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道方全盛 한나라 이제 번성하여
朝廷足武臣 조정에 무신들 넘쳐나건만
何須薄命妾 어찌하여 이 박명한 아녀자가
辛苦事和親 괴로운 화친의 일을 맡아야 하나요
掩涕辭丹鳳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쏟으며 단봉문(長安의 성문) 나서서
銜悲向白龍 슬픈 가슴 안고 사막(白龍堆) 향해 나아가네
單于浪驚喜 선우(흉노의 왕 呼韓邪)는 그저 기뻐뛰지만
無復舊時容 나는 이제 다시는 고국에 돌아올 수 없으리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허리띠 이리 헐렁해진 것은
非是爲腰身 몸매 가꾸어 그런 것 아니라네
위 시는 당나라 측천무후(AD 624년 ~ 705) 시대의 시인 동방규의 시로 화친을 위하여 흉노에게 시집 보내진 한나라 궁녀 왕소군(王昭君)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첫째 장은 흉노에게 시집 가게 된 왕소군의 조정을 향한 원망을 노래하고 있고, 둘째 장은 미인을 아내로 맞게 되어 기뻐 날뛰는 흉노의 왕 호한야 선우를 따라서 눈물을 쏟으며 만리 밖의 이국을 향해 떠나는 왕소군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셋째 장은 황량한 흉노의 낯선 땅에서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어렵게 지내는 왕소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왕소군의 본명은 왕장(王嬙)이고 소군은 자(字)이다. 왕소군은 서시, 양귀비, 초선과 함께 중국 역대 4대 미녀로 거론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여인들 중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단연코 왕소군일 것이다. 왕소군을 소재로 한 시가 700편이 넘고, 왕소군을 주제로 시를 쓴 작가로는 이태백, 백거이, 이상은, 두보 등을 포함한 수많은 유명 시인들을 망라한다. 왕소군을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와 소설도 많으며, 왕소군을 소재로 한 TV드라마도 여러 편 만들어졌는데 우리의 KBS에 해당하는 관영 중국 중앙(CC)TV에서도 2005년, 한국의 드라마 <대장금(2003)>에 필적하는 사극 드라마를 제작한다면서 드라마 <왕소군>을 제작하여 방영하였다. 왕소군은 한(漢) 왕실에서 흉노에게 시집보낸 궁녀일뿐인데, 왜 중국인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왕소군을 기억하고 그토록 열광적으로 노래하고 기리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한 조금의 실마리라도 찾으려면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항우를 물리치고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다음으로 중국을 재통일한 한고조 유방은 북방 영토를 계속적으로 침탈하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32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나선다. 기원전 200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흉노의 계략에 속아 참패하고 본진과 분리되어 백등산(현재의 산서성 다퉁시 인근)에서 적에게 포위되고 만다. 유방과 그의 측근들은 7일간 물과 식량의 보급이 전혀 없는 가운데 철옹성 같은 흉노의 포위망 가운데 갖혀서 거의 살 길을 찾기 힘들었다. 언제든지 흉노가 몰아부치면 전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유방은 한밤중에 흉노의 왕 묵돌선우의 아내에게 몰래 사신을 보내어 뇌물을 바치며 남편을 설득해 달라고 빌어서 겨우 혈로를 뚫을 수 있었다. 한밤중에 그토록 단단하던 포위망 한 쪽이 슬며시 열린 것이었다. 유방과 그의 병사들은 화살을 활에 장전한 채 초긴장 상태에서 어디에선가 흉노의 병사들이 나타나 길을 막아 설까봐 노심초사하며 밤새 수십리를 도주하였다. 적장의 아내에게 뇌물을 바치며 빌어서 겨우 목숨을 건지다니 전장에서 뼈가 굵은 유방의 입장에서는 접전 끝에 모든 병사를 잃고 단기필마로 도주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었다.
평민으로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유방은 말 그대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王侯將相寧有種乎)'는 말을 삶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유방은 정통성이 없는 왕조의 시조란 이야기가 된다. 누구든 실력만 갖추면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 유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방과 그의 측근들이 열심히 퍼뜨린 것이 유방에게는 왕기(王氣)가 서려 있어서 사람 볼 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눈치채고 복종하고, 하늘도 유방을 돕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세간에서는 유방은 전쟁에 능하지 않은 장수였지만 하늘의 뜻과 도움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새왕조를 만든 인물이란 인식이 퍼져있지만 실제로는 유방은 매우 뛰어난 장수이자 지략가였다. 하지만 통일된 새 왕조의 권위와 능력을 중원에 다시금 떨치기 위해서 직접 나섰던 흉노 정벌 전쟁의 대패는 유방과 새 왕조의 체면을 나락(那落) 끝까지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방의 능력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간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와의 치열했던 초한대전은 알고보니 마이너리 리그였다는 둥, 여기서 다시 의문의 1패를 당한 사람은 초패왕 항우라는 둥, 마을 이장이 황제가 되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냐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유방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승전과 패전은 병가의 상사(兵家之常事)라지만 유방은 패전을 하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적장의 아내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여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쳐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등산 패전(白登之圍) 이후에도 흉노의 변방 침탈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방에게 흉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강적이었다. 지휘관의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각 잡히게 움직이던 기병들하며, 춤을 추듯이 리듬을 타며 말 달리며 정확하게 적에게 활을 꽂아 넣는 활솜씨며, 전쟁을 즐기는 것이 분명한 흉노 병사들이 진퇴시에 지르던 신명나는 외침들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온 유방은 흉노 병사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유방과 한 조정에게 흉노는 언제라도 둑을 터뜨리고 쏟아져 내려와 온 나라를 홍수에 잠기게 만들 수 있는 큰 물이 담긴 거대한 저수지와 같이 위험한 존재였다. 오랜 내전으로 피폐(疲弊)해진 나라를 회복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당장이라도 흉노가 마음 먹고 침공하여 내려온다면 이를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한 조정과 유방은 날마다 불안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백기를 높이 단 한나라의 사신 행렬이 북으로 흉노를 향하여 나아갔다. 전권을 위임받은 유방의 최측근 유경(劉敬)에게 주어진 임무는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떻게 하든지 흉노와 화친하고 그들의 침공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한 조정으로서는 지금은 어쨌든 안전을 확보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이윽고 유경(劉敬)은 성공적으로 흉노와 ‘화친(和親)’이라는 이름의 평화조약을 맺고 돌아왔다. 흉노와의 화친 조약은 다음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흉노는 제발 장성을 넘어 침략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둘째, 상호 형제 관계를 맺는다. (형님으로 극진히 모실테니 침략은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셋째, 한나라는 하나 밖에 없는 공주를 흉노의 왕 선우에게 시집보낸다.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니 제발 장인의 나라를 참략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넷째, 한나라는 매년 흉노가 필요한 옷감(무명, 비단)과 음식(술, 쌀) 등을 보낸다. (필요한 것은 모두 보내드릴테니 제발 침략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어떻게 보아도 매우 굴욕적인 협정이었다. 하지만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빌고 달래면서 맺은 조약이란 애초에 공평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 조정에서는 흉노를 달래고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는 면에서 그런대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협정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유방의 친딸인 노 원공주[魯 元公主, 노(魯) 땅을 하사받은 황제의 맏딸이라는 뜻]를 흉노의 왕 묵돌 선우의 아내로 보내어 정략혼인을 하기로 했지만 문제는 이미 노 원공주가 조왕 장오(趙王 張敖)와 혼인한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유방은 유경에게 무슨 일이 있던지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협정을 맺고 오라는 임무를 주기는 했지만 시집가서 이미 유부녀가 된 공주를 흉노의 왕에게 처녀라고 속이고 시집 보내겠다고까지 약속하고 온 것을 보면 한 조정의 입장에서 흉노의 침공을 막는 것에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하게 목을 매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며칠 째 유방의 방에서 문을 닫아 걸고 유방과 유경은 속닥거리며 숙의를 거듭했다. 흉노와의 평화 협정을 맺고 온 이상 거기에 맞추어 혼사를 맺는 것이 국가안보와 황실 보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이 남자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들의 은밀한 계책은 무르익기도 전에 며칠이 못되어 유방의 아내 여황후(呂皇后)의 귀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시집간 딸 자식을 수만리 먼 곳, 오랑캐 흉노의 땅으로 다시 시집을 보낸다니 어떤 어머니가 이를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여황후는 길길이 날뛰며 곱게 기른 딸 팔아서 옥좌를 보존하겠다는 것이냐며 결사 반대를 하고 나섰다. 하지만 국가의 안위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날밤, 한 여인의 통곡소리가 황실로부터 어두운 밤공기를 찢으며 수도 장안의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이 소리를 들은 장안의 여인들도 울기 시작하여 장안의 밤하늘이 온통 통곡 소리로 가득 차 울리고 있었다. 마치 만월에 암늑대들이 일제히 소리 맞추어 구슬피 울부짓는 소리(howling)와 같았다. 다음날 집집마다 남자들이 아내들에게 지난밤 왜 그리 통곡을 했냐고 물었더니 여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무너지고 너무 슬픈 생각이 들어서 울음이 나오더라'고 했단다. 여자들은 아무 것도 들은 것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남자들이 제몫을 못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하면 여자들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를..... 임금이 침략군의 발길 아래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나라의 소중한 어떤 것들보다 더 소중한 여인들을 침략자들이 마음껏 유린하고, 마음껏 끌고 갈 수 있게 용인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세월을 타향에서 모진 세월을 보내다가 살아남아 돌아온들 아무도 반겨주지 않고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며 손가락질을 하고, 몸을 팔아 치부하려고 적군의 성노리개를 자처하여 먼 이국까지 제발로 갔다 왔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강의실에서 떠들고, 글 쓰는 자들은 책에 날조하여 적어서 책장사를 하고, 연구를 한다는 자들은 이 여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몸을 팔았는지 연구하여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온갖 모욕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 모진 세상을 또 눈물로 보내며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여후가 밤낮으로 울고 불며 이를 결사반대하자 유방은 어찌할 줄 몰랐다. 오랜 고민 끝에 찾아낸 계책이 공주와 비슷하게 생긴 처녀를 찾아내어 공주로 꾸며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다. 결국 힘없는 서인(庶人)의 여식 중에서 공주와 비슷하게 생긴 처녀를 하나 찾아내어서 교육시키고 치장하여 흉노에게 시집보내게 되었다. (가짜) 노 원공주가 온갖 치장을 한 화려한 마차를 타고 떠나는 날, 온 장안의 여인들이 몰려나와서 공주를 전송하며 눈물을 흘렸다. 여자들은 이미 자신과 자신들의 딸들에게 닥쳐올 일들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군중 속에서 한 남자가 어디에서 멋진 말을 들었는지 이를 패러디하여 "장안의 딸들아, 노 원공주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딸들을 위해서 울어라."고 말했다가 여인들로부터 돌맹이 세례를 받고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에 한 조정에서는 해마다 흉노에게 막대한 공물과 수많은 여인들을 바치며 극진히 손아래 동생의 예를 다하였지만 흉노는 여전히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변방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이를 근절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유방은 토사구팽(兎死狗烹)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라를 안정시켜서 오래 갈 수 있는 왕조를 만들려면 화근이 될 수 있는 뛰어난 부하 장수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실의 이러한 움직임에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방의 측근들 중에서 자기 방어를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유방의 부하 중 하나였던 경포(黥布)도 그 중 하나였다. 유방은 경포의 반란를 진압하려 나섰다가 화살을 맞고 돌아왔다. 황제의 부상에 놀란 의료진들이 집중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였지만 중상은 아니었던지이라 유방은 이를 경히 보고 치료를 소홀히 하다가 갑자기 상처가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재위 7년만인 BC 195년의 일이었다. 흉노에게 설욕하기 위하여 전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서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적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한 것도 아니고, 흉노에게는 큰 소리 한 번 쳐보지 못하고 고작, 항우와의 싸움에서 함께 피흘려 싸웠던 측근들을 잡아 죽이려고 나섰다가 화살에 맞은 가벼운 상처가 덧나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슬픔에 싸여 있던 여태후에게 흉노의 선우 묵돌이 편지를 보내왔다. 이 편지가 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만다. (다음 편에 계속)
* 쓰다보니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는 것 같아서 나누어서 한두 편 더 올려보려 합니다. 지면관계상 줄일 일도 없고, 저로서는 바쁜 가운데 작년부터 조금씩 적은 글이다보니 시간적 제한도 없어서 제멋대로 마음껏 적고 있습니다. 읽는 분들에게 긴 글이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양해를 구합니다. 탈고 안 된 글이라 꾸준히 계속 고치는 점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