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의 추억
입춘, 우수가 지나면 대동강물도 풀린다고 하지만 겨울은 정녕 이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려는양 아직은 차가운 바람소리에 살며시 찾아온 봄 정경은 올똥 말똥 머뭇거린다. 그렇고 보니 어느새 이해도 두 달이 서서히 지나간다. 2월은 겨울의 끝자락 봄이 오는 길목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가야만 하는 겨울이 정녕 저 혼자는 가기 싫어선지 오늘도 맥없는 눈 흘김으로 구례 산수유골 양지바른 터울에 산수유나무 촉새마져 더디게 피려는 눈치가 보인다. 엊그제 인가는 꽃샘추위로 강원도 산간지방에선 폭설까지 내려 사람들이 거동하기에 매우 불편하다고 하니 말해 부엇 하랴 싶다내 맘같아선 작년 가을엔가 강남에 갔던 제비야 어서 어서 돌아와 이 땅에따스한 봄볕 불어다오 “라는 말을 남기고싶다.
우리 광평마을은 지리산자락에서 화엄사 계곡을 지나 흐르는 물이 우리마을 동쪽에 있는 마산천을 지나면서 섬진강으로 흐르고 있다. 이 마산천을 중심으로 우리 마을인 광평과 상사마을이 나뉘어진다. 지금은 하천 제방이나 하상이 잘 다듬어져 보기가 좋았지만 그 옛날 사오십년전만해도 하천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비가 조금만 많이와도 하천물이 범람 둑 너머 농토는 해마다 흙탕물 뒤범벅 일 때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내 어린시절에 해마다 정월 대보름전날이면 이 마산천을 중심으로 우리 마을과 상사마을은 불 싸움을 한다. 펑퍼짐한 하천을 가운데 두고 촘촘히 구멍 뚫린 깡통에다가 관솔가지를 넣어 불을 지펴 뱅뱅 돌리면 금새 깡통에선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원을 그린다. 불싸움은 어느마을에서 돌리는 불꽃이 더 잘 타며 밝은지 또 그 숫자가 많은지를 놓고 밤새도록 싸움을 한다.
또 그 시절엔 농업이 1차 산업이었기에 논, 밭이 우선이었다. 보름전날이면 너나 할것없이 논두렁 밭두렁 잡초태우기가 일상화되었다. 논 두렁 잡풀과 벌래를 불로태우는 일인데 평소에 불조심 하라고 그토록 귀에 닳도록 당부하던 어머님말씀도 그날만은 성냥을 주면서 불놀이 하라고 하신모습은 오랜 지금와서 생각헤보니 그립다가 못해 애닯기까지 한다.
지금은 물질팽배의 시대로 먹을것이 흔해빠진 시대 쌀 1되박 가격이 껌값도 채 안되는 시대지만 그 시절엔 쌀농사를 많이 짓고 살알도 수입원이 대부분 농사지어 5일시장에 내다 팔아야만 돈맛을 보는 시대라 돈이 참 귀했다. 그러나 아무리 먹을 것이 귀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엔 정녕 이웃간 오손도손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정월대보름 전날이면 우리집은 어김없이 어머님께서는 보기에도 커다란 떡시루에다가 흰 찹쌀과 감말랭이, 밤말랭이등 오곡을 시루안에 가득히 넣고 솥과 시루사이엔 하얀 찹쌀가루로 빈틈없도록 봉인을 하여 장작불로 오랜 시간불을 지펴 찰밥을 지으셨다.
그 찰밥은 대보름날 아침에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난 후 온 식구가 방에 둘러앉아 정월 보름밥을 먹었다. 그 중에서도 난 들깨가루를 듬북넣고 끓인 호박말랭이나물하고 두부국, 토란대잎 그리고 평소엔 먹기 힘든 김을 찰밥에 싸먹던 일들이 제일 생각이 많이난다.
온 식구가 아침을 맛있게 먹고 나면 이제는 친척집과 이웃간에 찰밥을 나눌차례이다. 우선 한동네 살고 있는 세 당숙집을 비롯해 우리집과 토담 사이로 이웃을 하고 있는 위,아래 가까운 사람들하고 음식을 나눈다. 그 중에서도 안 골목에 사시는 막내 당숙집 하고는 사촌간의 친척이지만 피를 나눈 친 형제나보다 더 가까이 지냈는데 특히 당숙모님은 정이 많았던 분으로 우리집 대,소사 일들이 있을때면 어머님이 먼저 부르셔서 함께 일을 하셨다. 참 우리집일 많이 하고 돌아가신분으로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늘 당숙모님이 못내 그립다.
지금은 모두가 15년전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이지만 그 시절 참으로 가진게 없어 고달픈 삶들을 사신 분들이었지만 그분들에겐 그래도 이웃간에 돈독한 정과 나눔의 미덕이 있었고 피보다 더 진한 정이 있었기에 어쩌면 오늘 나에게 나눔의 정을 간직하게 했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물질만능시대에 살면서도 이웃간 따스한 정을 나누기는커녕 집들이 토끼장처럼 칸칸이 가로막혀 한동네 한 지붕아래 10년을 함께살았는데도 이웃집 사람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대 도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모습들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
지난 2월초 구정 무렵의 일이다. 아내는 해마다 설 명절이 다가오면 그전에 해았던 식으로 떡국이며 떡이며 설빔 음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며칠전부터 걱정을 하며 음식을 만들기에 분주하게 웁직이는 모습이지만 언젠가부터 이러한 풍습도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식습관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한다.
나에겐 세 아들에 두 며느리가 있는데 지난 설 즈음에든가 며느리들과 아내가 나눈 대화가운데 올 설에는 떡국도 조금만 하고 떡은 아예 누가 먹지도 않으니 하지도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애들이 인스턴트식품, 가공식품을 사가지고 온다고 한다. 설 명절에 무슨 인스턴트 식품이며 가공식품이랴 하지만 그건 아마도 저자가 살아왔던 구시대 사람들의 고정관념인가 싶다. 애들은 지난 설날 각종 인스턴트에 가공식품들을 여러 보따리 가져와 떡을 대신 했으니 참 세월도 변했고 시절도 많이 변했다고나 할까?
사회구조가 농경사회에서 최첨단 정보화사회로 급변하면서 핵가족이 늘더니만 이제는 쌀 소비마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우리나라 주식은 쌀인데 언젠가부터 각종 인스턴트와 가공식품이 주식으로 변한지 오래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 우리나라 국민1인당 쌀 소비량은 137kg, 1985년엔128kg에 달했던 것이 2005년엔 80,7kg, 2010년엔73kg로 줄어들더니 급기야 2015년말엔63kg으로 한사람이 1년내 쌀 한가마니(80kg)도 못 먹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와 반면 우리나라 외식산업은 저성장기조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늘어 작년말 800억달러(약 80조원) 에 이른다고 한다. 쌀 소비량이 크게 줄어드니 쌀값 또한 한가마(80kg) 140,000원에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내 이린 시절 쌀 한 됫박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쌀 한가마니는 웬만한 기술노동자 하루 품삯도 못되니 누가 농사를 지으려 하겠는가? 참 세월도 많이 변했다. 쌀밥 한 끼니 실컷 먹는게 소원이기도 했던 내 어린시절 고달프고 힘겨운 세상을 살아왔던 지난날을 생각을 하니 웬지 맘이 침울해진다.
이제 또 좋으나 굳으나 올 한해 농사철이 서서히 다가온다. 옛말에 農者 天下之大本이라고 하지만 지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먼저 걱정부터 앞선다. 대보름달은 이 밤도 예나 지금이나 휘영청 밝기만 한데 .....
2016. 2. 22 대모름날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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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보름이라고 이렇게 글 쓸 여유를 지니고 사시는 우리 선생님...
부럽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항상 가슴이 뜨겁게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계속 좋은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