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남지 개비리’ 옛길: 남지읍 아지리의 창아지마을에서 용산리 마을까지 낙동강 벼랑에 나 있는 2.7km의 작은 오솔길입니다. 두 마을 사이의 낙동강변에는 수십 길 높은 벼랑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낙동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옛날 아지리의 개(수컷)들이 짝을 찾아 용산리의 개(암컷)들을 만나려면 이 벼랑을 타고 넘어야만 했습니다.
공룡발자국이 있는 덤바위 벼랑길을 걷고 있는 예비 수녀님들
그런데 용기 있는 개 한 마리가 이 위험한 절벽을 타고 이웃마을의 개와 사랑을 맺기 위하여 왔다갔다하면서 길이 트였기 때문에 '개가 다녔던 벼랑길'이란 뜻으로 '개비리'라고 하였습니다. '비리'('벼리')는 '벼루'의 경상도 방언으로 벼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용산양수장 앞 쉼터
옛날 아지리 주민들이 남지장에 가기 위해서 이용하였던 길이고,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해야 했기에 '서울나들이길'이라고도 했습니다. 강바람만이 스쳐갈 뿐 호젓하고 아름다운 이 길은 1022번 지방도로 공사가 예정돼 있어 사라질 형편에 처해 있으며, 단체여행이 아니면 쉽게 찾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시원한 대나무 숲길
*우포늪: 창녕군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 일대에 우포 ‧ 목포 ‧ 사지포 ‧ 쪽지벌의 네 개 늪이 있는데, 통상 이 네 개의 늪을 통틀어 우포늪이라 하기도 합니다. 92만5천 평의 넓이로 서울 여의도의 면적에 근접하며, 가장 큰 우포는 51만 평으로 여의도광장의 다섯 배에 달하는 넓이입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우포늪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늪지에 개구리밥, 생이가래, 물억새, 창포, 부들, 가시연꽃 등 수 많은 물풀들이 수면을 덮고 있고, 나무들이 물 속에 하반신을 담그고 있는 모습은 신비로움을 자아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우포늪 전망대에 올라 340여 종의 식물과 62종의 조류, 78종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내륙 습지 우포늪의 전체 경관을 살펴보고 산책로 걷기를 즐깁니다.
예비 수녀님들과 함께 걸었던 우포늪 산책로
*연화동 연꽃축제: 경남 의령군 낙서면 정곡리 신기마을 앞의 1만6천500㎡에 달하는 신기 늪은 과거 연꽃천지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연꽃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 지금까지 나이 든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낙서면사무소와 연화동 작목회가 2008년 4월부터 함께 팔을 걷고 나서 신기 늪 1만㎡에다 홍연, 백연, 어리연, 가시연 등 14종의 각종 연꽃을 부지런히 심으면서, 연꽃이 많아 `연화동(蓮花洞)'이라 했던 옛 모습 복원 작업에 나선 결과 2009년 7월 14일 '제1회 연화동 연꽃축제'를 시작하였습니다.
강변의 작은 마을이 친환경적이고 아름다운 마을로 멋진 변신을 하고 있는 이 마을의 연꽃축제 때는 의령문인협회 주최로 연화동 연꽃 및 아름다운 농촌풍경 주제의 글짓기대회가 열리고, 행사장에서는 연떡, 연차, 연국수 등 연으로 만든 다양한 요리도 맛볼 수 있습니다.
*백산 안희제 생가마을: 입산리 속칭 설뫼마을은 일제 압제기에 근대화 운동에 앞장섰던 실업가이면서 조국의 광복운동에 헌신했던 애국지사 백산선생이 1885년 태어난 곳입니다.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선생은 근대학교 설립운동에 착수하여 부산과 의령 등지에 여러 학교를 세우는 한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이후 백산상회를 경영하여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청년교육을 지원하였으며, 중외일보를 인수하여 민족 언론 창달에도 선구자적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백산 안희제 생가
1930년대에는 대종교에 입교한 후 만주로 건너가 발해농장과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중에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되기에 이릅니다.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옥고에서 풀려나지만 이미 건강은 해친 상태였고 감시와 연행은 계속되어 마침내 1943년 향연 5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합니다.
입산리 문화마을(안희제 생가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고목
*곽재우 장군 생가마을: 큰 북을 매달아 의병을 모았던 현고수 뒤편의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터에는 최근 조선초기 건축양식으로 안채 등 7동의 건물과 부대시설을 갖춘 정겹고 아담한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역사적 의미가 큰 생가는 나라사랑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망우당 곽재우장군 생가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당시 41세이던 곽재우가 4월 22일 이곳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의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처음 일어난 곳이어서 해마다 열리는 의병제전 행사를 위한 성화가 이곳에서 채화되고 있습니다. 현고수(현고수)는 북을 매단 나무란 뜻으로 수령 52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7m의 고목입니다.
곽재우장군 생가마을 입구에 있는 현고수 나무
*임해진(臨海津): 이름이 말하듯 하굿둑이 들어설 때까지는 바닷물이 약 40㎞ 상류인 이곳까지 치고 올라왔다 해서 붙여진 지명입니다. 1960~70년대엔 정미소, 양조장, 도살장까지 있었고, 장날이 아니라도 붐볐다고 주민들은 기억합니다. 마을 인근 청학로 아래의 낙동강 소(沼)엔 용왕과 상사바위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해진 옛 나루터
소우정(消憂亭)
임해진 맞은편은 옛날 창원의 관문인 주물연진이 있었던 곳입니다. 주물연진은 뱃길을 따라 올라오는 일본사신을 맞이하였던 곳으로 창원부사가 직접 그 일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해진 산기슭에는 근심걱정을 떨쳐 버린다는 ‘소우정(消憂亭)’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에 올라 낙동강의 절경을 굽어보며 잃어버린 심성을 되잡을 수도 있습니다.
주물연진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다 이곳 임해진에서 산을 만나 꺾어지면서 강변에 절벽을 만들었고 그 절벽의 한곳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하나를 남겼으니 그 이름도 애절한 ‘상사바우’입니다. 사랑한 남자가 죽어서도 잊지 못하여 뱀이 되어 돌아와 자신의 여자를 지키려 했던 그 의지가 지금도 바위와 바위 사이를 연결하는 돌이 되어 그 흔적을 전설이 되어 전합니다.
상사바우
옛날, 결혼하기로 약속한 남녀가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사랑한 여자를 죽어서도 못 잊어 뱀으로 변하여 여자의 목을 감자 여인의 부모가 낙동강 강가에 우뚝 솟은 바위로 데려가 남자의 원혼을 달래주는 굿을 하니 뱀이 여인의 목에서 풀려나며 절벽 아래 낙동강으로 떨어져 내렸다고 하는 전설입니다.
상사바우 아래의 낙동강물
*임해진 개비리길: 임해진이 있는 부곡면 청암리와 학포리 사이의 낙동강변에도 두 마을을 잇는 2Km의 개비리길이 있었습니다. 창녕군지에 명승지로 기록된 이곳은 천애 절벽으로서 사람의 왕래가 거의 불가능하였으나, 두 마을의 개들이 오랜 세월 짝을 찾아 오가면서 자연스레 오솔길이 만들어 진 후 사람들도 도보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犬)가 맨 처음 길을 열었다고 하여 두 마을 사이에 있는 부곡면 노리 822번지에 개비(犬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청학로 도로변에 있는 개 비석
주민들이 수백 년 동안 교통 불편을 겪어 오던 중 1986년 11월 육군 39사단 1116야전 공병대가 군사작전 훈련용으로 시공하게 되었고, 그 후 민관군이 합동하여 오늘날의 도로가 완공되어, 개비리 옛길은 사라지고 청암리와 학포리의 이름을 빌어 청학로라 명명한 자동차도로가 새로 생겨났습니다.
청학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