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 "/home/jnilbo/public_html/banner_include.php3"; ?>"20년을 진실 규명을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 많던 인권 변호사님들,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재야 민족문화단체인 '우리마당'을 이끌어 온 김기종(48ㆍ사진)씨. 그가 지난 해 10월19일 청와대 앞에서 분신자살 기도 후 고향인 광주로 내려와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11일 광주 북구 삼성병원에서 힘겹게 투병중인 김씨를 만나 왜 분신을 해야만 했는지, 밝혀야 한다는 진실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1988년 '우리마당'은 서울 올림픽을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통일문화큰잔치(위원장 고 문익환 목사)'를 기획했었죠. 하지만 통일잔치를 며칠 앞둔 그해 8월17일 새벽에 4명의 정체불명 사내로부터 피습을 당했습니다. 이때 두 명의 남직원이 각목으로 집단구타를 당하고 여대생이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른바 '우리마당 습격사건'이다.
사건 당시 평민당 등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국가가 개입된 조직적 범죄'라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수사기관들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 현재까지 사건 전말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씨는 기무사(옛 보안사)가 명칭을 바꾼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당시 보안사가 정보사와 함께 각종 정치테러를 일삼으면서 '우리마당 습격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겁니다. 표면으로 드러나면 문제가 커지니까 아예 덮어버릴 목적으로요."
이후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그는 또 하나의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당시 변호사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료 변론을 자청, 인연을 맺었다. 80년대 말 '우리마당'이 주최한 법률교실의 강사로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초청되면서 안면을 텄고 그 인연으로 무료변론을 맡게 된 것.
그러나 이후에도 피습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김씨는 참여정부 시절인 지난해 8월부터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이마저도 반응이 없자 김씨는 급기야 분신자살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시너를 들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 속옷을 휘발유에 적셔 입고 겉옷을 두른 채 그 자리에서 불을 붙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의경이 급히 달려와 소화기로 불을 꺼 목숨은 건졌는데 마음은 편칠 않았습니다. 제 죽음이 진실 규명의 촉매제가 되길 바랐는데…."
이후 김씨는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올 2월께 광주로 내려와 계속 치료를 받고 있다. 이유는 고향의 부모님 때문. "부모님이 북구 삼각동에 사시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로 문병오시는 게 죄스러웠어요. 나름대로 사회 정의를 올바로 세우는 데 청춘을 다 바쳤다고 자부하지만, 장가도 못간 자식이라 부모님 속도 많이 썩혔죠. 이젠 부모님 가까이서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피습사건에 대한 실체를 밝혀내겠다는 그의 각오는 여전했다.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질 그 날까지 전 싸울겁니다." 김씨는 다시한번 의지를 밝혔다.
'우리마당' = 1982년 서울 신촌에서 시작된 민족민중문화단체로 수많은 시국 사건과 시위가 이곳에서 준비됐다. 유홍준, 임진택씨 등의 강의와 판소리 공연이 펼쳐졌다. 고 이한열군의 장례식을 준비하기도 했던 이곳은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연합 등 시민단체의 산실로 유명하다.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71·사진) 변호사가 일본 대사한테 시멘트 조각을 던진 시민단체 ‘우리마당 독도지킴이’ 대장 김기종(50)씨 변호를 맡고 나서 눈길을 끈다.
21일 검찰과 법원에 따르면 박 변호사는 김씨 변호를 맡겠다는 선임계를 내고 구치소에 수감 중인 김씨를 만나는 등 정식 변론 활동에 착수했다. 박 변호사는 지난해 ‘박연차 게이트’ 사건 당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변호를 맡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한테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라”고 요구해 화제가 됐다.
한편 최근 경찰에서 김씨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허상구 부장검사)는 구속 상태인 김씨를 이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외국사절폭행,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김씨는 지난 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일 신시대 공동번영을 지향하며’라는 주제로 강연하던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한테 시멘트 조각 2개를 던졌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우리마당 김기종 선배가 일본대사에게 돌을 던졌다. 그저 몇 차례 면식이나 있고 인사 정도만 나누던 사람에게 선배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은 것은 어찌됐든 문화운동판의 선배라는 생각이 있어서다.
이 분은 예전에 일하던 단체에서 토론회 등을 열면 어느 주제든 간에 꼬박꼬박 출석해 과도한 질의로 참가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일부 수긍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곤 할 수 없었지만, 대개는 과도한 민족주의와 세월을 인내한 고집이 뒤엉킨 이해하기 어려운 장광설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어 자연스레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분신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마당 피습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몸에 불을 그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했다. 내가 특별히 무언가를 하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절박감을 드러내는 방식이 주는 아득한 거리감. 그건 모종의 불편함이었다. 나는 저 사람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았다는 씁쓸함. 목숨과 맞바꾸더라도 진상을 밝혀야겠다는 그 간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절함이 절절하게 와닿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이 토해내게 만드는 한숨. 일부 문화예술단체에서 모금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왠지 선뜻 나서 함께 할 맘이 생기지 않았다.(다시 생각해 보면 반성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우리마당 메일링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상당히 위중했던 지경까지 갔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회복이 빨랐던 모양이다. 그러다, 어제 신문기사에 다시 그의 이름이 나왔다. 독도지킴이 대장 김기종으로. 시게이에 도시노리 일본대사가 강연을 하는 도중, 독도와 관련된 편지를 전달하겠다고 나서 돌을 던졌단다.
또 다시, 비슷한 막막함. 속절없는 안타까움이 엄습한다. 아마도 그가 지금 인터넷 댓글에서 떠도는 것처럼 초딩들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얄팍한 맘에서 이번 일을 벌인 것은 아니리라. 최소한 그런 종류의 소영웅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닐거라 생각해 본다. 역시 그 나름의 절박감이 그런 방식으로 드러난 것일텐데. 어쩔 것인가. 도무지 와닿지 않는 그의 외롭고 아귀가 맞지 않는 싸움을.
우리마당 김기종 대표가 19일 오후 1시 28분경, 청와대 앞 사랑방 부근 분수대 근처에서 분신을 기도해 한강성심병원에 입원 중이다.
당시 김 대표는 인화물질을 휴대하지 않고 플래카드 등에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했으며, 이를 본 경찰들이 소화기를 이용해 불을 끈 뒤 곧바로 병원에 이송했다. 병원측에 따르면 김 대표는 온몸에 2∼3도의 화상을 입어 수일 경과를 지켜봐야 소생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는 지난 1988년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였던 우리마당 사무실에 북파공작원이 침투해, 자고 있던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서류를 훔쳐 달아났다며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해 줄 것을 줄 곧 요구해 왔다. 이와 관련 지난 2004년 12월 <시사저널>(788호)은 5.6공 시절 야당 정치인과 재야 인사의 정치테러에 가담했던 북파공작원 출신 이종일씨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이 이종일 씨를 비롯한 북파공작원들의 소행임을 폭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주째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김 대표는 이 사실을 주목받기 위해 결국 분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다다랐다.
김 대표가 분신한 청와대 앞은 인화성 물질을 반입하는 것이 검문검색 등을 통해 사전에 차단되는 까닭에, 김 대표는 플랜카드 등 불에 잘 붙는 물품을 이용하여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김 대표가 25년간 명맥을 유지해 온 우리마당은 80년대 초 창립해 역사 단절을 문화적 측면에서 극복하고자 민속문화 연구 및 보급 활동을 했다.
특히 우리마당은 '풍물','탈춤','국악','판소리' 등 우리 문화의 보급 속에서 자연스럽게 분단으로 빚어진 남북문화의 이질화를 해소하고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통일문화큰잔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마당은 '2차 통일문화큰잔치' 준비 도중 보안사부대가 보낸 북파공작원들에 의해 사무실을 피습당하면서 2차 대회가 좌절됐다.
한편, 김 대표는 평소 노무현 대통령, 김칠준 인권위 사무총장 등을 거론하면서 "우리마당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진실 규명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며 비판해 왔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이 집필한 저서 중에는 우리마당 주최로 열렸던 강연의 교재인 <제2기 새터주민교실 강연- 법의 사법및 입법과정,1993.9.13>이 있으며 김칠준 사무총장 또한 우리마당에서 주최한 생활법률교실에서 여성과 법문제로 강연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기종 대표의 유서 전문>
지난 실천 되짚으며, 남는 실천을 여러분께
‘놈’과 ‘사람’이라는 전라 경상의 지역 갈등에서 새롭게 깨달은 분단의 아픔을 씻고자, 전래 민족문화를 통한 동질성을 확보, ‘통일’ 꿈을 실천해 본 지난 과정은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공동 개최 주장은 무산되었지만, ‘통일문화큰잔치’ 행사 준비는 국위선양 못지않게 파생될 남북 갈등을 염려하며 마련한 소중한 자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통일문화큰잔치’ 준비 과정에서 당한 8월 17일 새벽의 ‘우리마당 피습사건’.
그 사건 발생 후 수사 기관과 언론, 국회는 웬일인지 사건 진실을 감추려고만 하고 있고, ‘우리마당’을 폐쇄시키려는 음모와 더불어 자행되는 당국의 끊임없는 탄압은 숱한 사업과 활동을 막바지에 거듭 무산시키고, 결국 많은 회원들을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버티겠다는 의지로 직간접 압박에 타협하지 않고 버텨온 20년째, 마당지기 어언 25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피습사건’ 진실규명 요구하는 청와대 앞 1인 시위 9주째를 핑계로 분신을 결행하는 저의 마지막 글입니다.
광주에서 성장하면서 부모님들 바램처럼 사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고자 목표했던 서울대 법대, 그러나 입시 실패로 시작된 서울 생활에서 접하는 숱한 사회 모순들은, 청년기에 접어든 저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즉 어떤 학습보다도 입시 실패가, 사회 모순 혁파의 뜨거운 실천 의지를 갖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막연했던 전라, 경상의 지역 갈등 모순에 대해 일찍 눈 뜨고, 아예 삼수 시절에는 함께 공부하는 아우들이 ‘놈과 사람’이라 호칭하면, 왜 썼는지 따졌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이용하는 세력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함께 ‘북한 놈’ 호칭을 대신하는 용어로써 "우리”라는 말을 찾아내고, “우리”를 통한 실천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광화문 일대의 유신정권 유지를 위한 모습에서 “통일”이 더욱 멀어져 가는 걸 목도하였고, ‘동서’ 지역감정이 존재하면 ‘남북’ 분단 역시 해소될 수 없다는 각성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라는 더불어 살아가는 민족과, 공동체 구현의 실천을 체득하였습니다.
물론 고시를 통해 사회지도자로써 실천하려는 명분을 다짐, 후기 성균관대 법대에 우선 입학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사회 모순을 헤쳐 나가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켜보았으나, 막상 제가 접하는 모순의 심각함은 보다 실천적인 책무를 가져주었을 따름입니다.
결국 입시 실패에 대한 자책감에 치를 떨며 대학생활과 함께 오기(?)로 꾸렸던 소위 네번째 재수 생활, 여기에서 만난 아우들, 이들과 함께 ‘바회’ 모임을 결성하여 모순을 토론하며 구렁텅이에 함몰되지 말고 보다 나은 앞날을 설계하자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회 현장 곳곳을 직접 찾아 다니게 되었고 우리문화 찾기, 야학교사, 청소년 상담교사, 예술소모임 간사활동 등등을 꾸준히 실천해보는 가운데, 명문대, 고시를 통한 실천 만을 모색했던 저에게, 새로운 방식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삼 확인되는 고향 광주의 민주화투쟁 아픔은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성찰케 하였고, 모두가 하나되는 ‘우리’와 모두의 만남과 나눔이 있는 터 ‘마당’을 확실히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며 반만년의 한겨레를 상징하는 ‘배달’이라는 필명을 사용, 구체적 여러 실천을 하게 됩니다.
결국 외세에 의존하며 그 첨병 역할을 하는 소위 시민사회단체들이 갖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았고, ‘신라화랑 어디가고 스카웃이 판을 치고, 보부상은 어디 가고 라이온스 판을 치나’라는 구호를 만들며,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자고 결심했던 실천이 오늘까지 “마당지기”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학 졸업장을 받는 날 부모님까지 속이고 고시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과다한 용돈을 요구, 신촌에 공간을 만들어 뜻을 같이하는 벗들과 “우리마당”을 개설, ‘마당지기’ 25년을 보낸 것입니다.
이 “우리마당”과 ‘마당지기’의 못다한 실천이 많은데도, 제가 삶을 마감하게 됨은 어인 일일까요?
물론 “우리마당”을 통해 그동안 이룬, 우리 사회 민주화와 통일에 기여한 여러 값진 성과와 보람은, 오늘 이렇게 삶을 마감하는 저에게 아무런 여한이 없음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제 스스로 구체적 책임과 실천을 직접 맡고 나서면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환경연합, 경실련, 민예총,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태동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역할)
하지만 민주화와 통일, 노동해방을 외치다 산화한 분들의 뜻을 잇는 활동에 매몰된 지난 시절을 되새기며, 저는 그 바탕인 “사회 정의”의 아쉬움을 절감하며, “통일문화열사”로써 제 삶을 마감해야 되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제가 그나마 조그마한 바램들을 여쭈고 싶습니다.
약간 건방질지 모르지만 아래의 세가지로 나누어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냉전 시절 당시의 ‘놈’과 ‘사람’이 아닌 남북동포 모두 한겨레인 “우리”가 하루빨리 될 수 있도록, 우선 풋내기 정치인들의 놀음에서 비롯된 ‘동서’, 즉 영호남의 지역적 갈등을 풀고 화합되어 봅시다!
민족 통일에 전념하고자 미력한 제가 전래 민족문화의 동질성 유지와 확보를 통해 하나됨을 실천하였고, 소중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부탁, 아니 자신 있게 당부 드리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자신들의 생활 현장에서 말이나 노래로만이 아닌 실천을 직접 모색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동서화합 차원에서 보다 확실히 통일을 준비하고자, ‘전라도’에서 “경상도” 독도로 호적을 옮기고, 우리 가슴의 38선을 걷어내기 위해, “독도 38번지”라도 일본으로부터 확실하게 지켜내고자 합니다. 또한 북녘의 청소년들을 정기적으로 “독도”에 초청하는 행사를 준비, 당국과 논의 중에 있었습니다)
둘째, ‘우리마당 피습사건’ 진상이 공개되었는데도 진실이 사회 일반에 공개되기를 꺼려하는 조바심으로,“우리마당”의 열정적 활동을 곳곳에서 직간접으로 조여왔던 공안 세력들의 음모는 타파되어야 합니다.
사건 발생 20여년째를 맞이한 오늘까지도, 수사결과에 대해 입 다물며 사회정의를 논하는 사법 당국, 사건을 열렬히 취재했던 언론인, 그리고 정국 변환에 따라 대응하자던 정치인, 인권변호사들 모두 오늘 저의 죽음을 계기로, 그 음모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깊이 각성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피습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를 촉구하며, 양심있는 시민들의 동참도 요구 드립니다.
특히 범인이 공개적 자백을 하였기 때문에 사건 규명보다도, 진실을 공개시키지 못한 이면에는 과연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확인하여 주십시오. 이는 후세에 절대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규명이 아니라 대충 넘기려는 기회주의(당시 모월간지 편집실 습격사건, 모일간지 부장 피습사건)가, ‘우리마당’ 김기종에게는 20여년 되도록 안 먹혔음을 오늘 이렇게 죽음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공안 당국이 스스로의 과오는 인정하고, 시대에 맞는 자기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확립하여,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역할 만을 수행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셋째, 마당지기를 하며 보낸 지난 25년간의 활동, 집안 장손의 역할은 못했지만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마당”이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문화적으로 달성한 소중한 활동 가치를 인정하신다면, 비록 저처럼 모든 걸 투신하지 못했을지라도, 청년학창 시절에 “우리마당” 회원으로 활동했었던 국회의원들만이라도 집결하여,“우리마당 설립에 관한 법” 같은 것을 입법해주시기를 감히 청원드립니다.
즉 “우리마당”이 당국의 엉터리 탄압을 벗어나 보다 합법적인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사회변화 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로써 실천을 할 수 있는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덧붙이는 말
민주화되었다는 국민, 참여정부 시절에도 제가 ‘우리마당’ 운동을 실행하면서 당했던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의 분신을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다면, 그 협작과 공작 과정들에 참여한 분들의 양심선언을 유도해 주십시오.
(참고로 9월 10일 ‘만남과 나눔’ 호외2에 실린 의문점들만 파헤쳐도 그 사연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1980년대 중반 ‘우리마당’같은 열린공간 없던 시절, 일반 활동가들의 분신을 상담하던 이들에게 왜 죽느냐, 죽는 목적이 무엇이냐며, 그들을 1인 시위, 단식농성 등을 지도했던 제가, 우연찮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단식농성 없이 곧바로 분신하는 아픔을 잘 이해하고, 진실규명에 동참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1987년 고생하고 촬영한 이한열 열사 장례식 필름 압류 아픔 속에서도 꾸준히 이북영화를 연구하였고, 1997년 ‘고구마 3개의 사랑’을 제작, 이북동포돕기에 실질적 기여한 ‘영화마당’ 대표 이경화 님과 충남 대천 ‘우리마당’ 지회장으로 활동했던 신돈 님에게 “우리마당‘ 운동의 제2대 마당지기로써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두 분에게 모든 권한과 의무를 맡김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분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행을 달리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 때문입니다. 1988년 8월 ‘피습사건’ 원인에 대한 언론보도 등으로 ‘보안사’가 “기무사”로 이름이 바뀌자,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시던 노무현, 이해찬 님 등도 군부의 짓이 명백하니까, 사건 진상규명은 시기를 적절히 대응하자는 말로 저를 달랬습니다. 그러면서 사건 배경은 당시 6월항쟁 이후 ‘우리마당’ 사무실을 비교적 수월하게 드나들었던(?) 경찰, 안기부와는 달리 올림픽을 목전에 둔 군부가 정보 수집 단계에서 문책 당하면서 이같이 엉뚱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합의를 도출하였습니다.
이후 ‘국회’ 국정조사 출석 요구에 응하는 등 꾸준히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결국 활동에 여러 제약, 예를 들면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고집으로 ‘민예총’ 창립에 동참 못한 아쉬운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소위 통일관계 시민단체연합 ‘민화협’, ‘615남측위’, ‘통교협’ 등의 창립과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군부정권 시절 관변 단체보다 더욱 심한 조직 간의 암투 탓에, 통일사업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연이어지고 있으며, 이에 격분한 저는 회의장에서 발언 도중 흥분하여 실신하는 등 심각한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 김기종은 그같은 소외와 냉대에도 통일운동을 하는 문화운동가로써, 통일관계 회의와 행사에 꾸준히 ‘우리마당’ 또는 ‘서울시민문화단체연석회의’를 대표해서 참가(가장 우수한 출석 등), 자신의 역할을 끝끝내 수행하고 있었음을 정말 마지막으로 자랑스럽게 부언합니다.]
@~면회후기 !!
의인 김기종선생 무죄방면을 위하여~함께노력하시다~!!
다물이~최근 법률신문에 기자가 되었답니다 ㅎㅎ..기자권력을 김기종선생면회하는데 사용했습니다.22일면회가 가능하다는 연락을받고 면회신청을 했더니~오전애 면회를 해서 면회는 못하고,면담신청을 했습니다.사법정의국민연대 본부장명함과 기자증을 재시하면서~구치소소장과 담당과장 면담취재 요청을 하였더니,사무실로 들어오라면서 냉커피를 맞나게먹으며~담당직원(교위)이 면담내용이 뭐냐길래~지금이 일제시대도 아니고,일대사 망언에 분개하여 돌맹이던져서 구속이되었는데~실정법으로야 이해하지만,,일반잡범들과는 다른대우가 있어야한다 했더니~교위말씀이 자기도 이해한다~07:37
면서,그런걱정은 안해도 된다 했습니다. 결국 소장 면담은어렵다 길래그럼 그분지병있는것은 아느냐했던니 모른다길래그럼선생님만알고 조치를부탁드린다 했더니~말씀잘하셨다면서,의무실통해 진료와 약처방받을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을 받고면담을 마쳤습니다~이상면회후기였습니다. (다물:010-6672-1615)
"우리마당 습격사건 실체 꼭 밝힐것"
include "/home/jnilbo/public_html/banner_include.php3"; ?>"20년을 진실 규명을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 많던 인권 변호사님들,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재야 민족문화단체인 '우리마당'을 이끌어 온 김기종(48ㆍ사진)씨. 그가 지난 해 10월19일 청와대 앞에서 분신자살 기도 후 고향인 광주로 내려와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11일 광주 북구 삼성병원에서 힘겹게 투병중인 김씨를 만나 왜 분신을 해야만 했는지, 밝혀야 한다는 진실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1988년 '우리마당'은 서울 올림픽을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통일문화큰잔치(위원장 고 문익환 목사)'를 기획했었죠. 하지만 통일잔치를 며칠 앞둔 그해 8월17일 새벽에 4명의 정체불명 사내로부터 피습을 당했습니다. 이때 두 명의 남직원이 각목으로 집단구타를 당하고 여대생이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른바 '우리마당 습격사건'이다.
사건 당시 평민당 등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국가가 개입된 조직적 범죄'라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수사기관들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 현재까지 사건 전말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씨는 기무사(옛 보안사)가 명칭을 바꾼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당시 보안사가 정보사와 함께 각종 정치테러를 일삼으면서 '우리마당 습격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겁니다. 표면으로 드러나면 문제가 커지니까 아예 덮어버릴 목적으로요."
이후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그는 또 하나의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당시 변호사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료 변론을 자청, 인연을 맺었다. 80년대 말 '우리마당'이 주최한 법률교실의 강사로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초청되면서 안면을 텄고 그 인연으로 무료변론을 맡게 된 것.
그러나 이후에도 피습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김씨는 참여정부 시절인 지난해 8월부터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이마저도 반응이 없자 김씨는 급기야 분신자살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시너를 들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 속옷을 휘발유에 적셔 입고 겉옷을 두른 채 그 자리에서 불을 붙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의경이 급히 달려와 소화기로 불을 꺼 목숨은 건졌는데 마음은 편칠 않았습니다. 제 죽음이 진실 규명의 촉매제가 되길 바랐는데…."
이후 김씨는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올 2월께 광주로 내려와 계속 치료를 받고 있다. 이유는 고향의 부모님 때문. "부모님이 북구 삼각동에 사시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로 문병오시는 게 죄스러웠어요. 나름대로 사회 정의를 올바로 세우는 데 청춘을 다 바쳤다고 자부하지만, 장가도 못간 자식이라 부모님 속도 많이 썩혔죠. 이젠 부모님 가까이서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피습사건에 대한 실체를 밝혀내겠다는 그의 각오는 여전했다.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질 그 날까지 전 싸울겁니다." 김씨는 다시한번 의지를 밝혔다.
오해준 기자 hcoh@jnilbo.com
'우리마당' = 1982년 서울 신촌에서 시작된 민족민중문화단체로 수많은 시국 사건과 시위가 이곳에서 준비됐다. 유홍준, 임진택씨 등의 강의와 판소리 공연이 펼쳐졌다. 고 이한열군의 장례식을 준비하기도 했던 이곳은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연합 등 시민단체의 산실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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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서울구치소에 계신 김기종동문을
서강석민동회장님과 면회를 다녀 왔습니다.
만나자마자 바깥에서 해야 할 일을 부탁하네요...
8월3일 국회에서 하기로 한 행사 등등...
사무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알아봐서 도와드리겠다고 하였지요.
독도수호 단체나 네티즌들이 일부 면회를 오셨다고도 합니다.
투석사건은 우발적인 것이라고 하시고,
그날 독도의 동도와 서도를 상징하는 의미로 콘크리트 덩이를
오른쪽과 왼쪽주머니에 넣어가셨다가 질문을 가로막자 던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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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분신의 휴유증이 있어 혼거방 생활이 불편하다고 하면서
독방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변호사와 상의하고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도 하였습니다.
현재 박찬종변호사와 황상현변호사(83법학)가 변호업무를 보고 있어서
오후에 황상현변호사가 접견을 가도록 연락을 하였는데,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겠습니다.
그리고 민동에서 영치금 10만원을 넣어드리고 왔습니다.
면회를 가실려면, 우선 1544-1155번으로 전화하셔서 가능 여부를 알아보시고
예약을 하신 뒤 가시면 훨씬 편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김기종동문 수번은 2227번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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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검찰과 법원에 따르면 박 변호사는 김씨 변호를 맡겠다는 선임계를 내고 구치소에 수감 중인 김씨를 만나는 등 정식 변론 활동에 착수했다. 박 변호사는 지난해 ‘박연차 게이트’ 사건 당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변호를 맡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한테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라”고 요구해 화제가 됐다.
한편 최근 경찰에서 김씨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허상구 부장검사)는 구속 상태인 김씨를 이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외국사절폭행,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김씨는 지난 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일 신시대 공동번영을 지향하며’라는 주제로 강연하던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한테 시멘트 조각 2개를 던졌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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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9 00:51
우리마당 김기종 선배가 일본대사에게 돌을 던졌다. 그저 몇 차례 면식이나 있고 인사 정도만 나누던 사람에게 선배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은 것은 어찌됐든 문화운동판의 선배라는 생각이 있어서다.
이 분은 예전에 일하던 단체에서 토론회 등을 열면 어느 주제든 간에 꼬박꼬박 출석해 과도한 질의로 참가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일부 수긍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곤 할 수 없었지만, 대개는 과도한 민족주의와 세월을 인내한 고집이 뒤엉킨 이해하기 어려운 장광설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어 자연스레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분신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마당 피습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몸에 불을 그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했다. 내가 특별히 무언가를 하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절박감을 드러내는 방식이 주는 아득한 거리감. 그건 모종의 불편함이었다. 나는 저 사람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았다는 씁쓸함. 목숨과 맞바꾸더라도 진상을 밝혀야겠다는 그 간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절함이 절절하게 와닿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이 토해내게 만드는 한숨. 일부 문화예술단체에서 모금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왠지 선뜻 나서 함께 할 맘이 생기지 않았다.(다시 생각해 보면 반성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우리마당 메일링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상당히 위중했던 지경까지 갔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회복이 빨랐던 모양이다. 그러다, 어제 신문기사에 다시 그의 이름이 나왔다. 독도지킴이 대장 김기종으로. 시게이에 도시노리 일본대사가 강연을 하는 도중, 독도와 관련된 편지를 전달하겠다고 나서 돌을 던졌단다.
또 다시, 비슷한 막막함. 속절없는 안타까움이 엄습한다. 아마도 그가 지금 인터넷 댓글에서 떠도는 것처럼 초딩들의 영웅이 되고자 하는 얄팍한 맘에서 이번 일을 벌인 것은 아니리라. 최소한 그런 종류의 소영웅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닐거라 생각해 본다. 역시 그 나름의 절박감이 그런 방식으로 드러난 것일텐데. 어쩔 것인가. 도무지 와닿지 않는 그의 외롭고 아귀가 맞지 않는 싸움을.
[출처] 닿지 않는 절박감, 독도지킴이 김기종|작성자 놀이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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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8일 프레스 센타에서 일본대사 면전에 돌맹를 던저
구속 수감중인 독도 지킴이 김기종님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
무더운 날씨에 감옥살이가 고통스러울 터인데도 껄껄 웃으며
피서왔다고 말하는 김기종님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게된 자세한 경위를 설명하며 자신의 의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부탁 하였습니다.
김기종님은 국치 백년을 맞아 독도 문제등
여러가지 사안을 수 차레 서면으로
일본 대사에게 질의 하였으나 아무런 답변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7월8일 프레스 센타에서 시게이 일본대사의
강연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의 독도 침탈에 항의하는 의미로
오른쪽 주머니에 동도, 왼쪽 주머니에 서도를
상징하는 작은 돌맹이 두개를 소지하고 강연에 참석하여 강연을 듣던 중
시게이 일본대사의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한일이 공동으로 대응 하자는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질의 신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첫번째 질의자로 선정된 김기종님은
"일본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 무었을 했느냐"
"북한을 제외한 한일 공동대응으로 동북아 평화가 이뤄질 수 있느냐"고
항변하는 중 주최측이 강제로 마이크를 빼앗자
"독도 가저가라" 소리치며 독도를 상징하는 동도와 서도를
단상에 던지는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김기종님의 말씀은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으며,
일본의 독도 자국영토 표기로 시작된 독도 침탈에 항의하는 마음으로
독도를 상징하는 동도와 서도 돌맹이를 던젔다고 합니다.
김기종님이 일본대사를 향해 던진
작은 돌맹이는 그냥 돌맹이가 아니고,
독도지킴이가 가지고 있는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한
가슴속의 분노였습니다.
무더운 삼복 더위를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김기종님께 힘찬 응원 바랍니다
[반민특위 엎어님의 글을 추가 합니다.]
독도지킴이!
애국자 김기종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셨습니다.
면회와 서신으로 응원바랍니다.
애국자 김기종을 석방하라!
안티MB 초심님과 일본대사관 망할넘에게 시멘트 부스러기 던졌다고
서울구치소에 구속된 김기종님 면회다녀왔습니다.~
찾아오는 분이 없으신것 같고,
단절된 공간에 갑지기 가두어지셔서인지 조금
안정감을 갖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애국자 ! 독도지킴이! 애국자 김기종님께 면회와 서신으로
많은이들이 응원하고 있음을 전해졌으면 합니다.
동북아평화하자던 일본대사의 발언 속내....
남,북 관계의 이간질을 통한 남한에서의 일본장악력을 높히기 위한
왜놈들의 간계가 더욱 분노스러웠던 것...
뉴스에도 나왔듯이 독도관련 항의와 질의를 왜놈대사관넘에게 수십번을 하였으나 ,
말한마디 답변 하나 없는 일대사관의 행정적 불성실과 무시하는 태도에 대한
항의도 있었으려니와..
또한가지 알려지지않은 것은
삼성이 주최한 동북아 평화를 주제로 한 학자중심이던 세미나에
일본대시가 이례적으로 참석해 발언하였고,
발언 내용도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한국과 일본이 협력.주도하자는 내용,
그 이면의 팩트는 북을 배재한 일본과 한국의 관계의질을 높히는것.
결국 남힌에 대한 일본의 장악력을 더욱 높히고,
북을 고립시키며 남북공조를 배제한 채 남한을 일본화한 정치경제권력으로
동북아에 데뷔시키겠다는 속내가 보이는 발언으로...
일본대사가 공분을 샀고,
김기종씨는 이 발언에 대한 항의 질문을 하던중
발언 중간에 저지를 당하였으며,
이에 그간의 울분과 분노로
평소 주머닝 가지고 다니던,
동도, 서도를 상징하는 독도 시멘트 모형을 우발적으로 집어던졌다고
당시 정황을 알려주셨습니다.
단순히 독도문제만이 아니라,
남,북 관계의 이간질을 통한 남한에서의 일본장악력을 높히기 위한
왜놈들의 간계가 더욱 분노스러웠던 것이지요.
(잘알려진바와 같이 97년 IMF이후 사채시장 , 금융자본 일본자금 싹쓸이한 상황과
아키히로 정권이 남한을 잡은 이후 정치, 군사, 문화적 잠식이 보여주듯 ...
-담담당당님의 글을 참조)
찾으시는 분이 거의 없으십니다.
애국자 ! 독도지킴이! 애국자 김기종님께 면회와 서신으로
많은이들이 응원하고 있음을 전해졌으면 합니다.
군포시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2227번 : 김기종
예약 전화번호 : 031-423-6100 연결후 0번 또는 9번
교통편 : 전철 4호선 인덕원역 3번출구로 나와서
5번,6번 버스타고 3정거장 서울구치소앞
뻘소리 강연하던 日대사에 시멘트 뭉치 던져...
독도 지킴이 김기종을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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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중 기자
"민주와 통일을 사칭하며, 당국의 음모에 타협과 협잡을 일삼는 자들의 양심을 회복시켜 주십시요" - 김기종 대표의 유서 中
우리마당 김기종 대표가 19일 오후 1시 28분경, 청와대 앞 사랑방 부근 분수대 근처에서 분신을 기도해 한강성심병원에 입원 중이다.
당시 김 대표는 인화물질을 휴대하지 않고 플래카드 등에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했으며, 이를 본 경찰들이 소화기를 이용해 불을 끈 뒤 곧바로 병원에 이송했다. 병원측에 따르면 김 대표는 온몸에 2∼3도의 화상을 입어 수일 경과를 지켜봐야 소생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는 지난 1988년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였던 우리마당 사무실에 북파공작원이 침투해, 자고 있던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서류를 훔쳐 달아났다며 이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해 줄 것을 줄 곧 요구해 왔다. 이와 관련 지난 2004년 12월 <시사저널>(788호)은 5.6공 시절 야당 정치인과 재야 인사의 정치테러에 가담했던 북파공작원 출신 이종일씨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이 이종일 씨를 비롯한 북파공작원들의 소행임을 폭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주째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김 대표는 이 사실을 주목받기 위해 결국 분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다다랐다.
김 대표가 분신한 청와대 앞은 인화성 물질을 반입하는 것이 검문검색 등을 통해 사전에 차단되는 까닭에, 김 대표는 플랜카드 등 불에 잘 붙는 물품을 이용하여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김 대표가 25년간 명맥을 유지해 온 우리마당은 80년대 초 창립해 역사 단절을 문화적 측면에서 극복하고자 민속문화 연구 및 보급 활동을 했다.
특히 우리마당은 '풍물','탈춤','국악','판소리' 등 우리 문화의 보급 속에서 자연스럽게 분단으로 빚어진 남북문화의 이질화를 해소하고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통일문화큰잔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마당은 '2차 통일문화큰잔치' 준비 도중 보안사부대가 보낸 북파공작원들에 의해 사무실을 피습당하면서 2차 대회가 좌절됐다.
한편, 김 대표는 평소 노무현 대통령, 김칠준 인권위 사무총장 등을 거론하면서 "우리마당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진실 규명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며 비판해 왔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이 집필한 저서 중에는 우리마당 주최로 열렸던 강연의 교재인 <제2기 새터주민교실 강연- 법의 사법및 입법과정,1993.9.13>이 있으며 김칠준 사무총장 또한 우리마당에서 주최한 생활법률교실에서 여성과 법문제로 강연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실천 되짚으며, 남는 실천을 여러분께
‘놈’과 ‘사람’이라는 전라 경상의 지역 갈등에서 새롭게 깨달은 분단의 아픔을 씻고자, 전래 민족문화를 통한 동질성을 확보, ‘통일’ 꿈을 실천해 본 지난 과정은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공동 개최 주장은 무산되었지만, ‘통일문화큰잔치’ 행사 준비는 국위선양 못지않게 파생될 남북 갈등을 염려하며 마련한 소중한 자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통일문화큰잔치’ 준비 과정에서 당한 8월 17일 새벽의 ‘우리마당 피습사건’.
그 사건 발생 후 수사 기관과 언론, 국회는 웬일인지 사건 진실을 감추려고만 하고 있고, ‘우리마당’을 폐쇄시키려는 음모와 더불어 자행되는 당국의 끊임없는 탄압은 숱한 사업과 활동을 막바지에 거듭 무산시키고, 결국 많은 회원들을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버티겠다는 의지로 직간접 압박에 타협하지 않고 버텨온 20년째, 마당지기 어언 25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피습사건’ 진실규명 요구하는 청와대 앞 1인 시위 9주째를 핑계로 분신을 결행하는 저의 마지막 글입니다.
민주와 통일을 사칭하며, 당국 음모에 타협과 협잡을 일삼는 자들의 양심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4340(2007)년 10월 19일 김 기 종 드림
[김기종의 마지막 남기는 글]
광주에서 성장하면서 부모님들 바램처럼 사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고자 목표했던 서울대 법대, 그러나 입시 실패로 시작된 서울 생활에서 접하는 숱한 사회 모순들은, 청년기에 접어든 저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즉 어떤 학습보다도 입시 실패가, 사회 모순 혁파의 뜨거운 실천 의지를 갖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막연했던 전라, 경상의 지역 갈등 모순에 대해 일찍 눈 뜨고, 아예 삼수 시절에는 함께 공부하는 아우들이 ‘놈과 사람’이라 호칭하면, 왜 썼는지 따졌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이용하는 세력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함께 ‘북한 놈’ 호칭을 대신하는 용어로써 "우리”라는 말을 찾아내고, “우리”를 통한 실천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광화문 일대의 유신정권 유지를 위한 모습에서 “통일”이 더욱 멀어져 가는 걸 목도하였고, ‘동서’ 지역감정이 존재하면 ‘남북’ 분단 역시 해소될 수 없다는 각성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라는 더불어 살아가는 민족과, 공동체 구현의 실천을 체득하였습니다.
물론 고시를 통해 사회지도자로써 실천하려는 명분을 다짐, 후기 성균관대 법대에 우선 입학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사회 모순을 헤쳐 나가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켜보았으나, 막상 제가 접하는 모순의 심각함은 보다 실천적인 책무를 가져주었을 따름입니다.
결국 입시 실패에 대한 자책감에 치를 떨며 대학생활과 함께 오기(?)로 꾸렸던 소위 네번째 재수 생활, 여기에서 만난 아우들, 이들과 함께 ‘바회’ 모임을 결성하여 모순을 토론하며 구렁텅이에 함몰되지 말고 보다 나은 앞날을 설계하자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회 현장 곳곳을 직접 찾아 다니게 되었고 우리문화 찾기, 야학교사, 청소년 상담교사, 예술소모임 간사활동 등등을 꾸준히 실천해보는 가운데, 명문대, 고시를 통한 실천 만을 모색했던 저에게, 새로운 방식의 현장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삼 확인되는 고향 광주의 민주화투쟁 아픔은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성찰케 하였고, 모두가 하나되는 ‘우리’와 모두의 만남과 나눔이 있는 터 ‘마당’을 확실히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며 반만년의 한겨레를 상징하는 ‘배달’이라는 필명을 사용, 구체적 여러 실천을 하게 됩니다.
결국 외세에 의존하며 그 첨병 역할을 하는 소위 시민사회단체들이 갖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았고, ‘신라화랑 어디가고 스카웃이 판을 치고, 보부상은 어디 가고 라이온스 판을 치나’라는 구호를 만들며,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자고 결심했던 실천이 오늘까지 “마당지기”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학 졸업장을 받는 날 부모님까지 속이고 고시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과다한 용돈을 요구, 신촌에 공간을 만들어 뜻을 같이하는 벗들과 “우리마당”을 개설, ‘마당지기’ 25년을 보낸 것입니다.
이 “우리마당”과 ‘마당지기’의 못다한 실천이 많은데도, 제가 삶을 마감하게 됨은 어인 일일까요?
물론 “우리마당”을 통해 그동안 이룬, 우리 사회 민주화와 통일에 기여한 여러 값진 성과와 보람은, 오늘 이렇게 삶을 마감하는 저에게 아무런 여한이 없음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제 스스로 구체적 책임과 실천을 직접 맡고 나서면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환경연합, 경실련, 민예총,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태동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역할)
하지만 민주화와 통일, 노동해방을 외치다 산화한 분들의 뜻을 잇는 활동에 매몰된 지난 시절을 되새기며, 저는 그 바탕인 “사회 정의”의 아쉬움을 절감하며, “통일문화열사”로써 제 삶을 마감해야 되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제가 그나마 조그마한 바램들을 여쭈고 싶습니다.
약간 건방질지 모르지만 아래의 세가지로 나누어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냉전 시절 당시의 ‘놈’과 ‘사람’이 아닌 남북동포 모두 한겨레인 “우리”가 하루빨리 될 수 있도록, 우선 풋내기 정치인들의 놀음에서 비롯된 ‘동서’, 즉 영호남의 지역적 갈등을 풀고 화합되어 봅시다!
민족 통일에 전념하고자 미력한 제가 전래 민족문화의 동질성 유지와 확보를 통해 하나됨을 실천하였고, 소중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부탁, 아니 자신 있게 당부 드리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자신들의 생활 현장에서 말이나 노래로만이 아닌 실천을 직접 모색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동서화합 차원에서 보다 확실히 통일을 준비하고자, ‘전라도’에서 “경상도” 독도로 호적을 옮기고, 우리 가슴의 38선을 걷어내기 위해, “독도 38번지”라도 일본으로부터 확실하게 지켜내고자 합니다. 또한 북녘의 청소년들을 정기적으로 “독도”에 초청하는 행사를 준비, 당국과 논의 중에 있었습니다)
둘째, ‘우리마당 피습사건’ 진상이 공개되었는데도 진실이 사회 일반에 공개되기를 꺼려하는 조바심으로,“우리마당”의 열정적 활동을 곳곳에서 직간접으로 조여왔던 공안 세력들의 음모는 타파되어야 합니다.
사건 발생 20여년째를 맞이한 오늘까지도, 수사결과에 대해 입 다물며 사회정의를 논하는 사법 당국, 사건을 열렬히 취재했던 언론인, 그리고 정국 변환에 따라 대응하자던 정치인, 인권변호사들 모두 오늘 저의 죽음을 계기로, 그 음모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깊이 각성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피습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를 촉구하며, 양심있는 시민들의 동참도 요구 드립니다.
특히 범인이 공개적 자백을 하였기 때문에 사건 규명보다도, 진실을 공개시키지 못한 이면에는 과연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확인하여 주십시오. 이는 후세에 절대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규명이 아니라 대충 넘기려는 기회주의(당시 모월간지 편집실 습격사건, 모일간지 부장 피습사건)가, ‘우리마당’ 김기종에게는 20여년 되도록 안 먹혔음을 오늘 이렇게 죽음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공안 당국이 스스로의 과오는 인정하고, 시대에 맞는 자기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확립하여,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역할 만을 수행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셋째, 마당지기를 하며 보낸 지난 25년간의 활동, 집안 장손의 역할은 못했지만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마당”이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문화적으로 달성한 소중한 활동 가치를 인정하신다면, 비록 저처럼 모든 걸 투신하지 못했을지라도, 청년학창 시절에 “우리마당” 회원으로 활동했었던 국회의원들만이라도 집결하여,“우리마당 설립에 관한 법” 같은 것을 입법해주시기를 감히 청원드립니다.
즉 “우리마당”이 당국의 엉터리 탄압을 벗어나 보다 합법적인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사회변화 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로써 실천을 할 수 있는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덧붙이는 말
민주화되었다는 국민, 참여정부 시절에도 제가 ‘우리마당’ 운동을 실행하면서 당했던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의 분신을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다면, 그 협작과 공작 과정들에 참여한 분들의 양심선언을 유도해 주십시오.
(참고로 9월 10일 ‘만남과 나눔’ 호외2에 실린 의문점들만 파헤쳐도 그 사연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1980년대 중반 ‘우리마당’같은 열린공간 없던 시절, 일반 활동가들의 분신을 상담하던 이들에게 왜 죽느냐, 죽는 목적이 무엇이냐며, 그들을 1인 시위, 단식농성 등을 지도했던 제가, 우연찮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단식농성 없이 곧바로 분신하는 아픔을 잘 이해하고, 진실규명에 동참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1987년 고생하고 촬영한 이한열 열사 장례식 필름 압류 아픔 속에서도 꾸준히 이북영화를 연구하였고, 1997년 ‘고구마 3개의 사랑’을 제작, 이북동포돕기에 실질적 기여한 ‘영화마당’ 대표 이경화 님과 충남 대천 ‘우리마당’ 지회장으로 활동했던 신돈 님에게 “우리마당‘ 운동의 제2대 마당지기로써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두 분에게 모든 권한과 의무를 맡김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분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행을 달리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 때문입니다. 1988년 8월 ‘피습사건’ 원인에 대한 언론보도 등으로 ‘보안사’가 “기무사”로 이름이 바뀌자,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시던 노무현, 이해찬 님 등도 군부의 짓이 명백하니까, 사건 진상규명은 시기를 적절히 대응하자는 말로 저를 달랬습니다. 그러면서 사건 배경은 당시 6월항쟁 이후 ‘우리마당’ 사무실을 비교적 수월하게 드나들었던(?) 경찰, 안기부와는 달리 올림픽을 목전에 둔 군부가 정보 수집 단계에서 문책 당하면서 이같이 엉뚱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합의를 도출하였습니다.
이후 ‘국회’ 국정조사 출석 요구에 응하는 등 꾸준히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결국 활동에 여러 제약, 예를 들면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고집으로 ‘민예총’ 창립에 동참 못한 아쉬운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소위 통일관계 시민단체연합 ‘민화협’, ‘615남측위’, ‘통교협’ 등의 창립과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군부정권 시절 관변 단체보다 더욱 심한 조직 간의 암투 탓에, 통일사업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연이어지고 있으며, 이에 격분한 저는 회의장에서 발언 도중 흥분하여 실신하는 등 심각한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 김기종은 그같은 소외와 냉대에도 통일운동을 하는 문화운동가로써, 통일관계 회의와 행사에 꾸준히 ‘우리마당’ 또는 ‘서울시민문화단체연석회의’를 대표해서 참가(가장 우수한 출석 등), 자신의 역할을 끝끝내 수행하고 있었음을 정말 마지막으로 자랑스럽게 부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