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품에 품는 음란죄
잠 6:20-28
20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21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22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24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25 네 마음에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26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잠 6:21-28 / 네 아비와 어미가 이르는 말을 언제나 네 마음속에 새기고 다니거라. 아가씨들이 목걸이를 늘 걸고 다니듯 그 말을 목걸이처럼 늘 드리우고 다녀야 하느니라. 22) 네 아비와 어미가 이르는 말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네가 잠을 잘 때에도 내 아비 어미 말을 명심하면 너를 지켜 줄 것이다. 네가 잠에서 깨어 활동할 때에도 너를 잘 이끌어 줄 것이다. 23) 이 아비 어미가 너에게 차근차근 일러주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밝은 대낮에 길을 가는 것처럼 앞길이 환하리라. 이 아비 어미가 하는 꾸지람을 들어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게다. 그 꾸지람이 생명을 지키는 길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 24) 이 아비 어미의 가르침과 꾸지람을 듣고 그대로 살아야 나쁜 계집에게 빠지지 않을 것이다. 나긋나긋하게 다가와 달콤한 말을 속삭여 너를 홀리는 그 계집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거야. 25) 그 계집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애간장을 녹일 만큼 눈부시게 아름답다 해도, 그 미색에 네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애교 넘치게 눈웃음 치며 다가온다 해도 그 눈웃음에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되느니라. 26) 몸파는 여자를 가까이하다가는 네게 밥한그릇이나 남아나겠느냐? 그래, 다른 남자의 아내에게 다가갔다가는 소중한 목숨을 지키지 못하리라. 27) 활활 타오르는 불을 가슴에 안으면 가슴에 걸친 옷이 남아 나겠느냐? 어떤 사람의 가슴이 타지 않겠느냐? 28)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 위를 맨발로 걸어간다고 하자. 그 어떤 장사의 발이라고 남아 나겠느냐?
또 아들에게 주는 경고는 악한 여인들, 이방 여인들, 음녀들의 유혹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기는 비밀은 오직 부모님의 입을 통해서 나온 훈계와 교훈을 항상 따르는 것입니다.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20-22) 이제까지 들어온 아비의 훈계를 지키고 어미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훈계와 가르침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네 목에 영원히 매라는 것입니다. 마치 돌비에 새겨진 글씨처럼, 아씨의 목에 걸린 목걸이 보석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그 부모의 훈계와 가르침이 걸을 때 인도하겠고, 잘 때 지켜 주며, 깰 때 지혜롭고 생명으로 이끄는 말벗이 되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23) 참으로 그 부모의 명령은 등불이요, 그 가르침은 빛이며 그 부모의 훈계와 책망은 생명의 길입니다. 즉 부모의 말을 잘 듣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앞길이 환하며 생명을 지키는 길이 됨을 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부모의 교훈과 가르침, 그리고 훈계는 토라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들이며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교훈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그 어린 아들의 성장기와 전 삶에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쳤던 부모의 훈계와 교훈입니다(신 6:4-9).
음란한 여자는 네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다(24-28) 본문 말씀은 가부장적인 문화 배경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열거된 악한 여인, 이방 여인의 혀, 음녀 등은 남자로 바꾸어 열거해도 무방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들에게서 호리는 말에 유혹되지 말고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탐내지 말고, 그 눈짓에 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부모님의 훈계와 가르침만을 기억하여 자신을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한 조각 떡만 남는 빈곤에 처하고 건강마저 무너져 귀한 생명마저 사냥 당한다는 것입니다. 27-28절은 그런 여인들은 남자의 생명을 불사르는 불덩어리라고까지 정의합니다.
적용: 인간이 스스로 독립된 성인이 되려면 적어도 20여 년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양육 받으며 교육받아야 합니다. 이 때 부모의 훈계와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음녀의 유혹을 비롯하여 모든 탐욕과 유혹을 이기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예수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가장 귀한 보배를 발견한 사람이고, 예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을 찾는데 골몰하기보다는 보배 예수를 찾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삶이요 성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 설 교 >
약속 중의 약속
잠언 6:20-28, 에베소서 6:1-4
지난주 화요일 노년부에서 전주 지역 문화 유적지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걸린 경기전, 금산 ㄱ자 교회 등을 관람하고 본 안동교회의 송재욱 장로님이 설립하신 동동동심원(東同童心圜)을 관람했습니다. 동심원에서 영토회복기원비를 보며 영토회복을 기원하고 순수한 전통적 기술로 지어진 누각에서 바라본 호수의 전경은 절경이었습니다. 이 누각에서 절경을 바라보며 전주 지방 명창의 판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중의 한 곡이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심금을 울리는 소리 때문에 눈시울이 시큼해졌습니다. 감동적인 판소리였습니다.
판소리를 듣기 얼마전에 심청전의 심청이를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국어시간에 받은 한 과제물의 제목이 ‘고전 소설 속 인물 비판하기’였습니다. 이 학생이 심청전의 심청이로 그 대상을 잡았습니다. 학생의 글의 일부입니다.
“우리나라 고전 소설 인물 중에 효녀를 한 명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청전’의 심청이를 꼽을 것이다. 심청이는 정말 최고의 효녀였을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청의 잘못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양미 삼백석을 몽은사에 바치면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둘째, 자신의 귀중한 몸을 팔아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진 것은 불효 중의 불효다. (중략) 나는 이 행위가 일종의 자기 도피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와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분명 심청이는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것이다. 반복되는 힘든 하루하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그런 기회가 오고 죽음으로써 자유를 얻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한다는 명분으로 (일종의 자살행위이므로) 원래는 불효인 것을 효도인 것처럼 바꿔버렸다고 생각된다. (중략) 심청이는 이기적인 불효자였다.”
물론 이 글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개발하기 위한 과제물이지만, 어린 학생이 쓴 글 치고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현대인들 중에서 생활의 어려움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읽으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판소리를 들으면서 갑자기 앞의 학생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몇가지 질문들이 생겼는데, 심청이가 왜 불효자의 길을 가게 되었는가? 심청전이 쓰여졌을 당시의 작가나 독자에게 현대인 같은 생각이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불효가 있었고, 고려장과 같은 비극적인 현상이 만연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간장타는 판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전통 사회에서의 효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차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효는 인생이 걸어가야할 절대적인 길이었습니다. 심청이가 불효자처럼 보여도 어리석게 보여도 그의 행동의 원인이 도리어 극진한 효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생명을 바쳐서라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는 간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효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건 간에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수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효도는 결단의 내용이 아니고, 운명인 것입니다. 도리어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당연함이 있어야 합니다. 효 외에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운명처럼 받아 들여야 되는 것이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효도가 결단의 사항이 되고 선택 사항이 되어서 문제인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 1-3).
현대인들이 유아기부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기가 진행되면서 이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상이 변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3살 때는 “아버지는 전능하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우러러 봅니다. 5살 때는 “아버지는 전지하다. 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6살 때는 “아버지는 모든 사람보다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8살이 되면 “아버지가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12살이 되면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 옛날 사람이라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20 살이 되면 “아버지는 구제 불능이다. 뒤떨어진 사람으로서 옛날 생각에 메여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30살이 되면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 두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 경험은 중요한 것으로서 인정할 만한 것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하고, 35살이 되면 “아버지께 여쭈어 보면 참 좋겠다. 이럴 때 아버지의 의견을 꼭 묻고 싶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아쉽다는 겁니다. 40살이 되면 “아버지라면 이런 때 어떻게 하셨을까? 아버지의 생각은 어떨까?” 아버지의 지혜가 그립습니다. 50살이 되면 “아버지는 확실히 훌륭했다. 그리고 그 훌륭한 지혜를 미쳐 좀 더 많이 들어 둘걸” 아버지의 교훈을 청종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됩니다.
존경과 사랑의 대상을 잃는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살아 계실 때 무언가 기쁜 일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 왔는데 기쁨을 함께 나눌 분이 안 계시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2-25).
어느 마을의 원님이 동네를 지나가다가 한 집안의 풍경을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원래 효자로 소문난 젊은이의 집이었습니다. 효자로 소문난 아들은 마루에 앉고 팔십 노인네가 그 발을 씻기고 있었습니다. 원님은 놀라서 소리를 쳤습니다. “아니 저럴수가” 원님의 소리를 들은 옆집 사람이 말합니다. “원님, 이뿐 만이 아닙니다. 저 노인네는 아침 저녁으로 밥을 하여 아들을 먹입니다.” 이 말을 들은 원님은 분을 삭일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 효자로 소문난 사람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이같이 못된 사람이 있다니 내가 엄벌을 내리리라.’ 다음날 호된 벌을 내리기 위해 아들을 불렀습니다. 엄히 묻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그대는 효자로 소문이 나 있는데, 어제 내가 그대의 행동을 보니 불효자 중의 불효자였네. 자네한테 속은 것도 원통하려니와 자네 같은 불효자를 본 적이 없네.” 아들이 대답합니다. “원님의 마음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은 어머니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효의 또다른 차원을 깨달은 원님은 이 아들을 아무 말 없이 풀어주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자식은 부모와 웃어른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효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응답을 비유할 뿐만 아니라, 십계명 중 제 5계명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의 유비
부모에게 순종하되 특별히 믿음의 부모에게 순종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훈계하는 부모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의 훈계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의인으로서의 삶과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그의 부모를 즐겁게 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아버지로 나타내십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집을 나갔어도 방탕했어도 기대를 져버렸어도 날마다 낮이면 언덕배기에 올라가서 동네로 들어오는 길목을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나 바라보는 아버지, 밤이면 밤늦게 돌아온 아들이 혹시나 돌아갈까봐 문을 잠그지도 않고, 바람만 불어도 혹시 아들이 돌아오나 잠을 깨는 아버지. 이 아버지 많큼 죄지은 인간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머니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과 27절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러분 이 성경 구절을 다음처럼 한번 읽어 보십시오. “어머니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어머니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어머니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어머니가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기독교만의 현상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있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인정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좋은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만져지고 들려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님을 통하여 보여지고 만져지고 들려지고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부모님의 음성을 아이들은 매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님을 통해서 아이에게 들려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날마다 아침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의 자녀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양육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사랑의 모범상
사랑 받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도 닮아갑니다. 그 감정이 향하여 있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대단한 행복입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이 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부모를 존경하라는 말을 설교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부모를 존경하라고 설교한다면 반 이상의 성도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를 도무지 존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끼친 악영향을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증오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것에 대해서는 배우자도 선생님도 성직자도 그 누구도 보상해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인격의 손상은 부모 외의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꼭 필요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객관적인 모습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 속에 있는 부모에 대해서 가지는 상도 중요합니다. 같은 부모아래 있는 자식들이라도 어떤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고 어떤 자식은 부모를 미워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부모 상에 대해서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나는 우리 부모님의 부정적인 면만 생각할까?’ 하는 사람과 ‘나는 우리 부모님이 너무 좋다!’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여러분, 부모님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불행해집니다. 스스로 불행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부모님을 존경하십시오.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효의 모범이 되라
부모는 아이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모범상을 가진 사람에게 모범상이 형상화되고 그가 다음 세대의 모범이 됩니다. 여러분의 부모를 존경하십시오. 존경하는 모습 속에서 존경받을 모습이 여러분 속에 만들어 질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존경받는 부모가 될 것입니다. 자식들이 존경하는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본능적인 일 외에는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인 본능도 그 자체는 배울 필요가 없지만, 본능을 만족해가는 방법은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욕구의 처리 방법을 자신의 문화 안에서 배워야만 합니다.
저희 집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나오는 인사말과 존대말을 배우는데, 그 시간에 선생님께서 “너의 집에서는 아침에 무슨 인사를 하니?”하는 너무나 평범한 질문을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대답을 하는데 제 아이는 대답을 못했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또는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모범 답안인줄은 알겠는데 저희 집 아침 인사가 보통 인사와 너무나 차이가 나서 과연 대답을 해도 되는지 망설였다고 합니다. 저희 집의 아침 인사로 정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Ich liebe dich. Ich liebe dich auch) 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아침 인사를 하지 않지만, 아이가 어릴 때 상당한 기간 동안 이렇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제 아이가 남들에게 이런 인사를 한다고 하면 너무 튈까봐 말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 가지 어휘를 사용할 수 있기 위해 만 번 이상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행동을 배우는데도 수없이 보고 흉내를 낸 다음에 자신의 습관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만 번 이상 들어야 하고 만 번 이상의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정상적인 부모의 역할을 보고 배울 기회가 없다는 점입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나중에 자신들의 가정을 가졌을 때 정상적인 가정을 꾸미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보여 주지도 않고 어떤 일을 하라고 하면 그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부모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식보고는 이웃을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면 그 아이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교육은 자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모 자신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자식 교육 이전에 부모가 자기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신앙적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교육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된 여러분, 자신의 부정적인 것을 자식을 통해서 재생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을 다시금 갈고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나 자신이 인격적이 되고 나 자신이 또한 나이에 걸맞게 성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스스로는 도저히 담배를 끊지 못했는데 천식에 걸린 자식 때문에 금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키우는 것은 부모에게 있어서 발전과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교육이란 여러분이 완성된 상태에서 어떤 내용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여러분 자신의 삶의 과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효자 효녀가 되는 것 자체가 효 교육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효자 효녀가 되어서 효자를 재생산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대대로 효자 가정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모든 계명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약속 안에 또 다시 약속을 한 계명은 이 한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약속을 이중으로 하신 것입니다. 이중의 약속 속에 있는 이중의 복을 소유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존재를 사르는 불 같은 위험
잠언 6장 20-35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지혜의 왕 솔로몬이 잠언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며, 수차례 경고하는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간음죄에 대한 경고입니다. 솔로몬은 수많은 사람들이 간음죄로 인해 넘어지고 그들의 인생이 멸망의 길로 갔다고 이야기하며, 결코 성적인 범죄의 길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합니까? 지난 2015년도 2월 26일 한국은 헌법재산소의 위헌결정으로 인해 간통죄가 폐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간통이 법으로 범죄행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죠. 한국 뿐만 아닙니다. 이미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간통죄를 폐지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대만이 작년 5월에 폐지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주마다 다릅니다. 2015년도 기준으로 50개주 중 29개의 주가 간통을 죄로 보지 않습니다. 반대로 메사추세스, 아이다호, 미시건, 오클라호마, 위스컨신 주는 간통죄를 중범죄(felony)로 다스립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일리노이 주 역시 간통죄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미국 전체를 놓고 보면, 50개 주 중 절반 이상이 법원에서 간통을 범죄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국이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합니까? 이는 심각한 영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을 주제로 다루는 TV 드라마나 영화는 ‘막장’이란 말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륜과 간통죄가 만연한 곳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솔로몬은 절대로 그 길을 걸어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솔로몬이 간통죄를 짓지 말라고 수차례 이 주제를 강조했을까요? 이 죄에 넘어지는 사람을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통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 가정은 파탄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다윗 가정에 벌을 내리셔서 다윗의 아들들은 서로 싸우고 죽였고, 다윗은 그의 아들에게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적 범죄가 가져다주는 폐해를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간통죄는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주변에 그와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아프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망가뜨릴 정도로 엄청난 파급 효과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로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25-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6:25)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잠 6:26)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솔로몬은 음탕한 여인의 화려한 외모와 아름다움에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에게 사로잡힌 자는 결국 한 조각 떡 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조각 떡’만 남게 된다는 것은 그의 모든 재물을 탕진하고 물질적으로 빈곤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물의 손실이란 단순히 성적 범죄에 대한 경제적인 대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가차없이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음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비밀리에 아주 치밀한 계획 속에서 움직이지만, 결국 그는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육체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버린 대가로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적 범죄로 인해 그의 내면의 성품과 인격이 파괴되고, 사람들에게 쌓아온 덕도 파도가 덮친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됩니다.
솔로몬은 간통죄를 지은 사람은 뜨거운 불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27-28절입니다. “(잠 6: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잠 6:28)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잠 6:29)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 솔로몬은 음녀의 유혹에 빠진 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 ‘불을 가슴에 품고 있는 자’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불에 타 죽게 될 것입니다. 숯불을 맨발로 밟고 가면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가 남을 정도로 몸이 타 버리고, 심각하면 몸 전체가 불에 타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음행의 결과가 그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평생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만든다고 경고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죄로 인한 불은 범죄한 두 당사자만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가족, 친구들, 친척들, 가까운 이웃들, 교회 식구들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간통죄를 지은 자들의 부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괴로워합니까? 그들의 자녀들은 또 얼마나 힘들어 합니까?
솔로몬은 차라리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친 사람은 잡히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먹을 것을 훔쳤을까?”하고 사람들의 동정이라고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래도 도둑질한 것의 7배를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갚을 것이 없으면 자기 전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녀와 간음하다가 잡힌 자는 어떻게 됩니까? 그의 부끄러움은 평생 씻어낼 수가 없습니다. 평생토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며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웃들에게 비방을 받고 모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배고픔에 빵을 훔친 도둑과는 다르게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간통죄는 상대방 배우자에게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 어떤 벌금을 내도, 많은 선물을 주어도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세상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져 넘어졌습니다. 솔로몬은 우리의 육체, 정신, 영혼을 불 태워버릴 수 있는 이 성적 범죄를 주의하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 죄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지혜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3-24절입니다. “(잠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 6:24)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를 세상 유혹으로부터 지켜 줍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만이 죄의 강력한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체, 정신, 영혼을 폐망의 길로 인도하는 세상 죄악과 육체의 욕심을 주의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불을 품으면
잠 6:20-35 / 이국진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 특별히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잠언서의 여러 교훈들 교훈해야 될 여러 주제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음행에 대해서 또 말하고 또 반복하고 또 강조해서 교훈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이 음행의 죄라고 하는 것은 언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빠지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걱정이 없다” 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여건이 주어지게 되면, 조금만 상황이 바뀌게 되면, 이러한 죄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될 문제가 바로 이 음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는 특별히 이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제가 예전에 설명을 드린 것처럼, 이 표현법은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같은 내용 말을 반복하는 방식의 표현법을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20절의 말씀 가운데서 보면, 아버지의 명령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법에 대해서는 떠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법이 있고, 어머니의 법이 있는데, 아버지의 법은 지키면 되는 것이고, 어머니의 법은 떠나지 말아야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서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지키며 떠나지 말라. 다시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말고 꼭 지켜야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법을 지키며,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에서는 그 아버지의 법, 어머니의 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된다고 하는 말씀을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메라” 이것도 역시 히브리 평행법적 방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네 마음에 새기고 네 목에 매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이중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표현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 좀 특이합니다. 내 마음에 새겨라. 마음의 새겨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듯이, 나무에다가 이름을 새기듯이, 그리고 어떤 곳에 하나의 이름을 새기듯이,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속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도록 새겨서, 그것이 끝까지 남아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목에 걸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잃어버리는 것들은 어떻게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하죠? 목걸이를 합니다. 요즘 목걸이를 하는데, 무엇을 목걸이로 하죠? 입마개를 마스크를 목걸이를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 벗었다 썼다 해야 되는데, 벗어놓으면 어디로 도망갔는지 찾을 수가 없으니까, 이 벗어놓은 마스크를 다시 한 번한번 그냥 쉽게 찾아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걸이에 걸면, 언제든지 쓰고 싶을 때, 다시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목걸이라고 하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한번,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목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경도 우리가 목걸이를 달아가지고 보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늘 안경을 쓰기 때문에 목걸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제 아내는 평상시에는 안경을 쓰지 않다가, 그런데 글을 읽을 때만 안경을 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안경을 어디다 뒀는지 늘 찾습니다. 저는 늘 쓰고 있으니까, 찾을 일이 없지만, 제 아내는 안경을 늘 벗고 있다가 책을 읽을 때 전화기를 볼 때, 그때 안경을 써야 되기 때문에, 그때 안경을 찾게 되는데 안경이 도대체 어디다 놔뒀는지 화장대 위에다 놔뒀는지, 화장실에 놔뒀는지, 냉장고 속에 나뒀는지 모르니까,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요즘은 목걸이를 달아가지고 목걸이에다 차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갖다 쓰는 것이죠.
그런 것을 설명하면서, 오늘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냐면,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또 우리들의 목걸이에 걸어두라라고 이렇게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연인들이 먼 곳에 여행을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 나무나 바위에다가 이름을 새깁니다. 철수 영희 그리고 하트 모양을 그리면 너와 나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미에서 바위에다가 그 이름을 새기고, 사랑을 새기면서, 영원히 변치 말 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도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마음판의 세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판에 새기고 그리고 목에 걸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목에 걸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말씀인데, 그것을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새길 수 있고, 어떻게 우리들의 목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안경이나 마스크 같은 거 경우야, 우리가 보이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냥 목걸이를 만들어서 걸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들의 목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서 그 적은 말씀을 머리 이마에 달고 다니고 혹은 그렇게 적은 그 말씀을 옷 소매에 달고 다니면,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달고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어디다 잘 적어놔라. 어디다 적어서 가지고 다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라고 하는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인 줄로 믿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젊은 청년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미혹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고 있을 때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이마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고, 그리고 옷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내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서 범죄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그 음란한 여인에게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리고 목에 걸라고 하는 얘기는 우리가 써갖고 다니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써가지고 어디다 붙여가지고 다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걸게 됐을 때,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역시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 세 번에 걸쳐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할 것이다. 네가 잘 때,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새기게 되면 그 유익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해 준다고요? 보호해 준다라고 오늘 22절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호해 준다고 하는 말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부적을 아마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부적이라고 하는 게 뭐죠?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당이 써준 어떤 글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면, 그 부적이 나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부적을 내가 가지고 다니게 되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게 해 준다라고 생각하면서 다니는 거죠. 요즘 보니까 뭐 부적 같은 걸 손에 써가지고 다닌 사람이 있어서 난리가 나던데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내가 써가지고 가지고 다니면,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줄 거다. 이것을 내가 들고 다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서, 부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너희가 만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속에 새기게 되면, 그것이 너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런 부적과 같은 의미로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부적과 이 말씀과의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적은 귀신의 힘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하지만 잠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고 다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의 길로 걸어가 하게 될 때, 우리가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부적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이지가 못한 거예요. 악한 사람도 부적을 들고 다니면, 보호를 받는다는 그런 개념이 이 세상 부적의 개념 가운데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잠언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목에 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부적처럼 내가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말씀대로 도덕적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국은 복된 길이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가 해를 입지 않는 그런 보호받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 도덕적인 차원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새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오. 훈계와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또 세 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법칙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빛에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고, 안전하게 걷게 만드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악한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체적으로 보면 무슨 교훈을 하고 있냐면, 악한 여인에게 빠지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음행의 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고요. 성적인 범죄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성이라고 하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인데, 그것이 정당한 울타리 안에서 사용될 때는 축복이며, 하나님의 선물이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울타리 밖에서 행사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거리가 되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악한 여인에게, 음행한 길로 따라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26절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너에게 딱 떡 한 조각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음행의 결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완전히 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폐가 망신당하게 될 거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음행을 저지르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 음란한 여인이 나의 생명을 사냥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음행의 죄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이 아니라, 처음에는 쾌락을 위해서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음행의 죄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 결과가 정말 비참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잘 절제하고, 이러한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27절과 28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이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불을 품으면 어떻게 되죠? 불을 품으면 다 타버립니다. 혹시 화재를 일으켜 본 분 계십니까? 불을 내 본 적 계십니까? 불이 나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불이 나는 걸, 불이 나는 현장에서 있어봤습니다. 제가 몇 살 때였냐면, 아마 세 살, 세 살 정도 됐을 때, 어린아이 때였던 것 같아요. 형이랑 동네 형들이랑 어른들이 없을 때, 우리 형들이랑 같이 동네 꼬마 아이들이 모여 앉아서, 저 고산읍교회 바로 옆에 있는 집이었는데요. 그 초가집으로 된 그 집에서, 타이어, 이렇게 고무 타이어, 이렇게 줄이 있는 그것을 가지고 형들이 거기다 불을 붙이더라고, 3살짜리 정도 됐으니까, 그냥 꼬마 아이로서 신기해서 다 쳐다보고 있는데 형들이 그 고무 타이어에다가 딱 붙이니까, 그 불똥이 툭툭 툭툭 툭툭 떨어지면서, 아, 신기해요. 신기한데, 신기한 건, 단 몇 초.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그 불똥들이 튀기 시작하는데, 화장실에 지푸라기로 된 문에 옮겨 붙기 시작해서, 불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집 전체를 불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그 엄청난 화재 현장 가운데, 제가 꼬마 아이였을 때 있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 굉장히 컸었는데요.
그 불이 있으니까, 집 전체를 완전히 살라버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잠언서에서 말하기를,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불을 품게 되면 어떻게 된다? 다 타버린다. 숯불을 밟고 서 있으면 어떻게 된다? 발이 데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불을 절대로 품으면 안 된다. 숯불 위에 서 있으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음행의 죄로부터 면역된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라든지, 교회 지도자들도, 조금만 틈이 보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무너질 수 있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 이런 음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조심해야 되는 건데요. 조심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조심하는 방법 불을 안 만지는 거예요. 불을 만지면 타니까, 숯불 위에 서면, 데이니까, 숯불 위에 올라가지 않아야 되고, 불을 품지 않아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결혼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성과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든지, 또한 깊은 상담을 주고받는다든지 하는 일들은 우리가 피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조그마한 문을 여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나 사이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그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한 그런 관심, 아내로부터 얻지 못한 그 사랑,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워서, 주변에 이성들에게 내 가정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그 불이 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런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아야 돼요. 결코 결혼의 관계를 떠난 사람과 이성 간의 그런 관계를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기 시작하면, 쉽게 모든 사람들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죄가 음행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합니다.
특별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속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끼리 해결을 해야 됩니다. 말하기만 하면 늘 싸우고, 말해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고,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서툴고,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서 전달하는 그런 방법들이 서툴러서, 그래서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갈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때가 너무나도 많거든요. 그럴 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이성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 문제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기분이 나쁘면, 왜 기분이 나쁜지, 내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면, 왜 상처를 받았는지, 어떻게 나에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같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음의 문을 조금씩 조금씩 열면서, 깊은 사랑의 대화를 해 나가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닫혔던 그 모든 것들이 사르르 녹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회복되는 일들이 있게 될 것인데, 그러한 일을 시도하지 않고, 결혼의 울타리 바깥에 나가서, 어떤 해결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결과만을 가져옵니다. 불속에 들어가는 것이고, 다 태워먹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분명하게 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음행의 문제 외에도,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건 도둑질의 문제입니다. 30절에서부터 31절의 말씀을 보면, 만일 누군가가 훔치게 된다고 한다면, 힘들어서 훔쳤겠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7배나 갚아줘야 되고,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음행의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도둑질의 이야기를 할까요?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마음에서부터 똑같은 일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정당한 내 바운더리 속에 있는 정당한 내 울타리 속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울타리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져와서 만족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재물을 우상으로 섬길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게 도둑질입니다.
그런데 이성에 관한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쾌락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어떤 성적인 만족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그리고 어떤 자기 만족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울타리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사실은 같은 성격의 것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려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하나님 저희들의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넘어졌다고 한다면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훌륭한 분들이 음행의 죄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만 보더라도 다윗이라고 하는 그런 엄청난 인물도 음행의 죄에 넘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넘어질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다 더 잘 넘어지겠습니까? 쉽게 넘어질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 그렇구나! 훌륭한 사람도 넘어질 수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기에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야 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주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마음속에 기억이 나서, 우리가 발걸음을 걸을 때, 혹시라도 불 속에 들어가지 않는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지, 우리 자신들을 잘 살펴보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