사자 인형을 갖고 놀다 그것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가 어떤 기회에 동물원에서 진짜 사자를 보는 것이다. 완벽하게 시뮬라크르 속에서 살아간다. 아프리카 아이들이라면 몰라도 사자를 먼저 보고 사자의 시뮬라크르를 보는 애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고 안 나는 것이 이상하다. 맨날 디즈니에 나오는 것만 보니까 사자가 무서운지 모르고 동물원에서 사자를 보자마자 ‘어! 라이온킹 반갑다.’고 사자를 덥석 안아 사고 내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이런 시뮬라크르 문화가 존재론적으로나, 미학적으로는 흥미진진하고 많은 것을 보여주었지만,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상업적인 것이 엮여 있어 우리 의식을 판타지로 마비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이 만나면 가족이나 이웃, 친구 등 진짜 사는 이야기는 안 하고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이야기, TV이야기, 스마트폰 게임이야기만 한다.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환상=판타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실물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실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현대사회의 본질은 거대한 판타지산업사회다. 판타지산업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다. 이제 판타지라는 것이 판타지로 느껴지지 않는다. 뭐가 판타지고 뭐가 실물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실감도 안 나고 촌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3) 시뮬라크르의 세계
현대 이전에도 지도, 그림, 인형 같은 시뮬라시옹이 있었다. 기왕에 써온 문자나 한자 같은 것도 일종의 시뮬라시옹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오늘날은 새로운 시뮬라시옹의 시대라고 진단하고 이를 네 단계로 표시한다. 첫 번째 시대의 시뮬라시옹은 미메시스mimesis 개념에 가깝다. original이 있고, 그것을 copy했다는 의미다.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라는 뜻이다.(신성) 두 번째 단계는 달에 착륙했던 거미 같은 기계들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왜곡하고 변질 시켰다는 뜻이다.(저주) 세 번째는 정보통신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이미지는 실재의 부재를 감추고 실재 행세를 한다는 뜻이다.(마법) 마지막은 이미지의 조작가능성, 더 이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지는 실재와 무관한 순수 시뮬라크르라는 뜻이다.(시뮬라시옹) 실재를 감췄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다. 이미지와 실재가 구분되어야 반영을 했느니 왜곡했느니 감췄느니 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런 말들이 필요 없이 이미지와 실재의 구분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가짜로 완벽하게 통제와 관리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걸프전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듯 모니터를 보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 없는 실재, 초실재를 만드는 과정이다. 실재는 원본의 권위를 상실했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을 ‘실재의 폐허’라고 표현했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이런 세계를 그린 영화가 <메트릭스>다. 실재의 세계는 사라져버렸고 가상의 세계만 존재한다. 물론 그 영화세계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세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실재 세계가 망하고 완전히 가상의 세계를 따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아드가 말하는 세계는 그런 이원적인 세계가 아니고, 오늘날의 세계가 원본과 시뮬라크르 사이의 차이가 소멸되어버린 시뮬라시옹 세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실재를 덮어버린 시대가 아니라 이미지가 실재인 세계라는 것이다. 상상세계가 실재가 된다. ‘사자’ 그림은 진짜 사자를 지시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시하는 것과 지시되는 것 사이에 거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자 그림과 진짜 사자 사이에 거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제 지시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원본과 시뮬라크르 사이에 지시 관계가 아니라 단지 시뮬라크르 자체 사이에서의 상호 참조만이 존재한다. 이제 시뮬라크르는 ‘흉내 내기’가 아니다. 진짜를 위협하는 가짜 마침내 이분법을 무너뜨린 가짜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는 원본을 계속 감소시키면서 실재 페허를 이끌어 낸다.
시뮬라크르는 무엇인가를 흉내내고 감추고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는 기호이다. 시뮬라크르의 시대는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시뮬라크르르 만들어낸다. 미국 자체가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생겼다. 그러면 사람들이 디즈니랜드를 보면서 그 바깥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 자체가 미친 곳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정신병원을 지었다. 세상이 정신병원인데 정신병원을 지음으로써 정신병원 바깥은 정신병원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치 인디언 살해를 감추기 위해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든 것과 같다.
상상의 세계로 제시된 것은 다른 세계가 실재라고 믿기 위한 장치이다. 시뮬라시옹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허위의식이 아니라 실재의 폐허의 문제이다. 실재로의 회귀를 저지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는 모든 존재론적 층위들 사이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그것은 블랙홀이다. 그러니까 TV 역사드라마가 시뮬라시옹의 좋은 예다. 역사가 있고 그것을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드라마는 진짜 역사와 상관없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된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서 시뮬라크르의 회전은 잘 나타난다. 폭탄 투척이 좌익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지, 극우에 의한 자작극인지, 중립주의자들의 짓인지, 경찰이 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진실을 알려면 일어난 사건을 접해야 하는데, 진짜 사건은 없고 그것에 대한 버전들만 있는 것이다. 진실이 증발해버려 그런 것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이런 시뮬라시옹의 원조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팔기 위해서 못할 짓이 없다. 그러다가 ‘실재의 폐허’를 만들어낸다.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가 되면 원조는 몰락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시뮬라크르로서의 실재를 만들어내는데 혈안이 된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를 만들어 판다. 그런데 시뮬라크르가 범람하니까 원조가 망한다. 그러면 상품을 계속 팔기위해 시뮬라크르에 대비되는 원조를 만든다. 물론 그 원조도 하나의 시뮬라크르다. 그렇게 옛날에 이런 것이 있었다는 오리지널을 상품화하는 것이 추억의 상품화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의미 없는 세상 더 살아서 뭐하냐는 냉소주의자다. 학문이란 희망을 줘야지 냉소주의로 몰고 가면 안 된다.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해줘야 의미가 있는 철학이다.
첫댓글 7월 13일 공부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