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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주름잡았던 여인의 안식처, 서울과 남양주의 경계 틈바구니에 왕과 왕비의 안식처가 자리했다.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목적지를 착각해 남양주 쪽에서 내린 뒤 강릉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해가 유난히 짧았던 어느 겨울날, 마침 대학가도 방학을 맞이 해 사람의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요했다. 간간히 지나다니는 자동차 그리고 덩그러니 걸려 있는 안내판이 옳게 걸어가고 있음을 나타내 줄 뿐이었다.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에 젖어든 채, 오늘의 주인공들을 되뇌며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강릉 매표소 앞, 그 입구를 알리는 간판조차 참으로 소박했다. 서서히 물들어 가는 노을빛을 머금은 채 안 그래도 짙은 갈색이 더해져 갔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문정왕후가 잠들어 있는 태릉의 그 분위기가 상당히 비교가 됐다. 소박한 입장료를 지불한 채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에 그 존재감을 내비치기를 껄끄러워라도 하는 듯, 다리를 건너 능침에 가까워질수록 괜스레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전했다. 조금이나마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고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1. 명종
영면에 들어가고 난 뒤, 여전히 그의 능침도 문정왕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웅장했던 그녀의 능침과는 다르게 그래도 한 시대를 대표했던 인물의 보금자리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와 분위기가 상당히 초라했다. 명종은 그의 아버지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을 기록한 왕 인종 과는 이복형제 사이다. 인종 사후, 그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어 자연스레 그 자리를 물려받아 조선의 13대 왕으로 즉위케 된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를 적 나이가 12세에 불과했으며, 성년이 될 때까지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된다.
이후, 조선은 대내외 적으로 혼돈의 시기가 시작된다.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당파싸움을 시작으로 갖가지 민란과 차원이 다른 왜구의 칩입까지, 사건 사고 속 평화로웠던 순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로 인해 충청도의 명칭이 홍청도로 수정됨은 물론, 승과까지 부활되며 조선의 그 사상적 기반조차 흔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미 본인의 뜻을 온전히 펼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명종의 기분은 어땠을까? 불현듯 능침으로부터 비참함과 굴욕 갖가지의 한스러움이 전해지는 듯했다.
사건의 시작은 즉위와 동시에 벌어졌다. 인종 즉위에 큰 힘을 보탰던 '김안로'가 실각 되고 난 뒤, 인종의 어머니 쪽에서 비롯된 '대윤'과 문정왕후 쪽에서 시작된 '소윤'과의 권력 투쟁이 바로 이것이다. 소위 '을사사화' 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각각 인종 재위시절과 문정왕후 수렴청정 시기로 갈리며 양쪽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데, 대사헌의 탄핵과 반역음모죄를 명분으로 대윤 쪽 신하들이 대부분 사약을 받거나 유배 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정국의 주도권은 소윤 일파가 가져가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양재역에 이른바 괴벽서가 붙게 되자 이를 빌미로 한 번 더 조정에 숙청의 바람이 불게 됐다. 해당 벽서의 내용은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를 빌미로, 소윤 일파의 수장 윤원형은 을사사화의 연장선상의 성격으로 조정에 남은 대윤 세력들을 다시 한번 숙청을 단행하는데, 당시 충주지역 출신 사대부들 약 50여 명이 사약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충청도는 한 때 홍청도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져 내려온다.
두 차례의 사화로 인해 내홍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이번에는 외부로부터 사건이 발생한다. 1555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왜구의 침입이 일어나 전라남도에 있었던 여러 군, 현 들을 침략한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계해약조를 체결해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삼포왜란, 사량진 왜변과 같은 선을 넘는 일이 벌어지자 명종대에 이르러 세견선의 그 수를 25척으로 대폭 줄이는 정책을 단행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에 의해 벌어진 전쟁으로 '을묘왜변'으로 알려져 있다.
침략 당시 성을 포위한 뒤, 점령을 할 정도로 왜구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기세는 거기까지였고, 이후 등장한 이준경과 이윤경의 활약으로 전세는 역전됐으며 그렇게 을묘년에 벌어진 왜구의 1차 침입은 잘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과정 중, 각 지역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지방관들이 보여 준 자태는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였으며 결과론 적으로 잘 막아냈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해 꺼지지 않은 불씨는 결국 2차 침략의 화근으로 작용케 된다.
이후, 전라도에서의 침략이 여의치 않자 같은 해 제주도로 2차 침략을 감행한다. 1차 때와는 달리 제주도를 점령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3일 간 제주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에서 민, 군 관 협동으로 1,000여 명에 달하는 왜구를 70명으로 막아내며 제주도 방어에 성공한다. 오늘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주목관아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 연극 '김수문 목사와 결사대'를 수문장 교대식과 함께 선보이고 있으며, 당시 조선은 이때를 계기로 방어 체재의 개편과 비변사를 설립해 대규모 침략의 대비책을 마련케 된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재위 기간도 충분히 길었다. 특히, 전임 왕의 재위 기간이 조선 왕들 중 가장 짧았기에 대비 효과는 더욱 크지 않았을까 사료된다. 위에서 언급했던 갖가지 사건, 사고들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문정왕후의 그 영향력에 가려졌다. 수렴청정을 거둔 이후에도 조정을 장악한 문정왕후 쪽 신료들을 활용해 정국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했고, 명종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권력은 영원할 수 없었고, 문정왕후가 유명을 달리하자 세상은 결국 명종의 손을 들어주는 듯했다.
이후, 명종은 당파에 색안경을 끼지 않은 채 고루 인재를 등용하며 선정을 펼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타고난 기질이 허약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동안 쌓여왔던 육신의 피로가 누적된 것을 극복하지 못해서였을까? 결국 그로부터 2년 뒤, 34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뜨게 된다. 지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뜻을 온전히 펼쳐 보이지 못한 채 그의 꿈은 이곳 서울과 남양주의 경계 그 한가운데 육신과 함께 묻힌 채 수백 년의 시간을 받아냈다. 짙어져 가는 노을빛과 함께 그가 건네는 혼의 울림이 아스라이 곳곳에 스며들며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2. 인순왕후
12세의 젊은 나이에 경원대군(훗날 명종)과 가례를 올리며 왕실에 발을 들이게 됐고, 인종의 짧은 재위 탓에 명종과 더불어 14세의 어린 나이에 국모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중전의 자리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551년에 명종의 뒤를 이을 후사, 순회 세자를 낳게 된다. 하지만 12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며 초기 조선 왕조의 직계는 단절된다.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 후사가 없어 왕통을 이을 후계자를 지명했어야 하는데, 이때 인순왕후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명종은 생전에 공식적으로 하성군을 후계자로 낙점하지는 않았지만 덕흥군의 아들들을 수시로 불러들여 관계를 쌓아갔다. 이후, 1565년 명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당시 인순왕후는 평소에 명종이 아끼던 하성군에게 병간호를 맡겼다고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명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직, 간접적으로 내보인다. 그로부터 2년 뒤, 명종이 승하하자 인순왕후가 하성군을 후계자로 공식 낙점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이다.
선조가 즉위한 후에도 왕대비의 자리에서 1년 가까이 수렴청정을 맡게 된다. 그 기간 동안 신하들의 의견에 반하는 모습들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선조를 비호하는 위치에서 묵묵히 자리를 이어간다. 통치의 기간 중, 인순왕후는 척신을 멀리하고 이황과 같은 도학정치를 꿈꾸는 이들에게 기회를 부여케 한다. 기록들을 살펴보더라도 8개월이 수렴청정 기간 동안 대부분의 기록이 인사 등용과 문정왕후 시절 파직당한 사림들에 대한 내용들이었고, 이러한 사심 없는 처사들은 이후 선조 재위 시절의 드넓고 깊은 인재풀로 본모습을 드러낸다.
수렴청정 기간을 마친 뒤, 인순왕후는 한 걸음 물어나 왕실 웃어른으로 자리했다. 이후, 1575년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이후, 인순왕후는 반려자의 곁에서 영면에 들게 된다. 수렴청정을 맡은 인물치고 그 존재감이 미미 했지만, 그 덕분에 명종 재위 시절 피비린내 나는 환국의 순간들을 되풀이하지 않은 채 안정적으로 권력을 다음 세대에 이양할 수 있게 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인물 됨됨이가 조금은 궁금해지기도 했다.
3. 존재감
그가 살아 생전에 보냈던 그 모습들과 재위 기간 대비 남겨진 내용들이 미약했기 때문일까? 명종은 조선의 정식 국왕들 중, 재위기간이 짧거나 쫓겨난 임금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종묘의 정전에 모셔지지 못한 왕으로도 불린다. 정전에 모셔지지는 못 했지만, 그 보다 한 단계 아래인 영녕전에서 모셔진 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그 존재감은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인물들에게도 별 다른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는 걸 보면, 그리 좋은 임금으로는 기억되지 못한 것 처럼 보였다.
더불어 해의 시작과 그 끝 자락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만 태릉과 강릉은 그 사이에 숲길을 둔 채, 서로의 관계를 영면에 들어서 까지도 천륜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다. 조선왕릉 전시관이 들어서 있는 것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잊힌 듯했던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노을빛이 잠시나마 강릉의 분위기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지나간 시간에 있어 만약은 존재할 수 없지만, 혹시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다시 한번 어떤 치세를 펼쳤을지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마감 시간에 맞춰 입구 밖으로 나올 때, 이곳을 찾았던 사람과 더불어 나온 사람조차 내가 유일했다. 혹시나 해서 오늘 하루 강릉을 찾은 사람이 있나 싶어 물어봤지만 관리하시는 분의 말에 따르면 '없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태릉의 울창했던 소나무 숲과 대비되는 초라함 그리고 이곳에 그들과 함께 영원히 묻혀버린 이야기들이 가져다주는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을 남겨둔 채 발걸음을 돌렸다. 서울에 두 발 딛고 살고 있는 한, 문득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채 잠시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고 싶을 때 생각날 것 같은 공간이었다. 녹음이 짙어져만 가는 이번 여름 문득 태릉과 강릉 사이의 숲길에 담긴 그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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