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산 수타사 (孔雀山 壽陀寺)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月精寺)의 말사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영귀미면 수타사로 473 / 영귀미면 덕치리 9
수타사 가는길, 초여름의 싱그러운 숲속 가장 먼저 만나는 수타사 부도전
공작산 수타사 천왕문
708년(성덕왕 7)에 창건되어 우적산(牛跡山) 일월사(日月寺)라 하였으며 영서지방의 명찰로 손꼽혀 오다가
1568년(선조 2)에 현위치로 이건(移建)하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린 뒤 1636년(인조 14)에 공잠(工岑)이 중건하였고,
1644년에 학준(學俊)이 당우(堂宇)를 확장하였다. 1647년에는 계철(戒哲)과 승가(僧伽)가 승당(僧堂)을 새로
건립하였고, 1650년(효종 1)에는 도전(道佺)이 정문(正門)을 세웠으며, 1658년에는 승해(勝海)와
정명(正明)이 흥회루(興懷樓)를 세웠다.
1670년(현종 11)에는 정지(正持)와 정상(正尙)과 천읍(天揖)이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1674년에는 여담(汝湛) 등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다.
그 뒤에도 여민(汝敏)·지해(智海)·지행(智行)·성민(性敏)·찬징(贊澄)·선찰(善察)·성념(省念)·찬원(贊源)·
상흘(尙吃) 등이 1683년(숙종 9)까지 계속하여 청련당(靑蓮堂)·향적전(香積殿)·백련당(白蓮堂)·
송월당(送月堂) 등의 당우들을 차례로 중건하여 옛모습을 재현하였다.
현재의 이름으로 바꾼 것은 1811년(순조 11)이다. 그 뒤에도 1861년(철종 12)에 윤치(潤治)가 중수하였고,
1878년(고종 15)에는 동선당(東禪堂)을 중건하고 칠성각(七星閣)을 신축하였다. 1976년 심우산방을 중수하였고,
1977년에는 삼성각을 지었으며, 1992년에는 관음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흥회루와 봉황문(鳳凰門, 또는 天王門)이 앞에 있으며,
좌측에 심우산방(尋牛山房, 또는 東別堂)이 있고 좌측에는 요사채가 배열되어 있다.
또한, 뒷편에는 삼성각(三聖閣)과 성황당이 있는데, 성황당이 있는 것은 특이하다.
이 중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1497년 공잠이 이건, 중창한 것이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도 보물 제745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 제17권과
제18권이 보존되어 있고, 기단부와 옥개석만이 남아 있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된 고려 말기의 3층석탑이 있다.
또한, 이 절을 거쳐간 고승 중 청송당(靑松堂)·기허당(騎虛堂)·서곡(瑞谷)·유화당(遊華堂)·중봉당(中峯堂)·
홍파(洪波)·홍우당(紅藕堂) 등의 부도가 있으며, 사리탑비(舍利塔碑)는 서곡의 것만 남아 있다.
총 2,999평의 대지에 171평의 건물을 갖춘 이 절은 풍수로 볼 때 공작포란지지(孔雀抱卵之地)라는 명당이며,
주위는 동용공작(東聳孔雀)·서치우적(西馳牛迹)·남횡비룡(南橫飛龍)·북류용담(北流龍潭)으로 표현되는 포근한 골짜기에 있다.
홍천 수타사 대적광전 洪川 壽陀寺 大寂光殿
보물 제 2247호
「홍천 수타사(壽陀寺)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수타사(壽陀寺)의
주불전(主佛殿, 석가모니불 또는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등을 모시는 사찰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홍천 수타사(壽陀寺)는 17세기에 이르러 수타사(壽陀寺)의 역사를 기록한 『홍천현동공작산수타사사적
(洪川縣東孔雀山水墮寺事蹟)』과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 등에 따르면 신라시대
원효(元曉)가 우적산(牛跡山)에 일월사(日月寺)를 창건하였으며, 1569년(선조 2)에 공작산(孔雀山)으로 옮겨
지으면서 수타사(水墮寺)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면서 사찰건물이
전소되었는데 1636년(인조 14) 공잠대사(工岑大師)가 사찰을 중창하였다.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에 따르면, 1811년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하는
‘수타사(壽陀寺)’로 다시 바꾼 것이라고 한다. 「홍천 수타사(壽陀寺)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으로 봉안한 법당으로, 불상 뒤 벽면에 비단 바탕에 채색한 영산회상도를
후불탱화로 걸어두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연목(서까래)과 부연(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이 있는 겹처마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은 규모가 크지 않으나, 부재간의 비례가 잘 잡혀 예술성이 높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불전 건물이다. 특히, 불전 중심에 불단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모셔져 있는 평면 형식과 일부 공포
·창방 등에서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1636년(인조 14) 공잠대사(工岑大師)의 중건 이후로
중수와 개수에 대해 명확한 사료가 뒷받침되어 건축적·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홍천 수타사 동종 洪川 壽陀寺 銅鍾
사인비구 제작 동종(思印比丘 製作 銅鍾)
보물 제11-3호, 수타사명 범종
동종 종신에
“강희 9년 경술 5월 일 원양도 홍천현 동면 공작산 수타사 주종기문 … 연화질 주종 화원 사인 태행 도겸
담연 기생 기임(康熙九年庚戌五月日 原讓道洪川縣東面孔雀山水墮寺鑄鍾記文 … 緣化秩 鑄鍾畵員
思印 太行 道兼 淡衍 起生 起林)”이라 새긴 주종기(鑄鍾記)가 남아 있어, 1670년 5월 원양도(현재 강원도)
홍천현(현재 홍천군) 공작산의 수타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사인, 태행, 도겸(道謙), 담연(淡衍),
기생(起生), 기림(起林, 起任) 등 모두 6명의 주종장이 참여하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높이 1.1m. 사인은 18세기에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더하여 종을 제작했다. 현재 사인이 제작한 동종 8구가 전해지고 있다.
홍천수타사동종은 종뉴를 따로 만들어 몸체와 연결하고 음통을 붙였다.
종의 어깨에 두른 띠 아래에는 9개의 돌기[乳頭]가 있는 네모난 유곽 4개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현란한 꽃무늬로 표현하여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화려하고 사실주의적 기법이 돋보인다. 종의 몸통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종을 만든 내력과 시기·발원자 등을 알 수 있다.
홍천 수타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洪川 壽陀寺 木造觀音菩薩坐像과 腹藏遺物)
이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1758년(건륭23) 5월에 강원도 홍천 공작산 수타사
옥수암에서 화승 순경(順瓊), 덕순(德淳)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확인된다. 불상을 조성한 화승 순경과 덕순은
1739년에 수화승 초흠과 《서울 학림사 괘불도》를 조성한 화승들이다.
불교조각사에서 18세기 중반은 불상의 조성과 개금에 불화승들이 점차 참여하게 된다.
순경이 제작한 목조보살좌상은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목조보살좌상》(1655년, 조각승 혜희),
《공주 마곡사 청련암 목조보살좌상》(1701년, 조각승 마일)과 비교해보면 신체비율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율이
커지고 대의자락이 도식적으로 변하였으며, 얼굴 이목구비는 타원형에서 방형으로 변하게 된다.
이와 같이 18세기 중반 불화승들이 제작한 불상은 앞선 시기 조각승들이 제작한 불상보다 인상이나
대의처리 등이 단순하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발원문을 통해 조성연대와 작가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년명 불상이며, 다리니ㆍ후령통 등의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는 등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우수하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다.
홍천 수타사 삼층석탑(洪川 壽陀寺 三層石塔)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1호
1층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
기단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고, 2·3층 몸돌이 없어진 탑신은 남아 있는 1층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얕게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뾰족하게 치켜 올려갔고,
밑면에 1 ·2층은 3단, 3층은 2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동그란 돌 하나가 남아 있다.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각 층의 지붕돌 너비가 거의 줄지 않고 있어
원래는 높고 날렵한 큰 규모의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홍천 수타사 월인석보 (洪川 壽陀寺 月印釋譜)
보물 제745-5호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 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석보 권17~18(月印釋譜 卷 十七~十八)은 세조 때 처음 간행된 초간본으로, 2권 1책이다.
본래 강원도 홍천의 수타사 인왕문에 있는 사천왕상의 배부분에서 발견되었다.
권 17은 전부가 완전하며, 권 18은 제87장 하부가 없어졌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내용은 권 17은 월인천강지곡 제311장에서 제317장까지이며 권 18은 제318장에서 제324장까지 해당되는 내용이다.
강원도 홍천군, 수타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판본 책이다.
첫댓글 저도 홍천 거주하면서 자주찿는 수타사 인데 수타사 귀중한 자료 말씀에 감탄 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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