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한 산악회의 계획에 따라 '복성이재 → 매봉 → 철쭉군락지 → 치재 → 다리재 → 철쭉군락지 → 봉화산 → 무명봉 → 양지재 → 광대치 → 중재 → 지지리'의 12km, 6시간 30분 철쭉 산행을 즐길 예정이었다.
1
봉화산
높이: 920m
위치: 전북 남원시 아영면
전북 남원시와 장수군, 경남 함양군의 경계에 솟은 봉화산은 철쭉이 곱기로 이름난 산이다. 흥부마을과 아막산성이 있어 볼거리와 현장학습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 사면과 바위 곳곳에 철쭉이 드넓게 군락을 이뤄 온종일 철쭉 향기에 취하며 걷는 봉화산 철쭉 길은 5월 중순에 만개한다.
봉화산을 가려면 일단 남원에 도착해 아영면으로 간 뒤 아영중학교에서 오산마을을 지나면 봉화산 산행기점인 성리마을에 닿는다.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의 고향으로 알려진 성리마을은 「흥부마을」로도 불린다.
마을을 지나 능선을 향해 20분 정도 가면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이었던 길이 6백33m의 아막성지가 나온다. 성지의 허름한 빈집을 지나 능선에 서면 성곽의 틈에 핀 철쭉이 산행객들을 반긴다. 남쪽으로 보이는 산 사면에 붉게 물든 철쭉밭에 묻히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능선에서 오른쪽으로 철쭉 산성을 따라가면 능선을 가로지른 치재에 닿는다. 최근 포장을 끝냈다. 계속해서 고개를 지나 능선을 따라 봉우리에 올라서면 붉게 물든 철쭉밭이 나타난다. 봉우리에서 꼬부랑재에 이르는 철쭉밭은 봉화산 능선 중 최고의 철쭉군락지로 손꼽힌다. 꼬부랑재를 지나면서 철쭉군락이 사라지고 40여 분 정도 더 가면 억새밭이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면 정상 전까지는 초원지대다.
정상 부근까지 올라온 임도는 다리 재로 통하는데 산불 때문에 초원지대로 바뀐 이곳에는 가지각색의 야생화가 등산객을 반갑게 맞는다. 공터를 이룬 봉화산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장안산과 남덕유산 기백산이 보이고 남쪽으로 지리산 연봉이 병풍을 친 듯 보여 장쾌하기 그지없다.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20여 분 가면 안부가 나타난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함양군 백전면 대안리에 도착하면서 산행을 마치게 된다. 산행 시간은 5시간 정도 걸린다. - 한국의 산하
이번 토요산행은 백두대간 중재, 복성이재 구간을 달릴 예정이다. 정확히는 그 구간에 있는 봉화산이 목표다. 지리산과 덕유산의 중간 정도에 있는 봉화산은 철쭉으로 유명하기도 해서 상춘에 맞춰 방문하기 위해 산행 계획을 세우다가 대중교통으로는 당일 산행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물론 까만 소 100 명산에 속하지도 않아 산악회도 찾지 않는 무명의 산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어 방법을 찾아보다 봉화산이 백두대간 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산악회 대간 팀의 산행 계획을 주시했다. 대간을 종주하는 팀이라면 반드시 봉화산 구간을 통과하는 산행 계획이 있을 거라는 판단에!
그러다가 코로나 덕에 거의 독주하다시피 해 마음에는 안 드나 어쩔 수 없이 이용하고 있는 산악회의 대간 팀이 5월 2주 차 토요일에 그 구간을 통과한다는 걸 산악회 게시판에 있는 산행 계획을 보고 알게 됐다. 해서 4월 16일 몇 자리 남지 않은 그 산행에 좌석 하나를 신청하고 바로 회비를 입금했다. 물론 산행 신청 전에 예약한 대간꾼의 면면을 둘러보니 익숙한 이름이 많이 보였다. 그 익숙한 이름 가운데 흥수도 있어, 지난 3월 사천의 와룡산 이후 오랜만에 같이하는 산행이 될 예정이다[산행기]. 물론 등산방에는 공개하지 않았다. 다른 산행은 같이해도 별문제가 없으나, 거의 앞만 보고 달리는 대간꾼과의 산행에 등산방 친구를 끌어들이기는 조심스럽고, 당시만 해도 빈자리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막상 산행 일이 가까워지면 일단 산행 계획만 보고 신청했던 등산객이 취소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 몇 개의 빈자리가 나타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번 봉화산은 서울에서 세 개 산악회가 산행 계획을 세웠다. 내가 같이하는 산악회를 포함, 두 개 산악회는 대간 팀이, 나머지 한 산악회의 주제는 철쭉 산행으로 전체 코스는 같으나, 동행하는 산악회는 지지리를 나머지 두 개 산악회는 반대편의 복성이재를 들머리로 하는 산행이다. 말인즉 산행 코스 중간에서 양 팀이 교차해, 익숙한 대간꾼이나 등산객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그리고 이번 코스 들머리인 지지리는 지난 2019년 12월 해발 1,000m가 넘는 산행의 하나로 올랐던 장수 백운산행의 날머리였다[산행기]! 따라서 애초 대간 연결이 목적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백두대간을 연결하는 산행이 됐다. 이런 식의 대간 연결 산행은 2020년 1월 고루포기산행의 날머리[산행기]인 닭목령이 2021년 3월 화란봉 산행의 들머리[산행기]가 된 산행이 기억하는 최초다.
대간꾼들은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주어진 시간보다 빠르면 2시간 늦어도 1시간 전에 도착하나, 그 구간 중에 국립공원 같은 유명한 산이 없는 한 날머리에 식당이 없어 꾼들은 산행 후 주차장에서 라면을 끓인다거나, 삼겹 구울 준비를 해오나, 뭘 모르고 대간 팀 버스에 합승한 등산객은 시간 보내기가 애매하다. 물론 꾼이 아닌 일반 등산객은 그들을 따라잡지 못해 마감 시간을 간신히 맞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흥수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한 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 앞으로 대간 산행 후 삼겹은 지나쳐 보여 라면을 끓여 하산주 한잔할 수 있는 디팩을 들고 다니기로 하고 준비했다. 물론 산행 중에는 버스에 둔다. 그리고 오랜만에 날씨가 좋다고 하고 봉화산 조망이 탁월하다니 좀 무거우나, 줌 렌즈를 준비했다.
2 - 1
아침에 기상해 간편식을 준비하고, 내 옆자리가 아직도 비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패드로 산악회 예약 상황을 확인했다. 그런데 흥수가 없다. 산행 당일이 어버이날이라 가족 행사 때문에 취소했거나, 다른 대간 구간으로 옮긴 거 같다. 버스 옆에서 라면을 끓여도 일행이 있어야지 혼자 처량하게 끓이는 건 식당에서의 혼술과는 달라, 라면이 든 디팩과 빨갱이를 배낭에서 뺐다. 확률은 지극히 낮으나 날머리인 복성이재에 식당이 있기를 비는 수밖에…. 누룽지를 끓여 아침을 먹은 후 준비한 배낭을 둘러메고 불광역까지 걸었다. 6시 전후로 동명탕 정류장에 도착하는 마을버스는 불광역발 6시 6분 지하철에 맞추기가 애매해, 시간에 쫓기며 가슴을 졸이기보다는 집에서 좀 일찍 출발해 불광역까지 걷기로 했기 때문이다.
불광역까지 걸어 다니기로 한 이상 집에서 출발할 대략적인 시각을 알기 위해, 스마트 워치의 운동 측정 모드를 가동해 불광역까지의 거리와 소요 시간을 측정했다. 1.16km에 14분 30초 정도 걸렸다. 5시 50분 이전에 집에서 출발하면 양재행 6시 6분 지하철을 탈 수 있어, 집에서 나오는 시각이 마을버스를 이용할 때보다 더 빨라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불광역까지의 정확한 소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좀 이른 시간에 집을 나와, 6시 6분 지하철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승차장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정각에 도착한 지하철을 타고 등산객의 성지 중 하나인 양재로 향했다. 6시 48분경 양재역에 도착해 배낭을 추스르느라 조금 지체 후, 12번 출구로 나가자 나와 같은 지하철을 이용한 많은 등산객이 산악회 버스가 정차하는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번에 이용하는 산악회 버스가 정차하는 국립외교원 앞에는 각지로 떠나는 대간꾼, 인증꾼, 등산객으로 혼잡해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평소보다는 좀 이른 6시 57분에 Led 표시창에 '대간 47-8'을 표기한 버스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47은 백두대간 종주 팀 번호, 8은 구간이라는 건 알겠는데, 오늘의 목표 봉화산 구간을 달리는 팀인지 알 수가 없어 일단 버스로 가 온도계를 들고 체온을 재고 있는 인솔 대장에게 "봉화산 구간 맞나요?"라고 물었다. "그렇다!"라는 답을 듣고 체온 잰 후 버스에 타, 이미 알고 있었던 3열밖에 없어 넓은 버스의 옆 좌석이 비어 두 좌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애초 3열 버스에 가지고 탈 수 있는 배낭을 이번에 샀으나, 두 좌석을 차지한다면야!
그런데 이미 자리에는 인솔 대장이 놓아둔 이번 산행 지도가 있었다. 지난주 속리산 묘봉산행을 인솔했던 대장이 산악회 방침상 지도를 줄 수 없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미리 배포하고, 고로 프린팅한 지도 제공 여부는 산악회가 아니라 인솔 대장의 성향에 따른 거로 보인다. 사실 내게는 그 지도라는 게 별 의미가 없고, 처리해야 할 고민거리일 뿐이지만! 양재를 떠난 버스는 죽전에서 나머지 대간꾼을 태우고 이번 대간 코스의 들머리인 지지리를 향해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물론 오랜만에 비가 내리지 않는 토요일이라 코로나로 집에 갇혀만 있던 사람들이 몰려나왔는지 고속도로는 정체됐으나 버스전용 차로를 달리는 산악회 버스는 거침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번 산행에 관한 지식이 맞는지 지도를 들어 훑어본 후 원위치하고 패드를 들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죽전에서 나머지 대간꾼을 태우고 달린 버스는 8시 18분경 '옥산휴게소'에서 20분간 휴식했다. 최근에는 이 휴게소만 계속 들리는 듯한데…. 버스에서 내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볼일을 본 후 버스로 돌아오며 앞을 보니 산악회 소속으로 생각되는 버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해서 각 버스로 다가가 소속 산악회와 목적지를 확인하고 버스에 탔다. 20분 휴식 후 다시 들머리인 지지리를 향해 버스가 출발하자 늘 그렇듯이 인솔 대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번 대간 구간의 주의 사항과 코스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책을 보는 와중에 신경을 써서 혹시 내가 모르는 게 있는지 듣고 있다가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구간에는 봉화산 외에는 내세울 만한 산이 없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월경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 있다는 거다. 문제는 그 산의 정상이 대간에서 200여 미터 벗어나 있다는 거와 정상석이 없어, 과거에는 어느 산악회에서 정상 표지를 만들어 나무에 매달아 정상임을 확인했는데 지금은 그 표지마저 없어졌다고.
다시 막힘없는 고속도로를 달린 버스가 목적지인 지지리에 가까워지자 마이크를 잡은 대장이 다시 주의 사항을 얘기한 후 가장 중요한 마감 시각을 공표했다. 10시 20분 들머리인 지지리에 도착 예정이라 애초 계획대로 산행 시간 6시간 이후인 16시 20분에 버스가 출발한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첨언하기를 총 거리가 12.5km이나 6시간이면 충분한 구간이라는 것과 날머리에 아무것도 없으니 참고하는 거였다. 날머리에 아무것도 없는데, 시간은 남아돈다! 이런 골치 아픈 상황에는 최대한 산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흥수가 있었더라면 라면을 끓여 하산주를 마셨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 내에서 등산화를 다시 매며 산행 준비를 마치자 2019년 12월 백운산행의 날머리[산행기]였던 지지리에 예정보다 조금 빠른 10시 17분에 도착했다.
2 - 2
2019년 얼어있던 지지계곡을 지나 산악회 버스가 기다리고 있던 간이 주차장으로 갔다면, 이번에는 물이 넘쳐 건너기가 쉽지 않은 지지계곡을 건너 넓은 공터를 가진 농가? 식당에 도착했다. 앞서가던 등산객이 길이 없어 당황해하는 걸 2019년 기억을 더듬어 산기슭에 있는 화장실 뒤로 길이 있다고 알려주고 먼저 화장실 뒤로 돌아갔다. 역시 기억이 정확해 길이 있었다. 물론 이 길이 백두대간은 아니나, 백두대간 상의 중재로 향하는 길이다. 산악회에서 이런 길을 접속구간이라고 칭하는 거 같은데. 그 길을 따라 15분가량 헉헉대고 올라가니 갑자기 임도가 나타난다. 지난 산행에서 임도는 기억에 없어 잠깐 당황했다.
그 임도를 따라 10여 미터 올라가자 중재다! 국립공원이 아닌 대간 상의 고개 중 두 번 방문한 건 닭목령 이후 두 번째다. 아, 대관령도 있구나! 뭐 어쨌든 대간꾼이 중재 이정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동안 과거 백운산에서 내려왔던 구간을 돌아보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대간 구간을 연결하는 순간이다. 이후 대간을 따라 첫 번째 목적지인 월경산으로 향했다. 인솔 대장이 버스 내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월경산은 대간 상에서는 약 200여 미터 벗어나 있어, 까만 소가 인증하거나 대간꾼이 꼭 방문해야 하는 봉우리도 아니고 조망도 좋지 않으나, 시간상 여유가 있으니 한 번쯤 방문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었다. 부연해서 과거에는 정상에 어느 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정상 표지가 있었으나, 얼마 전 대간꾼의 블로그를 보니 그 표지마저 없어져, 굳이 인증하고자 해도 정상임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이번에 같이 온 등산객 중 많은 수가 지나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나야 시간도 남고, 주 능선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고는 하나 봉화산보다 높은 봉우리를 지나친다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당연히 방문!
중재를 떠나 급경사의 대간을 따라 헉헉대고 40여 분 오르자 갈림길이 나타났다. 정황상 좌는 월경산으로 우는 대간을 따라 광대치로 향하는 거 같으나 정확히 할 필요가 있어 등산 앱의 지도로 확인했다. 예상이 맞았다. 해서 월경산에 갔다 오기 위해 왼쪽 길을 선택하는 순간 서너 명의 등산객이 그쪽에서 나왔다. 돌다리도 두들기라고 그들이 오고 있는 방향이 ‘월경산이 맞습니까?’라고 물어 ‘맞습니다!’는 답을 듣고 그들과 교차해 월경산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나와 같은 산악회라 알고 있었는데, 광대치가 아니라 지나왔던 중재로 향했다. 그걸 본 순간 ‘아니, 복성이재에서 출발한 팀이 벌써 여기까지 왔나?’하고 놀라고 있는데, 뒤에서 따라가던 꾼이 그 길이 아니라 반대로 가야 한다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빠를 수가! 앞만 보고 달리는 대간꾼다운 실수라 생각하며, 월경산 정상을 향해 가는데, 정상에서 한 여성 꾼이 내려오며, 내게 "정상석이 없나요?"하고 묻는다. “버스에서 인솔 대장이 없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자 스스로 한탄하며 지나쳐 갔다.
월경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다양한 대간꾼을 구경하며 11시 26분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널찍한 평지고, 이미 알고 있듯이 정상석이 없어 어디를 정상이라고 꼭 찍어 얘기할 수 없었다. 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삼각점이 있는 곳 옆에 누군가 좀 널찍한 돌을 정상석처럼 세워 놓은 게 보였다. 표면에는 글을 쓴 흔적도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돌 위 나뭇가지에는 각 산악회의 리본이 매달려 있어, 여기가 정상임을 알려주었다. 역시 대장의 말대로 조망도 좋지 않아 저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백운산이 보이나, 가리는 게 많아 사진으로 남길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에 들른 많은 대간꾼이 실망했을 듯! 다시 대간에 합류하기 위해 뒤로 돌아가 월경산 정상으로 올 때 보아둔 갈림길에서 지름길인 왼쪽으로 갔다. 애초 대간 상의 월경산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이라 평소라면 배낭을 벗어두고 갔겠으나, 산세 상 이 길 말고 대간으로 합류하는 다른 길이 있을 거 같아 배낭을 그냥 메고 갔다. 그런데 역시 길 중간에서 대간으로 합류하는 갈림길을 발견하고 정확 예측에 스스로 감탄했었던 그 길이다. 다만, 평소에 등산객이 다니지 않아 주의하여 보지 않으면 길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낙엽 쌓인 길을 따라 50여 미터를 가자, 대간 상에 서 있는 이정표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로 이정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돌아가 봐야 했다. 해서 돌아가 이정표를 확인하고 잠깐 놀랐다. 월경산이다! 월경산이 대간에서 벗어나 있어 인증꾼이 인증을 남기기 불편해 월경산 갈림길 앞에 설치한 이정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월경산이 보호구역이라 접근하지 못하게 여기서 인증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런데 난 그 이정표를 보고 앞선 갈림길에서 대간을 벗어나 두 번째 갈림길로 다시 대간으로 들어와, 처음 갈림길과 두 번째 갈림길 구간은 빼먹었으니, 결과적으로 대간 종주 실패? '하긴 이런 거까지 따지면 정확하게 백두대간 종주한 사람이 누가 있겠냐? 요즘 1대간 9정맥 구간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은 마당에!' 등 이런저런 생각 하며 광대치를 향해 갔다.
능선을 따라 달리는 대간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이번 코스 중 가장 많이 내려가야 해 일면 걱정을 안고 광대치를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좌로 머리에 윤형 철조망을 이고 있는 철책이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이 나타났다. 내가 알기로 윤형 철조망을 칠 정도로 보안을 유지하는 곳은 군사시설밖에 없어, 이 내부에 중요한 군부대가 있는가 보다 생각하며 철조망을 따라가다가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군사 시설이라면 부대장의 경고문이 철망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100여 미터를 지나왔음에도 경고문은 보지 못했다. 그럼 군부대가 아닌데, 어떤 시설이나 중요한 게 있어 군사시설에 버금가는 보안을 유지하는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은 대간을 따라 전진하다 만난 이정표로 해소했다. "약초시범단지" 란다! 아니 뭔 약초를 심었길래 이렇게 살벌하게 지키고 있을까 다시 궁금해졌으나, 이 궁금증은 해결하지 못했다. 추측 상 산삼이 아닐까?
약초시범단지 이정표를 떠나 7분 정도 내려가자 이정표가 보이고 인솔 대장이 이정표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해서 접근해 이정표를 보니 "광대치"다. 그 앞에서 인솔 대장이 폰을 들고 서성거린 이유는 본인이 알고 있는 대간 인증 장소 중 하나인 광대치는 여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리고 내게 본인 폰의 사진을 보여준다. 과거 대간 산행 시 찍었다는 광대치 이정표 사진이다. 확실히 앞에 보이는 이정표와 달랐다. 나야 뭐 광대치가 어디든 상관없으나, 인솔 대장으로서는 까만 소 인증 장소 중 하나라 중요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게 '~치'라면 고개를 의미하는데 고개는 더 내려가야 했다. 해서 인솔 대장에게 고개는 더 내려가야 하니 이게 아니라 아래에 이정표가 또 있을 거 같다고 얘기하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대장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정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했다. 아마 대장은 나를 대간꾼이자, 인증꾼이라 생각했던 거 같다. 해서 인증은 관심 없다고 말해주고 바로 고개로 내려갔다.
고개를 향해 4분가량 내려가자 예상대로 대장의 폰에서 본 사진과 같은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에서 등산객 한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서성이고 있었다기보다는 인증을 찍어줄 카메라맨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내가 도착하자 반가운 얼굴로 폰을 주며 사진을 부탁했다. 흔쾌히 인증을 찍어준 후 이정표 사진 몇 장 찍고 미련 없이 광대치를 떠나 다음 목표인 무명봉(산)을 향해 갔다. 이번 백두대간 중재~복성이재 구간에서 가장 많이 내려갔다가 가장 많이 올라가는 고개가 광대치다. 트랭글 기준 해발 977m에서 해발 832m의 광대치로 145m를 내려간 후 해발 945m의 이름 모를 봉우리로 113m를 올라가야 해 다른 산이나 대간 구간에 비하면 거의 기복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나, 접싯물에 빠져 죽는다고,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봉우리를 향해 헉헉대고 오르며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산에서도 규칙적인 식사를 하기로 한 이상 점심시간이다. 해서 힘들게 오르며 주변을 둘러보니 저 위로 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혼자서 밥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바위가 보였다.
그 바위로 가 배낭을 벗어 두고 점심이 든 디팩을 꺼낸 후 간편식과 김치를 꺼내 영양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물론 길을 등지고 밥을 먹으며 뒤로 등산객이 지나가 때는 고개를 돌려 관찰했다. 밥을 다 먹은 후 사람이 있었다는 모든 흔적을 인멸하고 깡생수를 마시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키가 큰 등산객이 지나가며 인사해, 답례하고 보니 익숙하다. 통성명을 나눈 사이는 아니나, 여기저기 산악회에서 많이 마주쳐 눈인사는 나누는 산꾼이다. 반대편인 복성이재에서 출발한 꾼이 지나가는 순간이다. 지지리에서 출발한 대간 팀이 아직 코스의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반대편에서 출발한 대간팀 중 한 명이 도착한 거다. 식당 기준 남은 시간 4시간, 가야 할 거리 대략 8km가량, 지금까지 왔던 속도로 가면 3시 이전에 도착한다. 해서 일부러 우회로를 피하고 과거에 등산로로 쓰였던 암벽이나 봉우리 길을 선택해 봉화산으로 향했다. 그중 한 바위는 이번 산행 처음 접하는 전망대였다.
뒤로는 내가 궁금해했던 월경산의 모습이 나타났고, 월경산 능선 사이로 2019년 겨울에 올랐던 백운산이 보였다. 전망대를 떠나며 바위를 우회하는 길을 보니 경사가 심한 거 같지도 않은데 잡고 올라올 수 있도록 밧줄이 설치된 걸 알 수 있었다. 전망대를 떠나 봉화산이 가까워지자 철쭉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고 "약초시범단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전망 바위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내가 달려온 백두대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말 아쉬운 게 미세먼지로 시야가 좁아 별로 멀어 보이지 않는 백운산까지 희미하게 보이니, 그 뒤의 덕유산이야 말해 뭐하겠나!
1시 6분 이번 산행 처음 암릉 구간을 만났다. 백두대간에서 암릉은 일반 산에서의 암릉과는 다르다. 물론 모든 암릉 대부분은 좌우가 깎아지른 절벽이고 가리는 게 없는 최고의 조망지나, 대간의 암릉은 아니 대간 자체가 행정상으로는 크면 도의 경계이거나 작으면 시군의 경계고, 날씨도 좌우가 다르고 때에 따라서는 식생도 다르다. 이 모든 걸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암릉 구간이다. 그리고 이 암릉 구간에서 복성이재에서 출발한 산악회 대간 팀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구경하고 바위틈에 아슬아슬하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사진으로 남기며 유유자적 무명봉을 향해 갔다. 가능하면 2.5km/h의 속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2.8km/h 넘어서고 있었다. 그럼 한 시간이나 넘게 시간이 남는 불상사가 생긴다.
앞으로 보이는 무명산(봉)을 향해 나아가 1시 25분에 정상에 이르러 정상에 있는 두 기의 묘에 놀랐다. 상식적으로 부부의 것으로 보이는 두 기의 무덤! 어느 후손이 백두대간의 봉우리에 묘를 썼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무명봉 정상에서 전진하는 방향을 바라보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봉화산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향하는 길목 주위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철쭉 군락이다. 그리고 정상 바로 아래는 갈림길로 "연비지맥 분기점"이다. 연비지맥? 구글링해 찾아보니, 내가 가고자 몇 번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사정이 생겨 오르지 못한 마천 삼봉산, 투구봉으로 이어지는 지맥의 분기점이다. 고로 이 길을 따라 죽 가면 삼봉산이다[연비지맥 소개].
무명봉에서 봉화산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핀 철쭉을 감상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갑자기 인공 구조물이 나타났다. 임도다. 임도 건너가 봉화산이고, 임도에는 정자와 지리산 조망 안내문이 서 있었다. 안내문에 의하면 지리산 주 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데 미세먼지로 희미하게 흔적만 보였다. 아쉬운 순간이다. 임도를 건너 나무 계단을 오르자 앞으로 철탑이 있는 봉우리가 보인다. 봉화산 정상이다. 그리고 주변에 붉은 철쭉 군락이 군데군데 보인다.
계단을 지나 능선에 접어들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많은 사람이 보였다. 철쭉을 즐기는 상춘객이다. 철쭉 터널을 지나 상춘객을 지나 양옆의 철쭉을 즐기며 정상을 향해 가다 갑자기 산 이름에 신경이 쓰였다. 봉화산? 봉화산? 정상에 봉화(烽火)가 있다는 또는 있었다는 거 아닌가? 유명한 봉산 또는 봉화산이 그렇듯이! 그런데 한국의 산하 남원 봉화산 소개에는 봉화(烽火)에 관해 어떠한 얘기도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깔딱인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자 눈앞에 나타나는 봉화대! 역시, 옛사람은 사물에 함부로 이름 붙이지 않는다.
정상에 도착해 봉화대와 정상석을 사진으로 남긴 후, 인증을 찍고 하산하려는 부부로 보이는 등산객에게 부탁해 인증을 남겼다. 그리고 분명 나보다 앞선 등산객 대부분을 추월했는데, 앞에 몇 사람이 있는 걸 보고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미 월경산행 시 예측했듯이 많은 대간꾼이 내가 월경산을 갔다 오는 동안 월경산에 들르지 않고 지나쳐 봉화산으로 직진했다면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정상에서 볼일을 다 보고 매봉을 향해 내려가며 좌우를 둘러보니 우로는 댐이 보이고 좌로는 곳곳이 붉게 물든 철쭉군락이 보였다. 좌로 보이는 댐의 정체가 궁금해 이 글을 쓰며 구글링해보니 "동화댐"이다. 그리고 정면에는 철탑이 보이는 봉우리와 고개에는 정자가 보인다. 철탑이 있는 봉우리는 매봉일거고... 정자는? 그리고 진정한 철쭉군락은 봉화산 정상과 매봉에 이르는 능선이라는 알게 되었다.
정상에서 내려와 정자로 접근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걸 발견했다. 일단 그 눈에 번쩍 뜨이는 걸 지나쳐 상춘객이나 등산객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쉼터에 서 있는 비석이 궁금해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 "봉수왕국 전북가야", 이건 또 뭐야? 전북가야? 해서 또 구글링해봤다. 내용은 신문 기사로…[기사]. 봉수왕국 어쩌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게 중요한 거라 다시 정자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옛날 추억에 아이스케기"라고 쓴 통을 들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막걸리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네!" 하더니 상자의 뚜껑을 열고 막걸리 하나를 꺼낸다. 한 병에 7,000원. 거스름돈 3,000원을 돌려받는 순간 대단한 횡재를 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올해 산행 중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수도권 산에서 막걸리를 파는 장사꾼은 안주로 멸치나, 마늘종을 고추장에 찍어 먹을 수 있게 제공하는데 따로 제공하는 안주가 없었다.
안주가 중요한 게 아니다. 늘 들고 다니나, 산에서 꺼내 먹은 적이 거의 없는 오렌지가 디팩에 있다는 게 기억났다. 해서 쉼터의 의자에 앉아 배낭을 열고 디팩을 꺼내는 순간 점심때 반찬으로 먹었던 김치가 남았다는 게 떠올랐다. 막걸리에 오렌지는 그림이 아니나, 김치는 금상첨화라 김치를 꺼내 막걸리를 마시려는 순간 강한 바람에 막걸리와 김치통이 날아가려는 걸 두 손으로 간신히 잡았다. 꼬부랑재를 넘는 강한 바람 속에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실 상황이 아니어서, 어디 바람 피할 곳이 있나 둘러봤다. 뻥뚫린 정자는 바람을 막기에 문제가 많아 보여, 더 둘러보니 "봉수왕국전북가야"라고 쓴 비석 뒤나, 별도의 다리 없이 통짜로 바닥에 설치된 "국가산림문화자산" 입간판 뒤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해서 의자에서 가까운 입간판 뒤에 주저앉아 김치를 안주로 막걸리 한 병을 비웠다.
무등산 생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기분 좋은 상태로 이번 산행 마지막 봉우리인 매봉을 향해 철쭉 군락 사이로 설치된 나무 계단을 따라 올랐다. 3시 5분 매봉 정상에 도착해 정상석과 봉화산 소개 글을 사진으로 남기고 700m 아래에 있는 산악회 버스기 기다리는 복성이재를 향해 내려갔다. 그런데 이정표가 알려주는 봉화산까지의 거리는 정상석이 있는 봉화산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래 꼬부랑재에 있는 이정표에는 봉화산까지의 거리가 3km, 여기 매봉 정상에 있는 이정표에는 3.3km! 두 이정표 다 봉화산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가 아니라 그 봉우리를 지나 무명봉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산행 중 등산 앱이 무명봉이라고 음성으로 알려주는 거야 당연했으나, 무명봉에서 몇 미터 더 전진하자 갑자기 같은 앱이 봉화산이라고 음성으로 알려줄 당시에는 앱의 오류라고 치부하고 말았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등산 앱은 잘못이 없다는 거다. 모든 이정표가 그 위치를 봉화산이라고 알려주고 있고, 같은 위치에 봉화대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애초 현재 무명봉으로 불리는 봉우리 일대가 봉화산이었으나, 후에 그보다 높은 현재의 위치에 정상석을 세우고 봉화산이라 칭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게 내 추측이다.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대간 능선을 따라 내려가 3시 18분에 도로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복성이재다! 정확하게 복성이재에 도착한 시각은 3시 19분으로 이번 봉화산 상춘 산행이자, 백두대간 중재~복성이재 구간 산행이 끝난 시각이다. 대간을 이어 달릴 생각이라면 길 건너 사치재로 향하면 된다. 재에 도착해 산악회 버스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좌우에 주차한 자가용 행렬은 보이나, 정작 버스는 보이지 않아 날머리가 여기가 아닌가 하고 잠깐 고민한 후 여기가 틀림없음을 굳게 믿으며 도로를 따라 내려가며 버스를 찾으니, 저 밑으로 산악회의 붉은 버스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버스로 다가가 신발을 벗고 고압 공기로 신발과 발에 묻은 이물질을 털어낸 후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내 자리로 가 배낭을 빈자리에 두고 슬리퍼로 갈아신고 버스에서 나와 복성이재 주변을 탐험했다.
3
한 십여 분 복성이재 주변을 돌아다니며 과거 대간 길 등 이것저것 확인하니, 더 볼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어, 차라리 책이나 보자는 생각에 버스로 돌아가기로 하고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고개에서 내려와 버스가 가까워지자 과거 도로의 그늘진 곳에 일렬로 주저앉아 쉬고 있는 산꾼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주 편해 보이는 모습이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해서 나도 버스에서 책 읽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열의 한쪽을 차지하고 주저앉았다. 앉고 나서 앞뒤 꾼들의 모습을 보니 거의 맨발에 슬리퍼다. 당연히 대간에 계곡이 있을 리 없어 산행 후 씻지도 않은 사람들이 슬리퍼에 맨발! 해서 나도 양말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원초의 발을 드러냈다.
산악회와 같이 움직이는 장점 중 하나가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신을 벗는 거다. 양말을 벗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어차피 같은 입장이라 서로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거. 그런데 맨발을 내놓아 바람에 발을 식히고 있으나,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바람에 날리는 꽃과 풀을 줌으로 당겨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으며 노닥거렸다. 그 시각이 대략 3시 45분경으로 공식적인 마감 시각인 4시 20분까지는 아직 35분이 넘게 남았다. 마침 그 시점에 인솔 대장이 인원 점검을 했다. 당시 대부분 꾼이 다 도착했는데 왜, 출발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인원 점검 결과 애칭을 "산미녀"를 사용하는 여성꾼을 제외하고는 다 도착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성산꾼은 체력이 부족하거나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번 코스가 평이하고 주어진 시간이 길어, 남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인솔 대장에게 대간을 벗어난 봉우리 하나를 더 다녀오겠다며 갔다는 거다. 마감 시각이 아직 남은 마당에 누구를 뭐라고 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대장으로부터 사정 얘기를 듣자 다들 버스에 타 조용히 산미녀가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난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배낭을 뒤져 충전이 필요한 모든 전자 장비를 꺼내 버스 각 자리에 있는 전기 콘서트를 이용해 다음 산행을 위해 충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책도 보며…. 역시 미녀는 다른 등산객이 실망하지 않게 본인이 원하는 모든 산행을 마치고 마감 10분 전에 버스에 도착했다. 덕분에 산악회 버스는 공식 마감보다 10분 정도 이른 4시 10분경 복성이재를 떠나 서울로 출발했다. 출발 시각을 10분이나 단축해준 산미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복성이재를 출발한 버스는 5시 55분경 죽암휴게소에서 10분간 휴식을 취했다. 버스에서 내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볼일을 본 후 편의점으로 달려가 식혜를 사서 마신 후 맨발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유유자적 버스로 돌아가고 있는데, 편의점 쪽에서 한 남성꾼이 박카스로 보이는 음료 2박스를 들고 급하게 버스 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대개 전체 인원과 뭔가를 나누는 경우는 자축할 일이 있다는 건데, 이번 산행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끝낸 게 아닐까?! 버스로 돌아가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인솔 대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 꾼이 사 온 건 '박카스'가 아니라 '비타500'이고 사 온 이유는 본인의 애칭이 "산미남"인데, 이번 산행에서 "산미녀"를 만난 걸 축하하는 의미로 음료를 돌린다고 했다. 부연하자면 산미남이 10년 가까이 산악회와 같이 산을 다녔으나, 본인과 비슷한 애칭을 사용하는 산꾼은 처음 만났다고!
산행을 신청하기 위해 사이트에서 좌석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게 빈자리와 신청한 산꾼의 닉네임을 확인하는 건데 그때 이미 나에 앞서 신청한 '산미남'과 '산미녀'를 보고 비록 자리는 앞뒤로 떨어져 있었으나, 당연히 부부 아니면 연인이라고 여겼는데, 초면이라니! 어쨌든 축하할 일이다! 죽암을 출발한 버스는 7시 31분 양재 마을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국립외교원 앞을 떠나 마을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거로 이번 남원 봉화산행을 마치는 순간이다!
처음 계획인 복성이재를 들머리로 한 봉화산 상춘 산행과는 달린 산악회 대간 팀 계획에 따라 "지지리(지지계곡) → 중재/치 → 월경산 갈림길 → 월경산 → 월경산 이정표 → 광대치 → 무명봉(산) → 봉화산 → 꼬부랑재 → 매봉 → 복성이재"의 13.77km(트랭글 기준), 5시간 4분의 대간 산행 겸 봉화산 상춘 산행을 즐겼다. 이동 4시간 49분, 휴식 15분!
미세먼지로 시야가 좋지 않아 덕유와 지리를 보지 못한 게 아쉬웠으나, 미세먼지 사이로 지리 주 능선을 볼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철쭉군락은 기대 이상으로 좋아, 한 번쯤 상춘 산행을 권한다.
이렇게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백두대간을 종주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산행이었다. 물론 전 구간을 연결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고, 구간의 주요 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