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를 보면 생각나는 때가 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로 추석을 전후로 열리는 운동회다.
모든 학년을 청군ㆍ백군 양팀으로 나누어 달리기와 무용 및 짝체조,차전놀이, 줄다리기 등 여러 행사를 하는데, 때묻지 않은 어린이임에도 승부욕은 어른 못지 않았다.
이겨봤자 진팀에게서 박수를 받으며 만세를 하는 게 승리의 대가인데 말이다.
초가을이지만 햇살은 따가워 그늘이 필요했는데 그 때 차양 역할을 한 나무는 은사시나무와 플라타너스로,
특히 잎이 크고 무성한 플라타너스가 그늘을 만들어주는데는 최고였다.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양팀은 열열한 응원을 했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응원단장이
"삼삼칠 박자 준비" 하면
"야~~~." 하면서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짝 짝짝짝 박수를 치면 응원단장은 이 박자에 맞추어 몸동작을 했다.그리고는 모두 손을 상대편을 향해
" 우~~~. 야~~" 했다.
그의 현란한 몸동작과 함께 흥원은 절로 났고 게임에 지면 지는 대로 이기면 더 좋고.
지금의 초등고등학교를 보라.
학생들이 맘놓고 뛰며 놀 수 있는 넓은 운동장이 있는가를. 대지의 공간만 있으면 건물을 짓는 지금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다. 가을이면 학교 운동장에서 울려퍼지던 즐거운 함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실내공간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기 바쁘고, 학원 공부 및 과제에 치여 휴식을 즐길 시간은 없으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ㆍ가상공간에 몰입ㆍ중독 등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학생이든 어른이든 공부나 일만할 수 없다. 때로는 적당한 휴식이 필요한 게 사람이다.
다음은 80~90년대 귝어책에 실렸던
김현승 시인의 <플라타너스>이다. 지금은 플라타너스를 대체한 다양한 수종으로 가로수를 식재했지만 오래 전에는 이 나무와 은행나무였다. 어느 곳에서나 잘 자라는 플라타너스.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친 채 항상 제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는 플라타너스. 이런 넉넉한 자태에서 삶의 기쁨과 함께 살아갈 동반자의 모습을 발견한 시인은 플라타너스를 소재로 하여 자신의 고독한 삶의 행로를 함께 걸어갈 동반자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시 전문을 그대로 옮겨적는다.
꿈을 아느냐 내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플라타너스(버즘나무)의 꽃말은 용서ㆍ천재ㆍ휴식이다.
● 은행나무의 꽃말은 장수다.
●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다.
ㅡ참고ㅡ
■ 인터넷 다음 ' 김현승의 플라타너스'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