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36, 악령, 그리고 환생
세칭 동방교의 교주, 할아버지(?) 노광공은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이땅에 수많은 손자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을 남겨두고 파란만장한 그의 생을 54세의 요절로 마감했으니 그때가 1967년 (음) 6월19일이다. 창조주 하나님(?)이요 재림의 구세주(?)였던 그도 영생불사 할것 같았건만 이땅에 무덤(자료 #1)을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으니 세계적으로는 말할것도 없고 한국땅에만 해도 수백이 넘는 내노라 하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수괴들과 하나같이 똑 같은 전철을 밟고 말았다.
---(자료 #1)---
이곳에서 나의 경험담이다. 내가 심취했던 이 이단종교의 자칭 하나님인 교주가 54세에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1967년에 사망했을 때 무슨 하늘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 그의 옥체(玉體)를 어느 공동묘지에 임시 가매장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경기도 소사면 소래리(박태선의 신앙촌에서 서쪽 방면)에 있는 산을 단장 하더니, 가매장한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파내어 이곳으로 이장(移葬)을 하였다. 그리고 왕릉처럼 무덤을 성역화 해 놓고(그 곳을 성지(聖地)라고 불렀다) 전기불도 없는 캄캄한 밤 산속에서 한 두 시간에 한 번씩 나는 랜턴을 들고 순찰을 하며 하나님(?)의 무덤을 지켰다.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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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한 바 마태목사는 노광공의 생일인 (음)정월13일과 사망일인 (음)6월19일, 1년에 두 번 꼭 세칭 동방교의 부산 문현동교회(세칭 동방교의 부산 '초량12교회'가 이전한 곳)를 찾아와 노광공을 기린다고 현재의 세칭 동방교 신도들은 자랑이 대단했었다. 사실이라면 갸륵한 그의 정성이 기특하지만 이제는 신분을 세탁하여 제도권 장로교단의 선교목사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그분의 본의를 가늠하기 힘들다.
노광공이 세상을 하직한 후의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은 세칭 동방교에 있어 그야말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권력이양기가 흔히 그렇듯이 암투의 시대였다. 1대 교주 노광공 사망이후 그 둘째 아들 노영구가 2대 교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에게는 창업자의 카리스마는 없었다. 단지 노광공의 핏줄을 타고 난 아들이었다는것 뿐, 자라나면서 자기 아버지가 일군 세칭 동방교에 심취하기는 커녕 방관자 내지 비판적인 자세로 일관했었다.
노광공의 큰아들 노영도는 얼굴도 핸섬하게 생겼고 풍채도 있었다. 두 형제가 어찌 그리 다른지, 2대 교주가 된 차남 노영구는 내세울 만한 풍채도 아니고 생김새도 빈상에 가까운데다 눈꺼풀은 늘 껌뻑 껌뻑 거렸다. 말을 할때의 음성도 이상했고 발음 자체가 어눌한 눌변이라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억센 간부들을 다스리고 세칭 동방교 전체의 조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동방교내에서의 행적이나 카리스마는 전혀 없었다.
대구에서 당시 줄만 서면 들어가는 모 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리포트를 쓸 줄 몰라서 대신 써 주었다고 세칭 동방교 목사인 누군가가 늘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능력이 부족한데다 문제는 연속으로 터지고, 1대 교주 노광공 휘하에 있던 간부들은 억세기 그지없어 통솔이 어려운 터에 2대 교주 노영구 자신도 지명수배가 되어 이리저리 피해다니게 되니 어수선 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통솔하기 힘든 간부들 여러명을 ‘지시’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으로 구실을 붙여 다시 부를때 까지 집에 가 있으라고 보내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부를때까지 기도하고 있으라고 사찰로 보내기도 하던 그런 시기였다.
우선 장승같이 턱 버티고 있는 사주(四柱)목사(정재덕 요나단목사, 양학식 베드로목사)의 한 사람인 요나단목사에 대하여 심판이 행해졌다. 1대 교주 노광공의 수제자요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경화록의 기록자요 인물도 잘 생기고 다정다감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고 설교와 성무에 능해서 많은 신도들이 따랐던 인물이다.
어느날 갑자기 그를 ‘악령’이라고 부르면서 심판이 행해졌다. 세칭 동방교의 최고위직 사주(四柱)목사인 그도 중간간부에 속하는 그 험상궂은 나사로 이상래장로등 중간간부들에게 온몸을 발가벗겨 구타당하고 벌벌 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심판은 정재덕 요나단목사 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노광공의 큰아들, 소위 성자 하나님이라고 떠받들던 ‘아바 할아버지’ 노영도도 발가벗겨 구타당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그 현장을 목격했던 어느 목사는 “우와~, 노영도하고 요나단목사가 발가벗겨서 이상래한테 두드려 맞아가지고 벌벌 떨고 있는데 요나단목사는 불알하나는 엄청 크더라이...”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노영도는 대기처의 여신도 대기자중 예쁘장하고 깜찍하게 생겼던 AR을 건드린 일이 대기처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그일과 더불어 동방교의 돈으로 무위도식하지말고 정신차리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던 것이다. 세칭 동방교에서의 심판이란 그런것이었다.
그후 노영도에게 당했던 대기자 여신도 AR은 세칭 동방교를 떠났고 그일이 스스로 가책이 되어 결혼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그후의 일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노영도와 정재덕 요나단 목사에게 육체적으로 얼마나 심한 고난과 모욕이 더 주어졌는지는 상세히 알길이 없지만 여하튼 정재덕 요나단목사, 그는 마산의 산중턱에 있는 그의 초가삼간 집으로 쫓겨가서 거기서 지내고 있었다.
나도 그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마산이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한적한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간 곳, 주위에 민가가 별로 보이지 않는곳에 초라한 흙벽돌로 지어 스레트로 지붕을 덮은 방2개와 부엌 한칸의 삼칸집에 그의 부인과 어린 두 딸이 거주하고 있었고 부인은 보따리 장사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서 매월 차례제가 있는 날 장을 보아 음식을 마련하여 제상을 차리고 혼자서 정성껏 차례식 (차례제라고도 하는데 전국의 각 지교회에서 매달 한번씩 정해진 날에 제사를 지낸다. '# 19, 자정에 올리는 제사' 참조)을 지내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한 시기에 세칭 동방교 내부에서는 정재덕 요나단목사에 대한 성토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와 관련된 잘잘못이 있는 사람은 거짓없이 죄자복서를 써 내라고 하기도 하고 용서해 준다는 명분으로 집회시간에 공개적인 참회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어느날 집회에서 이런 기회가 또 주어졌는데 40대 초반의 '초량12교회' 여자신도인 M장로가 분위기에 고조되어 죄자복을 하겠다고 하면서 손을 들고 일어서더니 ‘나는 악령과 저 뒷방(자료 #1)에서 간음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것이 아닌가,
---(자료 #1)---
'초량12교회'의 2층은 계단을 올라서면 내부 칸막이들을 모두 철거해서 툭 트이게 만들어 집회장소로 만들어 놓았는데 모두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실내 계단을 올라서면 2층의 중앙부위가 되는데 오른쪽으로는 앞서 어느 부분에서 설명한 것과 똑 같은 제단과 보좌가 있었다. 왼편의 끝에는 미닫이가 설치된 별도의 방 하나와 침구등을 넣어두는 골방 하나가 있었다.
왼편 끝쪽에 있는 미닫이 안쪽의 방은 부산경남지방의 지교회에서 일하는 남녀 전도사들이 매주 정해진 날에 모여서 서울 본부에서 내려온 순회자의 지시사항을 수령하고 각 지교회의 지성(헌금)을 모은 현금뭉치와 명단을 전달하고 세세한 지교회의 형편을 보고하는 모임 장소로 사용하고 밤에는 '초량12교회'에서 숙식하는 남자 대기자들의 숙소가 되기도 했다. (이단의 추억 # 16, 부산 '초량12교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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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뒷방’이라고 하는곳은 위에서 말하는 ‘왼편의 끝에는 미닫이가 설치된 별도의 방 하나와 침구등을 넣어두는 골방 하나가 있었다’ 라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에 깊이 빠지게 되면 아편에 취한것 같이 몽롱해져서 여자로써 천지분간이 안되는 이러한 자복도 가능해 지는 것이다. 아, 그 누가 아편같은 종교라더니. . .
세칭 동방교의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사주(四柱-동방교의 네기둥)의 한사람이었고 그 서열을 논하면 교주 다음이었다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인품이 신사답고 덕망도 있었던 그도 노광공교주의 사망이후 심판을 받아 세칭 동방교안에서 실권을 빼앗기고 마산에 있는 오두막같은 그의 거처로 낙향하고 말았다.
‘악령’이라고 낙인찍힌 것이다. 모두가 그를 지칭할때는 ‘악령’이라 불렀고 세칭 동방교내에서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 부쳤다. 아마도 교주의 아들인 2대 교주 노영구나 양학식 베드로목사및 그를 추종하는 중간간부들과 마찰이 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그 상세한 내막은 알려진 바가 없다.
권력의 이양기에는 언제나 피바람이 부는것이 인간세상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던가, 창립 교주 노광공이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사망한 후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다음 교주가 될려는 욕심으로 교주의 아들인 2대 교주 노영구의 독살을 기도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날 큰집(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중의 한곳, 1대 교주 노광공이 사망한 장소이기도 함)에서 창립 교주 노광공의 둘째 아들이자 2대 교주가 된 노영구가 속이 좋지 않아 부엌에서 차려 온 음식을 먹지 않고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 주었는데 개가 그 음식을 먹더니 바로 즉사 해버렸다는 것이다. 요나단목사의 짓이라는 것이었다.
심판을 받고 ‘악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쫓겨 나서 마산의 초가삼간 자기집으로 가 있던 그가 어느날 어렵게 장만한 일이천만원 가량의 돈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2대 교주 노영구 앞에 와서 지성(헌금)으로 꼭 받아 달라고 애원했는데 2대 교주 노영구는 그것을 지성(헌금)으로 받아주기를 거절하고 ‘정 그러면 파고다공원에 있는 노인들에게 가서 식사나 대접하라’고 했는데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부인이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 안했다고 한다.
한참 세월이 흘러 정재덕 요나단목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때 2대 교주 노영구는 ‘요나단 목사는 삼팔선 너머 비무장 지대에 늑대로 환생해서 밤마다 울부짖고 있다’고 하면서 ‘그런 생을 몇 번 더 거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고 했다고 한다.
아, 정말 믿거나 말거나 . . .
이런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일본의 전국시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다룬 소설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여러 여인네에게서 여러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에 하나인 다다데루가 항상 말썽이었다. 이에야스의 말년에 그는 심복인 시게가쓰를 조용히 불러다 놓고 특별한 밀명 하나를 내린다. ‘인간에게는 분수가 있다. 그러므로 다다데루가 천하를 어지럽히고 분수를 지키지 못하거든 그대의 손으로 이 단도를 찔러 내 아들의 목숨을 제거하고 천하의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고 당부하면서 한 자루의 단도를 위탁해 내려주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역사속의 이야기 하나, 조선의 개국공신이요 비운의 정치가 삼봉 정도전은 갑옷을 입지않은 장수라고 부를만큼 문무(文武)에 능했고 당시의 국제정세에도 정통하리만큼 예리한 통찰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왕권의 위협을 느낀 이방원에 의하여 제거되고 만다. 건국의 중심에 서서 큰 공을 세우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원대한 장래를 구상했던 삼봉 정도전, 창업의 대열에서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에 충성하던 인재도 그 아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제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독살설의 사실여부는 알길이 없지만 정재덕 요나단목사, 그도 선대 교주에게서 밀명을 받았을까? 아니면 2대 교주 노영구가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교권위협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제거할 수 밖에 없는 걸림돌이 되었을까? 과거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역사는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의 것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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