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소말리아파견 상록수부대 발대식
소말리아파견 상록수부대 발대식1993
년 4월 23일 소말리아에 파병되는 상록
수부대의 발대식이 열렸다. 상록수부대는 1993년7월부터1995년2월까지 소말리
아에 파견된 한국군 최초의 유엔평화유지
군(PKO)이었다. 이들은 주로 내전으로
파괴된 도로 보수공사와 주민지원 활동을
수행했다.
▶2015년 대구도시철도 3호선 개통
(칠곡경대병원-용지).
▶2015년한국 막장 드라마계 대모
임성한 작가 은퇴 선언
▶2015년한·일 원로시인 신경림·
다니카와 ??타로 ‘시낭송 콘서트’
▶2014년 팔레스타인 양대 정파
'파타'와 '하마 스'통합정부 수립에 합의.
▶2013년 일본 국회의원 168명,
야스쿠니 신 사참배 강행.
▶2013년 한국의 가수 조용필,
19집 HELLO 발매(수록곡: ‘Bounce\ Hello등),
▶2011 년 한국의 아이돌 보이 그룹
‘B1 A4’ 데뷔.
▶2010년 러시아의 체조 선수 및 코치 '나
탈리 라브로바\모스크바에서 여동생과 함께
교통 사고로 사망 향년 25세 262일 .
▶2010년 그리고 총리,
국제통화기금과 유로존 에 구제 금융 요청.
▶2010년멕시코의 로레나 오초아 LPGA 은퇴 발표
▶2010년러시아 리듬체조 스타,
나탈리아 라브로바 사망
▶2009년관광버스, 승용차 10여대와 추돌사고
▶2009년 이라크 바그다드와 바쿠바의 이슬람
시아파 모스크에서 두 건의 자살 폭탄 테러가 발 생,
최소 79명이 사망
▶ 2009년 JMS의 창립자 정명석이
강간치상 험의로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2008년 나라기록관 개관
(경기도 성남시 시 흥구 소재).
▶2007년 광우병 발생으로 대한민국에 수입이
중단되었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이 재개됨.
▶2007년 '보리스 엘친' 러시아 전 대통령 사망
향년 76세 81 일 .
▶2005년 대한민국MBC의 간판 예능 프로그 램
《무한도전》 첫방송.
▶2005년 이해찬 국무총리와 김영남
북한 최고 인민회의 상임의원장, 아시아-아프
리카 정상회의 에 참여하여 현안에 관해 논의.
▶2004년일본 횡혈묘 공주서 무더기 발굴,
백제-일본 교류 입증
충남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에서 발굴된
횡혈묘의 현실 내부.
지금까지 일본 특유의 묘제로 생각되던 횡혈묘(橫穴墓·언덕에 구멍을 뚫고 현실을 만든 무덤)가 2004년 4월 23일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충남 공주군 우성면 단지리 일대에서 횡혈묘15기가 모여있는 것이 발견됐다고 충청문화재연구원이 이날 밝힌 것이다.
박순발 조사단장은 “단지리 횡혈묘의 연대는 동성왕(재위 479~501년)~무령왕(501~523년) 때로 추정할 수 있어 일본 횡혈묘의 연대와 거의 일치하거나 오히려 이르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헌에 드러나지 않던 백제와 일본 사이의 교류를 입증하는 유적으로, 앞으로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단지리 횡혈묘는 대부분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있었으며, 인골과 뚜껑 있는 접시(蓋杯), 작은 항아리(小壺) 등 부장 유물도 출토됐다. 공주 단지리 횡혈묘는 현실(玄室·무덤방)에 연결되는 연도(羨道·무덤 입구에서 현실까지의 통로)가 매우 짧거나 거의 없으며 판석·목판이나 자갈로 무덤을 폐쇄한 점에서 일본 횡혈묘와 아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후쿠오카·오이타 등 북부 규슈 일대에 집중 분포된 일본 횡혈묘의 조성 시기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으로, 이날 횡혈묘의 발굴이 ‘횡혈묘 백제 기원설’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04년강인선 조선일보 기자,
제21회 최은희 여기자상에 선정
▶2002년야구선수 송진우,
국내 최다승인 147승 달성
4월 23일 청주구장에서
강속구를 날리고 있는 송진우 선수.
▶ 2001 년 진념 경제부 총리, 금융 구조 조정에
투입된 공적 자금 134조 원 가운데 240% 회수 발 표.
▶ 1999년 한국선물거래소 개장(부산)
국내 최초의 종합파생상품거래소인 한국선물거래소(KOFEX)가 23일 오전 부산 부산진구 범천동 부산상공회의소 2층 상의홀에서역사적인 개장행사를 갖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개장식은 김대중 대통령과 신상우 국회부의장, 김영배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 박태준 자민련 총재, 이규성 재경부 장관, 이헌재 금융감독원장, 안상영 부산시장 등 국내외 주요인사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새로 개설되는 이 선물시장이 기업과 금융기관들에게 금리와 환율변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체계적인 관리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외환위기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다시는 없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개장식은 현판식, 거래소 소개, 경과보고, 전산시스템 가동 점등식 순으로 열려 이날 오전 9시 34분 첫 거래에 들어갔다. 한국선물거래소는 지난 1995년 12월 선물거래법이 제정된 뒤 지난 해 10월 부산 설립이 확정돼 11월 전산거래시스템 설치를 마치고 지난 2월부터 지난 16일까지 4차례의 모의거래를 실시한 뒤 이날 공식 개장하게 됐다.
선물거래소는 개장 초기에는 원/달러 환율 선물 및 옵션, 양도성 예금증서(CD), 금리선물, 금선물 등 4개 상품이 상장되며 하반기에는 최근 국내 채권시장의 지표금리로 부각되고 있는 3년 만기 국고채금리 선물을 상장한다.
선물거래소의 개장으로 부산지역 경제 활성화는 물론 ▲국내 기업경영 및 금융산업의 선진화 ▲국내외 금융기관은 물론 기업들에게 경영위험 회피수단 제공 ▲일반 투자자들에게 새로운 투자기회 제공 ▲미래가격 예시기능을 통한 정부 기업 개인 등 경제주체들의 계획적인 경제활동 보장 등이 기대되고있다.
▶1998년콘스탄틴 카라만리스 전 그리스 대통령 별세
▶1997년‘남도들노래’ 예능보유자 조공례씨 별세
▶1996년동두천 미군 탱크사격장
야산서 화재 발생 - 공익근무요원 6명 사망
▶1996년강원도 고성군 산불 - 20여억원 피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마좌리 죽변계곡 군부대 사격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산불은 1996년 4월23일 오후 8시30분쯤 발생해 강풍을 타고 인근 산으로 확산, 죽왕면 전체 면적의 절반이 넘는 2천5백여ha의 임야를 태웠다. 이날 발생한 강원도 고성군 산불은 발화 54시간 만인 25일 오후7시쯤 불길이 잡혔다.
이 산불로 사흘동안 5개 마을에서 모두 가옥 75채가 불에 탔으며 1백72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피해면적이 3천ha, 재산피해액은 20여억원을 넘었다.
강원도는 이번 산불이 1986년 4월8일 고성군 수동면에서 군사훈련 중 발생한 산불의 피해를 훨씬 넘어 최근 20년 내 최악의 산불이라고 밝혔다. 내무부는 이번 산불로 피해를 입은 3개 읍-면 이재민 57가구 1백72명의 재해복구 경비로 강원도에 특별교부금 10억원을 지원했다.
▶1995년옴진리교 2인자 무라이 히데오 살해
1995년 4월 23일 밤 8시30분쯤 동경 미나미아오야마에 있는 옴진리교 동경 총본부 앞에서 교단의 2인자 무라이 히데오씨(촌정수부. 36)가 20대 재일교포에게 칼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라이씨는 이날 승용차로 동경 총본부에 도착, 잠시 건물 안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보도진과 섞여 있던 군중 속에서 식칼을 들고 뛰어든 한 남자에게 배 등을 찔린 뒤 인근 동경 도립 히로오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다음날 새벽 2시33분쯤 숨을 거뒀다.
무라이씨를 습격한 남자는 경비 중이던 경찰관들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돼 아카사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결과 한국 국적의 서유행(29)씨로 신원이 밝혀졌다. 서씨는 경찰조사에서 자신이 1년 전 미에현의 한 우익단체에 입회했으며, 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옴진리교 측에 따끔한 경고를 주기 위해 이날 오후 1시반부터 동경 총본부 앞에서 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1993년 소말리아파견 상록수부대 발대식
▶1986년남아프리카공화국,흑인의 국내이동을
규제하는 `패스법` 관련법을 폐지 또는 개정한다고 발표
▶1983년낙동강 하구언 공사 기공
▶1983년춘천서 300년 전 미이라 출토
▶1981년북아일랜드 신구교간의 종교분쟁 재현, 난동화
▶1979년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와 단교
▶1977년한일대륙붕협정 체결에 중국 항의
▶1976년태국, 반공법 고수 발표
▶1975년핵확산금지조약(NPT) 한국에서 발효
1975년 3월 19일 세계에서 86번째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비준한 한국에서 같은 해 4월 23일부터 조약이 발효됐다. 1968년 7월 1일 세계 62개국이 조인한 핵확산금지조약은 1969년 11월 24일 미소양국에서 비준돼 1970년 3월 5일 정식 발효됐다. 정식명칭은 `핵무기의 불확산에 관한 조약`이다.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 조약을 탈퇴하자,
유엔 총회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를 논의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핵보유국은 핵무기와 이와 관련된 것을 비핵국의 핵제조에 어떠한 원조도 할 수 없으며, 비핵국은 핵무기와 관련된 어떠한 것도 스스로 제조할 수 없고, 비핵국은 원자력 이용을 평화적 목적에 한정하고 원자력의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전용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 원자력기구의 보장조치를 수락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조약의 이행상황은 5년마다 검토하게 되어있는데 지난 1980년 이뤄진 제2회 검토회의에서는 개발도상국이 미소양국에 대해 핵군축의 진전이 없다는 불만을 토로했고 1990년의 제4회 검토회의에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미소양국을 겨냥해 핵무기를 폐기하고 거기서 회수되는 핵분열 물질을 발전용으로 전용하라고 촉구했다.
▶1975년미국-인도네시아 지전 종식 선언
▶1971년전북 지하당 간첩당 13명 검거
▶1968년틀라텔롤코 조약(군사적 목적의 핵무기 실험과 보유를 금지시켜 남미 핵자유지대 설치) 발효
▶1966년주중국 스웨덴 대사 페트리,
판문점 통해 입북
▶1962년케네디 미국 대통령 태평양 핵실험 재개 지시
▶1961년공민권제한 국회심사위원회 심사 종결.
민-참의원 8명씩 자격 박탈
▶1961년드골 프랑스 대통령, 알제리 주둔
프랑스 반군의 본토침공에 대비한 비상대권 선언
▶1960년장면 부통령 사임
▶1952년미국 네바다 사막서 최대규모의 원폭 실험
▶1945년중국 7전인대회 개최
▶1919년한성임시정부 수립
1919년 우리나라는 3ㆍ1운동과 만세시위로 민족의 단결력과 독립정신이 어느 해보다 들끓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독립의지와 달리, 하나만 수립되어야 할 임시정부가 일제의 감시와 탄압하에 연락 불충분으로 상해, 노령, 서울 등에 수립되는 등 난립했다.
전국 13도 대표들에 의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됐던 이승만(1919.4.24).
전국 13도 대표들에 의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됐던 이승만(1919.4.24).
1919년 4월 23일 전국 13도를 대표하는 25명이 서울에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는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학생과 시민대표들이 정오를 기해 보신각 앞, 서대문, 동대문, 남대문 등 네 곳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전단을 뿌리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3ㆍ1운동의 정통성을 이은 한성임시정부는 이날 국민대회에서 약법 제1조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함`, 제2조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 등을 명시함으로써 한성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임을 명백히 밝혔다. 당시 세계적 통신사인 UP 통신이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을 국외에 보도하자 그 약법이 채택한 민주적 정치제도가 미국 등 서구 제국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후 같은 해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한성임시정부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통합되었고,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한성임시정부 각료 전원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각료직을 맡았다.
한성정부 [ 漢城政府 ]
1919년 4월 서울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났는데, 한성정부는 제일 마지막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로 1919년 3월초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윤용주(尹龍周) 등이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의 수립문제를 제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에게 권청으로 추대된 천도교 대표 안상덕(安商悳), 기독교 대표 박용희(朴用熙)·장붕(張鵬)·이규갑과 유교 대표 김규, 불교 대표 이종욱(李鍾郁) 등 20여 명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할 것을 결의했다. 4월 23일 서울 서진동 봉춘관에 국민대회 간판을 걸고 임시정부 포고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을 발표했다. 또한 이승만·이동휘를 비롯한 임시정부 각 원과 파리 평화회의의 대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호(납세를 거절하라는 내용)·제2호(적의 재판과 행정상 모든 명령을 거절하라는 내용) 등도 함께 발표했다.
약법은 다음과 같다. ① 국체(國體)는 민주제를 채용한다. ② 정체(政體)는 대의제를 채용한다. ③ 국시(國是)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복을 증진하게 한다. ④ 임시정부는 일체내정(一切內政)·일체외교의 권한을 갖는다. ⑤ 조선 국민은 납세·병역의 의무가 있다. ⑥ 본 약법은 정식 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반포할 때까지 적용한다. 한성정부는 연합통신(UP)에 보도됨으로써 국제적인 선전효과를 갖게 되었고, 서울에서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후일 여러 정부의 통합과정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성정부의 각료 명단은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李東輝), 외무총장 박용만(朴容萬), 내무총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법무총장 신규식(申圭植), 학무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 참모부총장 유동열(柳東說) 등이었다. 조직으로 7부 1국과 평정관 18명을 두었다. 군무부 외에 참모부를 설치하고 차장까지 선정하여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각료 명단에는 국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임에도 집정관 총재를 비롯해 행정 각 부 총장·차장에 국내인사가 1명도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국내의 독립운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해외에서 활동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한성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국민의회와는 달리 지하조직으로 구성되었고, 그 약법이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비해 기본법으로서 미약했으나 전국 13도 대표로 구성된 국민대회의 명의로 조직된 정통정부라는 점에서 다른 임시정부보다 그 지위가 공고했다.
▶1895년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 교수형
녹두장군 전봉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이 1895년 4월 23일 서울에서 처형됐다. 41세였다. 전봉준은 그 전 해 공주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대격전에서 패한 후 순창으로 피신, 동지들과 재기를 모색하던 중 부하의 밀고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1월 동학의 고부 접주인 녹두장군 전봉준이 고부군민을 이끌고 전라도 고부군수 관아를 습격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 죽창을 들고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며 노도와 같이 관아로 밀어닥쳐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탐학에 대한 응징이었다.
이날부터 그 해 10월 금구싸움으로 마무리되는 동학농민운동 혹은 갑오농민전쟁은 근대를 향한 조선 민중의 몸부림가운데 가장 찬란하고 처절한 장면이었다. 이들은 19세기 말 조선의 정치 지형도 안에서 최고의 진보성을 대표했고 그 진보성을 감당하지 못한 지배 세력은 나라를 외세에 내주는 길을 택했다. 결국 이 농민전쟁의 비극적 마무리로 조선은 그 뒤 식민화와 뒤틀린 근대화를 겪게 되었다. 이 운동의 한 가운데 있던 사람이 전봉준이었다.
▶ 1850년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스 사망
무지개 My Heart Leaps Up(Rainbow)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보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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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왕실이 영국의 가장 명예로운 시인에게 내리는 칭호인 `계관시인`을 지낸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위즈워스가 1850년 4월 23일 사망했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고, 프랑스 혁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국교가 악화되자 그는 공화주의적인 정열과 조국애와의 갈등으로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 때 쓴 비극 `변경 사람들`에서 혁명과 합리적 급진주의에 대한 반성이 엿보인다. 테일러 콜리지와 공저한 `서정 민요집`(1798)이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면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사랑하는 감수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낭만주의와 자연주의가 잘 조화되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1791년 미국의 제15대 대통령(1857-1861 재임) 뷰캐넌 출생
▶ 1720년 빌뉴스의 가온(유대교의 정신적 지도자에게 주어졌던 칭호) 엘리야 벤 솔로몬 출생
▶ 1616년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사망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뛰어난 시인으로 또 극작가로 인정받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사망했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 활동기는 1590~1613년까지의 대략 24년 간으로 볼 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모두 37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습작적 경향을 보이던 초기와 영국사기를 중심으로 한 역사극에 집중하던 시기, 그것과 중복되지만 낭만희극을 쓰던 시기, 그리고 그의 대표작 일부가 발표된 비극의 시기, 화해의 경지를 보여주는 만년의 이른바 로맨스극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시기적 구획이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셰익스피어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1599년 템스강 남쪽에 글로브극장을 신축하는 등 평생을 연극인으로서 충실하게 보냈으며, 자신이 속해 있던 극단을 위해서도 전력을 다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등의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등이 있다. 현재까지도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고전의 살아 있는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 1616년 ‘돈 키호테’ 저자 세르반테스 사망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가 말했다. “‘돈 키호테’와 ‘햄릿’만큼 인간을 저돌형과 우유부단형으로 적절하게 묘사한 문학작품은 이제껏 없었다. ” 두 작품의 작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공교롭게도 1616년 4월 23일 같은 날 죽었다.
돈 키호테’가 발간된 1605년, 스페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 때의 번영과 레판토해전 승리로 한껏 고양됐던 영웅적 분위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무적함대도 영국에 격파되고 영토까지 점령·약탈당하면서 국가의 기운도 수명을 다한 듯 느껴졌다. 번영의 시대(1547년)에 태어난 작가 개인사에도 영광과 좌절이 교차했다.
24세에 레판토해전에 참전, 스페인의 승리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지만 전투 중에 맞은 총탄으로 왼손이 불구가 되고 설상가상 귀국 중에 알제리 해적들에게 나포돼 5년 동안 갤리선의 노를 젓는 노예생활까지 맛봐야 했다. 그는 풀려난 뒤에도 시인으로, 구매담당자로, 세금징수자로 생계를 위해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어는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세르반테스 개인에게도 영웅주의 시대는 끝나고 환멸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스페인의 운명과 개인의 경험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한 ‘돈 키호테’에 그대로 투영돼 주인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었다. 2002년 5월 노벨연구소가 세계 유명작가 100명에게 의뢰해 세계 문학사상 가장 훌륭한 문학작품을 선정한 결과 ‘돈 키호테’가 압도적으로 1위에 올랐다.
▶1447년 안견, 몽유도원도 완성
1447년(세종29년) 4월20일,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도원(桃源)을 거닐었다는 간밤의 꿈을 안견(安堅)에게 전한다. 안견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고, 안평대군은 그의 자질을 진정으로 이해해 준 후원자였다.
사흘 뒤 안견은 가로 106.6cm, 세로 38.7cm 크기의 비단위에 먹과 채색으로 꿈을 담아 안평대군에게 바쳤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였다. 조용하고 온화한 평지와 구름허리를 뚫고 솟은 웅장한 기암절벽이 꼼꼼한 필치로 묻어나왔다.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이 제서(題書)ㆍ발문(跋文)ㆍ시1편을 그림에 싣자 성삼문ㆍ정인지 등 21명의 대학자들도 앞다퉈 친필로 23편의 찬양시를 그림에 올렸다.
하지만 안평대군을 포함해 이들 중 상당수는 수양대군(세조)이 권력을 잡고나서 줄줄이 처단되는 바람에 그림에 오른 이름들은 결과적으로 ‘살생부’가 되고 말았다. 정작 안견은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가 언제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나 또 언제 세상을 떠 어디에 묻혔는지는 일체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1893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일본 텐리대(天理大)에 소장돼 있는 몽유도원도가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한번 있었다. 전 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기록에 의하면 1952년에 80만엔으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당시 정부의 예산부족으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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