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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나, 그리고 돌멩이 / 김정태
나의 이 글은 내가 개별적으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에 기대어 있다. 그러니 내 개인의 서사이지 이 나라 역사를 들춤에 미치지 못한다. 한 시대를 관통하며 새겨진 무늬는 나이테처럼 각자의 몸에 쟁여져 있고 더러 옹이로 박혀 있겠지만 거대한 흐름에 모두 편입되지는 못한다. 개인이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다가 지층의 밑바닥에 돌멩이와 함께 매몰되기 일쑤다. 이 글도 어디쯤의 구비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태어나 두 살에 4·19를, 세 살엔 5·16을 보았다. 물론 그 현장에 있었다거나 직접 보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보니 그때 이 나라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다. 올려다 본 최정상엔 이데올로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4·19 때는 기저귀를 더럽혀 젊은 어머니의 바쁜 일손에 일조하고 있었을 것이고, 5·16 때는 궁한 대로 두어마디 나름의 생존을 위한 말을 익혀가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깃발을 그려본 것도 한참 후의 일이 될 것이다.
세상에 나와 보니 대한민국은 도무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아니었다. 58년 개띠, 59년 돼지띠, 60년 쥐띠로 이어지는 폭발적 탄생의 연대기는 그 수가 해마다 100만을 넘기고 있었다. 아직 어려 인식하지 못하면서 역사의 거대한 바퀴에 실려 비슷한 궤적을 따라가며 구경한 인생들이 수백만 명은 되는 것이다. 나도 그 시절의 수백만 중의 하나였으며 그들은 지금 60대의 중반에 걸쳐 젊은이도 노인도 아닌 어정쩡한 연배에 닿아있다.
1959년 내가 태어나던 때의 대한민국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나라였다. 내남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하게 가난했다. 그 중 몇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겠지만 내 주변의 거지반이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삶이란 것이 그저 세끼 밥이 해결된다고 온전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격과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하는데, 세 끼 밥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품격 있는 삶이 유지될 수는 없으며, 인격적인 삶을 입에 올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시간이 흘러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생의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물질적 삶은 조금씩 나아지긴 했다. 소득이 늘어나자 평등했던 빈곤은 구조화 되어갔고 그런 구조적 빈곤은 차츰 토착화의 길을 거치며 세습되어가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가난이 물질적 결핍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소외와 차별, 박탈감과 멸시가 동시에 추근거리는 것이다. 국가 전체의 경제발전에 따른 소득분배 등이 이루어지는 거대담론을 들추어 말하기에 나의 지식과 사상은 빈약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듣고, 보고, 겪은 것들을 나는 겨우 말할 수는 있다.
세 살 때 벌어진 일로 군복을 양복으로 갈아입은 이가 권좌에 앉아 ‘반공’, ‘멸공’을 국시로 삼았다지만 직접 본 것은 아니니 그때의 일을 자세히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다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했다고 입이 찢겨 살해당했다는 이승복은 나와 동갑내기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이었으니 그도 3학년에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야만적 폭력을 지휘하는 선두에는 항상 무장된 이념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나 승복이나 이념이 뭔지 사상이 뭔지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폭력이 두려워 싫은 걸 싫다고 했을 것이다. 열 살 된 승복이 애국심이 솟아나서 한 말도 아닐 것이고, 그들의 생각과 다른 이념의 깃발을 그들 앞에서 휘둘러 본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열 살 먹은 아이의 정직한 말이고 삶이라고 믿는다.
동갑내기 이승복의 죽음 이후 이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어린 우리들도 철저히 이념으로 무장되어져 갔다. ‘때려잡자 김일성.’ 동사와 고유명사로만 이루어진 이 단순한 문장은 내 유년시절 알고 있던 가장 참혹한 말이었고 지금도 서늘한 문장이다. 어린 아이들도 무엇을 어찌 하라고 하는 지는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어려운 단어를 모를 뿐이다. 그 어려운 단어, 이념으로 무장해야했던 어린 시절의 학교마다 시멘트로 소년의 동상이 세워지고, 옆에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앞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며 ‘한글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왜구를 무찔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인사를 하며 지나다녔다. 초등학교의 이러한 풍경 구도는 지금 60대의 앞뒤에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유년의 학교 모습이리라. 지금은 많은 학교가 폐교되어 동갑내기 승복의 모습도 두루뭉술한 윤곽만 남은 시멘트 덩어리로 풍화되었다. 다른 몇몇의 동상들은 자리를 옮겨 앉거나 잡초에 아랫도리가 묻힌 채 그대로 서있다.
동갑내기 이승복이 이념과 폭력에 지극히 개별적으로 항거했던 목소리는, 소년의 형상을 시멘트로 만들어 서슬 퍼런 국시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순진하지도 않다. 아이콘이 된 승복을 등에 업고 법령과 제도의 공적 조직은 교묘해져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방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고 더러는 생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 세월의 야만과 오욕,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항들이 포개지고 비벼져 당시의 역사는 흘러가고 있었던 거였다. 시골의 한 촌가에서 흙장난을 하며 지내던 그 시절에 이 나라의 현대사는 지나가고 있었다. 역사가 어디 영광과 자존만으로 이루어지던가.
‘역사’라는 군단장급이나 될법한 무거운 단어를 머리말에 두고 얕은 지식과 논리로 거대담론을 나눠보자는 말은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개별적으로 보고 겪은 것들도 이 나라에 존재했던 역사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겨우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내가 태어난 집도 초가집이었지만 마을의 다른 집들도 모두 초가집이었다. 마을에서 큰대문집으로 불리던 한 집만이 기와를 이고 있어 되레 어울리잖게 서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오리 쯤 걸어가면 나오는 읍내를 또래들과 몰려다닐 수 있을 때쯤에, 호떡은 5원이었고 짜장은 30원이었다. 50여 호의 시골 마을에 같은 해에 태어난 또래의 동무들이 스무 명 쯤 되었다.
그들 중 몇과 50환짜리 동전을 움켜쥐고 5원짜리 호떡을 사먹기 위해 오리 길을 고샅하나 지나듯 휑하니 다녀오곤 했다. 오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던 꼬불꼬불한 골목의 어떤 모퉁이에는 유년의 질감과 무늬가 흐린 기억으로 남아 있고, 지금껏 살고 있는 마을은 고난의 세월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다. 당시 귀한 대접을 받던 호떡을 조금씩 떼어 먹으며 신작로를 마다하고 들길을 따라 집으로 오곤 했다. 길 한쪽 편으로 나무 끝에 구름이 걸려있는 미루나무 숲길이 사열하듯 서 있었다. 숲길이 끝날 때쯤 동그란 호떡은 흐리게 떠 있던 낮달처럼 모양이 얇아지며 일그러지다가 이내 호떡을 쌌던 설탕물 배인 종이만 바람에 날아갔다. 조락凋落하는 나뭇잎에 아쉬움을 실려서. 어릴 적 정서를 기억해가면 상위권에 속하는 평등했던 빈곤의 기억이다.
내가 의식을 했든 못했든 4·19와 5·16은 이 나라 현대사에 존재하는 역사이다. 사실과 말하여지지 않는 침묵은 나란히 간다. 이 둘은 연년생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민 이복형제를 닮았다. 같은 어머니의 배를 의탁하지 않았으며 둘의 성격도 이질적이다. 비교하기에 무리가 따르겠지만 같은 배에서 나온 카인과 아벨 형제는 신의 사랑을 질투해서 큰일이 벌어졌다. 카인은 동생인 아벨을 돌로 쳐 죽였다. 이 나라에서는 동생이 형인 4·19를 죽였다. 신의 사랑을 질투한 것과 역사의 시대적 이념의 차이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보다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것을 구분지어 말하기에 나의 논리는 빈약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은 같지만, 우리의 역사에서는 아벨처럼 아주 죽지도 않았고 신을 부르지도 않았다. 다만 목숨만 부지한 채 들판이 아닌 길거리를 피로 물들이며 간신히 살아남았다. 사랑이 아니고 이념의 덩어리를 안고.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이 나라 현대사가 그런 것 같다. 나는 이 나라에서 동생이 이복형을 죽이고자 할 때 여지없이 기저귀를 차고 마루 아래 댓돌 위에서 놀고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거대한 이복형제의 난이 세월이 지나며 개별적 나와 뭐 그리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마는, 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지나며 내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역사는 한 시대에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치되 받아들이는 것은 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내게도 이러한 거대한 흐름은 지극히 사소함으로 개별적이다.
5·16으로 권좌를 잡은 이가 훗날 느닷없는 총성으로 20여년 앉아 있던 자리에서 넘어지던 그해 시월, 나는 대학 2학년이었다. 그 전날 밤에는 동아리 방에서 늦도록 엽서를 쓰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중간고사를 마치고 서클에서 독서수련회를 가기로 되어 있어 준비 중이었다. 밤이 깊도록 작성한 엽서는 동아리 방을 끝내 나서지 못했다. 나만 빈손으로 나와 경찰서의 긴 탁자에 쭈그리고 짧은 반성문을 쓰고 나왔다. 쓰라고 하니 쓰지만 반성을 할 대상을 내가 알지 못하니 길게 쓸 수가 없었다. 그들에 의해 못질 된 서클 방에도, 쫒기 듯 밀려간 전경 입대 전까지 십자가로 못질 된 각목을 걷어내지 못했다. 그가 느닷없이 권좌에서 내려앉으며 그 자리에 다시 오른 이가 세상을 피로 물들였듯, 나는 느닷없이 떠밀려 전투경찰에 입대해야 했다.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젊은 날의 길은 어느 날 눈에 익은 가던 길을 잃었고, 어떤 힘에 의해서 생겨난 길을 따라가야 했다. 가을도 아닌데 시들어 떨어지던 미루나무 잎처럼 허공을 빙빙 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나라 역사의 포괄적 흐름에 끼어 내 삶은 개별적으로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던 거였다.
억지로 불려간 전투경찰에서 흐릿하게 그려지던 내 이념과 사상은 모여진 집단과는 이질적이었다. 입대 전 따라 외치던 정의의 옷을 입은 구호나 항거는 입 밖에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소리를 내는 집단을 체포하고 해산하는 정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그들이 돌을 던지며 전진하면 뒤로 물러났고, 그들이 물러나면 가스를 분사하며 뒤를 따랐다. 그럴 때 날아온 돌은 바닥에 박혀 쪼개지며 더러 정강이에 꽂혔다. 그들을 따라다닐 일이 없는 날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쟁의 황망 중에 수병을 데리고 훈련을 했듯, 아스팔트 광장에서 훈련을 했다. 그 분이 했던 일자진一字陣 전술과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시가지 진압전술’로 이름을 바꿔서.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고 경찰간부들은 말했다. 이순신의 구국의 충정과 데모대 진압의 상관관계를 생각할 때 오금이 저리고 살이 떨렸다.
별 볼일 없는 나의 삶을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끼워 넣음은 내 버릇이 된 돌멩이 주워 모으기에 나름의 의미를 새겨 넣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역사와 돌멩이의 이질적 사소함이라니.
언제부터였다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지역을 다녀올 때 그 곳의 돌멩이를 하나 주워오는 버릇이 있다. 돌멩이는 어디든 널려 있다. 돌을 쓰임의 가치로 따진다면 귀한 돌도 있고 천한 돌도 있을 터다. 허나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를 굳이 쓰임새로 보지 않으면 그들은 평등하다. 나는 그 지역의 평등한 돌들 중 아무 것이나 하나 주워들고 온다. 여러 해 주워 나르다보니 집안 마당 한편에 돌무더기가 생겨났다. 전국 곳곳의 돌멩이 집합소이다.
도시에서 농촌에서, 바닷가에서 산 정상에서, 화약 연기 자욱하던 80년대 도회지의 어느 거리에서, 돌을 던지다 쫓기던 이가 헐떡이며 숨어들던 골목에서, 그렇게 모인 것들이 무더기를 이룬다. 주워 온 돌멩이의 평평한 면에는 어김없이 ‘태기泰紀 몇 년ㅇㅇ에서‘라는 배서를 안고 있다. 태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써온 치기어린 나 중심의 기원紀元이다.
내가 어릴 적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4·19와 5·16이 나와 주변을 스치고 갔듯, 주워온 돌멩이들도 그가 나고 누워있던 자리의 역사를 안고 있지는 않을까. 나이가 있을 것이고, 제가 처음 생겨난 고향을 떠나 멀리 옮겨져 와 그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어딘가에서 더러는 군홧발에 밟히고 더러는 사람의 손에 잡혀서 다른 사람에게 던져졌을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아스팔트에 처박히고 더러는 가루가 되어 화약연기와 비벼졌을 것이다. 세월을 함께한 돌들의 삶이 어디 그 뿐이었을까. 이념의 깃발을 날리며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어린 이승복의 머리를 찍은 돌도 그 곳 어디쯤에 아직 남아 있을 것 같다.
아주 오래전, 어느 부끄러운 왕조의 행렬을 바라보며 임금이 이마를 내리찍던 바닥에 괸 핏물이 제 몸을 물들이고, 끌려가던 어린 처녀의 발자국이 찍혀있지는 않을까. 돌들은 그러한 왕조 앞에서도 완강하게 침묵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더러는 산으로 올라 날개를 접고 산성 아래로 투신하여 적의 가슴을 찍고, 사직을 보존하려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면서 지금은 또 어느 왕조를 바라보고 있을까.
주워온 돌의 출처와 옮긴 날을 표기함에 서력기원으로 표기하지 않고 내 나름의 기원인 ‘태기’로 표현함은, 내 나이를 기준으로 연관지어 알아보기 쉽게 표현한 유치한 발상이니 너무 나무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이 단풍으로 한껏 들떠 있던 그해 시월의 어느 날, 느닷없는 총성이 서울의 한 안가에서 울려 퍼졌고, 직접적인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 같던 일에 내 젊은 날이 매달려 따라가고 있었다. 며칠 후,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소나무 숲이 우거진 경기도에 있는 산을 찾았었다. 옆에 보이는 호수는 맑고 사위는 조용했다. 솔숲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는, 나무와 돌과 바람이 포개지고 비벼져 기괴한 소리로 들렸다. 부끄러운 왕조의 울음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잎 사이를 용케 비집고 들어와 계곡의 이끼 낀 돌에 와 닿는 늦가을 햇볕이 그날은 참 서럽게 다가왔다. 여기저기 흩어져 불쑥불쑥 솟아 있는 바위에는 아직 떨어지지 못한 단풍이 아프게 박혀 있었다. 밤이 이슥토록 계곡을 떠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여전히 완강하게 침묵하며 이끼로 몸을 싸맨 돌들과 함께. 물속에 달과 새빨간 단풍이 제 색깔로 거꾸로 박혀있었다. 대중없이 널려 있는 돌멩이 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고 밤길을 밟았다.
세월이 꽤나 흘렀는데도 돌들은 제 발로 시대를 앞서 까불대지 않는다. 앉혀준 질서와 계통에 따라 모두 제 자리에 있다. 내가 사사로이 겪었던 이 나라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을법한 돌 하나가 집안의 돌무더기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겉면은 흐릿하지만 아직은 알아볼 수 있는 몇 글자가 박혀있다. ‘태기 21년 시월 하순, 남한산성 서문에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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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시민들의 일상사, 개인사를 담담하게 풀어가심이 오히려 읽는 사람 마음을 절절하게 하는군요.
제 삶도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를 개인의 삶과의 조화가 감탄스럽습니다. 59 돼지띠의 지난 역사가 온축된 글 동갑들은 전부 공감될 만한 글, 잘 읽었습니다.
김애중 선생님, 김잠출 선생님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빠져들어 읽었습니다. 제가 겪지 않아 자판기처럼 쉽게 접하고 쉽게 잊어 버리는 그 정도로만 알았던 내용들을 김정태 회장님의 글을 통해 시대의 상황들이 더욱 선명하게 꽂혔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