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정씨 ~ 신라초기 (智伯虎) > 삼국통일 전 후 시기, 종은 (宗殷) > 의경 (宜卿)
고려의 정씨 ~ 1세조,극유 (克儒) > 2세조,창우 (昌佑) > 3세조, 균지 (均之) >4세조, 윤 (润) > 5세조, 유 (侑) >고려 말, 고려 충숙왕 때, 6세조,사도 (思道) / 여러호칭/ 설곡 (雪谷), 력정 (櫟亭), 방필 (邦)弼)
조선 초기의 정씨 ~ 7세조 홍 (洪) > 1자 진 (鎭), 2자 연 (淵)
8 세조 정원공 (靖元公) 진 (鎭) > 1 자 효손 (孝孫) 江華공파
2 자 효순 (孝順) 原平공파
3 자 효강 (孝康) 无
4 자 효완 (孝完) 无
. 5 자 효전 (孝全) 忠景공파
정숙공 (貞肅公) 연 (淵) > 1자 判決事 공파 自源
2자 吏議 공파 自洋
3자 威襄 공파 自濟
4자 金堤 공파 自淑
이야기 족보 1세조 감무공파 후손
2018년 5월 12일 토요일
오후 12:26
◎ 감무공파(監務公派) <氏族의 연원> 시조는 정종은(鄭宗殷). 신라 태종무열왕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김유신(金庾信) 장군과 협의, 신라의 삼한통일(三韓統一)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왕께 간언(諫言)한 것이 화가 되어 인동(仁同)의 약목현(若木縣)에 유배,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런데, 그뒤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때 감무(監務)를 거쳐 현감(縣監)을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대(世代)를 잇고 있다. ‘壬申譜’ 서문에 보면, 간관공(諫官公) 정종은(鄭宗殷)으로부터 20대 가량은 계통(系統)을 댈 수 없으나, 감무공(監務公) 정극유(鄭克儒) 이후 비로소 세계(世系)와 소목(昭穆)을 상고할 수 있게 되어, 감무공(監務公)을 기세조(起世祖)로 한다고 하였다. <派名錄> 정원공파(靖元公派) - 강화공파(江華公派), 원평공파(原平公派), 부마공파(駙馬公派) 정숙공파(貞肅公派) -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이의공파(吏議公派), 위양공파(威襄公派), 김제공파(金堤公派) 오성군파(烏城君派) / 5 세조/ 6세조 문정공 삼춘 <주요 世居地와 변천> 1) ‘辛酉譜’에 의하면 1세 정극유(鄭克儒)의 대 이전부터 영일군(迎日郡)에 세거하였다. 8세 정진(鄭鎭)은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으로 옮겨 갔고, 일부가 고손 정기(鄭沂)의 대 이후 여주군(驪州郡)에서 터를 잡았다. 정기(鄭沂)의 손자 정도우(鄭道祐)는 대구(大邱)로 이거하였고, 후손들이 경산(慶山) 칠곡(漆谷)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2) 정진(鄭鎭)의 둘째 아들 정효순(鄭孝順)의 아들 정석례(鄭錫禮)의 대에는 음성군(陰城郡)에 터를 잡았고, 13세 정수의(鄭守義)의 대 이후에는 고양군(高陽郡)에서 세거하였다. 3) 정진(鄭鎭)의 다섯째 아들 정효전(鄭孝全)은 지금의 김포군(金浦郡)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일부가 증손 정탁(鄭濯)의 대 이후로 강원도 금화(金化) · 철원(鐵原) 일원에 세거했고, 정렬(鄭洌)의 대에는 해남군(海南郡)으로 옮겨 갔다. 일부는 18세 정사중(鄭司中)의 대 이후 황해도 평산군(平山郡)으로 이거하였다. 4) 한편 8세 정연(鄭淵)의 대를 전후해서는 파주군(坡州郡)에 터를 잡았고, 일부가 증손 정학년(鄭鶴年)의 대에 경북 청도군(淸道郡)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일부는 14세 정제(鄭濟)의 대 이후 인천(仁川)에서 세거하며, 청양군(靑陽郡) · 서천군(舒川郡) · 당진군(唐津郡) · 고창군(高敞郡) 일원으로 산거(散居)하였고, 15세 정호(鄭豪)는 고성(高城)에 터를 잡은 것 같다. 16세 이후로는 익산군(益山郡) · 공주군(公州郡) · 음성군(陰城郡)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5) 정연(鄭淵)의 둘째 셋째아들 정자양(鄭自洋) · 정자제(鄭自濟)의 대에는 고양군(高陽郡)에 터를 잡았고, 정자양(鄭自洋)의 손자 정충남(鄭忠男)은 영동군(永同郡)으로, 정종남(鄭終男)은 옥천군(沃川郡)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정자제(鄭自濟)의 아들 정록(鄭淥)은 평산군(平山郡)으로 옮겨갔고, 손자 정언탁(鄭彦濯)은 제천군(堤川郡)에 터를 잡았으며, 정문림(鄭文淋)은 경주(慶州)에서 시거(始居)하였다. 6) 정연(鄭淵)의 넷째아들 정자숙(鄭自淑)의 후계 중 12세 정소(鄭沼)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순천(順天)에 은거, 터를 잡았고, 14세 정성(鄭晟)은 고부(古阜)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5세 이후로는 제천(堤川) · 충주(忠州) · 진천(鎭川) · 여주(驪州) · 원주(原州)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8세 정훈(鄭勳)은 아들 정사흠(鄭思欽)의 대부터는 안동군(安東郡)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氏族史의 개요> 정 철 (鄭 澈) 영일정씨(迎日鄭氏) 감무공파(監務公派)의 후손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요, 문인이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들 수 있다. 이 파(派)에서는 조선조에 상신(相臣) 4명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는 등 융성을 누렸다. 감무공(監務公) 정극유(鄭克儒)의 후손은 4세조까지는 단계로 이어졌고, 5세조 이후의 후손에서 몇개파로 나뉘어졌다. 정사도(鄭思道)의 아들인 7세조 정홍(鄭洪)의 후손이 공간공파(恭簡公派)이고, 그 아들 정진(鄭鎭)의 후손이 정원공파(靖元公派), 정연(鄭淵)의 후손이 정숙공파(貞肅公派)이다. 정원공(靖元公)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세 아들의 후손이 각각 강화공파(江華公派), 원평공파(原平公派), 부마공파(駙馬公派)로 나뉘어졌다. 정숙공(貞肅公)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이 각각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이의공파(吏議公派), 위양공파(威襄公派), 김제공파(金堤公派)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5세조 정후(鄭煦)의 후손은 정남승(鄭南升)-정여해(鄭汝諧)의 단계(單系)로 이어져 오성군파(烏城君派)로 나뉘어졌다. * 고려조의 인물 6세조 정사도(鄭思道)는 충숙왕 복위 5년 문과에 급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친 뒤 공민왕 때 동북면상원사(東北面上元師)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역임하고 우왕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올랐다.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지고 공신이 되었다. * 7세조 恭簡公 정홍(鄭洪)은 6새조 문정공 정사도(鄭思道)의 아들로 우왕3년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조에 들어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지내고, 공간(恭簡)의 시호가 내렸다. 큰 아들 鎭과, 작은 아들 淵을 두었다. * 오성군(烏城君) 정후(鄭煦) / 6세조 문정공의 삼춘, 숙부/는 삼중대광(三重大匡)의 관계에 올랐다. * 김제공파 12세조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 정유심(鄭惟沈) " 판결사공파 국동 11세조 鸞年(난년) 진사공과 8촌간" 의 막내 아들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두 누이는 왕실과 결혼, 큰 누이는 인종의 후궁이 되었고, 둘째 누이는 종실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되었다. 그가 열 살 되던 때인 乙巳年(1545)에 사화(士禍)가 일어나고 계림군(桂林君)이 여기에 연루된다. 큰 형은 귀양길에 죽고 아버지는 정평(定平), 연일(延日)에서 5년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송강(松江)은 그동안 창평현(昌平縣)에서 그곳 부호의 도움으로 인근에 낙향했거나 귀양 와 있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등 석학(碩學)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문장을 익혔다. 송강(松江)은 나중 그가 젊은 날을 보낸 이곳의 경승을 ‘성산별곡(星山別曲)’으로 남겼는데 창평(昌平)은 바로 송강(松江)의 문학적 감수성과 정서를 살찌운 고향인 셈이다. 이 수학기간에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과도 교분을 맺어 훗날 조정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27세 되던 명종17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명종22년에 이이(李珥)와 같이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그 때는 이미 동·서(東·西)의 당쟁이 노골화하던 때였는데 정철(鄭澈)은 어느틈에 서인(西人)의 거두가 되어 동인(東人) 이발(李潑) 일파와 맞서게 되었다. 선조13년 마침내 반대당에게 밀려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로 나아가 조용히 관동팔경을 벗하여 지냈다. 이듬해 다시 조정에 돌아왔으나 동인(東人)들의 세력이 굳어져 있어 관직을 사퇴하고 창평(昌平)에 물러가 있었다. 선조 22년 다시 부름을 받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얼마 후 다시 동인(東人)에게 밀려나 명천(明川), 진주(晋州), 강계(江界) 등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인 강계(江界)에서 풀려났다. 57세에 사은사(謝恩使)로 明에 다녀온 후 다시 반대파의 탄핵을 받자 강화로 낙향, 그곳에서 빈곤과 울분 속에서 병사했다. 사후 반대당의 참소로 벼슬이 박탈됐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됐으며 숙종10년 문청공(文淸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송강(松江)은 본래 성질이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화(黨禍)를 입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었으니,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어린 시절을 보낸 창평(昌平) 성산(星山)을 읊은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하여 우리말로 된 수많은 가사(歌辭)들은 국문학상의 일품들이다.
“…송근(松根)을 베어 누워 풋잠을 얼풋 드니 꿈에 한 사람이 날더러 이른 말이 그대를 내 모르냐 상계(上界)의 진선(眞仙)이라 황정경 일자(黃庭經 一字)를 어찌 그릇 읽어두고 인간(人間)에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난다. 저근덧 가지마오 이 술 한잔 먹어보오 북두성(北斗星) 기울여 창해수(滄海水) 부어내어 저 먹고 날 먹거늘 서너 잔 기울이니 화풍(和風)이 습습(習習)하야 양액(兩腋)을 추켜드니 구만리(九萬里) 장공이 져기면 날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사해(四海)에 고로 나눠 억조창생(億兆蒼生)을 다 취게 만든 후에 그제야 고쳐앉아 또 한잔 하잤고야. 말지자 학을 타고 구공(九空) 중에 올라가니 공중(空中)의 옥소(玉簫)소리 어제던가 그제런가.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굽어보니 깊이를 모르거든 가인들 어찌 알리 명월(明月)이 천산만락(千山萬落)에 아니 비친 데 없다…” (‘關東別曲’의 마지막 부분)
세종 때에 한글이 창제되었으나 한글은 문학표현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언문으로 천시받았다. 그러던 것이 송강(松江)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문학을 표현하는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송강(松江)은 그보다 50여년 후 등장하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글문학의 초석을 놓은 공헌을 하였다. 앞에서 든 별곡(別曲) 외에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장진주사(將進酒辭)’ 및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송강(松江)의 아들 정홍명(鄭弘溟)은 사계(沙溪)의 제자로 인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그의 형 정종명(鄭宗溟)은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있을 때 아버지 송강(松江)이 죽은 뒤 벼슬이 삭탈되자 이를 항변하다가 그마저 벼슬을 빼앗기기도 했다. ■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는 송강(松江)의 현손으로 영일정씨(迎日鄭氏) 후손으로 유일하게 영의정(領議政)이 된 인물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 당쟁에서는 스승과 함께 노론(老論)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숙종10년 등과(登科)하고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경종 원년 실록청 총재관(摠裁官)으로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파직, 강진에 유배되었다. 영조 원년 노론(老論)의 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右議政)에 특진되고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로 치사(致仕)했다. ■ 정호(鄭澔)의 손자인 정종(鄭宗) 역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증손 정이환(鄭履煥)은 참판(參判) 제학(提學)을 지내는 등 영일정씨(迎日鄭氏)의 가계에서 가장 융성을 누렸다. 영조조에 <형제정승>으로 이름을 날린 판결사공파 20세조 /인천, 정우량(鄭羽良. 右議政)과 정휘량(鄭翬良. 左議政)은 송강(松江)의 방손(傍孫)이다. 아버지 정수기(鄭壽期) 또한 판서를 지냈는데, 형제가 모두 문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중 정휘량(鄭翬良)은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 소론(少論) 축출을 주장하고 좌의정(左議政)직을 사임한 인물로 어쩌면 그의 방조(傍祖) 송강(松江)의 성격을 연상하게 한다. ‘남애집(南崖集)’, ‘견사록(見思錄)’ 등이 남아 있다. ▣ 한말(韓末)의 인물인 정기원(鄭岐源)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강화진무사로 재직 중, 불법으로 침입해 온 미국의 행위에 항의, 통상교섭을 거절했다. 정경원(鄭敬源)은 한말 외세에 의지해 이른 바 개화(開化)를 이룩하려한 친일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인물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 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자 그 회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김홍집내각의 법부협변(法部協辨)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정낙용(鄭洛鎔)은 갑오년 관제개편 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역임하고,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아 남작(男爵)이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동식(鄭東植), 정재건(鄭在健)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후 포고문(布告文)이나 토적문(討賊文) 따위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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