巴山先生逸稿/ 삼가 한글로 글을 옮기며
사람이 이 세상(世上)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 가족(家族)이란 공동사회(共同社會)가 있어서 보호(保護)를 받는다. 또 의식주(衣食住)의 가정(家庭) 문화(文化)에서도 개인(個人)이 겪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애(生涯)를 겪으며 조상(祖上)의 글을 내 손으로 옮긴 것이 오늘날이다.
나는 유학(儒學)의 집안에서 오남매(五男妹)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어린 자식(子息) 오남매(五男妹)의 호구지책(糊口之策)에 골몰(汨沒)했다.
그런데 나만이 초등학교(初等學校)의 교육(敎育)을 받았었다. 일본(日本)의 식민지(植民地) 교육(敎育)이었다. 그리하여 6년의 교육과정(敎育課程)이 일본어(日本語)로써 쓰이었다. 졸업(卒業) 이듬해에 일본이 전쟁(戰爭)에서 패망(敗亡)하자 서기1945년 8월 15일 우리의 땅은 해방(解放)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이 건국(建國)되면서 학교(學校)의 교육과정(敎育課程)이 ‘한글’로 바뀌었다.
어릴 때 어머니는 나에게 언문(諺文)으로 가르쳤다. 그 뿌리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요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생활에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先祖)들의 문적(文籍)은 한문(漢文)으로 발간(發刊)되었다. 한글세대(世代)는 읽는 것은 음독(音讀)으로 해석(解釋)은 구문(構文)으로 한문(漢文)을 익혀야했다.
서기1973년 교직(敎職)에서 중등교육(中等敎育)의 한문(漢文) 자격증(資格證)을 받았다. 그 때부터 한문사전(漢文辭典)을 끼고 살았다. 한자(漢字)는 육서법(六書法)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한 글자에 기본(基本)으로 음(音)과 뜻<意>이 있으나 활용(活用)하면 문장(文章)에 따라 음과 뜻이 바뀔 수 있다. 또 글자가 사전(辭典)에 많이 실린 것은 인류문화(人類文化)가 발달(發達)하는 것에 활용(活用)하기 위하여 선각자(先覺者)들이 미리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문의 해석(解釋)에는 실사(實辭)와 허사(虛辭)가 있는데 실사(實辭)는 실질형태소(實質形態素)라 하여 구체적(具體的)인 대상(對象)이나 동작(動作) 또는 상태(狀態)를 나타내는 가장 작은 단위의 말이다. 곧, 체언(體言), 수식언(修飾言), 독립언(獨立言) 등이 이에 따른다. 허사(虛辭)는 홀로는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말이다. 곧 문법적(文法的)인 기능(機能)을 가진다. 어미(語尾) 조사(助詞)가 이에 따른다.
회고(回顧)하건대 종형(從兄․吉榮)이 권오근(權五根) 선배(先輩)에게 파산선생일고(巴山先生逸稿)와 파산선조추모록(巴山先祖追慕錄)의 국역(國譯)을 의뢰(依賴)하고 서기1977년에 출간(出刊)하였다.
나는 책을 받아 앞에 놓고 두 번 절을 하였다. 그리고 소장(所藏)하였다. 일상(日常)으로 조금씩 읽어서 내용(內容)을 살폈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수많은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가면 사라지는데 우리 선조(先祖)는 사람의 정신문화(精神文化)를 통해서 부활(復活)한 것이다. 그것은 유학(儒學)을 숭상(崇尙)하고 충효사상(忠孝思想)을 길러낸 것에서 근거(根據)한다. 따라서 파산선조(巴山先祖)의 내력(來歷)을 살핀다.
휘(諱)는 중엄(仲淹), 자(字)는 경문(景文)·희범(希范), 호(號)는 파산(巴山), 성(姓)은 류(柳), 본향(本鄕)은 풍산(豐山)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공석(公奭),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나 출계(出系)하였다. 숙부(叔父)의 휘(諱) 공계(公季)의 뒤를 이었다. 출계(出系)와 후사(後嗣)는 가계(家系)에서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자라면서 생부(生父)로부터 유학(儒學)의 경서(經書)에 이르기까지 공부(工夫)하였고 약관(弱冠)에 도산서당(陶山書堂)에 들어가 퇴계 이 선생(退溪李先生)으로부터 주자서(朱子書)의 강의(講義)를 받았다. 그 뒤 사문(師門)의 교유(交遊)와 도학(道學)의 심오(深奧)한 탐구(探究)로 이어졌다. 그러나 34세를 일기(一期)로 서기1571년에 세상(世上)을 떠났다. 유족(遺族)으로 배위(配位) 영천 이씨(永川李氏)와 아들 삼형제(三兄弟)를 두었으나 가난과 왜란(倭亂)을 겪으면서 자손(子孫)들이 명맥(命脈)만을 이어갔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서기1834년 갑오(甲午·조선순조 34년) 가을에 서애집(西厓集) 중간(重刊)에 이어 파산선생일고(巴山先生逸稿)를 출간(出刊)하게 되었다. 이는 주손(冑孫) 희춘(羲春)에 이르기까지 세거지(世居地)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가능(可能)하였다.
그런데 본손(本孫)들은 유문(遺文)을 보존(保存)하지 못했다. 그 때 종친(宗親)들이 뜻을 모아 자료(資料)의 수집(蒐集)에 나섰다. 도산(陶山)을 중심(中心)으로 퇴계 이 선생(退溪李先生)을 비롯하여 교유(交遊)했던 벗들의 유문(遺文)에서 얻을 수 있었다. 몇 편 안되는 적은 분량(分量)으로 책은 단권(單卷)이었다. 어느 것에 견주어도 부러워할 것이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책이 보급(普及)되자 추모(追慕)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론(輿論)이 갈수록 높아지자 사림(士林)의 주선(周旋)으로 타양(陁陽)과 분강(汾江) 두 서원(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서기1864년(조선 고종 1년) 대원군(大院君)이 섭정(攝政)하자 서원(書院)이 철폐(撤廢)되었다. 그 뒤 나라에는 사표(師表)가 될 47개의 서원(書院)만을 남겼다. 사람의 생명(生命)이 세상(世上)에 태어났다 살다가 죽는데 죽은 영혼(靈魂)도 반복(反復)하고 있다. 선생(先生)의 호칭(呼稱)으로 추모(追慕)하였는데 어느 하늘 아래에서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다렸다.
이제 우리 집을 살펴보자. 주손(冑孫) 영목(領睦)에 와서 몰락(沒落)하였다. 나이 30세에 세상(世上)을 떠났다. 열다섯 살에 시집을 온 문소 김씨(聞韶金氏)는 이듬해에 남편(男便)을 잃고 혼자 남았다. 살던 집을 종친(宗親)에게 주고 하회(河回) 마을을 떠나 가까운 멸골 마을로 옮겼다. 그러면서 종통(宗統)을 세울 후사(後嗣)를 기다렸다. 선조(先祖)로부터 300여년이 흘렀으나 후손(後孫)들은 손꼽아 헤아릴 만큼 수(數)가 적었다. 후사(後嗣)로 선택(選擇)될 사람은 항렬(行列)과 나이에 맞추었다. 세 차례의 문회(門會)를 가진 끝에 나의 숙부(叔父)를 지목(指目)하였다. 할아버지는 ‘저우리 마을’에 종택(宗宅)을 세우고 문소 김씨(聞韶金氏)를 모셨다.
서기1900년 아들의 생일날에 만 여섯 살의 도흥(道興)을 출계(出系)시켰다. 그리고 성장(成長)할 때까지 학문(學問)을 가르치며 봉제사(奉祭祀)를 살폈다.
서기1910년 조선(朝鮮)의 나라가 끝났다. 일본군(日本軍)의 진주(進駐)로 침략(侵略)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民族)은 식민지 지배(植民地支配)를 받게 되었다. 또 일본군(日本軍)은 대륙(大陸)의 침략(侵略)으로 이어졌다.
서기1919년 우리 민족(民族)은 3월 1일 일제(日帝)에 항거(抗拒)하고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외쳤다. 이어 중국(中國)으로 망명(亡命),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였다.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의 항거(抗拒)는 도처(到處)에서 일어났다. 서기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는 일제(日帝)에 항거(抗拒)하는 운동(運動)이 학생(學生)들에서 일어났다.
우리 집안은 시골에 살면서 가난 속에 지냈다. 신학문(新學問)을 배운 이가 없었다. 오직 농사(農事)에 매달렸어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다. 유학(儒學)의 가정(家庭)들은 더욱 그렇게 지냈다. 할아버지는 조상(祖上)의 봉제사(奉祭祀)에 성의(誠意)를 가져야 자손(子孫)들이 복(福)을 받는다고 믿었다. 문중(門中)을 설득(說得)하여 농사(農事)를 지으면 절미(節米)를 하여 이재(理財)로 비축(備蓄)하자고 하였다. 10년의 세월(歲月)이 흘렀다. 문회(門會)를 열고 합의(合意)를 하였다. 그리하여 서기1935년에 파산정(巴山亭)을 양지(陽地) 바른 낙동강변(洛東江邊) 언덕에 건립(建立)하였다.
서기1939년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이 일어났다. 일본(日本)은 독일(獨逸)·이태리(伊太利)와 동맹(同盟)을 맺고 서기1941년 12월 7일 미국(美國)과 영국(英國)의 연합군(聯合軍)을 상대(相對)하여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켰다.
그 때 내가 겪은 것과 농촌(農村)의 실정(實情)을 돌이켜본다.
서기1942년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징병(徵兵)과 징용(徵用)으로 청장년(靑壯年)이 징발(徵發)되고 초등학생들이 농사(農事)에 동원(動員)되었다. 오전(午前)에는 수업하고 오후(午後)에는 논밭에 가서 일했다. 농사(農事)를 지으면 공출(供出)하였고, 밥그릇이 놋쇠로 된 것은 모조리 거두어 갔다. 식량(食糧)은 콩비지를 주었는데 비를 맞고 썩고 곰팡이가 생긴 것도 있었다. 그것으로 연명(延命)하였다.
서기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해방(解放)이 되었다. 우리 민족(民族)이 처음에는 기쁘다고 거리에 춤을 추고 다니더니 시간(時間)이 지날수록 마을 안에서 이데올로기(Ideologie)로 다투며 이웃끼리 원수(怨讐)가 되었다. 땅은 38도선이 그어지고 남북(南北)에 각각 나라가 세워졌다. 남쪽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다. 빈 그릇을 두들기면 요란하게 소리가 나듯이 가난은 계속되는데 싸움은 점점 커져갔다. 나라에는 큰 인물(人物)들이 암살(暗殺)을, 지방(地方)에는 폭동(暴動)이 일어났다. 이제 나도 약관(弱冠)이다.
서기1950년 6월 25일 북의 남침(南侵)으로 피란(避亂)하였다. 민족(民族)의 대이동(大移動)이었다. 국군(國軍)이 후퇴(後退)하여 대구(大邱)와 부산(釜山)을 잇는 낙동강(洛東江)에서 대적(對敵)하고 있을 때 9월이었다. UN군(軍)의 공격(攻擊)으로 적군(敵軍)이 물러나며 압록강까지 밀리자 서기1951년 1월 4일 적군(敵軍)을 지원(支援)하는 중공군(中共軍)이 개입(介入)하였다. 한반도(韓半島)의 전황(戰況)은 승부(勝負)없는 전쟁(戰爭)으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하다가 서기1953년 7월 27일 10시에 휴전(休戰)이 되었다.
시골집에서 주손(冑孫·吉榮) 혼자 부산(釜山)으로 피신(避身)한 것은 서기1951년 1월 4일 직후(直後)이다. 그 해 마침 부산 임시정부에서 한의사 시험이 있었다. 국가고시(國家考試)에 합격(合格)하여 한의사(漢醫師)가 되었다. 정부(政府)에서는 전시(戰時) 국민(國民) 보건(保健)에 시급(時急)한 것이었다. 의료인(醫療人)으로서 지방으로 갔다 김제(金堤)·대전(大田)·서울에까지 옮겨 다녔다.
서기1960년 종형은 선조(先祖)의 추모(追慕)를 위하여 계획(計劃)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서기1960년은 민주국가(民主國家)의 체제(體制)가 흔들렸다. 3월 15일 대통령·부통령의 부정선거(不正選擧), 4월 19일 학생의 의거(義擧)로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사회단체(社會團體)들이 거리에 나와 자기네 주장(主張)을 내세우고 연이어 데모(Demo)가 일어나자 서기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軍事革命)이 일어나 제3공화국이 들어섰다. 나라가 쓸 재정(財政)이 어렵게 되고 국민 생활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서독(西獨)에 간호원으로, 탄광으로 인력(人力)을 내 보냈다.
어렵게 지내는 동안에도 시골에서는 종택(宗宅) 안에 사우(祠宇)를 짓고 성균관(成均館)을 비롯하여 유림(儒林)에 통문(通文)을 보내고 회신(回信)을 받았다.
서기1963년 4월 11일 의례(儀禮)의 절차(節次)에 따라서 부조지위(不祧之位)의 고유(告由)를 하였다. 유림(儒林)의 협조(協調)로 대성황(大盛況) 속에 추원보본(追遠報本)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 가문(家門)의 문적(文籍)이 있어서 가정문화(家庭文化)를 살필 수 있었다. 내가 읽고 옮긴 파산선생일고(巴山先生逸稿)는 사형(舍兄·光榮)으로부터 받았다. 서기1834년에 간행(刊行)된 것이다. 그리고 파산선조추모록(巴山先祖追慕錄)은 필사본(筆寫本)으로 서기1972년에 종형(從兄·吉榮)의 회갑(回甲) 때를 맞추어 간행(刊行)된 것이다.
오늘날 ‘파산선생일고 및 추모록’에 대하여 한글 세대가 볼 수 있게 한글로 옮겨 줄 것을 요구받고 또 자여질(子與姪) 및 종손(從孫)의 힘을 입었다. 또한 책의 발간(發刊)에 재정적(財政的) 지원(支援)을 받아 고맙게 생각한다.
앞으로 서기1977년에 국역(國譯)한 것과 함께 후학(後學)들이 읽을 기회(機會)를 기다리며 붓을 내린다.
서기2016년 4월 20일
부곡서재(富谷書齋)에서
후손(後孫) 계영(啓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