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천엽성승은 단엽을 향해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젠 되었다. 이 아비를 향해 서라.]
그러나 단엽은 그대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굳어진 석상처럼...
[아이야. 왜 그러고 있느냐?]
[아버님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단엽은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열고 있었다.
[허허... 너는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느니라. 모두가 이 아비의 뜻이다. 이 아비의 마음은 지금 퍽 편안하다.]
[아버님...]
[아들이면서 떳떳하게 아들이라 부를 수 없었던 이 아비이다. 그러나 이젠 누구의 앞에서라도 네가 나의아들임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단엽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아버님...소자는 죄인입니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전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변해 버린 천엽성승의 모습. 모두가 자신을 위한 천엽성승의 거룩한 희생 탓인 것이다.
두 사람의 손은 다시 뜨겁게 하나가 되었다. 천엽성승은 담담히 말했다.
[누가 너를 죄인이라 하겠느냐? 이젠 너를 영웅이라 부르게 될 지어다. 세상사람 모두가... 천엽성승이란 이름 대신 너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며 도탄에 빠진 난세의 무림을 단엽이란 인물이 구했음을 목이 터져라 외치게 될 것이다. 나는 믿는다. 네가 영웅이 될 것임을... 이 아비의 바램이 망상이 되지 않을 것임을...]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엽성승의 바램 그대로... 천엽성승의 신념 그대로 되어 보일 것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모친의 뜻이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뛰어 드신 수음마희 담야교. 그녀도 지하에서 웃고 있으리라.
삼일의 시간이 흘렀다. 단엽은 이 삼일동안 천엽성승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대소림사의 칠십이종절예.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무림의 지식까지도. 단엽은 새롭게 탄생이 되었다. 단엽 스스로도 자신의 힘의 한계를 확실히 모를 정도로...
[아이야, 시간이 없다. 북궁천을 깨워라. 지금 이 순간에 서궁수는 북궁천을 인질로 하여 북궁세가의 가주인 북궁추림을 이 뇌옥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을 게다. 그리하여 그녀로 하여금 군협칠대무황의 잠력을 극으로 폭발시켜 군협천의 구대장로를 상대케 하려 들지니 그 이전에 너는 북궁천으로 하여금 저들의 이지를 깨워야 한다.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야한다.]
[하지만...]
천엽성승의 말에 단엽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 않은가?)
천엽성승이 그런 단엽의 표정을 살피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어 그는 한장의 양피지를 단엽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단엽은 천엽성승과 양피지를 번갈아 보며 크게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이 양피지는 이 아비가 우연히 이 뇌옥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아비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아마도 그것이 너무 은밀하게 이곳에 숨겨져 있었던 탓이리라.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미 서궁수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단엽은 양피지를 받아든 후 물었다.
[그것을 자세히 보아라.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수가 있을 것이다.]
단엽은 천엽성승의 말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발하며 양피지를 살폈다.
양피지 그것에는 수많은 선이 마치 거미줄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문양같기도 했으며 또한 어떤 도형같기도 했으니...
단엽은 쉽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쉽게 파악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 손바닥만 한 양피지에 이토록 복잡한 선을 그어놓은 것인지... 한데 문득, 양피지의 도형을 살피고 또 살피던 단엽의 눈에 번쩍 이채가 띄어진다.
[이...이것은?]
[그렇다.]
천엽성승은 단엽이 무엇인가 파악한 듯 하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
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양피지를 살폈다.
[놀랍군요. 누가 마황성의 도면을 이렇듯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요?]
천엽성승이 담담히 말했다.
[그것을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이 아비도 모른다. 한 가지 짐작이 가는 것은 이 도면을 만든 인물이 바로 이 마황성을 설계하고 만든 인물이라는 점이다.]
[틀림없습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양피지가 이곳에 있었던 것은 이 도면을 만든 인물이 언제인가 이 뇌옥에 갇혀 있었음을 말한다.]
[으음... 그가 이곳에 갇힌 이유는 한가지이겠군요.]
[그렇다. 한가지이다. 바로 그가 이 마황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궁세가의 인물들은 이 마황성의 비밀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그마저 이곳에 가둔 것이겠지요.]
[허허... 너의 말 그대로일 것이다.]
단엽의 말은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을 만든 인물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물론이다. 그가 보통의 인물이라면 어찌 이 거대한 마황성을 설계할 수가 있었겠느냐?]
[그렇겠지요. 그리고 그가 보통의 인물이었다면 이 뇌옥의 비밀통로를 또한 만들 수도 없었겠지요.]
[그렇다.]
천엽성승은 단엽이 한눈에 도면을 완벽하게 파악한 듯하자 절로 흥이 난 듯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마황성을 만들기 전부터 자신의 위기를 감지한 것이 분명하며 언젠가는 자신이 이곳에 갇힐 것을 또한 예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비밀통로를 만들어 이곳을 탈출하려 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
천엽성승은 이제와는 달리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실패했기를 바랄 뿐이다.]
단엽은 천엽성승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만약 탈출에 성공했다면 당연히 이곳의 비밀통로는 서궁세가의 인물에게 노출되었을 것이며 오래 전에 철저하게 폐쇄가 되었겠지요.]
[으음... 바로 그것이 문제다.]
천엽성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단엽은 그런
그를 위로하듯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탈출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확신하듯 말했다. 천엽성승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물론 이 아비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짐작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
[확실합니다.]
[어찌 너는 그렇게 단정하느냐?]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한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했다면 이 도면을 이곳에 남겨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탈출한 이후 이 도면은 그에게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완전히 비밀통로를 빠져나간 이후에 도면이 발견된다면 문제가 없겠으나 만약 그가 미처 비밀통로를 빠져 나가기도 전에 이 도면이 서궁세가의 인물에게 발견된다면...]
단엽은 뒷말은 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 도면을 완성한 인물은 보통 인물이 아니고... 보통 인물이 아닌 그가 이런 생각 따위를 못할리는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그제서야 천엽성승은 확신이 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그는 또다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문제가 있다.]
단엽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이오이까?]
[이 철창문이다. 이 철창문의 열쇠가 없는 이상 이곳을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 철창문을 부셔야 하는데, 이 철창문은 만년한철로 만들어져 있다. 최소 육갑자 이상의 공력이 없고서는 만년한철을 전혀 어찌할 수가 없으니 이곳에 있는 비밀통로를 알았다 해도 이 뇌옥으로 들어올 수 없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지 않느냐?]
단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제게 육갑자 이상의 공력이 있지 않습니까?]
천엽성승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의 몸에 잠재가 되어 있을 뿐... 시일이 지나야 완전히 너의 것이 되는 것이지. 지금은 육갑자 이상의 공력이 될 수가 없다.]
[있습니다.]
단엽은 자신있게 말한 후 느릿하게 철창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힘을 주자 어른 팔뚝만한 굵기의 철창이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단지 휘어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휘어지는가 싶더니 그것은 한줌의 물로 녹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공력이 육갑자 이상임을 말하고 또한 수음마공이 한 단계 위의 경지로 상승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 단시간 내에 그럴 수가...?]
천엽성승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 몇 번이고 단엽과 녹아 버린 철창을 주시했다. 단엽은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 모두가 아버님의 덕분입니다.]
[아미타불...]
[그리고 이 모두가 아버님의 아들인 단엽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미타불...]
천엽성승은 느끼고 있었다. 단엽의 자질이 보통의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그 자질은 자신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것임을. 그래서 자신의 공력을 단번에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고 활용할 수 있음을. 그러나, 단엽은 자신의 자질을 뒤로하고 그 모든 것을 오히려 천엽성승에게 돌리는 것이다.
대견했다. 단엽의 심성이 선함에 대견해 했고 자신은 비록 무공이 전폐되어 이제 죽음을 앞둔 보잘 것 없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눈물이 나올만큼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아!]
그는 가만히 떨리는 손으로 단엽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둡다.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인물들이 있었다.
정확히 십인 이었다.
저벅저벅... 공간을 깨는 소리는 발걸음 소리 뿐이었다.
선두의 인물은 단엽.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인물은 천엽성승이었다.
그리고 뒤를 따르는 인물은 군협칠대무황이었다. 북궁천은 혁련궁의 품에 안겨 있었다. 군협칠대무황의 눈빛은 예전의 몽롱함에서 벗어나 완전히 이지를 되찾았는지 정상으로 돌아와 더 없이 맑은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북궁천의 사령마안이 힘을 발휘한 탓이다. 비록, 북궁천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완전한 힘은 발휘할 수 없었지만 단지 그런 정도로도 군협칠대무황은 상실했던 이지를 되찾은 것이다.
여기에서 단엽이 느낀 것은 사령마안의 불가사의한 위력이었다.
사령마안은 단지 눈빛만으로 인간을 죽이고 살릴 수 있고 또한 영혼을 제압하여 자신의 노예로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영혼을 제압하여 자신의 노예로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런 사령마안의 힘은 그 완전한 위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군협칠대무황의 이지를 되찾게 한 것이다.
만약, 그 힘을 반대로 군협칠대무황의 잠력을 극대화시키는데 사용했더라면 충분히 그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무공은 지금의 서너 배 가량으로 증진될 것이고 그런 그들의 합공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군협천의 구대장로이자 풍운회의 구대장로이기도 한 서궁수가 가장 두렵게 생각하는 그들을 능히 상대할 수 있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이 제정신을 찾은 것은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감사의 대가로 그들은 단엽이 하는 무슨 일이든 일 년 동안은 절대복종할 것을 다짐하니 단엽은 실로 거대한 힘을 얻은 셈이었다.
단엽은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예황 부소영의 크게 놀람은 당연했다.
난생처음 입술을 허락한 사람이 천엽성승이 아닌 단엽이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차차 그녀는 단엽을 헌신적으로 보필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군협칠대무황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단엽에게 각별한 정을 주었다. 북궁천 역시 단엽에게 감동하고 있었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됐든, 단엽이 그를 이용하여 서궁세가를 상대하려 했든 아니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단엽은 그의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그래서 그 역시 단엽의 오른팔이 될 것을 간청했다.
단엽은 거절했으나 북궁천의 뜻이 워낙 강경한지라 결국 승락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단엽은 북궁천이라는 북궁세가 사상 가장 뛰어난 기재를 오른팔로 삼고 군협칠대무황을 왼팔로 삼게 되었다.
단엽이 뇌옥으로 들어온지 육일 째, 천엽성승이 발견한 도면을 따라 뇌옥의 비밀통로를 찾았다.
과연, 비밀통로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도면을 만든 장본인이 이 비밀통로를 통하여 빠져나가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곳을 통해 빠져 나갔다면 이 통로는 벌써 오래 전에 서궁세가의 인물들에 의해 파괴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직 존재하는 비밀통로를 대하며 단엽은 이 비밀통로가 만들어진 그 이후 자신들이 최초로 걸음을 들여놓은 인간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통로를 따라 걷는 단엽의 표정은 웬지 긴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천엽성승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피로하시지 않습니까?]
[아니다. 오히려 네게 짐이 되는 것만 같아 죄스러울 뿐이다.]
천엽성승은 나직이 탄식했다. 단엽은 고개를 흔들었다.
[죄스러운 것은 소자이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더욱 죄스럽습니다.]
[허허... 이 아비 이제 죽은 목숨과 같거늘... 한사코 이 아비와 함께 나가려함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버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 단엽이 난세를 평정하는 모습.. 그리고 아버님을 대소림사로 모셔야 할 임무가 소자에게는 있습니다. 어찌 아버님을 이런 더러운 곳에 버려둘 수가 있겠습니까?]
단엽은 화제를 돌렸다.
[이제 출구가 가까와져 갑니다.]
[벌써?]
[그렇습니다.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 도면대로라면 출구는 천마루와 통해 있습니다.]
[천마루라면?]
[그렇습니다. 또 한명의 천마교주인 적용화의 거처입니다. 지금 그녀는 북궁세가의 힘을 빌어 그녀의 오라비인 적용운과 서궁세가를 상대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역시 우리에게는 적입니다. 현재의 그녀는 적용운에 비해 비록 약세에 놓이기는 했으나 역시 강합니다. 현재 우리의 힘으로는 쉽게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출구가 천마루로 나 있는 이상 그녀와의 혈전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겠군.]
천엽성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녀와의 혈전은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며 결국은 적용운과 서궁세가의 인물을 도와주는 셈이 되고 말지니... 천마교의 부활은 더욱 쉽게 되겠군.]
단엽의 표정은 그래서 긴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점입니다. 어쩌면 이 양피지는 서궁수가 계획적으로 우리에게 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물론 짐작입니다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아니다. 가능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서궁수의 계략이 분명하다.]
천엽성승의 몸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도 이런 점은 전혀 생각을 못했다. 도면은 단지 도면을 만든 장본인이 남겼을 것이라는 점만을 생각해 왔고 거기에 비밀통로가 표시되어 있음에 기뻐했을 따름이지 서궁수의 계략이 개입이 되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북궁천이 침묵 끝에 모처럼 입을 열었다.
[성승의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서궁수라는 인물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모사가입니다. 그는 적용화의 성격까지도 완전히 파악했을 것입니다. 결코 남과는 타협할 줄 모르는 그녀의거의 외골수적인 성격... 설사 이 북궁천이 당신이 생명의 은인인 만큼 이 결전을 피해주십사 사정해도... 그녀는 당신들을 죽이려 들만큼 정파인들에게는 무서운 증오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비참하게 자란 환경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죠. 그녀의 성격이 그런 만큼 이 결정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고... 서궁수는 어렵지 않게 적용화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다시 당신들과 군협칠대무황을 잡아들이려는 생각을 머리속에 계산해 놓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북궁천은 문득 기이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단엽을 응시했다. 그리고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도 한 가지를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단엽이 궁금한 듯 바삐 물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과 비타협적이지만...그녀가 사랑하는 한 사람과는 타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이곳에 있으며... 바로 단엽, 당신입니다.]
[무...무엇이?]
단엽은 당치도 않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북궁천은 빙그레 웃었다.
[소생은 가주에게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대소림사의 단엽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틀림이 없습니다.]
[그럴 리가?]
[단엽, 당신은 사사향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아...사사향...]
어찌 단엽이 잊을 수 있으랴. 적사도에 들기 전 대소림사에 잡혀온 희대의 마녀와의 정사. 그것이 첫 번째 정사이었음에야 더욱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북궁천은 변하는 단엽의 표정을 살피며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그녀가 바로 적용화이오. 이제는 나의 말을 믿겠소?]
[아아...]
이 순간 단엽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는 사사향의 모습. 비록 검상이 흉하게 얼굴에 나 있었지만 그녀는 기이한 매력으로 단엽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와 단엽의 인연은 실로 묘한 것이었다. 단엽의 모친인 수음마희 담야교가 죽었던 바로 그 뇌옥에 갇혀 있었던 사사향. 단엽은 그녀에게 뇌옥에서 탈출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정사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녀는 뇌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한데... 그녀가 적용화라니...그녀가 천마교주라니... 그리고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니...과거 그녀는 나를 무섭게 증오하지 않았던가? 한데...한데...)
이렇게 또 하나의 묘한 운명은 단엽을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서궁세가의 가주이며 군협천의 천루주였던 서궁수. 그는 오직 한 가지 길만을 우리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담담한 시선으로 말하고 있는 여인. 일신에 검은 흑의를 걸쳤고 나이는 십팔 구세 가량. 이마에는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으며 외팔이였다.
그러나 여인은 차가운 설매화처럼 아름다웠으며 두눈은 온갖 지혜가 농축된 듯 혜광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북궁추림. 바로 이 여인이 북궁세가의 가주인 북궁추림이었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얼굴로는 보일듯 말듯 절망감과 체념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선택만이 남아 있을 뿐이나... 불행하게도 다른 길을 선택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녀는 거대한 팔선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백의면사인을 보며 말했다.
이 여인은 또 한명의 천마교주인 적용화였다. 그녀는 깊숙이 태사의에 몸을 누인 채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싶었다. 눈빛은 공허히 허공에 맴돌고 있었다.
이곳은 천마루의 한 대전, 웬지 무거운 분위기이다.
대전에는 또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적용화의 우측에 앉아 있는 삼십대 미부, 그녀는 무릎에 하나의 철금을 단정히 놓고 있었다. 이 여인은 바로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지옥굉의 수뇌인철금마후였다. 그리고 적용화의 우측에 앉은 또 한 사람.
실로 비대한 노인. 눈빛은 푸른빛이었으며 그것은 그가 가공할만한 독공을
연성했음을 말한다.
이 비대한 노인은 바로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독풍림의 수뇌인 만독노조였다.
그리고 다섯 사람. 바로 적사도의 적사오혼들이었다.
단엽이 떠난 이후 그들이 이 천마루에 투신했던 것이다. 이때 북궁추림의 말이 계속 되었다.
[더 이상 우리 북궁세가가 서궁세가를 상대할 힘의 여력은 없습니다. 그들은 상상했던 이상으로 강했고... 우리의 부가주인 북궁천이 그들에게 인질로 잡힌 이상... 우리 가문 역시 그들에게 귀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주를 외면해서는 도리가 아니오나... 부가주를 외면할 수는 없으니...]
북궁추림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일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북궁세가. 그 힘은 가히 하늘에 닿아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이 땅에 서궁세가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아니 이 땅에, 이 시대에 서궁세가라는 존재와 함께 공존하지만 않았다 해도 북궁세가는 적용화를 도와 어렵지 않게 천마교의 부활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천년 만에 무림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 시대에 서궁세가 또한 무림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서궁세가의 모든 음모에 의해 난세에 희말려들고 있는 무림에 북궁세가는 설 땅이 없었을 뿐이다.
무림 전체를 능수능란하게 조종하여 그 거대한 힘을 자유자재로 이용하고 있는 서궁세가를 북궁세가로서는 상대하기가 역부족이었다. 그것을 적용화도 직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비극이다. 천마교의 부활을 놓고 한 피를 이어받은 남매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는 내심 깊은 탄식을 흘렸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왜 우리는 싸워야 하는가? 과연 천마교의 부활은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자신에게 향하는 의문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구에게 향하는 의문인가.
(서궁세가.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서궁세가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천마교의 부활을 이유로 이백여 년 세월동안 천마교의 마인들을 무림칠대뇌옥에 응축시켰던 것이며 이제 와서 완벽한 천마교의 부활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남매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녀는 회의를 느낀다.
(아아... 우리는 서궁세가와는 적이 될 뿐 친구가 될 수 없는 입장이 아니던가? 그들은 천마교의 부활을 노리고 있지만... 천마교가 파멸을 맞았던 것은 모두 그들 서궁세가의 음모 때문이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헌데 오라버니는 어찌 그 점을 망각하고 있단 말인가? 어찌 서궁세가의 손에 철저히 농락당하려 하신단 말인가?)
그녀의 시선은 어두운 그림자를 담고 북궁추림에게로 향했다.
(서궁세가에 비해 이들 북궁세가의 인물들은 인간적이다. 이들은 어떤 야망이 있어 결코 나를 돕는 것이 아니며 나와의 정이 있었기에 다만 나를 돕고 있는 것일 뿐... 아아... 이런 북궁세가의 힘을 빌어 진정한 천마교의 부활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거늘...)
어둡다. 돌이켜보니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가 희망이 없다.
문득 그녀의 입에서 처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결국 천마교는 서궁세가의 인물들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후 역시 파멸을 맞아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이 간단한 생각을 오라버니께서 못하시고 계신단 말인가?]
북궁추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도 어쩔 수가 없지요. 어쩌기에는 서궁세가의 힘이 너무나 거대하니... 그분도 역시 천마교가 이용당함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도 우리 북궁세가에게 믿음이 있듯 그분에게도 서궁세가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니?]
적용화는 의혹의 눈빛을 던졌다.
[서궁세가가 노리는 것은 천하제패에 대한 야망은 아닙니다. 그들은 철저히 군협천의 파멸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마교의 인물들과 같은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천하제패가 아닌 이상 군협천의 파멸이 도래한 다음, 그들은 이 땅에서 미련 없이 떠날 것임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어찌보면 서궁세가는 당신들에게 있어 해로울 것이 전혀 없는 거대한 힘입니다.
그들이 천하제패에 대한 야망만 없다면... 문제는 우리 북궁세가였고 우리 북궁세가만이 서궁세가의 인물들에게 굴복한다면 당신네 천마교인들이 당한 한은 당한 것 이상으로 군협천의 인물들에게 돌려 줄 수가 있을 겁니다.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북궁천이 인질로 잡혀 있는 지금 우리 북궁세가는 어쩔 수 없이 서궁수에게 굴복해야 할 입장이고...]
북궁추림의 눈빛은 공허히 적용화에게로 향했다.
[당신 또한 당신 오라버니의 뜻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적용화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이든 우리의 친구는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서궁세가의 농간에 의해 우리 천마교의 인물들이 무림칠대뇌옥에 투옥이 되지 않았던들 우리 천마교의 패망은 없었을 것이니 우리 천마교는 군협천에 의해 멸망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서궁세가의 인물들에 의해 희생이 된 것입니다.]
적용화의 두 눈에 절절이 한과 증오의 불꽃이 피어난다.
북궁추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적용가의 후예는 특출난 자질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천마교의 파멸을 가져온 실질적인 존재는 서궁세가이지 군협천은 아닌 것이다. 서궁세가의 인물에 의해 군협천이 다만 이용을 당했을 뿐이고 천마교는 희생을 당했을 뿐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할 즈음... 적용화는 마지막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내 설령 죽을지언정 굴복은 하지 않습니다. 싸우겠습니다. 아니 과거 천마교가 당한 한을 철저히 서궁세가의 인물들에게 돌려 줄 것입니다.]
순간, 철금마후와 만독노조 역시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노신들 역시 죽음으로 그자들과 싸우겠습니다.]
한데 바로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돌연,
[핫하하... 지당한 말씀이오. 당연히 서궁세가의 인물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오.]
낭랑한 웃음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니 그 음성은 정확히 말해 지하에서 솟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대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이곳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천마성의 금지구역. 한데 지하에서 외부인의 음성이 흘러나온 것이다. 이때였다. 쿠르르르...
묵석으로 만들어진 어림잡아도 천근은 됨직한 그런 거대한 팔선탁자가 돌연 움직이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빙글빙글 회전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전은 멈추었고, 곧 팔선탁자는 한쪽으로 미끄러져 나가 있었다.
대신 본래 팔선탁자가 있던 자리에 큰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입구는 계단과 이어져 지하로 끝없이 통해져 있는 듯 싶었다. 지금 그곳에서 십여 명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선두의 인물은 천엽성승을 안고 있는 단엽이었고 그 뒤로 군협칠대무황이 따르고 있었으며 천황 혁련궁이 여전히 북궁천을 알고 있었다.
한편 이들의 출현에 적용화와 북궁추림은 경악했다.
적용화의 눈빛은 단엽에 고정된 채 무섭게 떨리고 있었고 북궁추림의 눈빛은 북궁천에게 고정이 된채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헌데 이때 돌연, 만독노조와 철금마후가 단엽 일행을 향해 무섭게 덮쳐드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단엽 일행이 당연히 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타나자 혼신의 힘을 다해 가공할만한 무공을 전개한 것이니.
파아아...
디디딩....
가공할만한 독공과 음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순간적으로 펼쳐진 것이기에 도저히 단엽이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적용화와 북궁추림이 질겁하여 멈추라는 소리를 질렀지만 늦어 있었다. 허나, 정작 공격을 당하고 있는 단엽은 태연했다.
그의 입가에는 한가닥 여유있는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는 가볍게 만독노조와 철금마후를 향해 팔소매를 휘저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한데 다음 순간,
[헉!]
[욱!]
만독노조와 철금마후의 입에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나왔고, 그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밀리듯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쿵쿵!
그들은 대전의 벽까지 물러나서야 간신히 신형을 가눌 수가 있었다. 안색은 더없이 창백했고 두 눈은 경악과 회의와 불신의 빛으로 어우러진 채 부릅떠져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천마교주의 권좌를 노릴만큼 대단한 무공을 지닌 그들 두 사람이다. 비록, 북궁추림에게 패하여 천마교주에게 복종하는 입장이기도 했으나 그래도 그들에게는 천하를 오시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헌데, 생면부지의 어린 단엽에게 지금 또다시 이렇듯 무참하게 당하고 보니 그들은 자신의 무공에 대한 회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회의심 이전에 천마교주의 앞에서 무참히 당했다는 치욕감을 느꼈고 더불어 오기를 느끼고 있었으니 다음순간,
[죽어라.]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외치며 다시 단엽에게로 달려들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지
스스스... 돌연 그들 앞을 막아서는 인물들은 적사오혼이었다.
이에 만독노조와 철금마후는 만면 가득 의혹의 표정을 짓고 주추 멈추어 섰다.
그러자 적사오혼은 천천히 단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어 단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간, 그들 앞을 막아서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군협칠대무황이었다. 그들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사오혼이 동시에 단엽에게 공격하려 한다고.
[비켜서시오.]
단엽은 군엽칠대무황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군협칠대무황은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좌우로 갈라졌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단엽으로부터 단엽 자신에 대한 많은 말을 들었지만 정작 앞의 다섯 인물이 적사오혼이라는 사실을 몰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물러서자 털썩...
[노신들... 주인을 배알하옵니다.]
적사오혼은 단엽을 향해 정중히 일배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런 예는 천마교주에게도 취해 보지 않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단엽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모두들 무사했구료.]
역시 감격 어린 표정을 지으며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적사오혼은 거대한 잠력에 휘말려 몸을 세우고야 만다.
그들은 놀랐다. 불과 수일만에 단엽의 무공은 그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놀랍게 변해 있었다.
그것을 그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단지 변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무적의 경지에 이른듯하니...
한편, 적용화와 부궁추림 역시 상당히 놀라는 눈치이다.
적용화는 단엽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북궁추림은 단엽을 모른다. 허나 알든 모르든 그들은 단엽의 가공할 무공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 개망나니 어린 중이 저렇듯 변하다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적용화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단엽의 얼굴을 보며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과거의 일을 생각하니 원망이 앞서고 또 한편으로는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반가운 마음이 드니...
그녀는 지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었다.
북궁추림은 단엽을 보며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이...이럴 수가 나의 마음이 저 자의 얼굴을 보면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으니..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녀는 황급히 단엽의 얼굴에서 눈을 떼었다. 그러나 단엽의 아름다운 영상은 그녀의 뇌리에 깊숙하게 새겨진 뒤였다.
(아아..이래서는 안 되는 것을...북궁세가의 가주라는 지고한 신분에 있는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북궁천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그래서 그에게 지금 한 가닥 죄의식을 느끼고 있을 만큼 그녀의 마음은 단엽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도 확실히 모른다.
(북궁천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나는 북궁천을 쉽게 사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완벽한 인물을 사랑할 수 없음은 사랑이란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일을 두고 서서히 싹트는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헌데 이렇듯 단 한번 본 사람에게 내가 사랑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음은 무엇인가?)
그녀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때였다
[오랜만이오, 사사향.]
단엽이 적용화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순간, 적용화의 몸에 세찬 경련이 있었다.
(어찌 저 개망나니가 나의 정체를 알고 있단 말인가?)
그는 내심으로 비명이 터져나올 만큼 경악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다만 무서운 증오와 한의 기운만이 솟아날 뿐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북궁추림에게 나직이 말했다.
[가주...그를 죽여주시오. 그는 나의 원수이니...]
이 말만을 남기고 그는 대전을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단엽은 북궁천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소. 그녀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나를 중오했을 뿐이오.)
그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때 북궁추림은 적용화의 태도에서 언뜻 한 가지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대소림사의 단엽?)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새삼스런 눈빛으로 단엽을 바라보았다.
(교주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 사람이었던가?)
알 수 없다. 그녀가 그것을 느낀 순간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 것인지.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적용화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단엽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워하는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사랑으로 뒤바뀌어져 있었다.
(죽이려고 했지만 정작 죽인다면.. 그녀는 나를 원수로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내심 실소를 흘렸다. 문득 그녀는 단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교주를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교주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 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으니 당신의 위로가 필요할 것입니다.]
밤이다.
천마대회합을 삼일 앞둔 천마성의 밤은 긴장과 정적의 분위기였다.
천마루의 한 내실. 황촉불빛이 가늘게 일렁이고 있었다. 헌데 문득 황촉불빛이 심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철썩
[죽일놈!]
무섭도록 냉막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단엽의 머리가 거칠게 돌아갔다.
단엽은 한쪽 뺨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이오?]
그의 시선은 천마교주 적용화에게로 향해 있었다. 적용화는 무섭게 분노하고 있었다.
[꼭 이래야만 하다니...몰라서 묻는 것이냐?]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엽은 탄식했다.
[이미 지난 일이오.]
[지난일? 내게는 지난 일이 아니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일을 어찌 지난일이라 하느냐?]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강요하지 않았소. 당신은 살기 위해 나의 조건에 응한 것이며...]
[닥쳐라!]
적용화는 냉혹하게 말을 자르며 돌연 벼락처럼 일장을 뻗었다.
펑!
그녀의 일장은 정확히 단엽의 가슴에 적중이 되었다.
[으음...]
단엽은 신음과 함께 뒤로 주르르 밀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