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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모자 -장혜숙
“저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메시지를 남겨 주시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삐이 소리가
나거든…….”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난 여자는 전화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기계
속에서 걸러진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다. 실내에는 미처 물러가지 못한 어둠 한 자
락이 구석에서 머뭇거리고 있고, 벽에 걸린 시계는 막 여섯 시를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어제 저
녁, 아니, 정확히 오늘 새벽 세 시까지 여자는 깨어 있었다. 그러니까 겨우 세 시간을 잔셈이 된
다. 사람의 몸에는 햇빛에 반응하는 물질이 있어 아침에 저절로 깨어나게 한다는데 그래도 아
직은 정상인 부분이 있나보네, 하고 생각하며 여자는 혼자 풀썩 웃는다.
“나다, 이모야. 요즘 통 소식이 없길래 전화했다. 있으면 전화 좀 받거라.”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이모의 목소리는 여전히 쨍쨍하다. 여자는 갑자기 등골로 파고드는 섬
뜩한 한기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일어나 보니 소파 위였고 입은 옷 그대로이다. 허벅지
까지 말려 올라 간 원피스 속에서 길이가 다른, 볼썽사나운 다리가 드러나 있다. 왼쪽 다리는 볼
품없이 여위고 발도 오그라져 있지만 오른쪽 다리는 아직도 탄력과 윤기가 있는 살집이 붙어
있다. 여자는 언제 보아도 생소한 두 다리에 낯을 찡그리며 옷자락을 끌어내린다.
“요즘도 약을 먹어야 자니? 불면증 같은 건 시집가면 저절로 없어져. 에이그, 내가 죽기 전에 니
가 하루라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는데…….”
이모는 마침표처럼 쯧, 하고 혀를 차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자는 문득 장식장의 유리문 안에 의
사가 처방해 주었던 약봉지들이 두툼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본다. 그것들은 문만 열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질 만큼 위태위태하게 놓여 있다. 여자는 기우뚱한 걸음으로 장식장으로 다가가 한
쪽 문을 열고 붉고 푸른 알약들이 들어 있는 약봉지를 모두 꺼낸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휴지통
에 모두 쏟아넣는다. 의사들은 언제나 수면제와 소화제로 여자의 삶을 다스리려 들었다.
“아직 안 일어난 거니, 집에 없는 거니? 내 몸도 이젠 예전 같지 않은데 한 번 다녀가렴. 할 말이
있다.”
여자는 일어난 김에 길고 두꺼운 스웨터를 찾아 입고 소파로 돌아온다. 어쩌면 이모는 자신이
깨어있으면서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이모에게서 들
어야할 얘기, 그리고 자신이 해야할 얘기에 여자는 진작부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이모는 칠
순이 넘어 병이 들고 부터는 부쩍 여자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느이 에미 만나기가 민망하구나, 널 그렇게 살게 내버려두는 게 아니었는데
……. 그땐 워낙 살기 어려워서 널 도와줄 능력이 없었구나. 잊어버려라. 그리고 새롭게 살아. 사
람 사는 거 별거 아니야. 그저 무난하게 살면 돼. 이젠 돈도 좀 있으니까 예전같이 가난한 고아
는 면했잖니. 그깐 다리 약간 저는 거 요즘엔 문제도 아니야. 아, 당장 우리 동네 복덩방 최씨도
너를 한 번 봤으면 하더라.”
이모는 아마 같은 얘기를 또다시 반복할 것이다. 여자는 이모의 지나친 관심이 불편하다. 여자
의 어머니가 여자를 버려두고 혼자 저승으로 떠났을 때도 이모는 선뜻 여자를 거두려하지 않았
다. 마지못해 받아들인 이모에게서 얹혀 사는 십 년 동안 여자의 버림받은 상처는 배가 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이 이모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이모에게도 여자는 기대되
지 않는 존재였음을 알 뿐이다. 그런 이모를 여자는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저 가끔
고맙게 여길 뿐이다.
이모의 목소리는 어느새 뚜우뚜, 하는 신호음으로 바뀌어 있다. 여자는 다시 소파에 길게 눕는
다. 맞은 편 벽 쪽에 붙어 있는 침대가 을씨년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옆의 책장과 장
식장, 서랍장들도……. 이곳에 있는 어느 것 하나 을씨년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그것들은 모두 변
화 없이 한자리에서 침잠하고 있다. 변화가 있다면 침대 위에 그림처럼 들어앉은 창 밖 풍경뿐
이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는 지금 수액이 올라 연초록 색으로 방울방울 움이 트고 있
는 중이다. 여자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 빛이 눈에 시려 다시 한 번 눈을 감는다.
작업실 안은 아직도 어둡다. 여자는 내실과 작업실을 구분해 놓은 칸막이 벽의 작은 통용문을
열어놓고 팔을 뻗어 작업실의 전등 스위치를 올린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불이 켜지는 그 짧은
순간에 느껴지는 공포를 여자는 못 견뎌한다. 또한 불이 켜지는 순간과 마찬가지로 불이 들어
오는 순간에도 여자는 공포를 느낀다. 변화하는 공간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은 익숙하면서도 매
번 낯선 공포를 안겨 주었다.
여자는 불이 들어올 때 들리는 지잉, 하는 소리와 번쩍, 하는 빛의 자극을 느끼고 감았던 눈을
뜬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뜰 때 환하게 나타나는 또 다른 공간을 즐거워한다. 이상한 나라의 엘
리스처럼 마법의 힘으로 공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동화적 즐거움이기도 하다. 여자는 자신이
도착한 나라의 환영객들을 바라본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금빛으로 번쩍이는 재킷을 입고 열창
을 하고 있고, 입술 근처에 애교 점을 그려 넣은 마릴린 먼로가 고혹적인 눈길로 윈드 키스를 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황금빛 술이 달린 제복을 입고 턱을 치켜든 팔레비 왕과, 희끗희끗
한 머리칼에 흰 눈썹과 수염을 갖고 있는 헤밍웨이가 활짝 웃고 있다. 헤밍웨이의 터럭들은 어
두운 배경색 때문에 야광물질처럼 빛나 보인다. 그들은 모두 표구된 비단 천 속에 갇혀서 벽에
걸려 있다.
여자는 출입문 옆, 책상 위에 놓인 미완성의 그림도 바라본다. 건드리기만 해도 그 분홍빛 뺨이
톡 터질 것만 같은 아기 그림이다. 그러나 푸른색의 모자까지 쓰고 있는 아기의 얼굴은 비어 있
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는 아기……. 여자는 아기 그림을 바라보며 자신의 뺨을 어루만
진다. 아직도 여자의 뺨은 아기의 보드라운 감촉을 기억하고, 코는 달착지근한 향내를 기억하
고, 그리고 귀는 숨소리와 작은 심장의 박동소리, 얇은 살갗 밑을 흐르는 피의 움직임까지를 기
억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아기의 얼굴은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여자가 아기를 안아볼 수 있었던
기회는 딱 한 번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허락되었었다.
여자는 한쪽 구석에 있는 입식 옷걸이로 다가가 군데군데 물감이 묻어 있는 가운을 걸친다. 옷
걸이가 놓인 벽 쪽 칠판에는 수강생들을 위한 강의 내용이 쓰여 있다.
*일제 홀바인 칼라를 사용할 것
1. 연필 뎃셍 후에 번트 시에나 422로 덧그림
2. 레몬 옐로우 405를 솜으로 문지른다
3. 버밀리온 403, 차이니즈 레드 402를 섞어서 문지른다.
4. 선 외를 깨끗이 지우고 건조시킨다 (6시간 이상)
5. 번트 시에나, 퍼마넌트 그린을 배합, 부분 소묘한다. 피부까지
작업 순서는 6, 7, 8로 계속되어 있다. 여자는 지우개를 집어 그것들을 찬찬히 지워나간다. 이제
는 수강생들도 발길을 끊을 모양이다. 흑백과정에서 칼라과정으로 올라간 두 명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열흘째 결석이다. 사진 때문에 초상화의 인기가 떨어진지 오래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
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사진은 오만가지 기술이 있어도 그 필름이 있어야 그것에 관한 기술
을 발휘할 수 있지만 실크 스크린 초상화는 아주 작고 낡은 옛날 사진으로도 꼭 필요한 사람을
화려하게 살려낼 수 있다. 여자는 단 한 번이라도 그리워하는 대상을 그리워하는 이에게 만들
어 보여줄 수 있는 그 작업에 대해 불만을 느껴본 적이 없다.
여자는 내친김에 청소를 해볼까 하고 생각한다. 양쪽 벽에 각각 세 명의 인원이 작업을 할 수 있
는 작업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벌써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흔적이 생겨나고 있다. 딱딱해지
고 빳빳해져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물감과 붓, 잘린 비단 쪼가리, 그리고 작업대 위에 부착
된 6개의 형광등 갓에는 하나같이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다. 그러나 여자는 작업실의 문부터 열
기로 한다. 벌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여자는 작업실의 출입문과 덧문을 열어놓고 출입문이 닫히지 않도록 의자로 문간을 가로막아
놓는다. 간밤에 비라도 왔었는지 하늘이 유난스럽게 파랗고 거리도 씻긴 듯 깨끗하다. 봄비는
조용히 머물다가 살그머니 가버린 모양이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건너편에 있는 가게들은 아직
한밤중인 양 덧문까지 내린 채 미동도 없어 보인다. 여자는 무심히 습관처럼 건너편의 간판들
을 읽어나간다. 르봉 헤어라인, 한불 화장품, 멕시칸 치킨, 팔팔 비디오, 크라운 베이커리, 네모
뮤직박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든다. 네모 뮤직박스의 건물 이층에서
누군가 이쪽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얼마 전에 증축을 끝낸 건물의 이층 창문은 살림집답지 않
게 넓고 낮아서 사람의 반신을 너끈히 보여주고도 남았다. 남자는 여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움
찔하고 자세를 흐트리는 듯 하더니 다시 정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다. 커다란 고무나무와 항
아리를 이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 사이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얼핏 보면 마치 조각상과 어울
리는 장식물 같기도 하다. 여자는 그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
린다. 얼마 전까지 뮤직박스에 나붙었던 ‘하숙생 구함’이라는 쪽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새
로 이사온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여자는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작업실에서 뜨개질 바구니를 챙겨들고 나온다. 벌써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여자는 이 시각에 바깥 구경하기를 좋아한다. 길 끝에 이어진 큰길 건너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이맘때의 이 길은 병아리 같은 어린 것들의 재잘거림과 종종걸음으로 화사하다. 개중에 어떤
아이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밖으로 걸린 초상화들을 호기심 있게 들여다보기도 하고, 흰 가
운을 입은 여자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시늉도 한다. 여자는 그런 아이들을 보는 것이 좋다.
겨울이 오기 전, 날씨가 좋은 날이면 여자는 의자를 출입문 가까이에 놓고 앉아 뜨개질을 했었
다. 여자가 뜨는 것은 언제나 푸른 색깔의 모자이다. 울트라 마린 블루의 짙푸른 색깔의 모자가
완성되면 여자는 그것을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제 겨울이 지났기 때문에
여자는 털실 대신 가느다랗고 푸른 여름용 뜨개실을 준비했다. 앞부분에 플라스틱 챙을 집어넣
으면 썩 훌륭한 챙모자가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감색 골덴 재킷을 입은 사내아이 하나가 갑자기 여자 앞으로 다가오더니 신발주머니를 앞으로
모아 쥐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 아마도 전에 여자에게서 모자 선물을 받은 아이인 것 같다.
“응, 그래. 학교 가는구나. 공부 잘 하지?”
여자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쓸어준다. 짧은 머리칼들이 기분 좋은 탄력을 갖고 손바닥을 간질
인다. 어쩌면 여자의 아기도 이처럼 자라서 이런 감촉의 머리칼을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여자의 가슴속에서 뭉클한 것이 일어선다. 여자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눈을 가늘게 좁
혀 뜨고 아이를 향해 활짝 웃어준다. 아이는 칭찬이라도 받은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저만치에
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로 달려간다. 여자는 재잘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이
들의 모습이 조그맣게 멀어지자 무릎 위에 놓인 실과 바늘을 잡는다. 여자는 바늘을 움직여 동
그랗게 짜나갈 구심점을 만든다. 그리고 코의 수를 늘려가며 수면에 이는 파문처럼 동그라미를
이어나간다.
아기의 부모는 여자를 피해 아주 비밀스럽게 먼 곳으로 떠나갔다. 아기가 한국을 떠나기 전까
지 여자는 아기에게 두 번이나 모자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아기 엄마가 그것을 아기에게 씌웠
는지 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여자는 아기를 위해 모자를 뜨는 때가 제일 만족스럽다. 그
건 여자만이 알 수 있는 주술 같은 시간이다. 여자는 모자를 이루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의 목
소리를 새겨 넣는다. 있잖아, 나도 네 엄마야, 넌 나를 몰라도 넌 내 속에서 나온 내 아들이야, 아
이를 못 낳는 네 엄마 대신 내가 널 낳았단다. 그러니까 나도 엄마야, 나도 너를 사랑해. 잊지 마,
너의 존재가 내가 살아 있는 이유라는 걸…….
갑자기 거리가 조용해졌다. 어느새 등교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길
에는 순간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다. 오늘은 지각하는 아이도 없는 것 같다. 급한 마음에 발보다
먼저 목을 앞으로 빼고 가방을 덜그럭거리며 뛰어가는 아이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누나 도시
락>이라는 입 간판이 있는 골목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자전거 하나가 여자의 눈앞을 쏜살같이
지나 큰길 쪽으로 달려간다. 자전거를 따라간 여자의 시선 끝, 저 멀리에 구름 같이 피어난 벚꽃
이 보인다. 벚꽃은 마치 먼 곳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몽환적인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여자는 뜨개질 바구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바구니와 의자를 챙겨들자 바람에 실려온 분
홍색 꽃 이파리 하나가 여자의 코앞에서 나풀거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칸막이 저편에서 끊어질 듯 길게 이어지는 시계 종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11시가 다 된 모양이
다. 표구점에서 그림을 가져가기로 한 박 사장은 올 기미가 없어 보인다. 박 사장은 여자가 가겠
다고 전화를 하자, 분명 아, 오 선생, 몸도 불편한데 제가 가죠. 오전 중으로 갈 겁니다, 했었다.
여자는 밤을 새다시피 해서 마무리를 한 초상화를 꺼내 다시 한 번 살펴본다.
그림은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흑백을 칼라로 옮기는 데서 오는 어색함도 없고, 확대하는
데서 오는 불균형도 느껴지지 않는다. 솜을 이용해서 배경을 연한 녹색으로 문질러 주었더니
그림 속의 인물은 더욱 섬세하게 살아나 있다. 표구와 액자까지 갖추게 되면 더욱 만족한 상품
이 될 것이다.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세련된 차림새이긴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낡고 닳아진 느
낌을 주는 젊은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명함판 크기의 사진을 내밀면서 10호 정도의 크기에 칼
라를 넣어 그려달라고 주문했었다. 여자는 주문을 받는 즉시 렌즈를 사용해서 확대한 영상을 ‘
후랏또’ 천에다가 옮긴 다음 밑그림을 그려 놓았었다. 그러고는 며칠째 방치해 두었다가 어젯
밤에 끝내기를 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 속의 여인은 그림을 주문한 여자와 많이 닮아 있다. 한복을 입고 쪽을 찐
머리가 인고의 세월을 보낸 옛 시대의 여인이라기보다는 화려한 추억을 간직한 퇴물 기생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그림을 주문한 여자에게서도 얼핏 화류계의 냄새가 난 것 같다. 그림 속의
여자는 필시 그 여자의 어머니일 것이다.
여자는 어머니와 닮았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여자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모든 희망을 접고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여자
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어머니에게 희망이 되지 못했다는 서글
픈 자각 때문이다. 여자는 부모에게 반듯한 자식이 아니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름발이 딸이
었던 것이다. 여자가 어머니에게 희망이 못 되었던 것처럼 아버지 역시 여자에게 희망을 걸지
않았다. 사진작가인 아버지는 진작부터 모델출신의 젊은 여자와 딴 살림을 차리고 애까지 낳아
키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자살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도 여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지가 않다. 어머니의 부재 때문에 여자가 경험할 수 있
었던 것은 운명의 편벽하고 삐뚤어진 절름발이의 기호들뿐이었다. 언제나 가까이에 있고 언제
든 안길 수 있는, 그런 대상을 너무 일찍 잃어버린 여자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희망 없는 존재에 대한 깊은 절망감만을 여자에게 남겨주고 가버렸다.
때때로 여자는 자신이 치러야 할 의외의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어머니처럼 자살을 꿈꿀 때도 없
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옹호하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자신에게 일말의
기대나 가치를 남기지 않은 어머니를 따르기는 싫었다. 여자는 어머니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
며 살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다르기 위해 이제껏 살아남았다. 그러나 여자는 가끔 자신의 생각
에 모호함을 느낀다. 어머니는 그래도 어머니로 불릴 이름이나마 남겼지만, 여자는 자신이 낳
은 아이에게조차 불릴 이름이 없다. 단지 자궁을 빌려준 은밀한 거래자였던 것 외에는…….
여자는 무료한 표정으로 바깥쪽을 보고 있다. 출입문 상단의 유리에는 환하고 눈부신 봄볕이
섬광처럼 번쩍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 한적한 거리에선 봄볕이 분방하게 끓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어디선가 아이 우는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 여자는 무심결에 손을 올린다. 그러나 사위
는 한여름 땡볕에 혼자 서 있을 때처럼 막막하고 고요하다. 여자는 맥없이 웃으며 손을 내린다.
귀앓이가 사라진 건 벌써 오래 전 일인데도 여자는 깜빡 잊고 있다.
해마다 봄만 되면 여자는 연례행사처럼 귀앓이를 치르곤 했다. 밖에서 조용히 끓어오르고 있는
햇빛 속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는 귓속을 파고들면서 염증을 일으켰다. 그
러나 여자가 이비인후과를 찾으면 의사는 도리질을 하면서 여자를 신경정신과로 보냈고, 신경
정신과에선 또다시 여자를 이비인후과로 보냈다. 여자가 들은 것은 환청이었지만 여자의 귀는
분명 동통과 염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자는 아기울음 소리에 가슴 저리지 않는
다. 그건 아기가 더 이상 아기울음 소리를 내지 않을 만큼 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작업실 문 앞까지 나가 큰길 쪽을 기웃거려본다. 박 사장의 오토바이는 보이지 않고 거
리엔 햇빛만 가득하다. 행인도 없는 무기력한 정적 속에서 햇빛은 이따금씩 생선 비늘처럼 반
짝이며 튀어 올라 여자의 눈을 찔러댄다. 여자는 두 손으로 눈을 부비다가 문득 바깥 구경을 한
지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큰길 쪽으로 나갔던 일이 까마득한 옛날일 같다. 한겨울 동안
여자는 그냥 딱딱한 고치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칩거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오
늘 같은 갑작스런 햇빛에 여자는 분별없는 출분의 유혹을 느낀다.
여자는 한 시간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라는 메모를 출입문에 붙이고 길을 나선다. 놀랍도록 화
창한 날씨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마에선 벌써 땀이 흐르고 있다.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기상이변 어쩌구 하던 기상 캐스터의 말대로 사월의 날씨가 오월보다도 덥고, 찬란하게 내리꽂
히는 햇살은 오뉴월 땡볕처럼 콘크리트 도로 위에서 하얗게 뒹굴고 있다. 여자는 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다. 항상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애를 쓰는데도 남다른 걸음걸이 때
문에 여자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켜야 한다.
여자는 땀을 닦으며 무심히 고개를 들고 위를 보다가 깜짝 놀란다. 여자가 서 있는 곳은 뮤직박
스의 건물 앞이고, 그 건물의 이층에는 아침에 보았던 남자가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이상한
사람이네, 무슨 파수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자 중얼거린다. 생
각해보니 남자가 서 있는 방향은 바로 여자의 작업실 입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자의 시선이
어디를 주시하던 말던 알 바 아니라는 생각에 여자는 수건을 가방에 넣고 다시 길을 걸어간다.
왠지 남자의 시선이 좇아오는 느낌이 든다. 힘이 약한 왼쪽 발 때문에 오른발에 힘을 실어야 하
는 여자의 걸음걸이는 보나마나 무슨 벌레의 굼틀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거기
에다 어깨에 가로 걸린 가방은 여자의 움직임을 좇아 규칙적으로 덜렁거릴 것이다. 그러나 여
자는 개의치 않고 규칙적인 몸놀림으로 부지런히 큰길 쪽으로 걸어나간다. 아침에 보았던 구름
같은 벚꽃이 가까워지고 있다.
여자는 큰길을 건너 장미 울타리가 있는 초등학교 담장을 지나고, 올망졸망한 문구점들을 지나
허름한 아파트의 정문에 다다른다. 아파트 정문에는 ‘재건축 승인’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
려 있다. 여자는 아파트 안을 들여다보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현
수막 뒤의 정경은 무릉도원을 방불케 하는 별천지다. 은근하고 화사한 빛깔의 벚꽃 터널 옆으
로 넓은 잔디밭과 희고 노란, 작은 꽃들이 앙증맞게 피어 있고, 연초록 잎새로 애교 있게 태양
빛을 가리고 있는 이름 모를 나무들은 저마다 가지에 청사초롱을 매달고 있다. 여자는 큰 숨을
내쉬고 한 무더기의 벚꽃이 아기자기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벤치를 찾아 앉는다. 실바람을 타
고 작은 꽃잎이 떨어져 내린 벤치는 말 그대로 꽃방석이다. 여자는 여왕이라도 된 듯한 흡족한
기분에 수줍게 미소 짓는다.
곧 축제라도 벌일 것 같은 아파트 단지 안은 의외로 한적하다. 시골 간이역같이 소박한 놀이터
를 지나 마주 보이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어린 아이 둘이 한가롭게 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세
살, 일곱 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롭게 걸어다니는 계집아이는 퍼머를 했는지 미장원에
서 사용하는 보자기를 쓰고 있고, 사내아이는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땅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다
. 아이들의 엄마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잠깐 집안에라도 들어 간 것일까. 여자는 담쟁
이덩굴이 올라간 벽을 따라 아이들 엄마가 있음직한 곳을 눈으로 더듬어 본다. 날씨가 더운 탓
인지 창문들이 모두 열려 있다. 머릿수건을 쓴 젊은 여인이 창문턱에 조그만 화분 하나를 내놓
고 있는 중이다. 여자는 그 꽃이 눈에 익어 자세히 살펴본다. 투명한 용기에 담긴 히아신스다.
활짝 피어난 푸른 보랏빛의 꽃에서는 진한 향기가 전해져 올 것 같다. 그립고 익숙하나 아득하
게 잊어버렸던 향기……. 여자는 냄새를 맡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신경을 아플 정도로 긴
장시킨다. .
언제였던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어느 봄날, 한 남자가 여자에게 히아신스를 주었던 적이
있다. 히아신스를 보면 네가 생각 나, 이 빛깔과 향기는 너를 닮았어, 너를 사랑해, 네가 가진 슬
픔을 사랑해……. 그는 희고 고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다.
여자는 마음 속 가득히 슬픔이 차오를 때면 그의 고운 손을 잡았다. 그러면 여자의 슬픔은 거짓
말처럼 사라졌다. 그의 손을 잡고 있으면 버림받았던 여자의 손상된 시간들이 복구되었고, 아
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라는 슬픈 감정에서 그는 나를 사랑한다, 라는 기쁜 감정으로 바뀌
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살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는 시인이었고 폐암환자였으며, 또 가
난했다.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는 가난한 시인은 시집을 갖고 싶어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시
인에게 시집을 선물하고 싶어했다. 목돈을 만지기 위해 여자가 택한 일은 하필 남의 생명을 뱃
속에 심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자신 때문에 돈을 받고 남의 생명을 뱃속에 심었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된 시인은 그만 오랫동안 쓴 시들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여자가 해산
의 비명을 지르던 그날, 시인은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여자가
해산의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시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여자가 새
로운 생명을 얻었을 때 그의 생명은 소멸되었다. 아기는 그의 생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시인도
아기도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생각했다. 행복은 무척 낯선 것이라고, 불행이 오히려 익
숙하고 편안한 것이라고…….
갑자기 자지러질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소리 난 곳을 바라본다. 현관 앞에
서 놀던 아이들이 어느새 놀이터에 가 있다. 계집아이는 모래밭에 넘어져 울고 있고, 사내아이
는 넘어진 동생의 팔을 마구 잡아당기고 있다. 계집아이의 울음소리는 예사롭지가 않다. 숨이
넘어갈 것 같다. 혹시 미끄럼틀에서 떨어진 것이나 아닐까? 여자는 황급히 벤치에서 일어나 아
이들에게 다가간다. 여자가 계집아이를 일으키려는 순간 아이 엄마가 현관에서 쏜살같이 달려
나오더니 여자를 밀치고 아이를 안아 올린다. 그러고는 여자에게 수상쩍은 눈빛을 희번뜩거리
며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팽 돌아선다. 뚝 그쳐! 안 그치면 저 아줌마한테 주어버릴 거야! 울음
을 그치지 않는 아이에게 아이의 엄마가 엄포를 놓자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공포를 느끼는 몸
짓으로 제 엄마의 목에 팔을 꼭 감는다. 여자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빛 아래서 무안한 웃음을
짓고 서 있는다. 모래에 부딪쳐 오른 햇빛 때문에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따가운 두
눈에 눈물이 핑 돌고 있다.
햇빛은 출입문 상단의 유리를 통과해 들어와 작업실 바닥에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고 있다.
표구점의 박 사장은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여자는 나른한 햇빛 속에 손을 내밀어 그림자 놀이
를 한다. 토끼와 자라가 나타났지만 소리도 없이 입만 벌리다가 사라진다. 아이가 옆에 있다면
어릴 적 어머니처럼 무슨 말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여자는 다시 토끼와 자라를 살려
낸다. 그리고 어렸을 적에 들었던 어머니의 낭랑한 목소리를 되살려 본다.
앗, 토끼다! 여보셔요 토끼님! 저 말인가요? 예 토끼님 맞죠? 그런데요? 어이구 이것 참 반갑군
요. 말로만 듣던 토끼님을 직접 뵙다니. 나는 용궁에서 나들이 나온 자라올시다. 우리 한 번 사
귀어보지 않겠소? 그런데 정말 신기하군요. 우리 용궁의 화공이 그린 그림과 어쩌면 그렇게 꼭
같습니까? 그 화공이 언제 나를 보았던 가요? 글쎄요, 그건…….
“아, 이거 참,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지요.”
갑자기 손 그림자 위에 커다란 그림자가 덥치더니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표구점의 박 사장이
다. 헬멧을 쓴 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일이 많은가봐요?”
여자는 놀란 표정을 감추고 굼뜬 동작으로 일어난다.
“아니, 그게……. 사실은 애기 목욕시키느라고 깜박했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박 사장은 헬멧을 벗으며 멋쩍게 웃는다. 땀에 젖은 얼굴은 불결하고 추레해 보이지만 표정은
만족감으로 빛나 보인다, 여자는 한 달 전에 박 사장이 첫 아기를 보았다고 기뻐하던 표정을 기
억한다. 아기 목욕시키는 일까지 하는 걸 보면 아기는 그들 부부에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이 분명했다. 여자는 자신이 낳아준 아이의 아버지도 아기를 얻었을 때 저렇게 행복해 했을
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여자는 아이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가 만일 저처럼 좋
아했다면 여자는 자신이 받은 돈의 액수만큼 충실히 책임을 다 한 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러나 그의 아내, 아이 엄마인 그 여인은 어땠을까? 여자는 아이 엄마에 대한 생각이 미치자 일
말의 불안을 느낀다. 얼음 같이 차가운 표정에 유리조각 같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갖고 있던 여
인, 그 여인이 아이를 잘 키우고 있을까? 그 여인의 목소리는 지금도 유리조각에 살을 베었을
때처럼 선연한 아픔을 준다.
“아니, 왜 하필 절름발이에요. 게다가 눈빛은 왜 또 저렇게 처량 맞은 거야. 난 맘에 안 들어. 뭐
야. 그렇게도 사람이 없어? 혹시 아기에게 유전되면 어쩌려고 그래.”
여인은 여자가 앉아 있는 병실의 커튼을 와락 젖히면서 뒤에 서 있던 의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
다. 여인은 의사를 오빠라고 불렀다.
“너, 왜 그러니. 잘 알면서……. 저 분은 너를 도우러 온 거야. 유전자는 네 남편과 네 것이잖아. 그
러니까 아이는 너를 닮을 거야. 저 분은 단지 일곱 달 동안 아기가 자랄 집을 제공하는 것 뿐이
야.”
의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여인에게 말했다.
“맞아요, 사모님. 안심하세요. 정자와 난자는 모두 훌륭한 분 들 것이니까 아마 아기는 머리 좋
고, 인물 좋고, 아주 우등한 인간이 태어날 겁니다. 시험관에서 60일 동안의 배양도 성공적이었
으니 이제 아기의 탄생도 성공적일 겁니다."
간호사도 아양을 떨 듯 말했으나 여인은 히스테릭한 울음소리와 함께 병실을 뛰쳐나갔다. 그러
자 의사와 간호사도 여인을 달래기 위해 덩달아 뛰쳐나갔다. 여자는 병실에 우두커니 혼자 남
아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벼락 같이 내쏘고 간 여인의 말에 놀란 심장이 가슴속에서 풀무질
을 해댔지만 여자는 마음속으로 자궁이 없다는 사실이 여인을 저렇게 변화시킨 것이라고 생각
하며 여인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과연 누가 누구를 동정할 수 있다는 것일까. 열등한 인간
이면서 감히 우등한 인간을 동정하다니……. 여자는 천장을 쳐다보며 쿡쿡 웃었다. 생각 같아선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도 싶었지만 죽어 가는 시인에게 시집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기쁨을 포기
하지는 못했다.
표구점 박 사장은 냉수 한 잔을 달게 마시고 왔던 길을 되달려 갔다. 여자는 푸른색의 필름으로
빛을 차단한 진열장 안쪽으로 의자를 옮겨놓고 앉는다. 쏟아지는 햇빛으로 건물들의 색이 건조
하게 바래져가는 바깥과는 달리 진열장 안 쪽은 바다 속처럼 검푸르고 고요하다. 어스름한 빛
속의 고요함은 여자에게 어머니의 시체를 발견하던 그 최초의 어둠을 생각나게 한다. 여자는
아직도 그것을 몹쓸 꿈으로 기억하고 있다. 처음 눈을 떴을 땐 해바라기 꽃무늬가 있던 커튼 너
머로 눈부신 햇빛이 들어오던 아침이었다.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아주 곤하게 자고 있는 것처
럼 보였다. 옆에 누워 있던 여자는 여느 때처럼 어머니가 자기를 깨워주기를 기대하며 여러 번
깼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허기가 들어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어둠이 있었고, 그 어둠이 눈에
익을 때쯤엔 아직도 옆에서 자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여자는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
했다. 어머니는 미동도 없이 그저 누워만 있었다. 여자가 안간힘을 써서 어머니를 일으키자 어
머니의 팔과 목이 맥없이 늘어졌다. 여자가 힘에 부쳐 손을 놓으니 어머니는 썩은 나무둥치처
럼 나동그라졌다. 여자는 비로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큰 방의 한 가운데서 여자의 목소리만 오랫동안 공명처럼 울려퍼졌다.
여자는 의자에 두 발을 올려놓고 최대한으로 등을 구부려 무릎을 싸안는다. 부피가 다른 한쪽
다리 때문에 자칫 중심을 잃고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였지만 곧 자리를 잡은 여자는 등을 구부
려 무릎 위에 고개를 묻는다. 그리고 어두운 심해에 가라앉은 물고기처럼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숨을 내쉰다. 고요한 평화가 물결처럼 부드럽게 여자를 쓰다듬는다. 여
자는 그 아늑함 속에서 한 목소리를 생각해 낸다.
미안하다. 너를 이렇게 만든 건 모두 내 탓이야, 못난 에미 탓이야. 아니, 예방주사도 맞힐 수 없
었던 가난 탓이야. 예방주사만 맞혔어도 그놈의 폴리, 뭔가 하는 바이러스가 너를 망쳐 놓친 않
았을 텐데…….
어머니는 죽기 전날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흐느꼈다. 어머니의 입에서는 술내가 났
지만 품속은 따뜻했다. 여자는 마음속으로 힘껏 소리 지른다. 아니에요, 어머니. 아직도 모르세
요? 어머니의 잘못은 그것보다도 어린 자식을 홀로 남겨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데에 있
어요. 병신 소리를 듣는 모욕감도, 눅눅한 천처럼 척척 달라붙었던 불결한 가난도, 어미 없는 설
음보다는 나아요. 지금 내가 정말 슬픈 건, 아이를 버려둔 채 죽은 사람과 아이를 팔고도 살아
있는 사람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에요……. 여자는 이제 소리내어 흐느낀
다. 점점 커져 가는 흐느낌 속에 칸막이 저편의 전화 벨 소리가 조그맣게 섞여든다.
“누구 없어요?”
갑작스런 큰 목소리에 여자는 자지러질 것처럼 놀라 일어선다. 그 바람에 여자가 앉았던 의자
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그라진다.
“아, 이거 참,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낯선 청년이 한쪽 발만 안으로 들이민 채 서 있다가 여자의 놀라는 모습을 보고 무안한 표정을
짓는다.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청년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다소 창백한 낯빛에 짙은 눈썹이 섬약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인상이다.
“그러세요.”
여자는 이미 들어와 있는 청년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준다. 자빠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
고 나니 미처 바닥에 닫지 못한 한쪽 발이 긴 치마 속에서 흔들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편히 앉으시죠.”
청년은 마치 치마 속의 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한다. 여자는 공연히 치부를 내보인
것 같아 이마를 찡그린다.
“저, 얼마 전에 건너편 뮤직박스 위로 이사왔어요. 아참, 아까 잠깐 보셨더랬죠?”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바라본다. 하얗고 조그만 이가 어린아이의 것처럼 귀엽게 드러난
다. 여자는 멀리서 본 남자의 얼굴을 청년과 연결시키지 못해 잠시 머뭇거린다. 청년은 여자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머쓱해져서 벽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제야 여자는 아, 그 파수꾼
처럼 서 있던,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청년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열심히 그림을 살펴보고 있다. 여자는 고개를 약간 들
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청년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본다. 청년에게선 어딘지 모르게 지친 여행
자의 냄새가 난다. 깍지 못한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의 얼굴엔 피로가 덕지덕
지 달라붙어 있다.
“‘아일 비 데어’군요.”
청년은 유심히 쳐다보는 여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마침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
는 노랫소리를 상기시키며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이제까지 자신이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새삼 귀를 기울인다. ‘이름만 불러 주세요, 나, 거기 있을 게요’하고 어린 마
이클 잭슨이 낭랑한 톤으로 노래하고 있다.
“머라이어 캐리는 아니고. 아마, 마이클 잭슨일테죠?”
청년은 확인이라도 하듯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가 맥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그림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잭슨의 목소리를 따라 노래를 부른다.
저스트 콜 마이 네임~, 앤 아일 비 데어~ .
“발음이 좋네요. 외국생활 많이 했나봐요?”
여자는 손님의 비위를 맞추려는 주인의 수작처럼 한마디 건넨다. 청년은 피식 웃음 소리를 내
더니 이내 표정이 어두워진다.
“미국에 있다가 얼마 전에 왔어요. 사람 좀 찾으려고…….”
“그래요? 누구를 찾으시는 데요?”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빠른 어투로 묻는다. 그러나 등을 돌린 청년은 아무 말이 없다. 그의 등에
는 견고한 껍데기가 붙어 있는 것 같다. 타인의 간섭을 거부하는 완고함이다. 여자는 그의 마음
을 알 것 같아 조용히 입을 다문다.
“이 그림들, 무얼 보고 그리나요?”
청년은 호기심이 많은 모양이다. 세세히 들여다보며 혼자 감탄을 하더니 여자를 돌아보며 묻는
다.
“사진을 보고하죠. 큰 사진, 작은 사진…….”
“저어, 그럼 혹시 이 정도의 사진으로도 저렇게 화사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
청년은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여자에게 내민다. 명함판 크기의 낡은 사진이다. 살이 튼 것처럼
여기저기 갈라진 피막 밑에서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 스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이다. 여인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있
다.
“사진이 많이 상하기 했지만, 할 수는 있겠네요, 크기는 어느 정도로?”
여자는 재빨리 가게 주인의 말투로 묻는다. 청년은 벽면에서 8호 정도의 그림을 가리킨다. 그러
고는 여자가 메모를 하는 동안 저 혼자 뜨개질 바구니를 들추기도 하고 카세트 테이프의 케이
스를 들여다 보기도하며 어정거린다. 마치 친숙한 사람의 집에 놀러온 듯한 무람없는 태도이다
.
“저 그림은 아직 미완성인데 무슨 그림이에요? 모자만 있게…….”
청년은 온갖 것을 흥미 있는 표정으로 둘러보다가 마지막엔 책상 위에 있는 그림을 가리킨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자가 대답이 없자 청년은 힐긋 보더니 더이상 묻지 않는다. 아
마 자신이 쓰고 있는 굳은 껍데기를 본 모양이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아, 그럼……. 예쁘게 잘 해주세요, 하나밖에 없는 엄마 사진이거든요.”
청년은 노랫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듯 하더니 출입문 쪽으로 가며 여자에게 말한다. 청년
은 ‘예쁘게요’ 할 때는 웃고, ‘엄마’라고 할 때는 우는 듯한 표정을 지어, 묘하게도 사진 속의 얼
굴과 같은 표정이 되어버린다. 순간, 여자는 목울대를 심하게 자극하는 이물감을 느낀다. 금방
이라도 ‘아가야’하는 소리를 토해낼 것 같은 그 이물감은, 그러나 청년을 향해 미소를 띠며 고개
를 끄덕이는 사이 목젖에 심한 통증만 남겨놓고 사그라든다. 등을 돌리고 나가는 청년의 뒷모
습에서 여자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본다. 어쩌면 십 년 후에 그 아기도 저렇듯
자신을 찾아오지나 않을까……. 여자의 눈가에 또다시 물기가 돋는다.
여자는 의자 위에 꼼짝 않고 앉아서 밖을 내다본다. 출입문의 네모난 유리로 보이는 밖은 이제
빛이 가라앉고 있다. 어두워지려면 아직 두어 시간은 지나야 할 것 같다. 여자는 어두워지기 전
에 서둘러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둠에 익숙해지려면 앞으로 얼마나한 세월을 보내야할
것인지 여자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여자가 죽기 전까지 그것은 홀로 넘어야 할 거대한 산처럼 버
티고 있을 것이다.
칸막이 저편에서 또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여자는 전화를 받는 대신 작업대 위에 놓
인 뜨개질 바구니를 끌어당긴다. 전화기는 충실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여자는 실과 바
늘을 꺼내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윽고 동그라미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동그라미
를 몇 줄 더 늘여서 크게 만들 생각이다. 청년의 머리에 맞게 하려면 아마도 대여섯 줄은 더 늘
여야 할 것 같다. 까다로워 보이는 청년이 순순히 모자를 받을 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여자는
습관대로 모자를 뜨는 줄마다에 자신의 목소리를 새겨 넣을 것이다. 나도 네 엄마야, 너를 사랑
해. 잊지 마, 너의 존재가 내가 살아 있는 이유라는 걸…….
여러 번 울리던 전화 벨 소리는 제풀에 지친 듯 까무라들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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