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활동 연수교육, 그리고 고려 도읍지 답사
2008. 2. 18.
경기 광주시의회 경제건설상임위원장 구 효 서
광주시 의회에서는 2008년 2월 14일(음력 정월 초여드렛날)「지방의회 운영」의 저자이며 국회사무처 총무과장, 연수국장으로 재직하는 최민수 강사님에게 효과적인 의정활동에 관한 주제로 1박2일간 여의도에 위치한 렉싱턴호텔 세미나실에서 연수교육을 받았습니다. 최민수 강사님은 지방의회에 관한 서적을 다수 출간한 다박한 분으로서 국회에서는 입법활동 실무경험까지 있는 훌륭한 강사로 정평이 있습니다. 이번 연수에 도움을 주신 현대지방의정연수원 하석천 실장님에게도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며,누구보다도 이번 연수를 위해 수고 많으신 김영훈 의장님과 동료 의원님 모두와 연수교육을 무사히 마치도록 고생 많이하신 박경원 의사과장님 이하 직원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음은 이번 '연수교육'에 대한 교육내용과 '개성 답사'에 대하여 보고서를 간략하게 작성하였습니다. 문장이 서툴고 부족한 내용이지만 '시민의 고귀한 세금'으로 다녀온 것이므로 미흡하나마 보고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고 지방의회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내용을 '복습'하는 의미와 답사의 평가와 성과를 나름대로 밝히고자 노력하였는데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연수교육 보고서는, 첫째날의 ‘효과적인 의정활동에 관한’강의를 요약하고, 그 다음으로 둘째날의 '개성 관광'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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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효과적인 의정활동 전략과 접근방법에 대하여 강의내용을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첫째날)
1. 의정활동이란 무엇인가?
지방의원의 의정활동은 하고자 한다면 끝도 없이 일이 많고, 그 책임 또한 막중하다 할 수 있다.
의정활동은 일반적으로 각종 지방자치 관련 법령, 당해 단체의 각종 조례, 회의규칙 등에 의하여 의원에게 보장된 총체적인 역할이나 활동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조례안 등 의안발의, 예산 및 결산 등 의안심사, 질문과 질의 등 발언, 감사와 조사활동, 각종 민원해결을 한다.
2. 의정활동 내용을 보자.
첫째, 정책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조례안 등 의안을 발의한다.
둘째, 정책결정, 정책방향수정 등을 하기 위하여 조례안 등 의안의 심사, 의결을 하게 된다.
셋째, 행정의 감시, 감독, 정책평가를 위해 행정사무감사, 조사를 한다.
넷째, 정책평가 및 대안제시를 질문, 질의를 통하여 해결한다.
의원이 발의할 수 있는 의안은 조례안, 건의안, 결의안, 동의발의권, 청원소개권, 사무조사요구권 등을 가지고 있다. 의안 중 예산안, 결산안, 동의안, 승인안은 단체장만 제출이 가능하다. 의정활동은 지역문제 및 현안을 해결하고 정책안을 제시하는 과정으로서 문제를 인지하여 핵심을 파악하고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하여 질의, 질문, 행정감사, 결산, 예산심사와 정책대안 제시에 활용하여야 확실한 의정활동이 될 것이다.
의정활동 중 질문, 질의 기법에 대하여 논해보자.
발언 대상을 우선 선정하고 구체적인 서류를 요구한 다음 질의(질문)를 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시행을 촉구하는 것으로서, 효과적인 질의(질문) 방법은 결론부터 말한 다음, 결론에 대하여 구체적인 자료를 근거로 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좋다. 이때 질의는 가능한 사례 및 구체적인 통계를 제시해야 효과적이다. 특히 1문/1답시는 Yes 답변으로 유도해야 효과적이며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된다.
3. 효과적인 의정활동 방법에 접근해 보자.
1) 먼저 의정활동 계획을 구체적인 일정으로 수립해야 한다.
지역내 문제점인지 확인 후 안건화시키고 처리를 하게 된다.
2) 그리고 업무보고와 현안보고가 있게 되는데 연초에 갖는 업무보고는 세부사업 파악, 감사와 조사, 예산안 심사, 결산 심사의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또한 현안사항, 민원발생사업 등은 반드시 현장 확인해야 한다. 확인시에는 점검 list를 작성하여야 하며, 필요시는 행정사무조사권을 발동하여 조사할 수 있다.
3) 각종 의안, 심의 및 처리의 방향을 살펴본다.
동의안, 건의안, 청원 등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여 안건심의를 해야 하며, 청원의 경우에는 관계인을 참고인으로 출석시켜 의견을 청취해야 하며, 각종 대정부 건의안은 다른 의회와 공동 대처하도록 한다.
4) 조례안 제정과 개정은 정책/제도를 개발하고 기존의 정책/제도를 수정 변경하는 것으로서 다른 지자체의 모범조례를 우리시에 맞게 벤치마킹하는 방법도 활용해 보도록 한다. 개정안의 경우는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기 위함이며, 필요시에는 규칙, 규정을 조례화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5) 결산심사는 사업집행의 효과를 평가하고 이를 예산안에 반영하는 것으로서 세부사업단위로 접근하고 추진실적, 성과를 제출받아 현지 확인까지 마쳐야 한다.
결산심사 수준에 따라 예산안심사 수준이 결정됨으로 자료수집에 신경을 써야 한다.
6) 행정사무감사는 사업평가, 대안제시, 사전예방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세부사업 단위로 접근해서 집중감사를 해야 효과적이다.
7) 행정사무조사는 특정 사업이나 업무에 대하여 조사가 가능하며, 행정사무감사시 문제점이 많은 사항을 조사권발동으로 철저한 조사를 실시한다.
8) 예산안 심사는 행정, 정책방향 및 사업을 심사하는 것으로서 세부사업 단위로, 유형별로 구분하고, 공공-민간부문 기능재조정 여부를 심사하며, 핵심내용은 사업의 유지, 확대, 축소 여부를 결정하고, 소모성, 선심성 경비를 찾아내어 절약해야 하므로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9) 청원심사는 정책을 건의하고 구체적인 사업추진 요구를 하며,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서 특정 집단과 특정 주민과의 관련 구설수를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10) 공유재산관리계획(안) 감사도 있으며 재산의 취득/매각의 사무와 향후 활용도 검토, 도시기본계획, 도시관리계획, 도시계획시설 사업과의 비교 검토, 재산매각여부 검토, 기부채납 사유와 재산의 적정관리 검토도 심사하게 된다.
11) 주요 의안 심사시에는 공청회를 개최하여 주민여론을 수렴할 수 있으며, 주민과의 간담회를 통하여 주민의견 수렴하여 의정활동을 적극 활용하도록 한다.
12) 위원회 운영을 활성화 하도록 한다.
본회의는 질문의 시간 및 회수 제한으로 심도 있는 심사 제약이 있으므로 특별위원회와 상임위원회를 구성하여 해결하도록 한다.
13) 폐회 중에는 서면질문 제도와 자료요구를 활용하도록 한다.
14) 의정활동의 성패는 자료수집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료는 집행기관에 1차 요구하여 수집하고 추가적으로 각자 의원들이 각종 인터넷 매체나 정보지를 활용하도록 한다.
15) 주민 민원에 대한 적극적인 의정활동 방안으로 의회 내에 민원상담실 설치 검토와 청원 소개의 적극화를 모색해 본다. 그리고 홍보도 강화하여 효과적인 의정활동을 도울 수 있다.
4. 의정활동의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사후관리를 확실히 해야 한다.
1) 답변에 대한 사후관리가 필요하다. 답변 내용의 추진여부를 점검하도록 하며, 미이행 시에는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2) 연초의 업무보고는 의정활동의 바이블로 생각해 두자.
업무보고서를 질의/질문에 활용하고, 자료요구의 기초자료, 예산 및 결산 심사자료, 각종 중장기 사업계획 점검에도 훌륭히 활용할 수 있다.
3) 결산 심사/예산안 심사시 지적사항을 점검하여 사후관리 한다.
결산서, 예산서는 숫자 심사가 아니다. 세부사업별로 심사를 해야 하며, 전년도 사업보고서를 놓고 사업평가를 해야 제대로 평가를 할 수 있다.
4) 행정사무감사 조사의 조치사항의 사후관리, 감사 결과에 대한 단체장의 답변내용의 실현 여부를 반드시 체크하고, 미조치나 조치가 미흡할시는 대응 방법을 강구한다.
이상이 2008년도 상반기 광주시의회 의원 및 의사과 공무원이 연수 받은 내용들이다. 이번 연수는 다시 한번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는 위민 의정에 최선을 다하고자 다짐해 본다.
고려 500년의 역사가 살아있는 개성 답사 (둘째날)
무자년의 2월 15일(음력 정월 초아흐렛날)은 서울에서 새벽 4시30분 기상으로 시작되었다. 생전 처음 밟아보는 북한에 대한 궁금증, 두려움 등 어느 정도의 복잡다단한 심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5시에 출발하여 임진각 집결지에 도착 후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뒤 새벽을 뚫고 한국의 통일대교, 백연고를 지나쳐서 한국의 CIQ(남측 출입통제소)에 도착하여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는다. 디지털 카메라만 소지할 수 있고, 버스 이동 중 사진촬영이 금지되며, 위반시 벌금이 부과되며, 북한 주민과 대화 시에는 정치, 경제 등 민감한 사항에 대해서는 삼가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듣고 북측 CIQ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 일행을 인솔하는 한국 헌병은 머리에 화이버fiber(철모 밑에 받쳐 쓰는 것)가 아닌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헌병은 멋진 화이버와 칼날선의 바지 주름만 보아 왔기에 약간 의아해 하기도 했다.
개성으로 향한 차는 4차선 고속도로를 달려서 북측 출입통제소(CIQ)에 도착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남측 DMZ와 군사분계선 등을 지났건만, 별다른 감정 없이 지나쳐 왔다. 송전철탑이 이곳 고속도로를 따라 북으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송전탑 위에는 154만KV 글자가 선명했으며, 광주시 도척면민이 송전탑으로 고통 받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북측 출입통제소 건물 마당에 로만손 시계탑이 우리를 반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로만손은 개성공단에 입주한 시계회사였다. 빙 둘러보니 멀리 TV에서만 보던 인공기가 펄럭였고, 보이는 산마다 대머리 같은 민둥산이었다. 왜 그럴까? 이유도 알기 전에 이동하게 되었다. 차량을 통제하는 북한 군인의 제식은 과연 TV에서처럼 제스처가 크고 빨랐다. 북한 CIQ에서의 흐르는 음악은 한국에서 들어본‘반갑습니다' 였는데 몇 번 들어서인지 감흥이 없었다. 다른 분들 표정도 그런 것 같다.
북측 CIQ 주변에는 민가가 하나도 없고 경의선 봉덕역만이 홀로 외롭게 있었다. 궁금증은 나중에 풀렸는데, 이유는 개성공단에 화물을 1회 1번씩 조달하는 역할만 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황량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버스에 2명의 북한 남자안내원이 탑승한다. 안내원으로서 자연스럽지 않다. 잠시 후 버스는 개성의 3대 명승 중 하나인 박연폭포를 향했다. 불과 몇 분을 지나자마자 한국에서 공단을 개발하여 현재 공장들이 입주하여 생산하고 있는‘개성공단’이 앞에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우리은행도 보이고 낙원건설, 남광토건, 현대아산의 개발 현장, 기술교육센터 등이 스쳐지나갔는데 대단한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잘 되어 가고 있나? 이익은 남기나? 위험하지는 않나? 순간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북한군 지프가 앞장서서 에스코트하고, 현대아산 직원차가 따르고 그 뒤를 따라 남한 관광버스가 대열을 맞춰 쫓아갔다. 따라가면서 이것저것 궁금증이 생겼는데, 첫째는 산마다 거의 나무가 없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을 단 몇 명 만나기 쉽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삭막한 광경뿐이었다. 북한 안내원에게 묻고 싶었었지만 누구도 묻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 북한 안내원이 설명해 준다. 송악산은 임신한 여인의 형상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자세히 쳐다보았지만 왜 그런지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가다보니 통일다리가 나온다. 북한에는 통일 자를 많이 붙인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동현소학교(초등학교)도 설명하는데 72년에 김일성 수령님이 지정했다고 안내하는데 뭘 지정했다고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아마도 다녀갔으니 좋은 학교라고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지나는 길에 눈에 띄는 마을들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십여 채에서 수십 채 정도의 마을들이 대부분인데 가옥의 구조와 크기가 거의 일정하였다. 대개 일자형 기와집에 벽면은 흰색 일색이었고 울타리도 대부분 흰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한국의 주거 형태와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특이한 것은 마을 전체에 울타리가 있고, 또 주택별 울타리가 있는 곳이 많이 보인다. 분명한 것은 가옥 한 채마다 울타리는 모두 있었다. 추측하건대 예전에 배웠던 내용 중에‘오호담당부’가 생각났다. 감시하기 위한 배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에도 역시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택마다 굴뚝이 있는데 간혹 연기가 나는 곳이 보인다. 연탄보일러인가? 나무 아궁이인지 궁금했으나 역시 묻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법 좀 큰 마을을 지난다. 약국도 보이고 식당도 보인다. 이발소도 있는데 이 상점들이 별도 건물에 있는게 아니고 도로변을 끼고 기다란 건물 안에 상주해 있고 내부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출근시간인지 주민들이 지나는 것이 보이는데 자전거 타고 가는 분들이 여럿 보인다. 언뜻 보았지만 모두 표정이 굳은 것 같다. 아니 감정표현을 못하는 것인 것 같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주로 4-5층 APT인데 한곳에 9층 APT가 있는데 새 건물 같아 보인다. 북한의 APT는 한국의 APT보다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 4-5층 건물은 외모가 엉성하고 도색도 형편없고 위험해 보인다. 무너질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는데 박연폭포 길로 접어들었다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개성에는 王氏가 많은데, 고려 멸망 후에 王氏 멸족을 피해가기 위해 全, 玉, 田氏로 성을 개종하여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많다는 설명을 한다. 600년간 王氏 후손이 全氏로 성을 바꾸어 살다가 어느 날 김일성에게 왕건 초상화 있는 족보를 보이며 밝혀 들어난 사실임을 부연 설명한다.
포장이 매끄럽지 않기도 하고, 좁기도 하고, 굴곡도 심한 고개를 넘어서니 박연폭포 마을이 보인다. 개성 북쪽 27km 지점에 위치한 박연폭포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를 흘러가는 37m 낙수의 폭포이며,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3대 명폭으로 꼽힌다. 이 폭포의 명성은 경관과 더불어 명월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다. 폭포수 아래에는 용바위가 있는데 명필 황진이가 직접 지은 시를 머리를 풀어 글씨를 쓰고 그대로 조각하였다고 하는 현장을 보았는데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폭포 바로 옆에는 범사정이란 정자가 있고, 주변에는 고려 때 쌓은 대흥산성과 북문이 있다. 대흥산성은 한국의 남한산성보다 규모가 작고 조그마한 성인데 임진왜란 당시 전소된 것을 재축성하여 그때부터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는 설명을 한다. 10분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관음사 절이 나타난다. 관음사는 대웅전과 관리동 1동만 있는 아담한 사찰로서 대웅전 옆에는 관음굴과 유백색의 관세음보살 좌상이 있다. 자연굴인데 아름다웠다. 박연폭포를 보기 위해 올라오는 초입에 거대한 돌 판에 새겨진‘이사랑 영원히 노래하라 박연폭포’라는 시가 세워져 있었는데, 아름다운 박연폭포를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찬양의 싯귀에 동감하게 되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개성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간에 초등학교를 지나게 되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는 한 명도 안보이고 건물 모퉁이에 몇 명만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운동장 가장자리에 철봉이 보이는데 철봉 굵기가 작대기처럼 가늘고 모두 녹이 슬었다. 저런 녹슨 것을 사용하는지 궁금했으며, 학생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이 버스로 이동하다 보면 마을 어귀마다, 도로변 요소요소마다, 경비병을 배치시켜놓았는데 아마도 북한 주민과의 접촉을 못하도록 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사는 북한 주민이 안됐다는 생각을 해 본다.
지나는 곳마다 민둥산이요, 거리에는 거의 자동차가 없는 삭막하기까지 한 도로를 지나다보니 어느새 개성 시내로 진입하였다. 시내 교차로에는 신호등이 없으며, 청색 복장의 안내원이 수신호를 하기 위해 서성대고 있다. 도로변에는 과일납새, 천연색 사진현상, 통일관 등 상점 간판이 보이고, 한국의 동대문과 비슷한 개성의 남대문이 보인다. 한국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인다. 출출한 시장기가 전해오면서 버스가 음식점에 도착했다. 이곳은 개성의 전통 한옥이 잘 보존된 민속거리이며, 옛 기와와 조선식 정원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는 민속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맛깔스럽게 차린 한식을 먹었다. 한국 식당에서 보는 기름장 만한 놋쇠 반찬그릇에 13첩 반찬을 차렸는데, 특이한 것은 반찬 중에서 약과가 나온 것이었으며, 시장기 덕분인지 맛있게 먹었다.
우리 일행은 식사 후 전통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조그만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천 바닥이 전부 모래 종류여서 북한 안내원에게 질문하니, 원래 개성은 석별회 땅이라 그렇다고 설명해 준다. 설별회 토질, 검정기와, 하얀색 벽에 흰 울타리, 더군다나 북한사람들 거의가 검정과 회색옷 계통을 입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사진촬영 후에 인근에 있는 상품판매소에 들어가 본다. 그 유명한 개성인삼, 은은한 색채와 상감기법을 살려 빚은 고려청자, 다양한 수공예품, 생활용구 및 예술품과 북한에서 유명하다는 들쭉술과 인삼주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술, 고사리, 고비, 송화 가루를 위시해서 농산물 등이 많이 진열되어 있으며, 한국 관광객들이 사기 위해서 가격을 물어보고 사기도 한다. 한국과 비교하면 초라해지기까지 한 상품들이지만 나름대로 정성들인 상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북한 상품 구입은 모두 달러로만 통용되었는데 들쭉술은 12불, 고비나물 3불, 도자기는 높이 20cm 크기가 20~50불 정도 가격이다. 우리가 점심식사한 이곳을 민속거리라 칭하며, 이곳에는 민속여관이 있어서 관광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민속여관은 조선시대 전통가옥 단지를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는데 총 50동으로 지붕에는 돌기와로 된 전통가옥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고려 충신 정몽주 선생이 사시던 숭양서원으로 출발했다. 이동 중에 제법 큰 건물인 통일관, 시립문화회관 등을 지나쳤으며, 통일관 뒤편에는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곳곳에 보이는 김일성 부자 동상들, 김정일 벽 홍보판, 건물마다 써 붙인(한국 교과서에서 많이 보아온) 북한의 혁명적 단어들..., 이런 것들을 보면서 그 예산을 국민경제에 보탰으면 지금보다 북한 주민들이 훨씬 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한 숭양서원은 고려 충신 정몽주 선생이 거주하시던 집터로,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선조 6년에 개성유수 남응운이 개성 유림들과 함께 세웠는데 정몽주는 조선 건국을 반대하였는데도 정작 조선의 왕들은 정몽주를 높이 추앙하였다고 전한다.
선죽교로 이동하는 중에 자남선이란 깨끗해 보이는 여관이 있었는데 이곳은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한국인들이 주로 사용한다고 설명을 하였다. 개성에서 고생하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이윽고 선죽교에 도착하였다. 선죽교는 그 유명세에 비해서 규모는 길이 6.6m, 너비 2.5m로 비교적 작았다. 선죽교는 정몽주 죽음 후에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주위에 충절의 대나무가 돋았다고 하여 원래 선지교 였다가 선죽교로 개칭되었는데 후손들이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난간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었다. 다리 옆에는 한석봉의 명필로 추모비가 서있고, 길 건너편 표충각에는 두개의 비석이 거북의 등에 서있는데 조선 영조와 고종이 각각 세웠다고 한다. 북한 여성 안내원의 위트 있는 거북의 자웅을 알아맞히기 퀴즈는 웃음을 자아내게 했으며, 그 거북의 머리는 사람의 손길을 무수히 많이 거쳐 반질반질 하였다. 그리고 선죽교에는 묵비라는 비석이 있는데 지붕이 있는데도 비만 오면 비석이 젖는다고 하며 그것은 정몽주의 죽음을 애도하여 비석이 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선죽교를 나와서 이번에는 인근에 위치한 고려박물관을 찾았다. 고려시대 성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1988년 개관하였으며, 4개의 전시실에 약 1,000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세계 최초의 고려금속활자가 있으며, 상감기법을 사용한 고려청자, 조상님들이 사용한 활과 화살 등 고려의 역사, 경제, 과학, 문화의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야외전시장에는 불일사 5층 석탑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으며, 흥국사탑, 현화사 7층 석탑, 개국사 석등 등의 조각품이 나름대로 잘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뜰에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1,000년의 역사와 비바람 속에서도 위용을 자랑하며 박물관을 내려보고 있었다.
북한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1,000년 전 개성 전성기에는 7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상업이 많이 발달되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유명한 상업도시로서 개성깍쟁이란 말이 유행했었으며, 지금의 개성인삼은 그 기원이 2600년 전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어느덧 예정된 귀한 시간이 되어 우리들은 버스에 피곤한 몸을 실었다.
지금은 오후 4시 정도인데 왠일인지 거리에 퇴근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내일이 북한에서 제일 큰 명절인 김정일의 생일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해주는데 아마도 내일이 명절이라 일찍 퇴근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원은 계속하여 오전에 못다 한 설명을 마저 해주고 있었다. 개성공단 1단계는 100만평 규모에 64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20,900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2단계 250만평과 3단계와 골프장까지 완료하면 총면적 2,300만평이 개발된다고 설명한다. 완공되는 2010년쯤에는 2,000여개 업체가 입주할 예정이며, 그때에는 고용인구 25만명, 연 생산액 150억 달러의 공단도시로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느덧 예정된 시간이 다되어 돌아오는데 북한 CIQ 1~2km 전방에 한국의 대성동 마을에 태극기가 펄럭이며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교과서에서 보던 마을인데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는 오후 5시30분에 남측 출입통제소를 벗어났다. 나는 남측 CIQ에 도착하니 그때서야 비로소 편안한 마음이 생겼다. 남측 CIQ에 도착하여 북한 쪽을 바라보니 석양 해가 넘어가려 한다. 석양빛은 아름다운데 왜 마음은 쓸쓸하고 답답한 것일까? 같은 민족, 형제인 것은 분명한데 현실을 보니 너무 남북의 격차가 큰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니 그런 것 같다. 경제만 보면 한국의 60~70년대 수준인 것 같았다.
개성 방문은 나에게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대함과 귀중함을 새롭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는 새롭게 다짐해 본다. 풍요로운 광주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바른 의정을 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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