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했다.
입가에는 가는 선혈마저 흐르고 있었으니...
피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장력을 그대로 감당했으니 아무리 무공이 강한 그라도 온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나 적용화의 무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피를 흘리며 서 있는 단엽을 바라보는 적용화의 눈빛은 한순간 흐려졌다. 그녀의 면사는 눈물에 젖고 있었다.
[왜..왜..피하지 않았지?]
단엽은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은 당신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오.]
적용화의 눈빛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멍청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리도 가슴이 아픈 것인가? 마치 나의 가슴이 터져버린 듯... 그의 가슴을 친 이 손이 왜 이렇게 미워 보이는가?)
그녀는 천천히 단엽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흰 손수건을 꺼내 단엽의 입가에 맺힌 선혈을 훔쳤다. 아무 말도 없이 순간, 와락...
단엽은 적용화를 끌어안았다. 이어, 그녀의 면사를 잡아챈 후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찍어 눌렀다.
[으음...]
적용화는 완강히 저항했다. 고개를 심하게 내저었으며 두 팔은 사정없이 단엽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의 현상이었을 뿐, 그녀의 두 팔은 단엽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그녀의 입술은 정열적으로 단엽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적용화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 그것은 말보다 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단엽은 정성스럽게 그녀의 백의를 벗겨 내렸고 적용화는 눈을 꼭 감은 채 순응했다.
훅... 확촛불이 꺼졌다.
그리고 뜨거운 숨결이 내실 가득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흐릿한 달빛이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싸고 두 사람은 이내 한 몸이 된 채 불꽃으로 승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말,
[사랑해요.]
아마도 이런 말은 두 사람이 난생처음으로 하는 말인듯 싶다. 밤은 이래서 아름다운가 보다.
- 이제 적용화는 단엽의 사람입니다. 당신이 천마교주의 자리를 버리라 한다면 버리겠습니다. 적용세가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을 돕는 행위가 선조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일지나 이미 이 적용화는 출가외인. 당신이 하는 일을 따를 수밖에 없나이다.
쏴아아... 넘실거리는 파도를 가르며 한척의 범선이 막 태호변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이어, 근 백여 명에 이르는 인물이 지면에 내려섰다. 한데, 그들은 바로 단엽과 적용호 일행이었다.
단엽은 천엽성승을 안고 있었고 그 뒤를 호위하듯 군협칠대무황과 적사오혼이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북궁추림과 북궁천을 비롯한 북궁세가의 칠십이인이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이른 새벽 안개를 해치며 천마도를 떠나 이곳에 이른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들은 은밀히 천마도를 빠져나온 것이다.
이것은 단엽의 뜻이었다.
단엽은 말했다. 서궁세가의 거대한 힘이 천마도의 천마성에 도사리고 있는 이상 더 이상 그들을 반대하는 인물들은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그곳에 머문다는 자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서궁세가의 이목을 피해 천마도를 떠나자는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제안을 적용화를 비롯한 북궁세가의 인물들은 받아들였고 결국 오늘아침 천마도를 떠난 것이다.
지금 또다시 범선을 내려서는 백 수십 명이 있었다.
선두에는 적용화가 있었고 그 뒤로는 철금마후가 이끄는 삼십 이인의 지옥굉의 고수들, 그리고 만독노조가 이끄는 구십팔인 독풍림의 고수가 질서정연하게 따르고 있었다.
불과 이백여 명의 인물 그러나 이들 개개인의 능력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류고수가 아닌 인물은 없었고 이들의 힘을 끌어들인 단엽은 실로 거대한 힘을 등에 진 셈이었다.
[아버님... 이제야 저 죽음의 섬을 빠져나왔습니다.]
단엽은 감회 어린 시선으로 하나의 점으로 보이는 천마도를 응시했다.
천엽성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모두가 너의 뛰어난 능력으로 인한 것이다. 이 아비는 너에게 감탄하고 있다. 인간을 힘이 아닌 마음으로 다스리는 너의 능력은 대견하기도 하다.]
이때였다.
[아버님께서는 너무 그분을 과찬하시는군요.]
적용화가 입술을 삐죽이며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 분을 과찬하시는 것이 좋지만... 가끔은 이 며느리도 칭찬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며느리 너무 초라해지나이다.]
그녀는 면사를 벗고 있었다. 그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순간, 그녀의 말에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한사람은 탄식하고 있었다. 바로 북궁천이었다.
그의 상세는 상당히 호전된 듯 누구의 부축 없이도 혼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시선은 북궁추림에게 향해 있었다.
북궁추림은 그 시선을 단엽의 얼굴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적용화가 단엽에게 각별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북궁천이 전에는 못 보던 표정이었으며 탄식이었다.
북궁천 자신과 함께 북궁세가 사상 초고의 인물이라 불리우던 북궁추림, 인의 몸이면서 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오시하는 자부심에 차 있었고 불가능이란 단어는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북궁천에게 우상이었고 또한 동경이었으며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북궁천의 우상이 지금 불가능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가주께서 사랑을 느끼시고 있으시다. 내가 아닌 단엽에게...)
운명인가? 북궁천은 이렇게 된 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단엽... 그는 세상 모든 여인들을 매혹시킬만한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정대하다. 영웅으로서의 요소 역시 완벽하게 지니고 있다. 그런 그를 가주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가주를 포용할 수 없음을 예전부터 느껴왔다.
그녀에게 있어 북궁천은 단지 수하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빠르게 체념했다.
(가주를 내가 포용할 수 없다면... 그 분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과 맺어주는 것이 수하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는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인간인 이상 허전한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상대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기에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다.
(이 북궁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가주와 단엽을 부부가 되게 하리라. 이 땅에서 가장 어울리는 한 쌍으로...)
이때, 적용화는 단엽으로 앞으로 두 팔을 내밀었다.
[주세요.]
그녀가 불쑥 이렇게 말하자 단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말이오?]
[아버님을 언제까지 당신만이 독점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버님을?]
[그래요. 이 몸은 며느리로서 그 분을 잠시만이라도 독점할 권리가 있지
않나요?]
[그..그런가?]
단엽은 엉겁결에 천엽성승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적용화는 환하게 웃으며 천엽성승을 받아들었다. 천엽성승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적용화는 애교 있는 웃음을 흘렸다.
[이제부터 아버님은 이 며느리를 위한 말씀만 하셔야 합니다. 이 며느리의 칭찬만 해야 하고 불편한 일도 이 며느리에게만 말씀하셔야 합니다.]
[헛허허...]
천엽성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는 못내 흐뭇했던 것이다. 이런 적용화의 애교 있는 태도에...
(변했다 이 아이가 몰라보게...)
천엽성승은 대견한 듯 적용화와 단엽을 주시했다.
확실히 적용화는 변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녀는 오직 한과 증오와 저주가 전부인 듯 냉혹하기만 했는데 지금의 그녀는 인간미가 철철 넘칠 정도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녀를 믿고 따르던 철금마후와 만독노조까지도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단엽이 정색했다.
[서궁세가의 이목을 잠시 피하기는 했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오.]
그는 모든 인물들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는 개방의 인물들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다시 말해 개방은 그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소. 지금부터 개방의 이목을 피해야 하오. 그리고 일시라도 우리의 거처를 만들어야 하니 개방의 이목을 피하지 못한다면 임시거처는 오히려 우리에게 부담이 될 뿐이오.]
적용화를 비롯하여 북궁추림 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거처는 반드시 필요하다. 거처 없이 천하를 떠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거처가 적에게 노출된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문제는 개방의 이목을 어떻게 피하느냐인데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씀하시기 바라오.]
그의 말에는 한 가닥 위엄이 숨 쉬고 있었다. 이때, 북궁추림이 앞으로 나섰다.
[개방의 인물들은 우리가 북궁세가가 맡겠습니다. 먼저 떠나신다면 우리 북궁세가의 인물들은 뒤를 따를 것이며 개방의 이목을 완벽하게 차단하겠습니다.]
북궁세가의 능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진리인 것이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시겠소?]
[물론이지요. 우리는 이제 한 식구이니...]
북궁추림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운처럼 단엽에게 의미 있게 들리는 것은 바로 그녀가 말한 식구란 말이었다. 그러나 단엽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가볍게 북궁추림과 북궁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나머지 인물들을 이끌고 길을 떠나갔다.
북궁추림은 완전히 단엽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전한 빛이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전한 빛이 그녀의 전신에 넘쳐흐른다.
북궁천은 탄식했다.
[가주... 그 분을 사랑하십니까?]
[아....아니오.]
북궁추림은 화들짝 놀라며 엉겁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궁천은 부드럽
게 웃었다.
[가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분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부...부가주...]
[알고 있습니다. 가주의 마음... 적용화를 의식하지 마십시오. 자고로 영웅이란 삼처사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니 좀 더 적극적이 되셔야 합니다. 소신은 가주만이 그와 가장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부..부가주...]
북궁추림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북궁천이 한없이 고마웠다. 북궁천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가주에게는 그럴 권리가, 그리고 자격이 있습니다. 부궁세가란 이름으로... 그리고 위대한 부궁세가의 가주로서...]
[고마워요...]
북궁추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이제 솟아오르는 태양으로 던졌다.
그러나, 망막 가득 비쳐오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단엽의 모습이었다.
절강성에서 막간산에 위치한 허름한 장원.
이곳은 단엽 일행이 천마성을 나온 이후 사들여 보수하여 쓰고 있는 곳이다 그 후의 세월은 한 달여, 그동안 중원무림은 거대한 변화를 이루고 있었다. 중양절에 있었던 천마대회합, 겉으로 드러난 그것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천마교의 부활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림은 숨 막힐 듯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정파무림인들은 자신의 목을 향해 밀려드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어야 했다. 만약 군협천이 예전과 같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천마교의 부활을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군협천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아니, 그 명맥조차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군협천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기에 천마교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막강한 힘을 지니고 태동을 하였다. 정파무림인들이 절망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무심치만은 않았다. 군협천을 대신한 새로운 문파가 무림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 풍운회, 일설에 의하면 이 풍운회는 군협천의 일대 변신이라 했다.
풍운회주는 군협천주 철군무. 이것은 무림의 일대경사였다.
절망에 휩싸였던 정파무림인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그리고 은밀히 정파무림인들은 풍운회로 몰려들었고 그리하여 풍운회의 힘은 능히 천마교와 필적할 정도로 성장했다.
바야흐로, 무림은 천마교와 군협천의 시대에서 천마교와 풍운회의 시대로 변하였다.
아니다. 단지 천마교와 풍운회의 시대만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신진 문파가 무림에 나타난 것이다.
- 백의성.
이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전무하다. 성주가 누구이며 그 아래 예속된 인물이 누구인지... 한 가지 알려진 것이 있다면 그들은 공통적으로 백의를 입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면 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무공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최하위인 인물이라도 무림 절정고수의 대오에 들 만큼 대단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 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이런 소문은 한 가지 또 다른 소문을 낳고 있었으니 그것은 이 백의성이란 신비의 문파가 지닌 잠재력이 천마교와 풍운회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것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젖어 있는 화원, 화원은 국화가 만발해 있었으며 그 진한 향기에 취해 있는 다섯 사람이 있었다.
적사오혼이었다.
지옥겁은 화원에 떨어져 내린 낙엽을 쓸고 있었고 마동은 국화의 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흑접은 국화를 꺾어 화병에 정성스럽게 꽂고 있었으며 은사혼은 열심히 물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목은 거름지게를 지고 바삐 화원을 드나들고 있었다.
변했다. 변해도 엄청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적사오혼, 이들에게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오직 즐기는 것이 있다면 살인뿐이었다. 감히 그들의 이런 행동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한데, 지난 한달 동안에 그들은 이렇듯 변한 것이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한일은 아니었다. 단지, 한 송이 국화가 소중함을 알았고 그들은 몸소 나서서 국화의 가지를 다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던 그들이 국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질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을 바란다면 욕심일 것이다. 이때,
[아...함...]
국화의 가지를 다듬던 마동이 짙푸른 창공을 향해 들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기지개를 켰으나 전신의 나른함은 쉽게 풀리지가 않았다.
[빌어먹을... 이거 몸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있나... 군협천의 벌레든... 천마교의 개자식이든... 한번 신나게 싸워봤으면 원이 없겠다.]
결국 발작하고 말았다. 그러자 전염병에 걸린 듯 지옥겁이 낙엽을 발로 차며 투덜거렸다.
[그래... 우리들에게 이런 것은 전혀 어울리지가 않아. 무엇이든 때려부셔야 성이 풀릴 것만 같다....흐흐흐...]
음사혼이 뒤를 이어 말했다.
[흐흐... 죽일 놈들을 멀리서 찾는 것보다야... 가까운 데서 찾아야지... 저길 봐라. 저 놈들을... 영 눈꼴 사납지 않아?]
나머지 적사사혼은 시선이 은사혼의 눈길을 따라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아담한 인공호수 중앙에 자리한 한 채의 정자였다. 지금 그곳에는 일곱 사람이 바둑을 두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편안한 자세로 머물고 있었다. 바로 군협칠대무황이었다.
순간, 그들을 바라보는 적사오혼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흘렀다.
[저 놈들이 제 삼대 군협칠대무황이라니...]
사목이 음산하게 말했다. 흑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를 잡아들인 놈들의 제자이기도 하지. 우리와 직접적인 원한 관계는 없으나 죽여야 할 놈들임에는 틀림없다.]
[흐흐... 그래? 그렇다면 우리 슬슬 시비를 걸어볼까?]
마동이 천진하게 웃으며 천천히 인공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나머지 인물들 역시 비릿하게 웃으며 호수로 다가간다.
한데 바로 이때다.
[거기 다섯 분... 우리와 함께 대작이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자로부터 낭랑한 용황 천문평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음성에 이어 천황 혁련궁과 용황 천문평은 어느새 정자를 떠나 적사오혼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적사오혼의 안색은 가볍게 변했다.
(귀신 같은 신법이로군. 제법인데?)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군협칠대무황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은 짐작한 바이기는 했으나 이 정도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천황 혁련궁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 백의칠군과 백의칠성은 한 식솔이면서도 대화 한 마디 나누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함께 자리를 하여 서로에게 품었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순간, 적사오혼은 어설픈 표정을 지었다.
(제기랄... 이렇게 나오는 데야 도리가 있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고...)
(그리고 백의칠성이라... 실로 낯뜨겁게 이렇게 불러주는 데야 어찌 싸우고자 시비를 걸 수가 있겠나?)
그들은 내심으로 투덜거렸다. 그들이 말을 못하고 엉거주춤하자, 천황 혁련궁은 다시 공손히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도 무료하던 참이었으니...]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며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한데 백의칠성 가운데 두 분은 어디로 가셨는지?]
마동이 잽싸게 말을 받았다.
[헤헤... 그 돼지와 여우는 밭에 나갔소. 한데 술은 있는 것이오?]
입맛을 다시며 이렇게 넌지시 묻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천황 혁련궁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크핫하하... 좋아. 술이 있다면 이 지옥겁이 빠질 수가 없지. 자자...
갑시다. 무엇을 망설이는 것이오.]
지옥겁이 크게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마지못해 흑접과 은사혼, 사목은 그 뒤를 따랐다. 그런 그들을 보며 천황 혁련궁과 용황 천문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들은 이미 적사오혼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큰일이 터지기 전에 이렇듯 고개를 숙이며 접근한 것이고 결국 일은 원만하게 해결이 된 셈이었다.
(단순하다. 비록 일세를 떨어울리던 마인들이기는 하나...)
그들은 웃으며 뒤를 따랐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어머...어머...사람 살려...만독노조 죽는다....]
돌연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협칠대무황과 적사오혼의 시선이 일제히 비명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이때, 신발을 양쪽에 움켜쥔 채 허겁지겁 사색이 되어 뛰어오는 비대한 노인이 있었다. 도대체 인간인지 아니면 돼지인지 구분이 안가는 인물, 그리고 그 비대한 인물에게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영락없는 소녀의 것이었으니 실로 가관이었다.
그는 바로 만독노조였다. 그 뒤를 바짝 철금마후가 뒤쫓고 있었다. 호미를 든 채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었다.
[이 새끼야... 뭐 볼 것이 없어 남 실례하는 모습을 훔쳐봐. 거기 서지 못해. 죽여버릴 테다!]
[어머...어머... 오해야. 오해... 뒷간 청소하려다가 허연 엉덩이를 보게 되었을 뿐이야... 어머 그러지마...]
만독노조는 신발을 흔들어대며 발이 안보일 정도로 뛰었다.
[오해라구? 남의 엉덩이를 만지고서도 오해야? 네 이놈,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야지.]
[어머...어머...살려줘.]
두 사람은 이리뛰고 저리 뛰었다. 그 모습이 실로 가관도 아닌지라 군협칠대무황과 적사오혼은 배꼽을 잡고 폭소를 토했다.
가을날의 오후 따분하고 나른한 시간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드는 정실.
단엽과 북궁추림, 그리고 북궁천이 함께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단엽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북궁세가에서 포섭한 개방의 인물들이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천마교와 풍운회가 본격적으로 싸움에 들어갔소이다. 풍운회의 힘이 천마교에 뒤질 바는 없지만 문제는 풍운회가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외다.]
그의 시선이 북궁추림에게로 향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들은 이곳에서 무림의 동태를 면밀히 살폈다. 기실, 이렇듯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무림의 동태를 빠짐없이 살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북궁세가의 덕분이었다.
그들은 그 가공할 사령마안으로서 뒤를 따르던 개방 인물들의 영혼을 사라잡았다.
사령마안의 가공할 능력으로 그들을 노예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해 개방의 정보를 암암리에 북궁추림에게 전했던 것이니... 그 정보란 천마교와 풍운회의 움직임,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단엽의 말은 이어졌다.
[그들이 풍운회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풍운회는 천마교의 적이 결코 될 수 없소.]
[그렇다면 먼저 그들을 제거해야 하겠군요.]
북궁추림은 담담히 말했다. 단엽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오직 만박대선개만이 그 정체가 드러났을 뿐 나머지 인물들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소. 지난 한 달 동안 개방의 포섭된 인물들로 하여금 만박대선개의 행동은 파악하게 할 수는 있었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전혀 그 기미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소.]
북궁추림은 침음성을 흘렸다.
천하의 대소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그녀. 그러나 그녀역시 서궁세가의 첩자들에 대해서만큼은 무어라 입을 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그만큼 철저한 비밀,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단엽은 말을 이었다.
[길은 단 한가지 뿐이오. 바로 만박대선개를 통해서 나머지 인물들에 대한 정체를 캐내는 것이오.]
[어려운 일이로군요.]
[그렇소. 어려운 일이오. 만바대선개가 입을 열지 않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면 풍운회는 결국 무너지게 되오. 이번에도 두 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단엽은 북궁추림과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북궁추림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만박대선개의 영혼을 사로잡아야 하겠군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단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북궁천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성주께서는 저희 수하들에게 너무 겸허하십니다. 백의성의 성주로서 명을 내려주십시오. 수하들은 지옥에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허름한 장원 이곳이 백의성이었고 단엽이 바로 백의성주였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단엽의 뜻이 아니라 천엽성승의 뜻이었으며 나머지 인물들 역시 크게 찬성했다.
백의성은 그렇게 탄생되었으며 모두의 절대적인 신임속에서 단엽이 백야성의 제일대 성주가 된 것이었다 부성주는 적용화와 북궁추림, 그리고 총사는 북궁천이었다.
그 아래 군협칠대무황이 백의칠군이란 이름으로 한자리를 차지했고, 더불어 적사오혼과 철금마후, 만독노조 등이 백의칠성이란 이름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때, 단엽은 정색했다. 그리고 명을 내린다.
[만박대선개를 사로잡으시오.]
백의성주로서 내려진 첫 번째 명이었다. 이어 내려지는 명과 명... 적용화와 천엽성승은 단엽의 명을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두두... 한대의 마차가 장강변을 따라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는 거대한 팔두마차. 마차를 중심으로 호위하듯 삼백여명 가량의 흑의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각기 말을 타고 있었는데 눈빛이 범상치가 않았다. 섬뜩한 마기가 흐르는 눈빛. 그것은 그들이 일신에 지고한 마공을 익힌 고수들임을 말하고 있었다.
한편, 마부석에는 두 명의 면사인이 타고 있었다. 일신에 걸친 옷은 피보다 진해 보이는 적포. 그리고, 그들은 역시 적색의 면사를 얼굴에 쓰고 있었다. 눈빛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그들의 일신에 풍겨지는 기도는 마차를 따르는 삼백여 흑의인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일견하게에는 전혀 그 기도를 느낄 수 없었으나 다시 보면 느껴진다. 두 사람의 몸에서 풍겨지는 기도는 물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가끔 물처럼 고요한 기도는 거대한 파도처럼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뿜어진다.
그럴 때마다 삼백여 흑의인들은 숨이 막히는 듯한 무게를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두 사람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절대의 기도를 흩뿌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이 끌고 있는 마차에는 누가 타고 있기에 그들과 같은 절대의 고수들을 부릴 수가 있을까 의아롭다.
두두두... 마차는 무심히 달린다. 장강변의 무성한 갈대가 그때마다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언제부터인가...
아득히 먼 곳에서 질주해오는 마차를 주시하고 있는 다섯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두 글자, 그것은 풍운이었다. 그들은 풍운회의 고수들이었다.
한사람은 비렁뱅이 노인. 비록 남루한 백의를 걸치고 있었으나 비렁뱅이답지 않게 그 용모가 청수하다. 바로 이 인물이 개방의 전설적인 인물 만박대선개였다.
그는 한 사람의 뒤에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만박대선개를 뒤에 거느리고 있는 인물. 그는 한명의 중년문사였다.
일신에는 연백색 유삼을 걸치고 있고 머리에는 단하게 문사건을 두르고 있었으며 용모는 탈속수려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그의 눈썹이 눈처럼 새하얀 백미라는 점. 그런 그에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람처럼... 혹은 하늘을 부유하는 구름처럼... 그는 대자연의 한 부분처럼 보였으되 인간으로서의 무엇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런 기도의 인물은 무림을 통틀어서 몇 사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박대선개의 뒤로는 한명의 노문사와 백의중년인, 노도인이 서 있었다. 용모가 비범했으며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결코 만박대선개의 아래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세 사람은 과거 한때 군협천의 제삼인자와 사인자, 오인자의 권좌를 누리던 인물들이었다.
노문사, 그는 군협천의 제삼인자였던 소요선생이다. 인의대덕한 성품에 고대의 제갈량에 버금가는 지혜를 지녔다는 지자이다.
백의중년인, 그는 군협천의 제사인자인 백의신군 공손기이다.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모르는 철혈의 무인. 그의 무공은 소요선생의 위라고 전해진다. 노도인,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나이가 들어보이는 학처럼 고고한 그는 바로 무당파의 전설적인 기인이자 군협천의 제오인자이기도 했던 일학자였다. 한때, 이들은 서궁세가의 음모에 휘말려 군협천에 거대한 내분을 일으켰던 장본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군협천주 철군무를 만나 후 자신들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쳤고 풍운회에 몸을 담고 제 이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년문사는 바로 군협천의 구대장로 가운데 일인이자 풍운회의 구대장로 가운데 일인인 유향신협이었다.
이 인물은 이 시대 최고의 음모자인 서궁수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구대장로 가운데 일인이다. 나이는 이백이 넘었으나 주연의 모습을 지닌 것은 그의 무공이 이미 반노환도의 경지에 이르렀음이다. 장강변에 돌연한 이들의 출현, 이것은 세인들의 관심사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헌데, 이들의 주위에 번뜩이고 있는 수백쌍의 눈동자. 그 눈동자들은 갈대림에 있었다. 그 눈동자들엔 은은히 긴장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때, 오랜 침묵을 깨고 만박대선개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오는군...]
그는 점점 가까와져 오고 있는 마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유
향신협에게로 향했다.
[마차는 한대 뿐입니다. 그리고 마차를 호위하는 인물 역시 불과 수백입
니다.]
[그렇군.]
유향신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박대선개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그러나... 마차에 실린 것은 수백여 마차에 실린 것보다 대단하고 저 수
백의 고수들은 수천의 무림인들보다 강합니다.]
[그런 것 같아...]
유향선협은 이번에도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특히 마차를 끌고 있는 인물은 천마십대장로 가운데 두 명입니다. 그들의 무공은 인간한계를 벗어난 것으로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가공합니다.]
[좋은 상대가 되겠군.]
유향신협은 빙그레 웃으며 시선을 만박대선개에게로 던졌다. 그리고 담담하게 물었다.
[한데 저 마차에 천마교의 군자금이 들었다는 것은 확실한가?]
[틀림없습니다.]
만박대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교는 한 달에 한 번씩 저런 식으로 군자금을 남칠성과 북육성에서 조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 마차는 북육성의 삼백여 천마교지부로 부터 군자금을 조달받았으며 천마교의 경비는 보름동안 저 군자금으로 충당하게 되어 있고 나머지 보름은 남칠성에서 조달된 군자금으로 지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풍운회가 저 군자금을 빼돌릴 수만 있다면 보름동안 천마교는 군자금 부족에 허덕일 것은 명약관화한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마차를 탈취해야 합니다.]
[알겠네.]
유향신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생각해볼 여지가 없는 것이다. 풍운회와 천마교의 격전이 시작된 지금 저 군자금을 탈취하여 다만 보름 동안이라도 천마교를 고통에서 허덕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수확인 셈이었다.
(군협천의 부활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각오한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직시했다. 그런 그에게서는 항거불가능의 기도가 뿌려졌다. 그 기도에 접한 만박대선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대단하다. 가주께서 두려움을 느낄 만큼...)
그의 눈빛은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유향신협이여... 너의 운명도 오늘로써 끝이 될 것이다.)
두두두... 마차는 더욱 가까이 접근해 왔다. 한데 마차를 살피던 유향신협의 눈빛이 대변했다.
[하...함정이다.]
보라! 마차의 주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단지 수백 필의 말과 마차만이 질주해 오고 있을 뿐이었다. 수백여 명의 흑의인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고 천마십대장로 가운데 이인이라는 인물도 없었다.
두두두.... 마차는 유향신협의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달려들었고, 그 순간, 콰콰쾅!
히히힝! 마차는 그대로 무섭게 폭발했고 그 여세로 인해 수백필의 말들이 가루로 화해 날아갔다.
역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수만근의 화약이 일시지간에 폭발한 듯 싶었다. 거의 동시에 갈대숲에 숨어 있는 풍운회의 수백여 고수들이 그대로 비명조차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진 채로 허공에 떠올랐다.
실로 눈뜨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참상.
유향신협은 단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굳어져 버린듯 혼을 빼앗겨 버린 듯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 엄청난 폭발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처 한군데 입지 않았다. 다만 일신에 걸친 연백색 유삼만이 검게 그을려 있었고 군데군데 타있을 뿐이었다.
만박대선개는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한 안색이었고 입가에는 선혈마저 흘리고 있었다. 소요선생과 백의신군 공손기, 일학자 역시 만박대선개와 다를 바 없는 낭패한 모습으로 멍청이 서 있었다. 두 눈 가득 경악과 불신의 빛을 담은 채 그들의 시선은 만박대선개에게 향해 있었다.
유향신협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무섭도록 담담했다.
[만박대선개... 이 모두가 그대의 농간인가?]
만박대선개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향신협의 눈빛은 도저히 마주볼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눈빛이 아니라 날카로운 비수와 같았다. 더 이상 보고 있으면 만박대선개 자신은 온통 난도분시되고 말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무서운 눈빛! 이 만박대선개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태연을 가장했다.
[그렇소. 모두가 내가 꾸민 일이오.]
그가 순순히 시인하자 유향신협과 소요선생, 백의신군 공손기, 일학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유향신협은 곧 담담함을 되찾으며 물었다.
[무엇 때문인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오.]
[한 가지 이유라면?]
[유향신협 당신을...]
[죽이기 위함이란 말이지...]
유향신협은 만박대선개의 말을 자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런 그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단지 나 한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다니... 이것은 작은 일이겠지. 그대의 목적은 단지 내가 아니라 구대장로 전체에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풍운회의 전체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소.]
만박대선개는 다시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죽일 놈... 네 놈이 감히 그럴 수가 있더냐?]
백의신군 공손기가 거칠게 말하며 다짜고짜 만박대선개에게 달려들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돌연 그들 세 사람이 달려들던 방향을 바꾸어 유향신
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향신협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격. 그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하나 피할 수가 없었다.
펑! 펑펑!
세 가닥의 위력을 담은 장력은 그대로 유향신협의 가슴을 격타했다.
[윽!]
가랑잎처럼 유향신협의 몸은 허공에 휘말려 올라갔다. 그의 입에서 한 모금의 선혈이 토해지며 그는 썩은 짚단처럼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끝인 듯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만박대선개와 세 사람의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되었네... 우리 서궁세가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구대장로 가운데 일인은 이렇게 그 운명을 다한 것이네...]
만박대선개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말했다.
소요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아직 팔대장로가 남았소. 그들을 죽이기 전에 안심할 수가 없소.]
일학자는 유향신협의 시신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소. 팔대장로가 건재한 이상... 우리 서궁세가는 쉽게 풍운회를 무너뜨릴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러나 팔대장로를 제압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소. 이 자는 마지막 순간에 강한 호신강기를 뿜어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대단하오. 이 자의 무공이 나머지 팔대장로의 위가 아닌 이상... 그들을 제거하기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오. 더욱이나 이 자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은 크게 경악할 테니...]
침묵을 지키던 백의신군 공손기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그들이 나타날 시간이 되었는데...]
그가 말한 그들이란 바로 마차를 호위하던 인물들일 것이다.
사위는 적막했다. 그가 말한 그들이란 어디에도 없는 듯 하다. 퍼뜩 그들의 뇌리로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으으...]
돌연 죽은 줄 알았던 유향신협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인해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저럴 수가... 인간이 아니다...)
(저런 정도로 무공이 고강했던가? 구대장로 가운데 가장 약한 인물의 무공이 저 정도였더란 말인가?)
만박대선개들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저벅저벅...
다가온다. 마치 죽음의 사신처럼 유향신협은 그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마다 바닥은 그의 깊이 패인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네..네놈들...서궁세가의 인물들이라니... 놀랍다. 수십여 년의 세월동안 천하의 이목을 그토록 철저히 속여 넘길 수 있다는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