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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묵상글 들 ( 연중 20주 화요일-버리면 받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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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0주 화요일-버리면 받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어제 부자 청년 얘기에 이어지는 얘기입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는 말씀에
주님 따르기를 거부한 부자 청년 얘기에 이어지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자기와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가 있는지 주님께 여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베드로가 의기양양하다느니,
대가를 바라는 속물이라느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해하는 차원에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정말 자기들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여 순수하게 묻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대가를 바라는 것도 속물근성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는 이유가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순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면
따름의 대가라기보다 포기의 대가랄까 포상이 있기를 바라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다만 그 대가나 포상이 뭔지가 문제이겠지요.
그렇기에 대가가 무엇인지 묻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도
속물이라고 나무라지 않고 대가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 대가랄까 포상의 내용이 어마어마합니다.
1) 주님과 함께 열두 옥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
2) 부모 자식과 버린 재산의 백 배를 받게 될 것
3) 영원한 생명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과 보장이 사이비 교주의 그 사기와 같은 것일까요?
또는 일부 개신교의 3박자 축복,
곧 구원, 재물, 건강의 축복과 비슷한 것일까요?
어쩌면 3박자 축복이라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기에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버린 재물과 받게 될 재물의 의미입니다.
버려야 부모와 자식과 재물은 애착하고 움켜쥐고 있는 부모와 자식과
재물이고 그래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개 될 재물은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움켜쥐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 주님 말씀대로 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그런 것이며,
그래서 대가의 성격보다는 포상과 은총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버려야 할 부모나 자녀는 혈육이기에 애착하는 부모와 자식이고,
얻게 될 부모와 자녀는 영적인 의미의 부모와 자식입니다.
딱 맞는 예는 아니지만 예를 들어, 제가 자식을 포기하니까
저를 아버지로 여기는 아이들이 제가 결혼해 낳았을 아이보다 많습니다.
그러므로 받게 될 백 배란 같은 것이 수량적으로 백 배라는 뜻보다는
영적으로 백 배라는 뜻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아버지를 포기하니까 영적인 아버지가 백 배로 생기고,
더 나아가 육신의 아버지를 포기하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로 소유하게 된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참 아버지로 소유하게 되며,
육신의 자녀를 포기하니 영적인 자녀가 백 배로 생기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그렇다면 재물은? 백 배의 재물이란 어떤 것입니까?
내 욕심을 채우는 재물이 백 배나 된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런 뜻이 아닐 것이고 그것은 내 욕심을 채우는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 사업에 쓰일 재물이 아닐까 생각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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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연중 20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자는 죄인인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 반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18,29. 마태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올림픽대회 때 상을 위해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을 한 베드맨턴 경기는 결국 실격을 당하였습니다. 러시아 육상선수들은 약물복용으로 인해 경기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 근본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 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만을 생각하면 부정을 해서라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알맹이, 즉 내용을 보면 그 생각을 한 순간 이미 경기에서 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부자는 죄인인가요?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가기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잠언11,28).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삶의 변화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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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낙타와 바늘구멍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이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울 것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못 들어간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마태 12,20),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말씀은 지나치게 강경하고,
또 자비로우신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신 것은
부자들의 회개를 바라시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으로,
또는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낙타’와 ‘바늘구멍’을 어떤 상징이나 비유로 해석하고,
그래서 뭔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낙타를 가장 큰 동물로 생각했고,
바늘구멍은 가장 작은 구멍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표현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을 싫어하신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부유한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제대로 회개하고, 하느님만을 올바르게 섬겨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4-15)”
바리사이들은 부유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느님의 복을 받았으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복을 못 받은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복을 못 받은 사람들이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만일에 그 생각이 옳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그런 사고방식을
‘혐오스러운 생각’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5-26)”
제자들이 몹시 놀란 것은,
그들도 그때까지는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하느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셨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다는 뜻인데,
그냥 보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하느님께서 정하신다.”,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부자는, 즉 재물을 섬기면서 살았던 사람은,
그 상태 그대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한다면 재물에 대한 탐욕, 집착, 소유욕 등을 버릴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부자였더라도 회개한 사람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베드로 사도의 말을, 예수님께 어떤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는 말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요구는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복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로 해석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8-30).”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이들은 예수님의 왕정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간 이들은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백 배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역전된다는 뜻인데, 이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되고, 오만한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경고의 말씀이 됩니다.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백 퍼센트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자동적으로 처지가 역전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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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새벽을 열며.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빠다킹신부님.
역사적으로 유명한 미인들이 있습니다. 양귀비, 클레오파트라…. 그런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1900년대 테헤란에 살았던 이란 공주 ‘타즈 살타네 카자르’입니다. 당시 그녀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페르시아 귀족 남성 46명이 그녀에게 청혼했는데, 그중 13명이 거절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 정도였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혹시 정보가 있을까?’ 하면서 ‘타즈 살타네 카자르’를 찾아보니 나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 아니라, 끔찍한 외모의 남성입니다.
그녀는 키가 작고 발목이 굵었으며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었습니다. 여기에 엉덩이 위로 치마 밑단이 꽃부리처럼 활짝 펼쳐지는 발레 치마를 입었습니다. 패션 감각이 전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제가 남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콧수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썹도 막대기처럼 짙어서 ‘남자’처럼 보였습니다.
이 외모가 당시 미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 미의 기준은 이렇게 변합니다. 어쩌면 역사상 모든 기준이 바뀌고 있지 않을까요? 결국, 지금 우리가 내세우는 기준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기준은 주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참 진리이며,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부자들은 많은 봉헌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이야말로 하늘 나라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지요. 그렇게 많은 봉헌을 하고, 또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이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 주님의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면서 그분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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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으면 걱정이 없겠네(티벳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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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자기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으면서 상대를 설득합니다. 이런 사람은 똑똑한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아는 것이 많고 머리 좋은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똑똑함이 인류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존 최고 경영자 제프 베로스의 말이 많이 와닿습니다. 그가 말하는 같이 일하는 똑똑한 사람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이해를 계속 수정한다. 이미 해결한 문제도 다시 고려한다. 새 관점, 정보, 생각, 모순, 도전에 열려 있다. 예전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언제든 바꾼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짜로 똑똑한 사람이고, 이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자기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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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고 하신다. 여기에서 낙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낙타는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 바늘구멍이 낙타의 거대한 몸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져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정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신 말씀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신 것이다. 낙타와 바늘귀의 예가 그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한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 모두가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물었다. 여기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부족하고 죄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결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은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배”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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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한상우 신부님.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 24)
은총으로
채워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은총의
하느님께서
먼저
작아지십니다.
우리가
더 작아지면
못 빠져나갈
바늘구멍이란
없을 것입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우리자신이
작아지는
삶입니다.
작아져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버려야
빠져나갈 수 있고
비워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버려야
하느님을 위한
빈자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의 뜻을
버려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나누어야
작아질 수
있습니다.
작은
바늘구멍을
못 빠져나가기에
우리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빈곤한 이가
있기에 부자가
있는 것입니다.
위 아래의
구분이 아닌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많이 지녀서
못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나누고 감사하는
기쁜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작아지면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의
은총이 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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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어제의 복음과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내용도 ‘부’에 관한 것입니다.
젊은이가 떠난 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사실 마태오 복음에서 ‘부자와 하늘 나라’에 대하여 알아들으려면 산상 설교의 시작인 행복 선언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러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같은 행복 선언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루카 6,20 참조). 그리고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라고 말하는 마태오와 다르게 루카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루카 6,21)이라고 언급합니다.
곧 루카는 실재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가 복음을 전하려던 교회는 루카가 속하였던 교회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신자들이 주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유한 신자들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부자가 무엇인지를 강조하여 가르치려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태오가 이처럼 윤리적으로 각색한 이유는 교회 안의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제 복음의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오는 많이 가진 이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이가 부자라는 사실을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많이 가졌어도 스스로를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이 부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말씀처럼 “완전한 사람”(마태 19,21)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누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으로 자신의 빈 곳을 채우는 ‘마음이 가난한 이’가
바늘구멍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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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방에 선풍기가 있습니다. 선풍기에는 전원, 시간, 속도, 회전의 기능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눌러야 하는 곳은 전원입니다. 회전을 먼저 눌러도, 속도를 먼저 눌러도, 시간을 먼저 눌러도 선풍기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본으로 전원을누른 다음에 다른 기능을 누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시동을 걸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것들을 작동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급하거나, 서두르면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저도 성격이 급한 편이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설명서를 읽어보면 방법이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공인 인증서도 차분하게 과정을 밟으면 5분이면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서두르다보면 10분이 걸려도 다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현명한 여인이 두레박에 나뭇잎을 넣었다고 합니다. 갈증에 지친 남자가 급하게 마시다 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것도 힘들지만, 코로나19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천문학적인 재정지원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합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돈의 중요성과 저축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가 15, 8-10)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양 한 마리처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다음은 적극적인 재테크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태 25, 14-30)는 목표 수익률 100%의 공격적인 재테크입니다. 예화 속의 주인은 종에게 금융기관의 수익률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잘 키워야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잘 키워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맹목적인 저축에 대한 경고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 16-21)는 돈 자체에 탐닉하는 수전노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곳간이 미어터지게 재물을 모아도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인의 목숨을 가져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나눔의 미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눔이 참 행복임을 가르치십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 19-31)는 나눔을 모르는 부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닉을 싫어하셨습니다. 부자를 미워하신 게 아니라 나눔을 모르는 부자를 책망하셨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된 것이 죄가 아니라 모은 돈을 나누지 않은 것이 죄가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던 자캐오(루가 19, 1-10)를 축복하셨습니다. 자캐오와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삶과 신앙이 하나였습니다. 밥을 푸기 전에 성호경을 먼저 그었습니다. 일이 생기면 먼저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불렀습니다. 손에는 늘 묵주가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기일이 되면 새벽미사에 모두 함께 갔습니다. 전날에는 가족들이 모여 연도를 바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여행을 가면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이 성당의 위치였습니다. 가족들의 이름도 세례명을 많이 부르셨습니다. 물론 신앙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먼저 찾은 적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양심을 속인적도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이웃과 다투기도 했습니다. 성찰하고 뉘우치며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판공 때면 길게 줄을 서면서 성탄을 기다렸고, 부활을 기뻐하였습니다. 코로나19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의 기본기를 다잡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았던 일에 너무나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음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가 가면 좋겠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에게 하느님나라는 언제나 활짝 열려있습니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정녕 이 백성은 생각이 없고, 슬기가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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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부자에 대한 주님의 입장이 드러납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부유한 젊은이가 슬퍼하며 떠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는 많은 재물을, 누군가에게는 지혜를, 누군가에게는 건강을 주신 건데, 왜 유독 부자만 구원이 어려운 걸까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예수님께서 "불가능하다"고 하시지 않고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이 현세를 살아내는 것이 어렵다면, 부자는 내세에서 구원받기가 좀 더 어려운가 봅니다. 하지만 결코 불가능하다고 하시지는 않으셨지요.
세상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화와 권력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는 유산으로든 능력으로든 천운으로든 하느님에게서 더 많은 물질을 부여받아 관리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자신에게 부당하게 쏠린 재물을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눔으로써 재산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에 부응하게 됩니다. 그 재물이 애초에 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에게 성가시고 불편하며 무시해도 좋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자들의 구원을 위해 곁에 두신 선물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부자들이 구원에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세상도 더 나아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제1독서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티로의 임금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대목입니다.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에제 28,5)
티로는 지중해 지역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항구는 각 지역의 특산물이 무역을 통해 오가고 문화가 교류되는 곳이지요. 자연스레 상업과 거래가 활발해지고 부가 축적되며 여러 문화와 종교가 섞이게 됩니다. 그렇게 쌓인 지식은 또다른 부를 낳으며 도시를 확장시키고 화려하게 만들지요.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너의 영화를 더럽히며,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에제 28,6)
자신이 쌓은 업적과 치적, 재물과 명예를 오직 자신을 위해 소유한 이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선고입니다. 지혜나 아름다운 보물들, 재물과 영화는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 가치를 지니지요. 잘 쓸 때 좋은 것이 되고, 오용할 때 나쁜 것이 됩니다. 티로는 하느님 덕에 부유해지고 화려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제 힘인 양 우쭐대며, 자기 영광과 쾌락과 만족을 위해 사용했으니 하느님 보시기에 부적격 판정이 내려진 것이지요. 그분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화답송)시는 분이니까요.
그러니 부자로 세상 것을 실컷 누리고 살면서 내세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까지 바란다면,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있어도 교만해지지 않기는 어려우니까요. 있으면서 이기적이 되지 않기도 쉽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사심없이 나누는 것도 만만히 볼 일이 아닙니다. 있는 이가 없는 이를 겉으로든 속으로든 모욕하거나 조롱하지 않으려면 보통 이상의 인격도 갖추어야 하지요.
있으면서 있는 것 티 내지 않고 뻐기지 않기란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 욕심은 한이 없어서 있어도 만족을 모르니 감사 대신 불평만 늘고, 주위에 경계와 의심을 거두지 못하니 마음은 또 얼마나 불편합니까?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니 오만함을 달고 살 테고, 인간에게 닥치기 마련인 불행이나 고통 앞에서 하느님을 꾸짖으며 항변하겠지요.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재산이나 불려주는 집사처럼 여겨왔으니 실제로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하느님께는 오매불망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이지요.
"...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자들에게 힌트를 주십니다. 부자여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버리는 것, 주는 것, 나누는 것이라고요. 버리고 주고 나눈 만큼 백 배의 상급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니, 버릴 것, 줄 것, 나눌 것이 많은 부자들에게는 어쩌면 희소식이 될 법도 합니다. 단,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말이지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하늘 나라는 세속 삶에서 매긴 순서와는 사뭇 다를 것 같습니다. 많은 경우, 소유로 매겨진 순서, 권력으로 매겨진 순서, 배움으로 매겨진 순서, 신분으로 매겨진 순서가 하늘 나라의 새 질서 안에 다르게 재편될 것입니다. 여기서 첫째라고 거기서도 첫째가 되라는 법이 없고, 여기서 꼴찌라고 거기서도 꼴찌로 살라는 법도 없을 겁니다. 어쩌면 지상에서 소유한 만큼이 반영되기보다 나눈 만큼이 반영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벗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들어선 이상 구원은 우리 모두의 지향점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누리는 영원한 행복을 거부할 이유도 마다할 이유도 없지요. 현세에서도 행복하고 내세에서도 행복한 삶의 해답은 오늘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물적 재산이건 영적 재산이건 자신의 부유함을 내놓고 나눈 만큼 우리는 하느님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이 어려운 레이스에 도전하신 여러분 모두를 격려하고 응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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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4)
'참부자가 되는 길!'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나간 젊은이의 떠남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부자들은 영영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존재들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의 참의미'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단순하게 재물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하느님께서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그래서 가지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
나는 주인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을 관리하는 관리인이니, 주인님이신 하느님께서 쓰시겠다면 "예!" 하고 언제든지 내어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의 모습이라고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19,30)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제 깨어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어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늘 오늘, 아니 매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유혹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귀한 것일수록 그런 유혹은 더 크게 다가옵니다. 그것이 재물과 재능과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복음환호송)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셨으니, 우리도 너를 위해 전부를 내어 놓을 수 있는 '참부자'가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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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 주님의 구원 은총 - 회개, 가난, 겸손 -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들입니다.
어제는 우리 수도원의 고 정훈만 세례자 요한 수사의 7주년 기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배밭 노동중 불의의 사고로 44세로 선종한 수사입니다.
문보물 수사의 고마운 권유에 화답해 아침 배밭 선종터에서 간단히 기도를 바쳤습니다.
또 힘든 중에도 성가정을 이루어 사는 가족이 예뻐 사진도 찍어 드렸습니다.
이 두 경우 저에겐 생생한 회개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어제는 제 수도사제로서의 삶에 대한 묵상중 새삼스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분명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고 이런 회개와도 같은 깨달음을 통해 점차 가난하고 겸손한
내적 삶으로 변모될 때 바로 이것이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우리 나이로 41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사제 서품후 거의 매일 미사를 봉헌했고 강론을 썼습니다.
때로 강론이 잘 생각이 안나서 옛 강론을 사용할 까 하는 유혹에 옛 강론들을 들춰 봤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활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도저히 에너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흡사 40대 강론들이 봄철 같다면, 50대 강론들은 여름철 같고, 60대 강론은 가을철 같고, 지금 70대에 들어선 강론은 겨울철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여 40-50대의 강론들은 에너지가 충만하기에 도저히 지금 기력으로는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런 내외적 변화와 더불어 총체적 가난 체험에 이어 겸손해지는 마음입니다.
사실 숱한 병고와 죽음을 통해 체험하는 가난한 인간 존재입니다.
참으로 예외 없이 가난한 존재, 연민의 대상인 인간입니다.
어제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산더미 같던 쓰레기들이 잘 정리, 정돈되어 있었고, 그 비밀을 알고
수도형제에게 찬탄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들을 말끔히 보기 좋게 분류하여 정리 정돈한 것을 보니 정말 ‘정리의 달인!’ ‘정리의 천재!’
입니다. 디테일에 참 강합니다. 장상은 숲도 보고 나무들도 보고, 디텔일에 강해야 한다고 하지요.
작고 하찮아 보이는 가난한 작은 숨겨진 노동이 마치 숨겨진 보물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리 정돈에 남달리 희열과 재미, 행복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은사, 은총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 들여다 보면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어제 저녁기도시 계속된 후렴,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바로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구원이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새벽에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떠오른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었고, 구원의 은총 제목에다 파스카 주님을 앞에 추가하여, ‘파스카 주님의 구원 은총-회개, 가난, 겸손-’으로 정했습니다.
참으로 파스카 은총의 십자가의 주님이 구원의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주제도 참 중요하고 우리 영성생활에 직결됩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과 재앙, 비극은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 자비의 은총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무엇이 무지입니까? 바로 인간의 탐욕과 교만입니다.
아무리 공부많이 하고 학식 풍부해도 탐욕과 교만의 무지에 눈멀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살 집 하나면 되는데 무지의 탐욕으로 다주택을 보유한 자들이 문제가 아닙니까?
오늘 복음 말씀 소주제는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와 ‘추종과 보상’이고, 제1독서 에제키엘 서는 ‘티로 임금에게 내리는 심판’입니다. 복음은 탐욕의 무지를 제시하고, 제1독서는 교만의 무지를 제시합니다.
어제 부자 청년 일화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기준에 미달된 부자청년은 바로 탐욕에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봅니다.
부유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탐욕의 발동으로 탐욕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힘들다는 것입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정말 탐욕의 부富의 위험은 우리를 내적으로 부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광신狂信도 약이 없지만 탐욕貪慾의 부富로 인한 내적 부패도 답이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봐도 외적의 침입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내부의 부패와 분열, 성적 타락으로 망한
나라들입니다. 이 또한 뿌리에는 무지가 또아리 틀고 있음을 봅니다.
하여 수도생활의 개혁은 늘 물질적 부유함에서 사막의 가난으로, 세속화에서 사막의 고독으로,
바로 철저한 회개의 삶을 통해 원천의 순수로 향했던 것입니다. 복음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거듭 반복하면서 부자의 탐욕이 구원의 결정적 걸림돌임을 천명하십니다.
말씀대로 라면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쉽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부자들에 대한 증오와 원망, 탐욕으로 찌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라 하여 다 구원문 통과가 힘든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회개의 파스카 은총으로 소유물의 주인이 되어 자선과 선행의 나눔의 착한 부자로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쉽지 않습니다. 소유가, 자리가 의식을 결정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따라, 소유에 따라 돌변하고 변질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하느님 은총에 깨어 있는 자만이 소유로부터, 자리로부터 자유로운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은총에 의해 참으로 내적으로 가난해지고 겸손해 질 때 구원이니 그대로 파스카 신비 은총의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자는 구원 불가하다는 말씀에 놀란 제자들에게 주님의 다음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스카 주님의 무상 은총으로 깨달아 회개하여 내적 가난과 겸손의 순수를 회복할 때 비로소 부자든, 빈자든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구원 은총이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주님은 구원 은총에 버림으로 응답하여 당신을 추종한 이들에게 내세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마지막 말씀이 정신 번쩍 나게 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 끝까지 방심해선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마지막 순간의 방심으로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패가망신 무너져 내리는 경우도 주변에서 종종 보지 않습니까.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도처에 널린 악의 덫의 유혹들입니다.
제3차 대전은 나라 간 무기 대결이 아닌 코로나 19 팬데믹 감염병과 시작된 듯합니다.
전인류의 회개와 연대가 절실한 현실입니다.
노심초사 코로나 19와의 전쟁에 최선을 다하는 정은경 중앙방역대책 본부장의 호소가 참 간절했습니다.
"코로나19는 전파 속도가 워낙 빠르고 감염력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한 번 감염원에 노출되면 대규모의 환자가
발생하는 데다, n차 전파로 이어질 경우 마치 둑이 무너지듯 방역이나 의료 대응에 한계가 올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감염이 될 수 있다는 게 참 무서운 말인 것 같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염을 시킬 수 있고 (감염 사실을) 본인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스크 착용과 예방수칙을 지키는 것만이 최상의 예방법이라고 거듭 당부드린다.”
코로나19도 어찌 보면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교만으로 자초한 재앙처럼 생각됩니다.
오늘 제1독서 티로 임금은 그 좋은 지혜와 부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교만으로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있다. 너는 신이 아닌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에
비긴다.”
마침내 그 좋고 많은 지혜와 재산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교만으로 이방인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비참한 죽음의 종말을 맞이한 티로 임금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무지의 탐욕과 교만에 답은 파스카 주님의 구원 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 끊임없는 회개와 가난과 겸손으로 살아갈 때 무지의 치유와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의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시어 회개와 가난, 겸손의 삶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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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이영근 신부님.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당신을 따르지 못하고 물러간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24)
여기에서, “부자”란 단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인 재화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정, 재능과 지식, 이념과 신념 등 자신이 애착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에 대한 집착이라면, 버려야 하는 재물이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곧 재물 때문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한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이는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구원이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진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자신(우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마태 19,30)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 볼 일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나 자신의 몸과 소유물인가? 자신의 재능과 지식인가? 혹 나의 신념이나 이상, 그리고 자기 방식의 사랑인가? 내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 상이거나 하느님 상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하느님이셔야 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주님!
생각이 제게는 재물입니다. 붙들려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자신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생각 속의 당신이 아닌, 당신이신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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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28,1-10
마태오 19,23-30
하느님께서 부자를 구원하시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은 이런 불편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즉, 부자는 구원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부자도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으로 1,100명의 유태인 포로들을 구출해 줍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아끼려 했던 차와 금 배치를 보며
그것까지 팔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합니다.
정말 사랑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쓸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부자로 남아있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남아있는 재산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성경에서의 부자는 소유한 돈의 액수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많을수록 부자입니다.
저는 행려자들 무료급식소에서 행려자들 사이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이들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문지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신문지를 많이 가진 사람에게서 하나를 훔쳐 갔을 때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부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은 재산의 양을 줄여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이 그들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어 구원하십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 ‘회심기’란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어먹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3년 전,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절의 경내지가 종단의 몇몇 사무승들의 농간에 의해 팔렸을 때,
나는 분한 생각 때문에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전체 종단의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이서 은밀히 강행한 처사며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앞에서 넘어져 갈 때,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가 산을 헐어 뭉갤 때, 정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웠다.
함께 살던 주지 스님도 다른 절을 맡아서 가고,
그 그늘에서 붙어살던 나는 그야말로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다른 도량으로 옮겨 차라리 눈으로 보지나 말자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가슴에 맺혔던 멍울이 삽시간에 술술 풀리었다.
그렇지!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거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거다.
언젠가 이 몸뚱이도 버리고 갈 것인데.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전까지의 관념이 아주 달라졌다.
내가 주지 노릇을 하지 않고 붙어살 바에야 어디로 옮겨 가나 마찬가지 아니냐. 중생들끼리 얽혀 사는 사바 세계라면 거기가 거기지.
그렇다면 내 마음 먹기 탓이다.
차라리 비리의 현장에서 나를 키우리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옛사람의 말도 있지 않더냐.
이때부터 팔려나간 땅에 대해서도 애착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본래 사찰 소유의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도들이 희사를 했거나 아니면 그때까지 주인이 없던 땅을 절에서 차지한 것일 게다.
그러다가 그 인연이 다해 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내지가 팔렸다고 해서 그 땅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다만 소유주가 바뀔 뿐이다.
이날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그토록 시끄럽던 불도저며 바위를 뚫는 컴프레서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이것이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부자가 아니고, 무엇이 없다고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내 것으로 생각하면 부자이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자를 어떻게 구원해주실까요?
바로 당신이 ‘주(인)님이 되어주심으로써’입니다.
신문지 하나도 내 것이라고 믿으면 부자이고,
수억 원의 재산도 주님 것이라 믿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 모든 것의 주님임을 일깨워주심으로써 우리를 가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가난한 자 되게 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주님께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것’이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이 이해되었습니다.
종은 아무리 가져도 그 가진 것이 다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신 이는 그분의 종이기 때문에 일절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믿음을 주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받은 것 중 일부를 도로 봉헌함으로써 굳건해집니다.
내 소유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방식이 새로운 계약을 위한 선악과인
‘십일조’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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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28,1-10
마태오 19,23-30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청빈생활
수도자들을 양성시키는 신학원의 책임자로 있을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책임자 직책을 맡은 데다 수도자 양성이라는 막중한 사명감에 대한 부담이 합쳐져
이런 저런 요구들을 참 많이도 했습니다.
말 한마디 해도 신랄하고 날카롭게 하게 되더군요.
부족한 점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지적도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처신한 것은 아무래도 후배들이 정말 제대로 된 수도자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울타리 안에 살아가던 아이들을 만나면 한없이 부드럽게, 끝없이 받아주는 제 이중적인 모습이 형제들의 눈을 거스르게 했던가봅니다.
언젠가 한 형제가 밤에 찾아와 제게 신중히 했던 조언의 요지는 “저희도 사랑받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 반만이라도 저희들에게 보여주십시오.”
방한 중에 교황님께서 보이신 행보 가운데서도 그런 측면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들이나 사회의 약자, 아이들, 청소년들, 가난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야말로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교황님이셨습니다.
갖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료 주교들과 사제들, 수도자들을 만나셨을 때 교황님의 태도나 어조는 사뭇 달랐습니다.
말씀에 날이 서 있었습니다.
때로 섬뜩할 정도로 적나라한 경고성 말씀을 가감 없이 던지셨습니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습니다.
요즘 저희 동료들끼리 농담 삼아 나누는 이야기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제 생활 그동안 편했는데 교황님 방한하고 나서 많이 힘들어졌다 ㅋㅋㅋ”
방한 기간 중 수도자들과의 만남 시간 때 청빈과 관련된 말씀이 아직도 강한 울림으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수도자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오늘 우리의 청빈생활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로 치면 수도자들이었던 제자들을 향해 청빈생활과 관련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입문 과정에 있는 후배 수도자들 바라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은 고마움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그 나이 또래들이 하루 온 종일 갖고 노는 스마트폰도 없습니다.
주머니 뒤져봐야 땡전 한 푼 없습니다.
그저 갖고 다니는 것이라곤 묵주와 양심성찰용 작은 수첩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름 최대한 청빈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인데...
그렇다면 교황님께서 강조하신 ‘부자 수도자들’은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생각해봅니다.
청빈에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과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아끼고 절약하며 사는 것,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은 조금은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청빈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다양한 가능성과 장점, 강점이 무엇인지를 찾고, 최대한 개발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 정말 근사한 청빈생활입니다.
내게 주어진 24시간이란 보물을 효과 있게 구성해서 보다 충만하고 기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래서 힘겨워하는 이웃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청빈생활이겠습니까?
한평생 게으르게 살지 않는 것,
꾸준히 맡은 일에 충실한 것,
하루하루 보람되게 살아가는 것,
결국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일,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 참으로 의미 있는 청빈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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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8. 연중 제 20 주간 화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주제는 에제키엘이 바다를 운영하는 티로 군주의 교만의 죽음 과 예수님 열두 제자들의 생명'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서는 티로의 군주가 '나는 신이다' 신의 자리에, 바다에 앉아있다. 는 것에 경고합니다. 신이 아니면서도 신처럼 여기는 것에 경고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옥좌에 앉을 때 제자들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 길을 따르는 제자는 세상을 바르게 이끌고 경영합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지난 시간의 각 현장을 되돌아 가서 봅니다. 나와 사람들. 활동, 곧 만남, 대화, 행위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잘못, 부정과 거짓을 보며, 나의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와 함께 묵상합니다.
-. 지난 모든 일과 만남에 감사하며, 그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하낟.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 자라에, 바다 한 가운데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진다.
과연 너는 다니엘 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 심오하지 않다.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너는 튼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에제 28,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 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태19,23-30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묵상.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 그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받을 특은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 하는 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영적 생명으로 인도할 권한을 갖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전하는 제자는 세상과 사람을 바르게 식별하고, 그들을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특별한 힘과 능력을 갖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바르게 경영할 수 있습니다. 그런 특은을 도구로 써 세상에 생명을 전달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제자에게 주님께서 시는 혜택도 있습니다. 영적인 선물, 영적 토지와 공동체의 선물을 백 배도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게 됩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 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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