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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 19 온 세상이 - 요 12: 23 영광을 얻을 때
요 12: 19 온 세상이 -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하니라. (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하니라. )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그때 군중의 동태를 바로 보고 지적하였다.
그들의 말에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라고 한 것은, 무의식 중에 나온 예언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세계적 선교의 확실성을 예언한 셈이다. 그들의 말에 뒤이어 예수님께서 자기의 세계적 선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20-32).
1]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지만, 유대인 회중들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려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뜻하신 바를 하나씩 이루어가고 계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도 남김 없이 결국 다 이루어질 것이다.
2]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하니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의 확산을 제지하려 했으나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온 순례자들에 의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방해하는 일이 헛수고에 이르고 예수의 소문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 크게 확대되었다.
3]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요 12: 12-19)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에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입성은 스가랴 선지자에 의하여 예언된 일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이미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무리들로 붐벼대고 있었다. 그들 중 사람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려고 성문으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입으로 찬양을 외쳤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들의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져 있었다.
(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어느 개선장군에 못지 않은 장관이요 환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셨다. 예수님은 개선장군보다 더 크고 위대한 승리의 영광을 안고 입성하셨지만, 이것은 바로 그의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①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낸 것이다.
겸손하다는 히브리말 ‘아니’는 곤고하다, 초라하다는 뜻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왕으로써 곤고를 겪으셨으며 가난하고 초라하셨다.
그는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낮추시기까지 겸손하셨다.
* 빌 2: 6-11 –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시기까지 겸손하셨다.
* 고후 8: 9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원수의 무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기까지 겸손하셨다.
* 눅 23: 24 –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②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평화의 왕이심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원수를 무찌르는 칼을 가지고 입성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 눅 2: 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처럼 말했다.
* 사 53: 5-6 –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③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에 대하여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다.
스가랴의 예언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이 같은 입성에 대하여 그 뜻을 잘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이 일이 스가랴가 예언한 예언의 성취임을 알게 되었다.
(2) 호산나를 외친 무리들
예루살렘에 있었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마중 나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면서 외쳐댔다.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시아나’의 헬라어 음역이다. 이 말은 ‘구원하소서’ ‘이제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구원하소서’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갈채 또는 찬양의 송영으로 사용되어 온 말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친 것은 다만 유월절 행사 때문에 습관적으로 부른 찬송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를 이 찬송의 주인공으로 여기고 그를 맞이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조국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일을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해 왔다. 그런데 그들은 이번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에 대한 희망에 부푼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소문을 들었고,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소문도 들었다. 그러한 그가 이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몹시 흥분했다. 어느 누구인가의 업에서 ‘호산나’의 찬송이 나오자,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암송 시를 다 함께 합창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 같은 환영은 적중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야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빌라도의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골고다의 사형장에서 무력하게 죽어간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①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하심이 목적이셨다면 그 일이 그의 생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② 예수님은 표적으로 자기를 믿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그가 행하시는 표적에 의해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 했다. 예루살렘 성문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무리들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표적 때문에 모인 무리였다.
이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치 혁명의 가치를 들고 입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선동하거나 이스라엘의 회복을 부르짖지 아니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군중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으며 그가 과연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 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무리는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대제사장의 선동을 받아 예수 대신 바라바를 요구하고 예수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 마 27: 20-26 –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시키자.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듯이, 성경은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 딤후 3: 15 -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둘째,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자.
나사로의 기적을 본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다.
성경을 깨닫고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주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언하자.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지 말자.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였다. 그들은 양심이 무디어진 외식자들이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다고 하나님의 일은 좌절되지 않는다. 악한 자들의 악행은 자신들의 악만 더 쌓을 뿐이며 또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만 더욱 쌓일 뿐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착오 없이, 실패 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4.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심 ( 12: 20-27 )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요 12: 20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헬라인 몇이 있는데 )
유월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1]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여기 이른바 "헬라인"은 순연한 헬라인으로서, 개종(改宗)하고 그 때의 구약 종교에 들어왔던 자들을 의미한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장차 이방인들이 무수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실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요 12: 21 예수를 뵈옵고자 -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예수를 뵈옵기를 청했다.
1] 그들이 갈릴리 벱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그들은 직접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빌립의 소개를 받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경외(敬畏)하는 증표였다(Calvin).
그런데, 그들은 하필 다른 제자들보다도 빌립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립"이란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사실을 보아서 그가 누구보다도 헬라어를 융통한 관계였거나, 혹은 그들이 빌립의 고향 벱새다(헬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온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2]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을 찾아온 헬라인들은 자기들이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 예수를 뵈올 수 있도록 소개해주기를 요구하였다.
요 12: 22 예수께 여쭈니 -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말하였다.
1]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빌립은 헬라인들의 요구사항을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함께 예수에게 고하였다.
요 12: 23 영광을 얻을 때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그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것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바대로 이방인들이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때가 왔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즉 헬라인들의 방문은 이방인들의 구원의 때를 암시하는 것이다.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씀은 그의 개인적인 영화를 말함이 아니고 메시야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내포한 것이다.
구원의 갈증을 느낀 헬라인들이 찾아 온 마당에 있어서, 이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다.
이방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며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 성령의 강림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낮아지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그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셔서 그를 높이실 것이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굴복하게 하실 것이다.
* 빌 2: 9-11 –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만 된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P. 215-216).
12장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를 영화롭게 함과(1-8)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영화롭게 함(12-19), 헬라인 몇이 그를 베옵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다(20-33).
그러나 이 일들이 모두 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사건을 보여 줌과 관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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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움켜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꽃이고 열매라고 합니다.
오늘도 꽃피고 열매 맺는 행복한 하루 힘차게 만들어 가시길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