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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다음카페 바로사의 최종철님의 글임을 밝혀둡니다.
환웅과 염제 신농씨, 태호복희씨
[삼국유사]에 의하면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내려보며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때 환인이 아들 환웅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니 널리 사람을 유익하게 해 줄만 했다. 이에 환웅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가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와 더불어 곡식과 인간의 수명, 질병, 형벌, 선악에 대한 일을 맡아 다스리고 ,모든 인간의 일 360가지를 주관하여 인간의 일을 다스렸다."
三國遺事 紀異 王儉朝鮮篇 古記云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 乃修天符印三箇 有住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白山 神檀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 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利化 時有一雄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靈爻一炷 蒜二拾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十六日 雄得女身 虎不能忌而父得人身 雄女者 無女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者 號曰檀君王儉
지금까지 우리 나라 사람은 이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단군이 살펴보았다는 삼위태백 중 태백과 환웅이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 왔다는 태백산을 한반도 북쪽의 백두산으로 보는데 이견이 없었다.
백두산 아래 한반도를 한웅과 단군의 나라 땅이라 하고 환웅의 신시를 아사달(새 땅)이라 해석하여 대동강가의 평양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위산은 어디를 가르키는 것인가?
이 삼위산에 대하여 역사연구의 초점을 맞춰 보고자 한다. 삼위산은 동북아 전체를 놓고 중국의 서쪽 감숙성의 삼위산 한 곳 밖에 없다. 이 삼위산의 가까운 곳에는 돈황석굴이 있는데 일명 막고굴이라 한다. [장자]에 의하면 막고야라는 신령스러운 인물이 있었다. 막고야의 야는 노인에 대한 존칭어이다.
그 내용을 참조하면 이러하다.
"막고야산에 신인이 있어 살 빛깔은 눈과 같이 희고 단아하기는 처녀와 같은데 곡식을 먹지 않고 바람을 호흡하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 위에서 나르는 용을 타고 4해 밖으로 놀러 다닌다. 그의 정신이 모아지면 온갖 사물에서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오곡을 풍성하게 결실 할 수 있다."한다.
이 막고는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삼신할미인 마고할미의 한문식 표현이다. 삼신 마고할미는 출산을 주관하는 여인임에 일치하는 것이다. 박제상의 부도지에 의하면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한민족의 시원을 마고성과 마고라는 여인에 의해서 출발한다. 마고시대에서 출발한 역사는 황궁 .유인. 환인. 환웅에 이른다. 그 내용에 의하면 마고 또는 막고굴이 있는 삼위산과 환웅은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환웅에 대한 기록에서 막고굴이 있는 삼위산을 언급한 것은 함부로 넘겨 버릴수 없는 앞으로 우리 민족의 근원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삼위산의 서북쪽엔 천산 산맥이 있으며 우랄알타이 어족의 근거지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삼위산에서 감숙성 동남쪽 끝으로 내려오면 섬서성 서쪽 끝에 태백산이 있다. 3,767m의 산이다.
이 태백산과 삼국유사의 환웅이 신시를 세운 태백산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혹시 [삼국유사]의 삼위 태백이 이곳이 아니라고 부정할 근거가 없는 한 일단 알아보기로 한다.
이 태백산 바로 북쪽 위에 오늘날 보계시라는 곳이 있다. 이 보계는 중국민족이 조상으로 생각하는 염제 신농씨의 무덤이 있으며 염제 신농씨의 고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염황자손 즉 염제 신농씨와 황제헌원의 자손임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삼국유사에서 말한 삼위태백을 찾아 나가는 길에 환웅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인들의 조상인 염제 신농의 무덤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중국 사학자 서량지교수는 이렇게 답변한다.
"세석기 문화부족(구석기와 신석기인의 중간시대로서 중석기인)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바이칼 호수 부근이었다. 이들이 중국 전설 가운데 나오는 염제 신농씨의 본 민족이다. "
진순신의 [중국고고학]에 의하면 중국 황하 일대에서는 세석기가 황하의 홍수에 휩쓸려 다 떠내려 가 버린 탓인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홍수에 다 휩쓸려 버린 것이 아니라 바이칼 호수 일대의 세석기인들이 요녕성 일대를 거쳐 황하 일대로 옮겨오는 동안 세석기 시대를 지났기 때문이 아닐까? 서량지 교수의 말대로 염제 신농씨가 바이칼 호수에서 황하 일대로 이주해 왔다면 어디를 통해서 왔을까?
최무장 저 {중국고고학]에 의하면 우리 민족 또한 홍적세 말기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살던 세석기문화인들의 한줄기는 송화강 유역에 정착하여 숙신과 말갈이 되었다고 한다. 실지로 길림성 장춘 일대의 서단산에서는 많은 세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중 한줄기 사람들은 지금의 만주 요녕성의 동북평원에 정착하였으며 그 중의 일부는 황하 유역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고학의 내용에 의하면 환웅과 염제 신농씨가 바이칼 호수 일대에서 홍적세 말기에 만주 요녕성 일대에 내려 왔다가 황하 일대의 태백산과 보계라는 이웃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환웅과 염제 신농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1958년 이 보계의 북수령이란 곳에서 약 5천년 전 내지 7천년 전의 신석기 시대 유물과 함께 30여구의 유골들이 옹관 속에 단독장 혹은 합장으로 출토되었다. 또 사방으로 반듯한 집터가 있으며 화덕터와 항아리 ,농사용 석기, 어구 ,도자기들이 함께 발견된다.
사마정의 [보사기]에 의하면 "염제 신농이 비로써 나무를 다듬어 호미와 쟁기를 만들어 밭갈고 밭매는 일을 가르쳤으며 처음으로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를 신농(神農)이라 하였다. 그는 풀뿌리를 헤치고 다니면서 백가지 풀들을 맛보아 약을 찾아내고 또 다섯 줄의 비파를 만들었으며 낮에 시장을 열어 각자 필요한 물건을 교환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태호 복희의 8괘를 고쳐 64효로 만들었다."
이 내용을 보면 이는 하나의 문화 혁명이었다. 단순히 한 인물의 창의력에서 나온 변혁이라고 보기보다 민족 생활의 근본이 뒤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태호 복희로부터 내려오는 유목민을 위주한 생활에서 요하 일대를 거쳐서 새롭게 이주한 농경민인 염제 신농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그 지역은 삼국유사에서 말한 태백산 일대였다. 그렇다면 풍백,운사,우사와 더불어 곡식과 인간의 수명에 관한 일 , 즉 농업과 의학에 관한 일과 인간사 360 가지를 살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잘 살게 한 환웅의 역사적 사실과 신농에 대한 기록이 무엇이 다른가?
이 보계에서 서쪽으로 가면 천수라는 곳에 이르는데 중국사람들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태호 복희씨의 고향이다. 천수시 한복판에 명나라 홍치 3년 즉 서기 1490년에 세워진 복희 묘가 있다. 역대신선통감에 의하면 이 천수에서 태호 복희씨 이전에 수인씨라는 인물이 나왔는데 그는 하늘의 별들을 28숙으로 나누고 1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로 나누었다. 또 한달을 30일로 정했다. 그는 또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나무로 만든 그릇과 시루, 사발 등의 토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한다.
수인씨가 죽고 8대를 전하다가 용성씨,사황씨,백황씨,속륙씨,곤련씨,갈천씨,축융씨,호영씨,무회씨로 이어져 무회씨가 죽고 난 후 태호 복희씨가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환웅의 자취를 따르다 왜 중국인들의 조상이라는 염제 신농과 태호 복희와 만나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역대신선통감에 의해서 확인해 보면 "천왕의 5세손에 무상천존 혁천씨가 도읍을 동악에 세웠는데 또 천손은 천왕의 후손이라 한다.
천왕가는 마음을 딲는 법을 전했는데 홀로 동북 장백산 아래에서 오래 도를 닦아 공을 이루었다. 태호 복희씨 때는 동왕공 태화진인이라 했다. 진인은 하늘나라 신선을 부르는 여섯 가지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염제 신농 때에는 많은 량의 기록을 한 공으로 태화진인에게 천부도관이란 칭호를 내렸다."하였다.
天王五世 無上天尊赫天氏 都於東嶽 一曰天孫謂天王之孫也 數傳之金虹氏古歲 得天王家傳心法 獨修於 東北 長白山下 日久功成 太昊時 方諸東王公太華眞人 台掌天仙六籍 炎帝時 多枚量記錄之功 太華眞人似號 天符都官
동북 장백산은 백두산을 말하는데 일명 태백산이 되며 천부도관이란 말과 환인이 환웅에게 준 천부인 3개와 통하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환웅과 관계 있는 천왕이나 태화진인이 또한 중국의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와 관계있다고 중국의 역대신선통감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 신단수 아래 홍익 인간세계 이화세계를 펼친 환웅과 태호 복희 ,염제 신농은 역사 속에서 분명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보사기에 의하면 복희씨는 백성들에게 그물 만들기와 고기잡이를 가르침으로 복희(伏犧)라 하고 또 소, 양, 돼지 등 가축 기르는 법을 가르쳐 포희(敍犧)라고도 했다 한다. 이 내용을 보면 복희 때의 부족들은 어로와 목축에 의존하여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복희의 어로와 유목을 위주로 하던 부족과 염제 신농씨의 농경 부족의 갈등은 없었는가?
운급칠참에 의하면 "해가 하늘 가운데 있을 때 시장을 열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통용하게 하여 백성들의 편의를 살폈다. 이때 제후 숙사씨가 반란을 일으켜 명령을 어겼다. 기문동이 그를 죽였다. 신농씨가 덕을 딲으니 숙사씨의 백성으로 스스로 그 임금을 공격하여 신농씨에게 돌아 온 것이다."하였다.
그 갈등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신농이 황하 일대를 다스리기 전 싸움이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로 하여 어로와 유목민 위주의 생활에서 농경을 위주로 하는 생활로 바뀐 것은 틀림없다.
신농씨가 시장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환웅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시 神市를 열었다고 했다.
이 신시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신농씨가 열었다는 시장과 어떻게 다른가? 환웅의 신시를 환인하기 위해 박제상의 [부도지]에서 환인과 단군이 열었던 신시의 모습을 비교해 보자.
"이에 황궁씨의 후손 6만을 이주하여 지키게 하였다.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9신용을 나타내는 표적)를 새겨 천지의 물에 흘려보내 사해의 모든 족속들을 초청하였다. 모든 족속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숲에 신시를 크게 열고 마음을 딲고 수련하여 천상을 살핀 후 마고할미의 계보(계통을 나타내는 족보)를 닦아 그 족속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음(말)을 정리하였다. 또 북극성 과 북두칠성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제사를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모든 족속이 방장산 방호의 굴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신용의 표적)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이라 하여 일곱가지 어지러움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십년마다 반드시 신시를 여니 이에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가 되어 인세가 크게 화평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바다가에 성황을 지어 천부에게 제사를 올리고 모든 부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로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
또 서로 교차하는 중심지에 시장을 설치하고 여덟 군데 큰 못에 바다 시장을 열어 매년 10월에 조제를 행하니 사해의 모든 족속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의 모든 족속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제족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공진하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 ."하였다.
이를 가리켜 조선제 朝鮮祭라 하였다. 이 때에 산악과 해양의 제족이 물고기와 육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이 거의 저린 해산물과 조개와 가죽류이기 때문에 곧 희생제를 행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하고 공에 보답하게 하였다.
언제나 이 때가 되면 물건과 화폐가 폭주하므로 사진과 사포에 바다 시장을 열고 몸을 깨끗하게 하여 지리를 거울 삼아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여 물건의 성질과 근본을 분별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한다.
이 내용을 보면 환웅의 신시와 염제 신농이 열었다는 시장과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섬서성의 태백산에서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서안시가 나오고 서안시의 근교 반파라는 곳에서 대규모의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섬서성의 반파유적은 방사선 측정치에 의하면 6080년(+-110)에서 5600년(+-105) 전으로 되어 있다.
환단고기에서 환웅의 신시 개천을 단군 개천 4330년 보다 1565년 앞선다고 하니 약 5900년 전으로 비슷한 연대였다고 생각된다.
반파는 서안 동남쪽 황하로 빠지는 위수의 지류인 산하 동쪽 기슭에서 있다. 강으로부터 약 8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며 강바닥으로부터 9미터 위쪽의 언덕이다. 약 7만 평방미터의 유적터에 주거지는 3만 평방미터 전성기에는 약 200채의 주거지가 있었고 약 5백명에서 6백명으로 추정되는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여성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농업을 했으며 어업과 사냥도 병행했다. 이 반파에서 발굴된 61구의 신석기 앙소시대 인골을 조사해 본 결과 현재 섬서성에 살고 있는 화북 사람 보다 화남의 한족(漢族)에 가까운 체질이라 한다. 이 인종과 태백산이 있는 보계의 북수령은 동일 문화와 인종이다. 하지만 복원된 반파인의 두상에 의하면 한국인 남자 얼굴과 다를 바 없이 보인다. 그들은 화남에서 북상하여 북방민족과 혼혈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6개의 남성 대퇴골의 길이를 가지고 추정해 본 결과 그들의 키가 172.48Cm-165.24Cm로 평균169.45Cm로서 화남지방 사람들의 신장과 비교해 볼 때 이례적으로 큰 키였다. 이 내용을 볼 때 이때는 이미 북방민족과의 혼혈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화남인과 혼혈한 북방인은 누구인가? 환웅은 지금의 만주 요녕성 일대에서 반파와 보계인들이 살았던 태백산으로 옮겨 가 그 당시 모계 사회의 남방 민족 유웅족 웅녀와 결혼하였으니 이 남방민족이 화남지방에서 북상한 반파인들이 아니었다고 부정 할 수 있을 근거는 없는 것이다.
반파인들의 생활은 남성 위주의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여성 위주의 모계사회 생활이었다. 아버지의 혈통은 알 수 없었고 사유재산과 상속이 없었던 사회였다.
이 모계사회에 대한 내용을 보면 고사변 제7책에 "태고의 사람들은 그 수명이 길었다. 처음에 3남 3녀가 있었는데 겨울엔 모여 살고 여름엔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새, 짐승, 곤충, 물고기, 초목의 열매를 먹고살았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여자의 성을 따랐다. 처음 세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이를 합웅기라 한다."하였다.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옛 글이라 생각한다. 옛날 여와나 웅녀가 살았던 약 6천년 전에는 지금처럼 일부 일처제의 결혼 제도는 존재 하지 않앗으며 오히려 일처 다부제의 형태, 즉 한 여자에 애인인 남성이 둘 이상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의 어머니는 알 수 있지만 아버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거나 모르는 형태였다.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옛 글이라 생각한다. 이 글에 의하면 새, 곤충, 물고기를 많이 먹고 살았다 했는데 반파인들이 사용했던 토기에는 물고기 그림이 많다. 그 다음에는 새와 곤충의 그림이 많다. 그들의 의,식,주 생활을 알게 하는 일면을 볼 수 있다. 환웅이 섬서성의 태백산으로 갔다면 그 때는 이러한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산동성 역성현 용산진을 중심한 용산 문화는 채문토기와는 다른 회도나 흑도를 사용한다. 이들이 생활 중심은 남성 중심이며 농업을 주로 하고 돼지, 개, 양의 작은 동물에서 소나 말 등 큰 동물을 대규모로 기르기 시작한다. 결혼제도도 일부일처나 권력자에 의한 일부다처제로 변했다.
중국의 사학자 부사년은 이하동서설이란 설로서 중국문화는 이夷와 하夏 두 계통이 있다 하고 채도는 하민족의 문화 흑도는 동이족의 문화라고 규정했다. 이 흑도문화와 동이족의 환웅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농사나 농업을 가르키는 농 農에는 진 辰이란 글씨를 포함하고 있다. 이 진이란 글씨는 태호복희씨의 내용에서 보았듯이 용을 나타내며 동시에 진 震과 같이 동북방을 가르킨다.
그것은 동북방에서 농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남북 만주 일대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유적에 의하면 지금부터 7-8천년 전에 이미 농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뚜지개 농사라 하여 땅을 지팡이 등으로 파고 씨를 뿌리는 원시농사에서 시작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보식신이란 인물이 죽으면서 그 머리에서 말과 소가 나오고 이마에는 조, 눈썹에서는 누에, 눈에서 뉘(벼와 같이 자라는 피의 일종)가 나오고 배에서 벼, 음부에는 보리와 크고 작은 콩이 났다고 한다. 이 말은 농사가 한민족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머리와 말, 눈과 뉘, 눈썹과 누에, 배에는 벼, 여자의 음부(보지)와 보리 등 우리말이 아니면 해석되지 않는 언어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사고도 마찬 가지였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에 의하면 "이 夷는 저 低이니 만물이 그 땅에서 뿌리 박고 난다."했다. 이 말 중 저 라는 말은 나무 뿌리라는 말이며 이 말은 농업이 동이족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염제 신농 또한 동이족인 환웅의 농업을 받아 들여 널리 펼친 것이다.
환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저술했다는 [부도지]에서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환인씨의 아들 환웅씨는 날 때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천부 3인을 계승하여 몸 마음을 딲는 수련을 하였다. 천웅의 도를 수립하여 사람들에게 그 유래됨을 알게 하였다. 어언간에 인간세상이 의식주의 생활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환웅씨는 4가지 법도를 정하여 환부-원래는 큰 물고기를 뜻하는 데 신성한 법도를 지키는 사람들을 뜻함.-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a.사람의 행적은 때때로 깨끗하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생귀가 되지 않게 하고 번거럽게 막혀 마귀가 되지 않게 하여 인간세상으로 하여금 밝음으로 통하여 장애가 없게 하라.
b.사람의 취적은 죽은 뒤에 공을 제시하여 생귀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게 하고 함부로 허비하여 마귀가 되도록 하지 않게 하라. 인간세상으로 하여금 넓게 베풀어 소외 받은 자가 없게 하라.
c.고집이 세고 사악한 자는 광야로 귀양 보내 때때로 그 사악함을 씻게 하라. 그 사악한 기운이 인간세상에 남지 않게 하라.
d. 죄를 크게 지은자는 섬으로 유배 보내 죽은 뒤에 그 시체를 태워 죄가 세상에 남지 않게 하라.
환웅은 4가지 법도를 정한 외에 궁전을 건축하는 법과 배와 수레를 만드는 법. 사람들의 거주생활과 여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환웅씨는 배를 타고 사방의 바다를 순행하여 천부인의 법을 밝혔다. 여러 족속들의 소식이 서로 통하게 하였으며 불로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
환웅씨가 돌아와서 8음2문의 언어와 글자를 공부하고 역법을 정하고 의약술을 수업하고 천문과 지리에 대하여 책을 지으니 인간 세상 만사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세대가 흘러가 나쁜 꾀를 꾀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 사이에 근본되는 도를 지켜 밝히기 위함이었다. 이 환웅의 조치로 하여 학문을 닦는 풍조가 생겨났다. 인간의 성품이 배우지 않으면 어두움에 빠지기 때문이었다."하였다.
환웅이 배를 타고 순행한 사방의 바다 가운데 황하가 포함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제 환웅의 역사 강역을 한반도에서 도는 만주 일대에서만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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