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莫見乎隱(막현호은), 莫顯乎微(막현호미), 故君子愼其獨也(고군자신기독야).
숨겨진 곳조차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일수록 잘 나타나는 것이 없으며, 고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조차 삼가는(愼獨) 것이다.
한자풀이
莫(없을 막 mò/모/멱) - 없다, 말다, 불가하다, 조용하다, 드넓다, 장막, 저물다, 어둡다, 덮다.
見(볼 견/현/천 jiàn, xiàn) - 보다, 보이다, 당하다, 견해, 뵙다, 나타나다, 소개하다, 만나다.
隱(숨을 은 yǐn) - 숨다, 점치다, 가엽어 하다, 근심하다, 음흉하다, 쌓다, 무게 있다.
顯(나타날 현 xiǎn) - 나타나다, 드러나다, 뚜렷하다, 명확하다, 분명하다, 명백하다, 높다, 귀하다.
微(작을 미 wēi) - 작다, 자질구레하다, 정교하다, 정묘하다, 적다, 없다, 어둡다, 쇠하다, 아니다.
愼(삼갈 신 shèn) - 삼가다, 근신하다, 조심스럽다, 두려워하다, 삼감, 진실로, 부디, 제발.
獨(홀로 독 dú) - 홀로, 혼자, 어찌, 다만, 오직, 장차, 어느, 홀몸, 외로운 사람, 외롭다.
여운 해설
동양의 '自然(자연)'은 서양의 'Nature'와는 다른 개념이다. 이에 대한 도올의 설명이다.
우리가 보통 '인간본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표현하는 서양 언어는 예외 없이 '휴먼 네이처 human nature'가 된다. 다시 말해서 '성(性)은 'nature' 이외의 다른 적당한 말이 없다. 그런데 'nature'는 동시에 문명이 아닌 대자연(大自然), 혹은 천연(天然)의 자연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nature'는 '본성'과 '자연'을 동시에 의미한다. 즉, 성질이라는 의미도 갖고, 또 천지 대자연이라는 의미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 언어의 기나긴 역사와 관련되는 것이다.
자연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퓌지스Physis, φύσις'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을 '퓌지코이physicoi'라고 불렀다. '퓌지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희랍인들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생명이 없는 무기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생명 원리로서의 혼(푸쉬케psyche)을 그 자체에 내포한 유기적 자연이었다. 인간과 신도 그 속에 포함되어 생성되는 조화적 통일체였다. '퓌지스'라는 말 자체가 '퓌오마이phyomai' 즉, '태어난다'라는 동사와 관련이 있다. '탄생', '성장', '생성'의 기본의를 내포한다. '자기자신 내에 운동의 원리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퓌지스를 규정했다. 그것은 자기형성의 계기를 상실한 죽은 자연이 아니라, 그 속에 생성 · 발전의 가능성을 항상 담지하는 생명으로 가득 찬 유기적 자연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자연은 '실험'이라는 '고문행위'를 통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퓌지스'는 성장 · 생성의 의미로부터 필연적으로 '성질, '본성'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또한 생성을 가능케 하는 '힘, '능력'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 · 생성하는 삼라만상 전체를 통괄하는 개념으로서의 '만물의 자연'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 '퓌지스'가 로마와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에 와서 '나투라natura'로 번역되었는데, 그것도 '퓌지스'와 똑같이 '태어난다'라는 의미의 '나스코르nascor'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으며, '퓌지스'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에 오게 되면 신과 인간과 자연은 계층적으로 분리된다. 신은 초월자로서 자연에 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신의 창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 인간과 자연은 신에 의하여 따로 창조된 것이며, 인간은 자연 외적 존재로 소외된다. 인간은 자연과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초월하며, 자연의 위에 군림하면서 신의 소명을 받아 자연을 지배하는 자가 된다. 따라서 자연은 인간과 무관한 객체로서 소외되며 실험적 조작을 통하여 과학적으로 파악될 뿐이다."
도올 김용옥 - 중용 인간의 맛 中
노자는 도덕경에서 道法自然(도법자연)을 설파한다. 自然(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사물의 성질에 의해 삼라만상이 돌아간다. 자연은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우연적 사건에 의한 스스로 그러한 결과물이 '우리 우주'와 지금의 존재하는 '나'다. 그러므로 道(도)는 우리를 한순간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道法自然(도법자연)의 도는 자연의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하늘은 도의 질서를 따르고(天法道), 땅은 하늘의 질서를 따르고(地法天), 인간은 땅의 질서를 따른다(人法地).
서양이 기독교 세계관에 의해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인간에게 종속시켜서, 자연을 파괴하고 실험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인류 불행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지배와 종속, 우월과 열등, 개발과 파괴가 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미개하고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고 종속함으로써 야만적이고 악마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신의 구원이라는 명분으로 식민지 정책이 마구잡이로 벌어졌다. 열강이라는 이름으로 식민국가에 대한 착취와 문화 말살정책을 통한 인간 사냥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이 경쟁적으로 도륙하였다.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아름다운 천성은 총과 대포에 의해 짓밟혔다. 오로지 자국의 이익이다. 힘으로 장악한 식민 지배를 통해 통치 국가의 자원을 갈취하고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식민 지배에 찬동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놈들에게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다. 그 후유증이 대한민국에서는 풀리지 않는 갈등과 대립이 되어 지금까지 국가, 사회문제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의 기득권은 친일매국 세력과 반공을 앞세운 극우보수세력이다. 그들은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인간 사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맹자가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제시한 사단(四端)인 측은지심(惻隱之心) ·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인간의 조건이자 마지막 보루이다.
도덕은 자발적 자기 길들이기이다. 무엇으로부터 인가? 내 안에 98.7%를 공유한 침팬지가 가진 본능인 잔혹성과 무지막지한 공격성을 스스로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 의미에서 자사는 인간이 자기 길들이를 넘어, 군자의 길을 가기 위한 수양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戒愼(계신), 恐懼(공구), 愼獨(신독)이다. 人間本性(인간본성)이란 인간 내면의 침팬지를 길들여 우러 나오는 내면의 도덕적 감성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본능인 이기적인 탐욕으로부터 경계하고 삼가며(戒愼), 탐욕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이 튀어나올 때마다 몹시 두려워해야 하며(恐懼), 죄를 범하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드러나는 법이고(莫見乎隱), 아무리 작은 허물이어도 나타나기 마련이다(莫見乎微). 그러므로 군자라함은? 홀로 있을 때조차 자기의 욕망과 싸워 이기며,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을 통해 人性(인성)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愼其獨也).
1-3. 莫見乎隱(막현호은), 莫顯乎微(막현호미), 故君子愼其獨也(고군자신기독야).
숨겨진 곳조차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조차 잘 나타나는 것이 없으며, 고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조차 삼가는(愼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