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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1) 독립 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든 윤봉길
윤봉길이 일제의 민족적 압박에 분개하며 복수를 다짐하게 된 것은 스승 성주록을 통해 참여하게 된 유교부식회의 영향도 컸다. 유교부식회는 홍주 의병장 김복한의 유지를 계승한 단체로 유교를 진흥시켜 ‘대공(大公)’, 혹은 ‘대동(大同)’ 세계 건설을 목적으로 ‘시대에 적합한 충의심을 앙양’하고자 했다.
당시 유교부식회의 기관지 〈인도(人道)〉를 간행했던 김은동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미 1928년경 대한독립군단의 상하이 의거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이흑룡으로부터 국외독립운동의 형세를 알고 있던 윤봉길은 이와 같은 상황에 자극받아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월진회 동료들이 마련해준 여비 50원을 품에 안은 그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귀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훗날 그가 쓴 유서에는 당시의 심경이 다음과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 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으로 적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 속에 들어가면 무소용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렇지만 윤봉길의 행보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선천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한 달여 뒤에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만주에서 대한독립군 김태식, 한일진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만주의 동포들을 위해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펼치기도 했다.
1930년 8월,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공근의 집에 머물며 박진이 운영하던 말총모자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했다. 이때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그해 12월에는 칭다오에 가서 이듬해 여름까지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번 돈 50원을 집에 송금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이상이 부모형제나 처자에 대한 사랑보다 중요하다면서 나름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2)홍커우 공원의 쾌거
1931년 7월, 일제는 만보산사건을 일으켜 한중 양국민의 민족감정을 유발한 다음 그해 9월 급거 만주를 침략하면서 마수를 드러냈다. 그 소식을 들은 윤봉길은 상하이로 가서 조국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모색하게 된다.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의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했다가 실패했다. 새삼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타오른 윤봉길은 공동조계 내에 있던 일본인 거리에서 야채상을 하면서 적정을 파악하던 도중 임시정부 지도자 백범 김구를 만나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1932년, 상하이사변으로 일본의 야욕이 구체화되자 김구는 상하이에 있는 일제의 군기창고를 폭파하려는 목적으로 윤봉길 등 6명의 애국단원을 하역인부로 투입했다. 그러나 폭탄 제조를 맡았던 상하이병공창 주임 김홍일의 작업이 지연되고, 그 와중에 일본과 중국이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거사의 실행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기회가 금세 찾아왔다. 상하이일일신문에서 일제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인 1932년 4월 29일에 홍커우공원에서 전승축하기념식을 열 것이라고 보도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에서는 김구의 제안에 따라 폭탄투척거사를 결정했다. 이때 거사에 자원한 윤봉길은 4월 26일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당시 윤봉길은 거사에 만전을 기하기 위에 27일과 28일, 양일간 홍커우공원을 답사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때맞춰 김홍일로부터 수통형과 도시락형 두 개의 폭탄이 입수되었다. 이윽고 거사 당일인 29일이 되자 그는 김구와 마지막 아침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새 시계와 김구의 헌 시계를 바꾸어 차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날 오전 홍커우공원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경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하지만 양복과 스프링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있던 윤봉길은 그들의 경비망을 뚫고 단상 가까이에 다가가 행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단상 위에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 상하이총영사 무라이 등이 도열했다.
오전 11시 40분경, 식순에 따라 무라이 총영사의 축사에 이어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제창되었다. 기회를 엿보던 윤봉길은 그 노래가 끝나는 순간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내고 안전핀을 뽑은 다음 단상 위에 집어던졌다.
폭탄은 굉음과 함께 불꽃이 일어나면서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했다. 그로 인해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가 치명상을 입었고 노무라 중장은 한쪽 눈을 잃었다. 우에다 중장과 시게미츠 공사, 무라이 총영사,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거사 직후 식장을 빠져나가려다 일본군 호위병 고모토에게 붙잡힌 다음 주변 사람들에게 집탄구타를 당했고, 헌병대로 연행되어 모진 고문까지 받았다. 그의 의거로 인해 자존심을 구긴 일제는 즉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범 색출에 돌입했다. 그 결과 프랑스조계에 거주하고 있던 안창호 등 12명의 조선인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본의 주요 신문들은 위대한 인물들이 희생당했다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국제연맹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이만스 의장과 영국 외상 사이먼을 비롯한 각국 대표들이 앞 다투어 일본에 조전을 보냈다. 그렇지만 교전당사국이었던 중국의 반응은 그들과 정반대였다. 중국인들은 만보산사건으로 인해 그 동안 백안시하던 한국인들의 빛나는 투쟁성과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특히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때부터 중국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 성원하면서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3)25세의 나이로 순국한 윤봉길
그해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는 윤봉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서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하이에 왔다.”면서 대장부로서의 변치 않는 기개를 펼쳐보였다. 그해 11월 18일, 그는 일본 우편수송선에 실려 상하이에서 고베항을 거쳐 오사카위수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2월 18일에는 다시 가나자와형무소로 옮겨졌고, 이튿날인 19일 가나자와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당시 일본의 육군형법에 따르면 유해는 육군묘지에 묻혀야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육군묘지 아래 일반인이 왕래하는 통로에 암장해 버렸다. 그때부터 13년 동안 오가는 행인들의 발에 짓밟혔던 윤봉길의 유해는 해방 1년 뒤인 1946년 3월 6일 발굴되어 조국의 품에 돌아왔고, 그해 6월 30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다음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봉길은 실로 단순한 독립지사가 아니라 신학문과 구학문을 두루 익혀 현실에 접목하려던 선각자였고 농민계몽에 앞장섰던 운동가였으며, 일본의 노예가 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충의지사였다. 그의 의거는 단순하게 적의 요인 다수를 살상했다는 소극적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있던 항일투쟁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중국정부와 함께 항일연합전선을 펼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비견될 만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쾌거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http://naver.me/5j2cKbA7
첫댓글 뿌잉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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