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4. 내 남편을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년은 죽여버릴 거야! (2/2) 240222
어느 날은 겨우 수업을 버티고 교무실로 내려오는 계단을 터벅거렸다. 그런데 분명히 서로 주먹을 교환하는 듯한 활극의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여지없이 남학생 둘이 멱살잡이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건, 때리고 있는 녀석이 분해서 씩씩거리는 중이고, 맞는 녀석은 본인이 왜 맞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일단 떼어놓고 물어보니 때린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쌤! 인마가 참새가 크면 비둘기가 된다잖아요!”
아 그래 이 동네의 참새는 자라면서 종의 변화를 겪는 … 아니잖아! 순간 나도 어이없는 눈으로 맞던 아이를 돌아봤다.
“아니 쌤. 제가 분명히 저쪽 실습 동에서 며칠 동안 봤더니요. 저쪽 벤치 아래 있던 며칠째 있던 참새가 오늘 없어졌는데 그 자리에 갈색 비둘기가 있는 거라요. 비둘기가 쌀이나 쪼아먹지, 참새를 잡아먹진 않으니까 그 자리에 있던 참새가 자란 거 아니에요?”
보통 둘이 싸우면 때린 애를 혼내주게 마련인데 어이없어 말문이 막혔다. 마침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하나씩 쥐어주면서 비둘기한테 가서 니가 참새 출신인지 원래 비둘기 출신인지 물어보라고 하고 밖으로 내보냈다.
이 녀석들이 나를 놀리려고 이러는 건지 진짜인지 궁금해서 짐짓 인상을 쓰며 받아쓰기를 시켜보기도 했다. 외래어 표기법은 차치하고라도 지나다니면서 많이 봤을 롯데리아, 배스킨라빈스 같은 상호들도 정확히 쓰는 아이들이 손에 꼽혔다. 그냥 소리 나는 대로 받아 쓰는데도 일단 의사소통은 되니 소리를 글자로 잡아매신 세종대왕님의 능력과 혜안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교과서에 나오는 말들은 아이들에겐 영어나 마찬가지라 한 달쯤 넘어서는 교과서를 그냥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서점에 가서 고사성어와 속담 책을 잔뜩 사 와서 프린트물로 만들었다. 학교에 몸만 가지고 오는 친구들이니까 볼펜 한 통을 챙겨서 수업에 들어가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받으러 나오라는 것도 아니고, 프린트와 볼펜을 각자의 책상에 하나씩 놓아 드린다. 그나마 뭐가 적혀 있나 들여다보다가 그림은 없고 글자만 있으니 곧 심드렁해지는 아이들이 삼분의 일, 눈앞에 사람이 지나가니 뭐야, 하고 흘끗 보고서는 다시 자기 일을 하는 아이들이 삼분의 일.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지금 잠을 자야겠는데 뭐야 귀찮게, 하면서 단잠을 방해하는 이물질을 팔로 툭 밀어 땅으로 떨어뜨리는 아이들이 삼분의 일이었다. 아! 고사성어나 속담은 아이들이 잘 안 쓰니까 재미가 없어서 그러는가 보다 생각하고 그다음 주에는 내용을 난센스 퀴즈로 바꿨다. 딱 두 개 정도 피식 웃고는 다시 원상태로, 그다음 주에는 가로세로 낱말 퍼즐을, 그다음 주에는 수수께끼를, 하다가 결국 영화를 틀었다. 영화의 숨겨진 메시지를 읽어내는 방법이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물론 그들과 말 섞지 않고 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오토바이 타는 걸 좋아하는 애들이 많으니까 <퀵> 같은 영화를 가져가서 일단 보여줬다. 난리가 났다. 국어 시간에 영화 본대! 그러니까 애들이 일단은 안 잤다. 슬슬 이야깃거리가 있는 영화로 옮겨갔다. <최종 병기 활>, <도가니> 같은 영화를 볼 때면 아이들이 제법 극에 몰입했다. 하지만 잠시 영화를 멈추고 이야기하려고 치면 날아드는 숨소리 같은 욕설과 도끼날 같은 눈빛에 말을 길게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보기가 거듭되면서 나도 조금씩 요령이 생겼다. 내가 먼저 영화를 보고 그 내용을 퀴즈로 만들어 프린트해 줬다. 예를 들면 ‘<도가니>에서 교장 선생님이 여자아이를 쫓아갔을 때 그 아이가 화장실 몇 번째 칸에 숨었을까?’ ‘<최종병기 활>에서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나라가 어디였을까?’와 같은 것이다.
아이들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완득이>였다.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볼 땐 시키지도 않았는데 볼펜을 먼저 들고 내용을 메모하면서 감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영화의 주인공 완득이는 엄마가 필리핀 출신인 다문화 가정의 아이이면서 공부에도 관심이 없고, 잘하는 것도 미래에 대한 꿈도 없는 가난한 아이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의 시크(chic 친절)한 보살핌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서 서서히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완득이>를 보면서 아이들은 짧지만, 격한 언어로 자신들이 살아온 생을 토해냈다.
“그 뭐지? 기초수급자? 그거 파악한다고 아빠 집에서 노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애들 다 있는 데서. 그럴 때 그냥 안 들었어요.”
“아빠가 공사장에서 떨어져서 척추 수술을 했어요. 맨날 술 드시고.”
“세상이 다 그렇지 뭐. 로또 안 되나 로또. 인생 한 방인데.”
다문화, 가난, 장애, 학업과 같이 현실의 자신에게도 차별로 작용하는 요소들에 대해 격하게 공감하는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수업의 내용은 아이들이 지금 살아가는 삶과 관련이 있을 것’ 그리고 ‘수업의 반응 역시 아이들의 삶으로부터 나오도록 할 것’. 그러면 완득이가 그랬던 것처럼 분명히 이 아이들도 국어 수업, 문학 수업을 통해서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게 잘한 일인지 매 순간 고민되는 날들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빛 한 줄기 없는 막장에 파묻힌 것만 같은, 또는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지는 매일매일의 수업과 일상 속에서, 문학 작품이나 영상 콘텐츠가 아이들의 삶과 만나는 부분은 ‘여기 사람이 살았다!’라고 외치는 구조 신호와도 같았다. 발령받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신규 교사가 건방지게 교과서를 버리고 그 밖에서 수업의 소재를 찾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그 외침이 금방이라도 메말라 바스러질 것 같은 교실 현장에서 학생인 너희도, 선생인 나도 구조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의 외침으로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