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용문사(龍門山龍門寺) / 전통사찰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913년(신덕왕 2)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창사하였다는 설도 있다.
1378년(우왕 4)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개풍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대장경판을 옮겨 봉안.
1395년(태조 4) 조안(祖眼)화상이 중창하였다.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위하여 보전(寶殿)을 짓고.
1457년(세조 3) 퇴락한 법당과 승방(僧房)을 중수하였다.
1480년(성종 11) 처안(處安)이 중수하였으며, 1890년(고종 30) 봉성(鳳城)이 중창하였다.
1907년 의병 봉기 때 왜병이 불을 질러 다 타벘다. 1909년 취운(翠雲)이 큰방을 중건하였다.
1938년 주지 홍태욱(洪泰旭)이 대웅전·어실각(御室閣)·칠성각·기념각·요사채 등을 복원하였다.
6·25전쟁 때 용문산전투로 다시 불에 탔다.
1982년 주지 선걸(禪杰)이 취임, 대웅전/삼성각/지장전/범종각/일주문/관음/요사 등을 중수. 불사리탑, 미륵불 등을 조성.
(용문사 안내문 위주로 정리함. 인터넷 백과사전도 참조함)
용문사와 용문산은 와 보고픈 곳이었다. 용문산은 미지산(彌智山)이었다.
용문사는 관광지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명하다.
주차(주차비 있음), 입장료를 내고 들어섰다. 절까지 20분 정도 걸어야 한다.
바쁜 일이 없는 나는 주변을 살피며 절로 들어 갔다. 절에서 몇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족히 3시간은 되겠다.
용문산, 좌로 장군봉, 능선, 정상/상원사에 주차, 장군봉, 정상, 용문사, 상원사......최소 5시간. 가을에 도전!
주차료 받는 곳이다.
일주문, 관광단지를 지나면 나온다. 여기서 20분 가량 더 가면 용문사가 있다.
사천왕문
미르, 커피와 전통차를 파는 휴게 공간이다. 너와지붕이다. 천왕문 앞에서 본 그림.
천왕문을 지나니 직선 계단, 우측 철구조물은 은행나무 보호용 피뢰침탑이다.
아직 파릇한 잎이 나지 않은 상태, 옷을 벗고 있는 나무를 보는 것도 좋다.
용문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높이 42m, 둘레 15.2m, 나이는 1,100살 정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이다.
의상대사가 들고 다니던 지팡이, 그 지팡이가 살아나 오늘까지 왔다는 설.
아니면 마의태자가 금강산 가는 길에 들러서 나무를 심었다는 설.
나라에 제앙이 오면 은행나무가 운다는 이야기.
1907년 의병 본거지인 이 절을 왜병이 태웠으나 나무는 타지 않았다.
용문사도 규모가 제법 큰 절이다.
대웅전
미소전, 웃고 있는 나한상들.
칠성각
산령각
지장전
운경당 기홍대선사(1904~2000) / 봉선사 조실, 봉선사에 이분 탑이 있다. 봉선사 홈페이지에 이분 생애을 게재하고 있다.
관음전
용문사 금동 관음보살좌상 /보물
14세기, 고려후기 불교 조각으로 가치가 높다.
범종루
누각 아래 울림통이 있다.
용문사 사적비
템플스테이 공간
승탑원, 부도전
용문사 정지국사 탑과 비 /보물 제531호
1398년(조선 태조 7) 건립. 신라 말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온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탑은 80m 떨어진 곳에 있다.
정지국사비, 부도에 비하여 비는 단촐하다.
2시간 넘게 구경한 것 같다. 예천 용문사가 생각이 났다. 이제 남해 용문사을 가면 세 곳을 엮어 글을 쓸 수 있겠다.
차가 다니는 길과 숲길은 계곡을 사이로 나란히 높여져 있다. 내려갈 때는 숲길을 택했다.
용문관광단지
한시, 비가 여럿 있지만, 매월당 김시습
점심 시간이 지났다.
남은 시간에 대성사와 마애불을 다 볼 수 있을까?
가을에 산행을 목적으로 와야겠다. 가까운 곳에 봉선사가 있다. 운악산도 100대 명산 가운데 한 곳이다.
봉선사는 본사이며 양평군 사찰은 봉선사 말사이다.
*정지국사 지천(正智國師 智泉, 1324/고려 충숙왕 11~1395/조선 태조 4)
선승(禪僧). 성은 김씨(金氏). 호는 축원(竺源). 황해도 재령 출신.
1332년(충숙왕 복위 1) 장수산 현암사(懸菴寺)로 출가하여 선(禪)을 닦다가, 뒤에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
1353년(공민왕 2) 무학(無學)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을 찾았다.
고려에서 먼저 온 나옹(懶翁)이 지공의 인가를 받았으므로 두 사람은 함께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오대산의 벽봉(碧峯)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자취를 감추고 수행에만 힘썼다.
항상 말이 적고 근엄하였으며, 깊은 산에 숨어 지낼 뿐 대중을 거느리고 법회를 여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천마산 적멸암(寂滅庵)에서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나이 61세,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
화장을 하자 많은 사리가 나왔으며, 제자 조안(祖眼)이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에 부도와 비를 세웠더.
왕은 정지국사(正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