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당에서 뭉크(Edvard Munch 1863-1944)전 관람
이제는 제법 절친이된 마루님과 둘이한 언푸 전시번개.
한마디로 재밌었다.
뭉크의 딥한 염세주의에 영향 받지않고
마냥 재밌었던 이유를 굳이 분석해보면
삶과 죽음과 사랑을 대하는 정서가 나랑은 너~~무 달라서
어머 뭉크는 그렇구나, 구경하고 왔나 싶기도.
그림 진짜 잘 그린다.
뭉크가 있었기에 표현주의가 있었고
표현주의가 있었기에 뭉크가 있지 않았을까.
간결한 구도로 감정을 표현해내고
그림 한장으로 휘리릭 문학적 상상력을 끌어낸다.
평생 수 많은 자화상, 백개 정도?로 자신을 표현했다.
전시에 온 하이틴, 30대 초반, 70대 후반 자화상.
앳된 얼굴
물론 해맑진 않다.
키도 크고 잘 생긴 뭉크.
신경질적인 새촘한 표정
얼굴의 반을 덮은 그늘로 어두운 내면을 암시하는듯.
언뜻 단정해 보이는데 밑부분의 느닷 없는 팔뼈때문에 눈여겨 보게된다.
검은 배경에 창백한 얼굴, 신부복을 연상시키는 의상, 윗부분에 묘비명 같이 이름을 새겨 넣고.
팍팍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그림이었음.
그래놓고 팔십 넘어까지 살고,
자다가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니
아이러니하다.
평생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뭉크였기에.
원색의 밝은 색상, 삐죽한 선들이 다리파 화가 키르히너 그림 같이, 음 뭐랄까 대충 그린듯
황폐한 노년의 모습을 그려냈다.
나는 자꾸만 흘러내린다.
손가락 사이에서
흐르는 모래알처럼
그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르게 목말라있다.
...
혼자 있었으면 한다.
맥박이 터질만큼
불안해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릴케
저 뒤의 남녀 한 쌍
청년이 우울한 이유일까.
뭉크의 그림에 의미 없는 부분은 하나도 없으니.
파리 생클루 거리에서 살던 시절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렸다는.
잘못된 종교적 신념으로 자녀들을 학대하던 아버지였다해도
뭉크에게 찾아온 또 한번의 죽음.
보라가 섞인 푸른색이 어둡고 탁하다.
창밖으로 세느강이 흐르고
흐릿한 달빛, 어둠속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중절모의 남자.
쓸쓸하면서도 로맨틱한.
생클루의 밤을 보면 생각나는 뭉크의 별밤.
이런 풍의 뭉크 그림은 가슴이 뭉글뭉글해진다.
혹시나 했는데 이번 전시에 오지 않았다.ㅜ
허무주의 한스 예거의 영향으로 가뜩이나 혼란스런 정신세계가 뒤엉킨 시기.
무표정을 넘어 패닉에 가까운 사람들의 표정이
거의 희극적이다.
뭉크에게 대중은 저런 느낌이었으려나.
섞이지 못하고 오른쪽에 홀로 뒤돌아 서 있는 남자는 뭉크겠지.
뭉크는 같은 그림을 끊임없이 반복해 그렸다.
그것도 집착하는 병의 일종이었을지도.
'말해무엇' 유명한 그림 절규도 여러 버전이 있어서
이번에 온건 채색판화.
유화에 비해서 쫌 귀엽다.
유화로도 여러개 그려서
저 뒤의 두 친구 중 하나가 난간에 기댄 버전도 있는데
작은 차이지만 나는 오리지널보다 그 버전에서 절규의 느낌을 더 받는다.
물론 비싼 유화는 전시에 오지 않았고.
실제로는 사진보다 부드러운 푸른색이 몽환적인
몇번이고 다시 돌아가 붙들려 서 있던 작은 그림.
인어 신화의 두 가지 버전, 안델센의 인어공주와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 중에서
뭉크의 인어는 두말할것 없이 세이렌 쪽이다.
그 쪽이 뭉크의 여성관이기도 하고.
멀리 인어의 자매들이 뱃사람들을 홀리고 있어
스토리를 완결시키는 나의 원픽이다.
클림트의 키스는 1907년 작.
뭉크가 더 앞선다.
클림트쪽이 우아하고 쾌락적이라면
뭉크의 키스는 불안하고 격정적.
위험한 사랑을 나누는 티가 난다.
얼굴 형체도 없는 여자가 잡아먹는 듯한.
보자마자 헉! 하게 되는 섬뜩한 그림
피를 빨기도하고 머리카락으로 목을 조르기도 하고
뭉크의 여자는 기본적으로 팜므파탈이다.
자신을 해치는 여자만 만나놓고 어쩌라구.
헉! 하게 되는 그림 많다.
숨은그림처럼 머리카락 아래에 남자의 얼굴이 있다.
오래 보기 무섭다.
절묘한 구도와 표현력이 감탄스러워
눈가리고 보게 된다.
바이올리니스트 에바 무도치와는 깊은 관계는 아니었나보다.
눈이 아름다웠던 그녀라더니, 드물게 눈을 제대로 그렸다.
커다란 브로치는 뭉크가 사준 듯 하고
풍성한 머리결.
여성의 머리카락은 뭉크에게 성적 심볼이었음이 분명하다.
거의 유일하게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은 이 그림을 원픽으로 꼽기엔
뭉크의 미학을 거스르는 셈이라 삼가하기로 하고.
이 작품의 모델인듯 하여
실물이 궁금해서 찾아봤다.
그림과는 또 다른 신비감.
바다를 향한 여자 한발짝 뒤에서 여자를 보고 있는 남자.
남자의 첫사랑은 엄마가 아닐까.
엄마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뭉크에게
25살 연상의 첫사랑 밀리는 여신이었나보다.
유화버전을 직접 보진 못했다.
둘 다 신화처럼 신비롭다.
굿즈코너에서 판화버전 마그네틱을 만지작거리다 놓고 왔는데
계속 생각난다는.
뭉크의 두번째 연인 -연인이라기엔 짝사랑?-
역시 유부녀였던 다그니를 모델로 했다는 듯.
기가막힌 작품이건만
나로서는 오래 마주하기 힘들다.
뭉크가 끊임없이 그린 세 여성상. 성녀, 창녀, 죽음이 한 여자에 녹아있다.
그나마 이 버전은 레드가 아닌 블루 톤이고
테두리에 정자, 태아가 없는거라 덜 괴롭다.
한마디씩 다루고 싶은 작품들이 즐비하지만 급 마무리.
후기를 쓰다가 뭉크의 여인들처럼 눈이 퀭해졌다.
한 작가의 작품이 지겨울 새 없이 다양한 것이 놀랍고
그러면서 하나하나 다 뭉크 그 자체였다.
강! 추!
첫댓글 전시회를 한번 더 본 듯한 디테일이 있네요.
역쉬..알마님!^^
요것도 잼있는 그림
뭉크식 사랑이란..
서로 굴복하는 순간 남녀의 융합은 그들의 정체성과 개성으로 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라고 해석에 써 있었지만..뭉크의 일방적인 판정패라는 느낌을 심하게 받았다는 거..^^
뭉크식 사랑은 자신이 해체 되는거라 했던가요? 뭔가 그럴듯했는데 까묵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