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근 2년 만에 선생님의 답글을 읽었습니다. 현재 이것저것 일을 하며 임상심리사 2급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19년도부터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제 조부모님이 농아자이고 아버지가 첫째 아들입니다. 대화 없는 부모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제 애착유형은 혼합형이고 아버지 역시 혼합형입니다. 겨울철에만 우울증을 조심하면 되구요. 현재 폭세틴 10mg을 먹는데
아침에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고 잠으로 도망칠 때만 먹습니다. 이 약이 약효가 좀 늦게 드는 것도 알구요. 제 아버지가 평생 보증을 10회이상 섰고 아파트도 몇 채 날렸습니다. 18년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남으로 상주노릇 하기가 싫어 혼자서 필름 끊길때까지 술 마시고 친척들이 계속 불러서 결국 상주노릇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제 부친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구두수선등의 일을 안하고 사회적 위치가 높고 잘 사는 친척들에게 쌀가마를 져 오라는 등의 경제적인 역할을 않하셨구요. 어렿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께 용돈을 정말 많이 탔는데 그 돈이 결국 아버지와 삼촌들한테 받은 용돈을 저 한테 주시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조부모님이 정말 싫어지더군요. 그리고 제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소년소녀 가장들은 동생들만 챙기면 되는데 아버지는 부모까지 책임을 졌다(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생각을 하니 이해가 되더군요. 아버지는 70년대에 유명한 덕수상고(졸업하면 바로 은행에 많이 들어갔죠.) 에 들어가서 부유한 친구집에서 하숙을 하며 과외를 하면서 생활하였고 졸업 후 가톨릭 신부가 되려고 신학대학에 진학을 하려 하였으나 결핵에 걸려 다 낳고 다시들어오라 하였으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은행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모친이 저와 쌍생아 형에게 사과를 직접 깍아 먹으라 하면 저는 얇게 잘 깍는데 형은 두껍게 깍아 사과살이 아깝다고 핀잔을 많이 주었고 조부모님과 같이 버스를 타면 형은 공부를 못하니 혼자 앉아라 할 정도로 교육관이 없이 형을 무시하는 가정환경이었습니다. 세계대전사를 보면 히틀러가 유대인인 모친에게 많은 학대를 당해 그런 대학살을 한 거처럼요. 모든 것을 제가 형보다 조금씩 잘 하였고 착한 형은 항상 저한테 희생을 하였습니다. 형이 소천하기 전에 내가 죽어줘야지 너가 잘산다고 할 정도로 항상 희생하였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하도 할아버지, 할머니께 형이 공부 못한다고 무시를 당해 형이 조부모가 누가 공부를 잘하냐고 물어보면 형이 잘한다고 얘기하라고 할 정도로 무시당하였고 저는 우물안 개구리여서 있는 그대로 얘기하였습니다. 형이 소천하시고 근 6개월을 1주일에 두 세번 투신자살하는 꿈을 꾸어 땅에 머리가 부딪쳐서 깨면 등이 땀에 푹 젖어 깨어나곤 했습니다. 하도 형이 불쌍하고 죄스러워서 이불 뒤집어 쓰고 운적도 많고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제 형이 지옥에 간다면 신과도 싸우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현재 교회에 다니지만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얘기 자체는 받아들이지 않구요.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신거 처럼 저의 조증은 우울증에 도망치다가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음~~2019년?인가 도서관에서 밤을 세고 공부하고 집에 와서 잠에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얼굴이 뒤집힌 귀신이 살짝 보이(생각인지?)는 겁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어머니를 불렀는데 어머니는 무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느꼈습니다. 제 어머니는 내거 아니면 버리는 구나?라구요.
제가 사회에 적응을 못한건 사춘기때가 컸습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가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음주운전(당시에는 차는 어느정도 부유한 사람이 탔음.)으로 교통사고를 내어 휴직기간에 살 때가 없어서 조부모님이 살던 농아원에서 6개월을 산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말 수치심을 많이 느껴 중1 진학때 학급성적을 우연히 1등을 하여 중학교 1,2 학년때는 축구 , 야구와 시험때는 무조건 밤을 세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 3 첫 3월달에 담임 선생님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잠을 안자고 공부한다는 소리를 듣고 중3 3월달은 월화, 화수,수목, 목금을 밤을 세고 공부하고 학교에서 축구공을 찼습니다. 공차다가 뒷골잡고 몇 번 쓰러졌네요.
이건 상당히 중요한데 저의 애착유형이 혼합형이고 어머니는 본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면 버리는 스타일이라 어머니께 관심을 받으려고 공부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국민학교 5학년때 농아원에 산 것이 정말로 수치스러워서 그렇게 공부를 하여 제 열등감을 투사한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사고하는것이 분석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판단에 감정을 많이 넣을 것입니다. 생활축구를 하는데 근 2년간 저한테 패스를 안한 후배가 있었는데 저는 그 친구가 위치만 좋으면 패스를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판단에 감정을 많이 주입시킬 것입니다. 사고 자체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라 저를 분석을 이제는 아예 안 합니다. 20살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입문, 꿈을 해석을 좀 읽다가 어려워서 포기했는데 스스로를 분석하면 저는 피해의식만 커지더군요. 뭐 제 입장에서는 피해의식이지만 의사의 관점에서는 2개월이 넘으니 피해망상이구요. 그리고 수용전념치료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5학년때 농아원에 살 때 저는 조부모가 농아인이었지만 부모님이 농아인이고 교통사고로 한 쪽다리를 의족까지 한 사람도 있었으니깐요. 이 건 주위 환경에 놓인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자신의 현실에 적응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작은 아버지께 들었는데 부모가 농아인이 어떤 사람이 빌딩을 샀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더욱 자극이 되어서요. 제가 부친을 닮아 신경이 얘민하고 중학교때 너무 잠을 못자 예전에 검사에서 의사가 신경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얘민하다고 하였고 많이 무덤덤해지라고 노력을 하라고 하였는데 요새는 신경 얘민한 것에 신경도 안써요. 자기 전에 클로자릴 50mg만 먹어도 잘 자요. 단지 목디스크가 아주 심하고 목이 역C자라 뒷골이 더 땡기네요. 그리고 목 디스크가 지겹습니다. 임상심리사가 되려고 사람상대하는 일에 더 적응을 하려고 현재 보험영업일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회에 부적응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가 컷습니다. 고 1때 부터 사춘기가 왔는데 저의 애착유형상 부모님이 여자보기를 돌 같이 보라고 하여서 고 1때 옆반 여학생들과 마니또를 하였는데 저만 답편지를 않 했었구요. 제가 공부 잘하고 운동잘하여 왕따를 아주 심하게 당하였을 때 그 때 아버지에게 심한 학대를 당하였습니다. 제가 고 1때 학교 안간다고 하였다가 아버님이 출근하기 전에 구두솔로 수십차례 얼굴을 때려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부어서 학교에 갔었고 저의 형과 제가 사과를 먹고 사과 깡태기를 침대 밑에 버린 것을 몇 개월 후에 어머님이 발견하여 아버지게 말하면 아버지는 형과 저에게 썩고 곰팡이 난 사과 깡태기를 먹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뿌리깊은 수치심이었고 21살 때 서울 신당동 청소년 대화의 광장의 한 심리학 박사님이 마음을 열어서 처음으로 인지하게 하였구요. 이것에 대한 피해의식이 엄청 심하였지만 우리나라 IMF 이전에는 은행원들이 보증서고 받고 해서 채권 추심을 하면 조폭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제가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군대갔을 때 아버지는 지방에 도망쳐 다니다가 조폭에게 얻어 맞아 어깨가 탈골까지 되었습니다. 그 때 심리학 박사님이 저를 끝까지 심리학과로 전과시켜 같이 심리학 박사학위를 따자고 얘기한 것을 19년도에 드디어 결정을 하였습니다. 취미로 공부하던 심리학을 본업으로 하기로요.
선생님 글에서 동료로 환영한다는 말씀이 진정으로 말씀하신거든 저의 사기진작을 위해 말씀하신거든 뭉클했습니다.
사회는 능력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고 많은 소통을 하였으면 합니다. ^^
글쓴이의 글에는 안보이지만 더 큰 문제는 살아오면서 대인관계의 문제였을 것 같은데요. 제 사견입니다만 대인관계패턴에서 자신에게 잘해주고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에겐 의존하고 매달리고 그러다보면 버림받거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 그리고 반대로 그럴수록 대인관계에게 불안도가 높고 경계를 하게되고 소위 세상에는 내가 원하는 100점짜리 환상의 엄마가 있을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사람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없으셨는지요.
---->아주 제대로 보셨습니다. 아직도 저는 유아적인 고착증이 있습니다. 21년쯤인가 아침에 마음챙김 명상을 하는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포장된 경계막을 한 꺼풀씩 벗겨내니 가장 마지막 경계막에는 한 중학생 쯤 되는 상처입은 사악한 아이가 경계막을 건드리자 마자 무서워서 도로 갇히내요. 처음으로 진정으로 상처입은 내면아이를 대면 하니 정말 무서웠습니다. 근 1년 이상을 마음챙김을 안하다가 요새 다시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마음을 연 사람들과의 대화를 녹음하여 들으니 말투가 쌍생아 형과 많이 닮아지더라구요. 그리고 어린 아이가 위축된 말투로 대화하는 것을 느꼈네요. 그래서 사람들과 전화통화한 것을 녹음을 시켜 들어보니 저를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더군요. 고등학교때 근 1년간을 왕따를 당하고 대화없이 수업시간이나 시험시간에 혼자 자서 대학1학년때 성당 교사생활을 하는데 말투가 외국인이 한국어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처럼 말투가 완전히 문어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충분히 구어체라고 생각을 하는데 지금 주치의가 문어체라고 하네요. 이 분이랑 상담을 얼마 안 했지만 하버드 의대 출신입니다. 안산연세 대표 원장님인데 이름을 지금 기억을 못하네요.
그리고 저는 안산연세병원에 새로 오신 조성주 원장님과 상담을 하고 싶어요. 제 모친과의 분리불안, 애착유형등을 봤을 때 저는 여자 의사선생님 특히 육아경험이 있는 의사선생님께 많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의 모성애는 사람을 자궁에 품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런 틀을 제 모친께 잘 못 받아서요. 어떤 조직을 틀을 잡는 것을 진짜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 조직을 구성하는데 잘못된 양육을 받으면 저처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신경증과 정신증 증상만 얘기하겠지만 권영탁 원장님이나 대표원장님과의 상담은 이중관계가 되기 때문에 치료적으로는 순수하게 조성주 원장님과 상담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의사를 찾아서 발품 팔았지만 조성주 원장님과 진료를 보면 제 돈을 드리던 나랏돈을 드리던 정신요법료가 빚지네요. 그만큼 이 의사선생님은 젊어서 그런지 초심을 지켜 진지하게 진료를 보시네요. 진료 수가와 정신요법료가 경력이 적어서 이렇게 책정되는 거 같지만 진료비를 빚지는 느낌입니다. 우리나라가 유럽과 미국처럼 임상심리사와의 상담 후 의사와 연결되는 선진시스템이 아니니까요. 수원에는 3분 진료보고 정신요법료 2 청구하는 의사들도 있고 환자와 충분히 상담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권원장님 말씀처럼 편하게 돈 벌고 싶어서 약만 과량으로 청구하고 신약에 대한 관심도 없어 젊은 의사도 옛날 약만 처방하는 의사들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제가 의사선생님이나 사람을 보는게 매우 확신이 생겼네요.
그리고 권원장님 같은 스타일은 병원 경영진들이 금전적으로 워낙 싫어하는 스타일이니 권원장님 입장(상담능력도 꽤 있으시지만 시간적인 제약때문에)에서는 최소용량 맞추는 진료로 계속 환자를 돌리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100점짜리 환상의 엄마가 있을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사람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없으셨는지요. ->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판단능력을 거의 어머니한테 맞겼었네요. 판단의 최종결정을 부모한테 맞겼었어요. 10년간 아주 친한형과의 대화를 하면서 판단능력이 전무하다는 것도 알고 부모한테 일임한 판단도 부모가 잘못 판단한것도 많았구요. 이것을 보면 선생님처럼 100점짜리 환상의 엄마를 찾아 다닌것이 맞는거 같기도 하구요. 1996년도 최초의 심리학 박사와의 상담시 상담선생님이 저는 책임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과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어머니가 아버지와의 불화시 저를 정서적인 남편으로 생각하여 과중한 책임을 지웠네요. 나흘을 밤을 세워 공부하는데 누구누구는 새벽에 신문배달한다고 저를 부추겼고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커 오면서 ???해라 라는 명령형 말을 많이 듣지 않았나? 얘기를 하였고 조그마한 실수도 제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네요. 돈 다루는 일에서 10원짜리 사고치고 자괴감까지 빠졌고 결국은 에라이 모르겠다하고 책임감을 던져버렸네요. 하지만 지금은 한 단계 한 단계를 조금씩 책임감있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오토바이 음식 배달일을 하는데 저의 뇌의 신경망 형성에 아주 좋습니다.^^저의 다치기 쉬운 성향상 보험들을 건 다 들고 신호위반을 아주 많이 하는데 아주 지름길을 잘 찾아 네요. 20년도와 21년도에 두번읭 MMPI-2 검사를 하였는데 정보처리능력(특히 긴급한 상황대쳐능력)이 80점대였요. 오토바이 배달을 아주 능숙하게 한 다음에 정보처리 능력 검사를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