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 |||||
외눈박이물고기 처럼 살고싶다 외눈박이물고기 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함께 붙어다녔다는 외눈박이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있으면 그 혼자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싶다. -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물고기의 사랑' 전문 - 혹자들은 아니 더 정확히 문단의 주류 내지는 제도권내에 있는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류시화란 시인을 말할 때 '시적 상징이나 은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 아닌 시」'를 쓰는 시인으로 폄하하거나 대중의 감성만을 자극하는 상업시인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류시화 시인에 대하여 만큼은 이들의 평가와는 달리하고 싶다. 류시화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편안하게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야말로 어려운 상징어나 은유도 생략한 채 느낌으로 만으로도 읽혀지는 시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류시화 시인의 전부임을 알면 혹자들이 평하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詩라는 것이 꼭 상징어를 써야하고 메타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부적인 시인의 직관에 의하여 발견되는 사물이나 감정을 인간적인 감성을 순수하게 그려냈을 때 오히려 독자들에게 더욱 더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류시화란 시인을 높이 평가한다. 또 류시화 시인의 詩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도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 눈으로 발견되어 詩로 탄생한 詩語들 속엔 깊은 사색과 사물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그런 詩들이 萬萬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시인의 을 통해 그의 시를 감상해보자. 이 시는 '외눈박이물고기'란 정상적인 상태의 물고기는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2연의 첫 행에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라는 시행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런 비정상적인 외눈박이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한다. 사랑하고 싶다며 1연을 노래한다. 2연은 외눈박이물고기가 되고 싶은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정작 외눈박이 물고기는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기 위해 두 마리의 외눈박이물고기가 평생을 붙어서 살아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시인은 그 두 비정상의 외눈박이물고기는 두눈박이의 물고기들 보다 죽는 날까지 더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3연은 '우리'라는 복수대명사가 나온다. 그것은 시인과 다른 피아와의 일 수도 있고 외눈박이물고기처럼 사랑하지 못한 불특정의 독자들일 수도 있다. 그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외눈박이처럼 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랑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나길 희망하고 꿈을 꾼다. 4연은 '혼자' 있음으로, 혼자있는 순간부터 불완전한 물고기임을, 인간임을, 사랑임을 틀켜 버리므로 반드시 꼭 맞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외눈박이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목숨을 다해 사랑을 하고 싶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외눈박이물고기는 시인 자신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또 하나의 불완전한 사랑을 만나 온전해지고 싶다고 노래한다.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완전의 요소를 지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다른 詩처럼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노래했던 시인의 詩처럼 우리는 '외눈박이물고기의 사랑'을 찾기 위하여 사랑의 모르스 부호를 끊임없이 타전하며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상은 류시화님의 '외눈박이물고기의 사랑'에 대한 저의 감상문입니다. 이 시에 대한 비평을 하라면 이런 것이겠지요. 너무 감상적으로만 흐른다는 것이지요. 즉 현대시의 주류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진정한 비평의 '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즘 현대시의 주류는 산문적이고 낯설게 쓰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문단 경향에서 보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긍정적인 면이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편안하게 詩를 감상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詩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단정적으로 말을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詩의 정의는 어느 것으로도 제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세계는 시인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만들어진 詩世界는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고 평가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님이 원하시는 답변을 제대로 드렸나 모르겠네요. 그럼...열심히 공부하시길... |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때 당시에 어떤 분이 난데 없이 이 시 제목을 던져주고는
감상문 좀 올려달라고 하더군요.
황당했지만 (그래도 친절한 목어씨...) 그냥, 생각나는대로 주절,,,,주저리...
저도 한때 류시화 시인의 시를 즐겨 읽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