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四 章 千古의 恨
침사지곡 험갑천하(沈沙之谷 險甲天下)
이 여덟 글자는 운학의 마음에 끊임없이 고동 쳐 울려오고 있었다.
운학은 골짜기 옆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서 있었다.
운학이 올라서 있는 바위 양쪽에는 높이가 사람의 몇 길이나 되는 바위가 험상스럽게 무수히 서 있었다.
더욱이 눈앞에 골짜기 밑에서는 심한 모래바람이 하늘 높이 일어나니 마치 귀신이 부르짖고 있는 것 같았다.
침사곡(沈砂谷)!
사납게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은 골짜기의 모래를 휘몰아 마치 하늘까지 모래기둥을 세워 놓은 것 같았으며 그 회오리바람 속에서는 한 줄기 뜨거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골짜기 한 가운데에는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었고 그 봉우리 위는 흙과 돌 뿐이었다.
이 침사곡에는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쉬지 않고 이상스럽고 신비한 이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었다.
밤이 되면 봉우리 위의 기류가 하늘로 상승하여 골짜기 아래 기류는 비교적 차가와지는 것이었다.
인류는 명확하지 않은 일은 무엇이나 모두 신비하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니 이 침사곡의 회오리바람에 세상 사람들이 신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바위 뒤에 서 있는 운학의 마음도 다를 수는 없었다.
그의 귓전에 들려오는 회오리바람 소리는 마치 그에 대하여 무엇인가 성내어 부르짖는 것 같았다.
『천하제일(天下第一)!』
그는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 발아래 붉은 모랫바닥을 응시하였다.
희고 찬란한 달빛을 모래에 반사되어 운학의 눈을 부시게 하였으니, 희고 찬란하게 반사되어 오는 빛도 그의 충동하는 정서(情緖)밑에서는 경연한 한줄기의 빛으로 그물을 짜놓은 것같이 보이기만 하였다.
천하제일(天下第一) 네 글자를 생각하자 운학의 머리에는 사부의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일찍이 자기의 사부 청목도장은 천하제일의 무인이었고, 자신도 청목사부의 뒤를 이어 찬하제일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학의 마음에는 끝없는 분함이 우러나왔으니 그것을 결코 그들 사제 두 사람 모두 무림(武林)제일의 웅심(雄心)을 갖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사부가 천년 인삼을 복용하고 나서는 자기에게 그는 알리지도 않고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운학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사부가 자기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훌쩍 떠나버렸는가를……
그는 아직도 사부에게 이야기 할 것이 수 없이 많았다.
운학은 사여명과 요원의 일을 사부와 의논하여 어떤 결말을 얻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젊은 그로서는 예법상의 명분과 자기 마음에 일고 있는 감정과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거운가를 분명히 알아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는 사여명은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직 혼례는 올리지 않았을망정 마음의 아내로 여기고 있는 여자이다.
사여명은 일찍이 그를 위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몸을 바쳐 서로 구원을 받은 사이였다.
한편 요원은 천진난만하고 활발한 여자였으나 운학의 마음에는 하나의 정든 여자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운학의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운학의 마음속에는 먼저부터 도사리고 있는 한 가닥의 선입감이 있었다.
그는 정말 사여명의 성숙미를 대단히 좋아하였다.
설령 이것이 남자 누구나가 느끼는 공통적인 생각이라 할지언정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면을 떠나서 순수한 순정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는 자기가 이와 같은 일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데, 평시에 그렇게 존경하고 믿으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부가 자기에게 알리지도 않고 훌쩍 떠났다는 것은 분명히 서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 청목사부를 의심까지 하였다.
결국 운학은 자신의 서운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침사곡에 이른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 이르면 사부를 만나리라 믿었고, 또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왜냐하면 지난날 청목도장은 자주 이곳을 찾았고, 또 최근에 이곳에 오기를 희망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목도장은 일찍이 운학에게 침사곡에는 지난 옛날의 무림의 수수께끼가 잠겨져 있으며 직접 자기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운학은 이것저것을 생각할 때 가슴 속으로 더욱 충동을 느꼈다.
골짜기에서는 지금 사나운 회오리바람의 노호(怒號)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으며 달빛이 찬란하게 반사되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천하제일을 생각했고 그 생각의 연장이 사부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고 한편 미안한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마음을 돌이켰다.
사부가 자기를 버리고 간 것은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호승심(好勝心) 때문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청목도장의 지존(至尊)함으로서도 오웅(五雄)의 구원을 받은바 되었다.
이것은 평상시의 청목도장의 자존심으로 봐서 과연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한편 그 수치심은 운학에게도 작용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한 사람의 지아비가 되어 자식 앞에서 지아비로서의 존엄을 잃었을 때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는 것이다.
운학을 자식으로 생각하는 청목도장의 심정은 어떠하였으리!
그러나 무림의 고수로서 연공(鍊功)의 비결을 잃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겠으나, 남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었다.
청목도장은 본래 진취심(進取心)도 극히 강하였으나 한편 참을성도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운학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욕을 당한 지아비가 자식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청목은 바람처럼 운학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떠나 버렸던 것이다.
운학은 사부가 자기를 버리고 간 까닭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자 운학의 마음은 만근의 돌에 눌리는 위압에서 벗어나게 되고 천 갈래의 번민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홀가분함을 느꼈다.
그는 골짜기 아래 모래사장을 내려다보면서
『사부님! 외톨박이 어린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공경하겠습니다!』
창자를 여미는 것 같은 외침이었다. 그는 골짜기에 우뚝 솟은 봉우리 위에 자상하게 웃고서 있는 사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운학은 이번에 자기들 사제 두 사람이 모두 오웅(五雄)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앞으로 그들 스스로가 먼저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은 그들을 다시 적(敵)으로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청목도장이 자기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난 원인을 더욱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사부는 자신이 어떤 일을 결심하더라도 그 결심이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운환마(雲幻魔) 구양종(歐陽宗)은 손바닥을 한 번 날려서 청목도장의 팔대주맥(八大主脈)을 끊어 놓았다.
그러나 얼마 전에 그 마교 사웅(四雄)은 온갖 힘을 기울여서 청목도장의 옛상처를 치료하여 주었다.
세상에는 남에게 은혜를 입는 수도 있고, 남에게 원수를 지는 일도 있다.
그러나 가장 괴로운 것은 한 사람에게 은혜와 원수가 한데 겹쳐 엉키는 일이다.
청목도장이 당면하고 있는 일이 바로 마교오웅(魔教五雄)과의 사이에 원수와 은혜가 함께 엉켜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관건은 청목도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운학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올봄에 그들과 일전을 겨루기로 한 것은 운학 혼자서 싸우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목도장은 자기의 주견(主見)이 운학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운학은 사부가 자기에게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사부가 자기의 인격을 이토록 생각하여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부의 인간성에 다시 한 번 깊은 감명을 받았다.
청목도장은 자기의 개인적인 원수나 은혜로 인하여 운학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마교오웅과 단독으로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지금 마교오웅과의 일전을 취소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깊은 원한이 맺혀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원수와 은혜가 반반인 형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간과(干戈)를 옥백(玉白)으로 뒤바꿔 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운학은 몹시 주저하게 되었다. 싸워야 하느냐 싸우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운학의 현재의 공력은 청목도장의 당시의 공력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또 지난 십 수 년간에 마교오웅들의 공력은 장족(長足)의 진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
지난날 구이자(鳩夷子)가 마교오웅을 제압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청목도장이 별로 연마하지 않았던 비룡십식(飛龍十式)의 초식에 의한 것이다.
이 초식은 운학의 사조(師祖) 구이자가 평생을 연구하여 만든 결정체이다.
사조 구이자가 파죽검객(破竹劍客)과 관계되어 마교오웅과 싸운 뒤에 파죽의 검법을 이용하여 소림검법을 창안해 내어 마교오웅의 마교만라오상진(魔敎萬羅五象陣)을 무난히 대적하도록 구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이자와 같이 훌륭한 당대 무림의 고수라 할지라도 마교오웅의 만라오상진의 진법(陣法)을 깨뜨리지 못하여 제 사십구초(招)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룡십식(飛龍十式)의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무서운 위력의 비룡십식을 운학은 충분히 연마하여 놓았다.
그러나 사십구초에 이르기 까지 힘을 버틸 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청목도장의 뛰어난 자질과 전심전력의 공력으로서도 사십팔세일 때가 되고서야 비로소 당년의 마교오웅과 팔십일초까지 싸웠고 팔십이초 때에는 운환마의 일장을 막지 못하여 팔대혈맥(八大血脈)을 끊겼던 것이다.
또한 조사 구이자와 파죽검객과 힘을 합쳐서 그들과 싸울 때는 오웅은 중년의 씩씩한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십 년의 공력을 완전히 소비하고서야 가까스로 그들 마교오웅을 격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 두 분의 지도자도 고배를 마시고 말았으니, 파죽검객과 같은 천하의 고수도 파고(破褲)의 치욕을 남겨 놓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 어린 운학이 큰 싸움에 경험도 없이 마교오웅과 싸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운학은 마교오웅이 자기에게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운환마가 자기를 도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림의 모든 사람들은 목숨보다도 명예를 중하게 여기는 처지에 만약, 마교오웅이 운학에게 격파 당하였다면 그것은 천하를 누비던 고수로서 참을 수 없는 수치임에 틀림이 없는 일이다.
운학은 인격과 무술이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진실한 무인이었다. 그는 요원처럼 강호의 학문에 정통하지도 못하였고 한약곡이나 하마처럼 탈속(脫俗)하지도 못하였다.
이것은 자라난 환경이 그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며 성격과 흥취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요원은 명문의 따님이라 규중(閨中)에는 언제나 글공부하는 소리가 끊일 날이 없는 속에서 자라났고 사여명은 잠시도 그의 사부 곁을 떠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불학(佛學)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또한 하마의 사부인 공동장문(崆峒掌門), 조년(早年)은 당대의 훌륭한 선비였고 하마(何摩)도 중용(中庸)을 생활신조로 하던 사람이라 자연히 훌륭한 공자(公子)가 되었던 것이다. 한약곡(韓若谷)은 비록 그 신원은 확실하지가 않았으나, 그의 일거일동으로 보아 그 성장과정이 사여안과 별 차가 없었다.
그러나 운학은 나이 어려서부터 깊은 원한을 짊어지고 있었고, 사부 또한 오웅에게 다친 바 되어 그의 마음에는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부의 불같은 자애(慈愛)가 있어 그는 사랑 속에서 살아올 수가 있었다.
그들 사제(師弟)는 인적이 없는 산으로 몸을 숨기고 고적한 살림을 꾸려왔으나 물질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운학은 사부와 함께 깊은 산중 수려한 자연 속에서 살으니 그에게는 어느 사이엔가 강직한 성품이 자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은혜와 원한이 한데 엉켜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가장 싫어했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한 침사곡을 바라다보면서 지난 일을 씹어 삼키고 있는 누런 모래를 멀거니 응시하고 있으면서 다시 한 번 사부를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오웅과 싸울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지을 기회를 마련하여 주려는 사부의 마음이 끝없이 고맙기만 하였다.
그 전에 운학은 자신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일과 사부의 원수를 갚는 일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에 대하여 깊은 번민에 빠진 일이 있었으나, 이것 역시 사부는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 일없이 운학 스스로의 결정에 맡겼을 뿐이었다.
그는 침사곡의 모래사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오웅들의 습격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사부가 오웅을 격파한 후에 팔대주맥(八大主脈)을 끊겼던 일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다.
이 팔대주맥을 끊긴다는 것은 선천기공(先天氣功)을 운행시키지 못하는 사람이면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운학 자신은 선천기공 방면에 가장 높은 실력을 자랑할 수가 있었으나 사부와 같이 오웅의 일격을 버틸 수가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만역 오웅과 자웅을 판가름 하는 경우에 자신이 꼭 이겨야 하겠다는 욕망은 있었으나 어떻게 이긴다는 방법은 생각나지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불안하여졌다.
침사곡의 신비스러운 회오리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오고 있었고 바람 속에는 수없이 많은 모래알이 섞여 얼굴에 불어 닥쳐 눈을 뜰 수 없게 한다.
또한 불어 닥치는 거센 바람은 큰 바위에 막혀서 일제히 운학이 서 있는 바위 위로 불어 닥쳐온다. 이 거센 바람을 가로막고 떡 버티고 서 있는 운학의 모습은 마치 신선과도 같이 보인다. 그의 머리에는 쉴 사이 없이 침사곡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바람을 뚫고 옷자락이 스쳐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들은 운학은 본능적으로 바위 뒤에 자기 몸을 숨겨 버리고 말았다.
침사곡 가운데에 있는 봉우리 위에는 뾰족한 큰 바위가 서 있었고 바위 밑은 깎아진 듯한 절벽이고 그 밑은 누런 모래 바닥이었다.
이 깎아진 듯한 뾰족한 봉우리 위에는 초목이 빽빽이 우거져 있었으나 그 초목은 모래와 같은 누런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일제히 골짜기의 밖을 향하여 뻗쳐 있는 것은 아마도 이 골짜기에 신비스럽게 부는 회오리바람의 방향 때문인 것 같았다.
그 봉우리 맞은편 산허리, 운학이 서 있는 곳에는 여기 저기 어지럽게 바위가 솟아 있었고 큰 것은 사람의 수 길이나 되었으며, 작은 것이라야 사람의 키 반쯤 되는 것이었다.
이 수없이 많은 돌과 바위들은 수천 년 동안 모진 풍상을 이겨 왔기 때문에 그 모습이 기이하기만 하였다.
이 때 이 흩어진 바위틈을 이리 저리 피하면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그곳 지형에 아주 익숙한 듯이 아무 거리낌 없이 돌 사이를 뚫고 걸어오고 있었다.
운학이 숨어 있는 곳과 그 사람의 그림자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입을 열어 중얼거리기 시작하니
『침사곡(沈砂谷)! 아, 침사(沈砂)의 골짜기!』
그 목소리는 운학의 귀에 무척 익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짝을 잃은 외기러기가 짝을 찾았을 때 기뻐 어쩔 줄 몰라 우는 소리와도 같이 들렸다.
운학은 돌 뒤로부터 갑자기 뛰어나와서 그의 등 뒤에 서기가 무섭게
『왁!』
하고 그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몸 하나 까딱하지 않고 침사곡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침사곡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사나운 바람 때문에 몸이 금시에 날라갈 것 같았으나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얼마 뒤에 침사곡 골짜기에서 눈을 돌린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운학의 눈에 들어온 얼굴, 그 사람은 바로 한약곡(韓若谷)이었다.
한약곡은 운학을 보자마자 자지러질 듯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한약곡의 모습은 비통하여지며 앞으로 다가와서 운학을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며
『둘째 동생! 셋째 동생은 벌써……』
하며 다시 통곡하기 시작하니 운학은 어이가 없어 어쩔 줄을 몰랐으나 하마가 불행을 당했다는 예감은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순간 운학의 눈에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얼마 뒤에 운학은 억지로
『형님! 어찌된 일입니까?』
묻는 운학의 목소리는 목매어 있었다.
한약곡은 겨우 울음을 멈추고서는
『전번에 네가 물을 길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운학은 미안하게 생각하여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는 사부를 만났어요. 어찌나 기뻤는지 형이 기다리는 것도 잊었었어요. 그 다음에……』
말을 하면서도 오웅이 자기들 사제를 구하여 준 일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못하는 그는 몹시 괴로웠다.
한약곡은 운학의 말을 가로막으며
『나와 셋째 동생과 둘이서는 바위 위에 노곤하게 누워 쉬고 있었으나, 갑작스럽게 사고가 나리라고는 어찌 예측하였겠나!』
이 말을 들은 운학은 다시 한 번 놀라면서
『누가 하동생을 해치웠소?』
그의 눈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눈물은 끝내는 분노로 변하여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한약곡은 신비스러운 회오리바람이 계속해서 불고 있는 침사곡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나는 졸려서 눈을 감고 잠이 들었었는데 셋째 동생이 손가락으로 나의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니 그렇게 맑던 얼굴이 엄숙한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고서는 무엇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각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이켜 운학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손가락을 입에 대어 말을 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그가 가리키는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산 아래 먼 곳에서 두 점의 검은 그림자가 산정을 향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 그 그림자의 공력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초 사이에 그림자는 산기슭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 그림자가 천전교의 천태마군(天台魔君) 영호진(令狐眞)과 새나타(賽哪吒) 백삼광(白三光) 호법이라는 것을 알고 셋째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이 없이 오랫동안 침묵을 계속했다.』
운학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한약곡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운학은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하마가 불행에 빠졌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다.
한약곡의 말소리는 점점 평화스럽게 평정을 되찾으니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말투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이 우리의 곁을 스쳐 가면서 하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들었다.』
『영호진형! 그 안가라는 놈 볼만합니다. 나 백삼광이 그놈들 부자의 뼉다귀를 꺾어놓지 않고 낯가죽을 벗겨 놓으니 참으로 괴상하지 않소?』
영호진이 껄껄거리고 웃으면서
『백형의 말이 옳다. 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우리 천전교와 대적하려 하겠소? 애새끼…… 흥! 올해 입춘에는 그 놈들이 곧 황룡(黃龍)을 잡으러 오는 게 아닐까?』
『나도 그런 말은 들은 일이 있으나, 이상하게도 입춘(立春)은 벌써 지나갔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섬, 감(陝, 甘) 양성의 무림계는 별로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지 않나!』
영호진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백삼광을 쳐다보니 백삼광은 의기양양해지면서
『안복언(安復言)이란 늙은이 여전히 큰 소리만 치고 있어! 북방 오성(五省)의 총영주 추운검객(追雲劍客), 후가(候家) 늙은이는 중병에 걸려 있고, 복파보주 요백삼(姚百森)은 마교오웅 및 우리 교주를 위해서 백화생일(白花生日)의 황학루(黃鶴樓)의 약속을 준비하고 있다 하고, 팔대 종파 중의 반수가 목숨을 걸고 수수께끼에 잠긴 먼저 번 무림대회의 비밀을 풀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그 안(安) 늙은이는 당황하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영호진은 이 말을 듣고 깊이 깨달은 바가 있는 듯이
『어쩐지 아래 글이 없을까 하였더니 바로 그런 까닭이 있었군. 그러나 교주 역시 옳아. 오늘 그들 부자 두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해 버리자는 거야. 오늘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걸세!』
그들 좌우 호법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약곡과 하마가 숨어 있는 바위 아래 벼랑으로 내려가더란다.
한약곡이 이야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마, 너와 내가 평상시에 그렇게도 농서대호(隴西大豪)의 늠름한 풍모를 흠모하고 존경하였었는데 어찌 그들 부자가 황산에서 피를 뿌리는 것을 앉아서 볼 수만 있겠는가?』
『이번에 내가 침사곡에 오는 도중에 듣자니 농서대호 안씨 부자는 경사(京師)에 간지 오래 되었다는데 어떻게 그들과 만났을까요?』
『말을 하자면 길어진다. 만약 우리들이 천전교의 흉계를 일찍 알았다면, 하삼제 우린 어찌 이곳에 오겠는가?』
한약곡이 말을 하니 하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미 우리들은 그 두 늙은 놈을 봤으나, 그 놈들이 천전교의 마귀라서 겁나 그러는 것이 아니니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 아닙니까?』
『바로 그 단장애(斷腸崖)가 안씨 부자의 상명(喪命)의 자리가 될 것이다.』
한약곡과 하마는 그들이 비록 좋지 못한 놈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화가 치밀기는 하였지만 가령 뒤쫓아 간다 하더라도 쉽사리 대적하여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약곡과 하마는 사형령주가 뒤따라올까 몹시 걱정스러웠다.
만약 그가 따라온다면은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은 빤한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천전교 중에는 고수가 극히 많지만 운학은 사형령주와 영호진 백삼광과 아미 대적한 적이 있었고 하마는 일찍이 천전교의 사대당주와 겨룬 일이 있어 그중의 구미신구(九尾神龜)는 한약곡의 손에 의하여 황천으로 갔고 나머지 세 사람 중에는 곤지신권(崐地神拳)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공력도 별로 신통한 것이 없었으나 최근에 호복(湖北)의 황강(黃岡)에서 일검쌍탈진신주(一劍雙奪震神州)에게 맞아 죽은바 있었다.
나머지는 두 사람의 당주가 있었으나 이들 역시 별로 가상할 만한 무공은 못 되었으나 두 사람이 힘을 합한다면은 공력이 아무리 강한 하마(何摩)라도 당해 내기가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행히 한약곡은 이 곳 지리에 밝아 두 마두의 뒤를 쫓는 것을 단념할까 하였으나 정의에 불타는 하마는 나지막한 소리로
『형, 단장애는 어디로 가오?』
하마의 눈에서는 정기가 넘쳐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신의 경공술을 발휘하여 단장애를 향하여 몸을 날리니 먼저 떠난 천전교 두 마두보다도 더 앞서서 목적지에 도달할 것 같았으나 그들에게 자기들이 발견된다면 오히려 안씨 부자를 구한다는 일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멀리 산길을 돌아 걸음을 늦추었다.
단장애(斷腸崖)는 돌을 깎아 세운 것 같은 절벽이며 그 높이가 천 길은 되어 보이며 산정을 향하여 틔어진 한 줄기의 길은 공중에 떠있는 무지개 같이 보인다.
밑에서 이 길을 보니 어림짐작으로 억지로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소로(小路)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와 같은 험준한 곳에서 안씨 부자가 욕을 당한다면은 몸이 부지할 리가 없었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두 사람은 단장애 밑 산기슭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산기슭에서 고개를 들어 산봉우리를 쳐다보니 깎아 세운 것과 같은 석벽이 산 아래 평지로부터 구름을 뚫고 치솟아 있으니 밑에서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준다.
산봉우리는 쳐다보고 있던 하마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씨 부자가 왜 이런 곳에 올까? 분명히 천전교의 흉계에 넘어가서……』
이리저리 사방을 살펴보며 말하던 하마는 산기슭 아래로 뻗쳐 있는 두 줄기의 가느다란 소로를 발견하고서
『한형, 우리 길을 바꾸어 갑시다.』
그러나 하마의 마음에는 상서롭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한약곡은 오던 길로 가자고 우겼으나 하마는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길을 바꾸어 가자고 우기면서
『한형! 우리는 사람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어찌 안씨 부자를 꼭 그 쪽 길로 올라가야 만난다는 이유가 있겠습니까? 염려할 것 없어요! 내가 만일 위험한 처지에 놓인다면 곧 화전(火箭)을 올리며 형에게로 가겠어요.』
하마는 결심이 섰다는 듯이
『우리들은 산 위세 올라가서 만납시다.』
말 하면서 한약곡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날려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한약곡은 하마가 몸을 날리는 순간, 그 무서운 공력의 발동을 보고서는 어딘가 믿음직스러워 흐뭇한 생각을 하면서 파죽검객의 신법을 연상한다.
이때 운학은 한약곡에게서 파죽검객이라는 말을 듣고는 갑자기 놀라면서,
『파죽검객?』
운학의 이 외침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어
『지난날 내가 무당산 아래에 있을 때 파죽검객의 실력을 눈여겨 본 적이 있었소!』
운학은 한약곡이 구구하게 파죽검객의 실력을 설명하려는 것을 막고 하마의 안부를 먼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한약곡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무조건 일체를 긍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한약곡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이미 하삼제의 공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으로 안도할 수가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몸은 벌써 수백 자 앞을 달리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한약곡은 그 당시를 회상하는 듯이 멀거니 침사곡을 바라보면서
『몸을 날리던 하마는 뒤를 돌아다보면서 나보고 빨리 떠나라고 독촉을 하더군!』
말하는 한약곡의 표정은 몹시도 서글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나는 손을 들어 흔들어 보임으로서 곧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여 주었다. 그러나 어찌 예측하였으리! 이것이 하마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말하는 한약곡의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맺힌다.
그리고는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당시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즉, 하마와 갈림길에서 작별한 한약곡은 죽을힘을 다하여 산 고개까지 기어 올라갔다.
산 고개까지 올라가는 도중에 천전교도나 안씨 부자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한약곡의 마음은 의아스럽고 초조하기만 하였다.
한약곡은 올라가는 도중에 그들을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는 산길을 올라가면서 혹시 하마에게서 어떤 신호가 오지 않을까 하여 쉴 새 없이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마가 떠난 방향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볼 수가 없었으며 자연은 적막하기만 하였다.
이 물을 끼얹은 같은 적막은 오히려 한약곡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것은 하마가 천전교의 좌우 호법이나 그 밖의 천전교도들을 도중에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증명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한약곡의 눈에서는 쉴 사이 없이 구슬 같은 눈물이 쏟아지며 분함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운학은 넋을 잃고 멀거니 한약곡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슬픔은 결코 한약곡에 못지않았으니 평상시에 한약곡을 육친의 형제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운학의 눈에 지금까지 보이던 한약곡의 모습이 어느덧 잔인하고 잔악한 모습으로 변하여 보였다. 심지어 그가 하마를 죽게 했다는 적개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운학의 머리에는 한약곡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쌀쌀하고 표독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불타는 감정의 소유자인 것 같았으며 천전교를 미워하는 태도는 자기보다도 더욱 가혹한 것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한약곡도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원통함을 참지 못하는 듯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계속 하였다.
그 낭떠러지의 꼭대기는 일 년을 계속해서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약곡은 몸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산정(山頂)을 향하여 올라갔으나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발견하지를 못하였다.
산정에 이르는 중간에는 원시림과 같은 소나무 밭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소나무 밭에서는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약곡은 길을 재촉하면서도 혹시 자기들이 천전교의 두 늙은이에게 조롱당하는 것이나 아닌지? 그 늙은이들이 정말 이곳에 와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나서 쉬지 않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하였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물론 바람소리 이외에는 새소리 하나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산정 위의 경치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도취시켰으나 한약곡은 이 경치를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 때 산정 수풀 속에서 이상한 동물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와서 자세히 보니 수 십 마리의 원숭이가 소리치는 것같이 들려왔다.
한약곡은 이런 산정에 원숭이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혹시 하삼제가 자기를 놀라게 하여 주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하면서 숲 쪽을 노려보면서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에 하삼제가 올라간 방향의 상공에 한줄기 붉은 빛깔의 화전(火箭)이 터져 올랐다.
한약곡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숲 속에 사람이 있나 없나를 확인할 사이도 없이 화전(火箭)이 터진 곳을 향하여 몸을 날려가며 단장애를 쳐다보니 단장애 꼭대기 바로 위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바위 위에 서있는 것이 보였고 그 아래로는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란히 서 있던 세 사람 중에 한 가운데 서 있던 사람의 벽력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호진 백삼광! 나 하마가 너희들을 두려워 할 것 같으냐?』
분명히 하마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하늘에 한줄기 번쩍하는 빛이 보였으나 하삼제가 공동신검(崆峒神劍)을 빼어 들었음이 틀림없었다.
이어서 백삼광과 영호진의 노호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무슨 말인지 그 뜻은 알 수가 없었다.
한약곡의 마음은 다급하고 초조하기만 할 뿐 하삼제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으나 워낙 길이 험준하여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얼마 동안을 우왕좌왕하다가 가까스로 돌계단을 발견하여 그쪽으로 향하려는 한약곡의 등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났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분명히 어떤 사람이 한약곡을 향하여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한약곡은 알 수가 있었다.
한약곡은 재빨리 두 손바닥을 뒤로 날려서 일 장을 쳐 내었다.
이 때 한약곡은 십성공력(十成功力)의 심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하삼제는 이미 천균일발(千鈞一髮)의 위급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때 한약곡은 십성공력의 무서운 권풍(拳風) 사이를 뚫고서 칼날 같은 지풍(指風)이 그의 뒷등을 공격하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천하에 수없이 많은 고수들 가운데에서도 한약곡의 십성공력의 권풍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단 한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약곡은
『설마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한약곡의 눈은 점점 빛나기 시작하였다.
우두커니 듣고만 있던 운학은 비로소 입을 열어
『금은지(金銀指) 구정(丘正)인가?』
하고 물었으나 한약곡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아냐!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구정(丘正)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려고 하였으나 날카로운 지풍은 나의 왼쪽 팔을 뚫어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상처를 만지면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뒤에 나타난 사나이를 보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라 버렸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운학의 눈에서는 살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사형령주인가?』
한약곡은 운학의 물음을 받고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그가 아니면 또 누가 있겠나?』
말하는 한약곡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 다시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한약곡은 고개를 돌려 사형령주를 발견한 순간에
『아차! 내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구나!』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던 한약곡은 갑자기 이야기를 중단하고 침사곡의 골짜기를 정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기 시작하였다.
이 때 침사곡 골짜기에는 처절한 바람이 윙윙거리며 불고 있었다.
한약곡의 이야기가 중단되어 버리자 운학은 가슴 속으로
(아! 셋째 동생아! 분명히 사람의 머리는 하늘의 계시(啓示)만 못하구나!)
소리치면서, 요동하는 것 같은 침사곡을 노려보면서
『첫째형!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운학이 이렇게 다음 이야기를 한약곡에게 독촉하는 것은 조금도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그가 한약곡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에 어떤 번민이 생겼을 때에는 자기중심을 떠난 것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운학의 환경 속에서 설령 하마의 결과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정경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러나 운학은 한약곡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서는 참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으나 어떤 말로 한약곡을 위로하여 주어야 할는지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침사곡의 바람소리는 점점 사납게 들려왔으며 누런 모래 먼지가 골짜기를 뒤덮고 있었다.
운학은 모래 먼지를 휘감아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는 회오리바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삼제야! 너는 저 침사곡의 모래먼지와 같이 하늘에 치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되돌아오려느냐! 너는 지금 어디로 떨어지려는 것이냐!』
이 때 갑자기 한약곡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두 팔을 쫙 펴고서는 운학을 향하여 달려가서 그를 꽉 끼어 안고서는
『동생! 형이 된 내가 너희들을 볼 면목이 없다!』
울부짖는 한약곡의 어깨를 마주 잡은 운학은
『사람의 생각은 하늘의 계시만 못한 것입니다!』
운학의 말소리를 듣자 한약곡은 고개를 들어 운학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눈길이 교차 되는 순간 운학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이 때 한약곡의 표정에서는 무엇인가 사람을 압박하는 것 같은 위압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약곡은 비통한 얼굴로 산 밑 구름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경치를 바라보다가 다시 정색을 하면서
『나는 그가 사형령주라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놀라지도 않았고 또 절망하지도 않았어! 왜냐하면 지난날 내가 무당산에서 그와 대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러나 한편 정신이 분열되어 당황한 것은 사실이었어!』
여기까지 이야기한 한약곡은 어딘가 서운함을 참지 못하는 눈치인 것 같았다. 그 서운함이란 다름 아니라 자기의 무공에 어딘가 서운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한약곡과 사형령주의 공력은 백중한 것이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계속된다.
한약곡은 분노를 참지 못하는 뇌성벽력 같은 목소리로
『안씨 부자는 어디 있느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으나 이렇게 노호하는 한약곡을 사형령주는 불쌍하게 여겼음인지
『무슨 말이냐? 만약 그가 이곳에 없다면――』
하는 사형령주의 대답을 들은 한약곡은 한편 놀라고 한편으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화가 난 까닭은 사형령주의 계교에 자기들이 말려 들어갔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고 한편 놀란 것은 그가 자기를 세 사람이 이곳에 올 것을 미리 알고 이곳에 천하고수를 매복시켜 놓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한약곡은 반드시 흉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한약곡은 사형령주 뒤에 우뚝 솟아있는 소나무 위에 하나의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분명히 사형령주가 매복시켜 놓은 천전교의 고수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운학의 머리에 지난날 사부 청목도장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입을 열어
『한형! 그 나무 위의 복병은 바로 인피(人皮)를 뒤집어쓰고, 온 몸에 까만 옷을 걸친 사람이 아니요?』
『둘째 동생! 네가 어떻게 그 사람의 모양을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지?』
한약곡이 이상하다는 듯이 묻자 운학은 정색을 하면서
『나의 사부 청목도장은 일찍이 그와 상대한 적이 있었어!』
운학의 말을 듣자 그의 손을 꽉 잡고 있던 한약곡은 손을 놓으면서 깜짝 놀라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운학은 한약곡의 이렇게 놀라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한약곡은 오른손을 들어 손짓을 하면서
『내가 알기로는 그놈의 공력이 굉장히 셀 것 같던데…… 혹시 너의 스승의 적수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나의 사부는 경공(輕功)을 비교하여 보았을 뿐이었는데 그 때 마침 금은지 구정이 나타나서 그 사람의 일장을 지풍(指風)으로 상대하였다고 하더군! 구정(丘正)과 그 검은 그림자의 싸움은 비슷하였다고 하더군!』
운학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약곡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약곡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그날 나는 정말 행운의 사나이였다. 나는 그 날 자네가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지금 생각하니 자네가 현장에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를 알겠네. 자네가 현장에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일망타진 되었을 것일세!』
이야기를 멈춘 한약곡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지는가 하였더니
『금은지(金銀指) 구정(丘正)과 사형령주(蛇形令主)는 모두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다.』
이 말을 들은 운학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나의 생각으로는 금은지 구정과 마교오웅들이 천전교와 내통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둘째 동생!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아!』
하면서 당시의 이야기를 계속하여 나갔다.
그 때 한약곡은 사형령주보다도 하삼제가 천전교의 두 마두와 겨루면서 공력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인지가 염려되어 왼팔의 상처도 잊은 채 두 손을 번쩍 들어 사형령주에게 일 장을 쳤다.
그러나 사형령주는 껄껄거리고 웃고 있을 뿐이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한약곡의 손을 향하여 면도칼날 같은 지풍을 쳐 보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손가락 끝에서는 흰 연기가 모락모락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지풍이나 행동하는 모습으로 봐서 마교오웅의 늙은 선배들과 같은 고수가 아니라는 것을 한약곡은 금시에 알아 차렸으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여
『금은지 구정!』
하고 사형령주라는 정체를 숨겨서 소리를 지르니 사형령주는 오히려 태연하게 자기 정체를 밝히려 하지도 않았다.
이 때 뒤쪽 숲 사이 소나무 위에서 갑자기 껄껄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학이 말하던 그 괴인의 웃음 소리였다.
한약곡은 고개를 휙 돌려 소나무 위를 쳐다보니 나무 사이로부터 얼굴을 내민 자는 누런 초(黃蠟)를 누덕누덕 발라서 누구인지 분간을 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한약곡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운학을 바라본다.
『동생, 자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가 바로 인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겠네!』
하며 감탄하더니 다시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얼굴을 나무 사이로 내밀었던 괴인은 슬그머니 얼굴을 감추더니 다시는 새로운 동정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 사형령주는
『하아 하아 하앗.』
하고 웃으면서
『너희 두 놈은 한 놈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사형령주가 말하는 틈을 타서 한약곡은 온 몸의 공력을 운행하여 그 힘을 양 손에 모았다.
한약곡은 사형령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손을 들어 다시 십성지경(十成指勁)의 술법으로 사형령주를 치니 사형령주도 견디지 못하여 두발 뒤로 물러섰다.
한약곡은 자신이 이렇게 위급한 환경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하삼제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동정을 살폈다.
하삼제의 용감하고 늠름한 모습은 벌써 천전교의 두 마두를 셋째 돌층계까지 추격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호진과 백삼광 두 사람은 불 뿜는 반격을 가하여 하마와 협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뜻 보니 하삼제와 절벽까지의 거리는 아직도 수백의 돌층계가 있었다.
한약곡의 머리에는 번개 같은 한 가닥의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이 상태대로 위를 향하여 사형령주를 공격하자면 하삼제와 만나서 두 사람의 힘을 합하기만 한다면은 우리가 우위를 차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한약곡은 앞뒤를 가릴 생각도 없이 오직 하마와 생사를 같이 해야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한약곡이 이런 생각을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사형령주의 날카로운 지풍(指風)은 한약곡의 전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형령주는 한약곡을 맞는 태도가 여유만만하였다.
한약곡이 머리를 돌려 소나무 위를 쳐다보는 틈을 엿보고 있다가 재빨리 허세를 타고 쳐들어오니 그는 완전히 수세에 몰리고 주도권을 빼앗긴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한약곡이 받는 지풍의 압력은 심하여져서 한약곡은 온 몸의 자유로운 행동마저 제압당하는 형편에 이르러 버렸다.
한약곡은 죽을힘을 다하여 사형령주의 지풍에서 벗어나려고 기를 써 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순간 한약곡의 머리에는 자기 나름의 약삭빠른 꾀가 떠올랐다.
그는 산봉우리 위를 향하여
『하삼제, 빨리 이곳으로 내려오게!』
소리치는 한약곡을 향하여 사형령주는 계속 손가락을 날려 지풍을 쏟아 공격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다.
한약곡도 그의 위엄에 위압되지 않으려고
『헛, 헛!』
하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웃으면서 오른손을 슬그머니 허리에 올려서 칼을 뽑아 들었다.
칼을 들은 한약곡은 한결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이 때다. 치솟은 산봉우리가 반쯤은 무너져 버리는 것 같은 폭음이 들려오면서 단말마와 같은 하마의 목소리가 온 산을 진동하여 메아리쳐 갔다.
갑자기 사형령주의
『하, 하, 하!』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영호진, 잘 했다 잘 했어!』
그러나 한약곡은
‘설마?’
하는 생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하마가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와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약곡은 하삼제가 서 있던 돌층계를 쳐다보니 백삼광과 영호진의 모습만이 보일 뿐!
산바람은 단장애를 향하여 무섭게 맴돌면서 불고 있었고 흰 구름이 산허리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한약곡은 그제서야
『하삼제!』
하고 미친 듯이 소리쳤으나 그 목소리는 성난 바람에 말려서 단장애 골짜기로 삼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운학은 발을 쾅 하고 구르더니
『영호진이! 영호진이!』
소리치는 그의 머릿속에는 일생을 잊혀지지 않을 영호진의 모습이 새겨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운학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영호진의 무서운 공력을 생각할 때에 하마는 필연코 당하고야 말 처지에 놓여 있는 몸이다.
그러나 영호진의 현재의 신분을 볼 때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생각으로 운학의 가슴에는 불과 같은 적개심이 타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운학은
‘설마? 영호진이…’
하는 의문이 생겼다.
지난날 만났던 영호진의 모습에서 충분히 호걸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발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날……
백삼광이 자기와 힘을 합쳐 운학을 살해하자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백삼광이 운학의 등 뒤를 비겁하게 치려는 것을 막아주던 일이 바로 어제와 같은데 하는 것을 생각하니 운학의 머리에 설마 하는 의문이 일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흉계에 걸려 하삼제가 목숨을 잃다니……
사람의 첫 인상이라는 것은 그리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 같은 생각이 운학의 머리를 번개같이 지나갔다.
이 생각 때문에 운학은 영호진을 미워하는 마음이 몇 배 더 강해졌으며 앞으로는 절대로 그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겠다는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한약곡은 다시 입을 열어 하삼제가 단장애 골짜기로 빠졌을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짐작하여 들려주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영호진이 수만 근의 공력을 내어 우뚝 솟아 있는 돌기둥 중심의 힘을 뒤흔들어 놓고서는 자기들은 슬쩍 후퇴하는 척하여 하삼제를 유인하면서 백삼광과 합세 하여 돌기둥에 장격(掌擊)을 가하니 돌기둥이 무너져 내려오는 위기에 아무리 경공술이 빠른 하삼제라는 할지라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
한약곡의 이야기를 듣는 운학의 가슴에는 가누기 힘든 적개심이 복받쳐 올라오고 있었다.
운학은 분연히
『먼저 죽은 사람의 복수를 하는 것은 나중에 죽는 사람의 책임이다.』
말하는 운학의 눈에는 또 다시 반짝이는 이슬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한형!』
하는 목소리는 목메어 있었다.
한약곡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침사곡에는 쉬지 않고 괴상한 회오리바람이 불어 일고 있었고, 산바람 또한 사납게 불어 골짜기로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 때 한약곡은 이 사나운 산바람 속으로 몸을 날려 산 위로 뛰어 오르더니 산정을 향하여
『영호진! 너는 어디 있느냐!』
하는 그의 목소리에 반 울음이 섞여 있었다.
운학은 한약곡이 적개심에 불타서 원수를 찾는 모습을 보고서는 혹시 그가 미치지나 않을까 하여 염려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자, 한약곡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좁은 길을 누비며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운학은 그를 뒤쫓아 가면서
『한형!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소리쳤으나, 한약곡의 대답 소리는 바람에 날려 희미하게 들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침사곡은 살아 꿈틀거리는 듯이 회오리바람이 일고 모래 기둥이 하늘을 향하여 치솟고 있었다.
잠시 후 돌담과 같이 우뚝 솟은 바위 뒤에서 한 사람이 뛰어 나왔다.
이 사람의 경공술은 아주 뛰어나서 땅 위를 밟는 모습이 마치 솜 위를 달리고 있듯이 보였다.
그의 뛰어난 경공술과 뒷모습으로 봐서 천전교주 사형령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산마루에 오르더니 걸음을 늦추며 그리 크지 않은 바위 뒤로 몸을 움직였다.
이 때 그 바위 뒤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점잖게 걸어 나오는 것을 보자, 사형령주는 흥분하면서
『사부(師父)다……』
하고 외친다. 얼굴을 가린 노인은 오른손을 흔들면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시늉을 하여 보인다. 사부라는 노인의 눈동자에는 늙었을망정 기지(機智)와 음흉스러움이 충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전교주를 자애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바위 뒤로 걸어 들어갔다.
교주의 사부는 이상스러운 목소리로 천전교주에게
『지금 그 어린애는 누구냐?』
천전교주는 침착한 어조로
『전진교(全眞敎)의 제자입니다.』
사부라는 노인은 이 말을 듣고서는 매우 두려워하는 눈초리로 교주를 바라보면서
『음! 네가 얼마 전엔가 이야기하던 운학(鄆鶴)인가 하는 자 말이지?』
교주는 머리를 꺼덕여 보였다.
『운학? 운학이라…… 설마? 그럴 수가 없지! 그러나 너무 닮았단 말야! 지난날의 둘째 사형(師兄)과 너무 닮았어!』
말하는 노인은 몇 번이고 머리를 숙여서 깊은 생각에 빠지고 있었다.
교주도 이상하였는지
『사부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인은 교주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렇다면 그는 청목도장(青木道長)의 제자겠구나!』
『예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교주는 사부라는 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교주의 사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청목도장의 제자라! 십 년전 나는 그와의 싸움에서 사나운 일장을 받은 일이 있었지만 그가 바로 청목의 제자라! 그런데 둘째 사형과 너무 닮았단 말야! 그 빛나는 눈동자! 그린 것 같은 눈썹…… 그도 분명 운(鄆)가 였는데……』
노인의 모습은 점점 심각하여지며 지난 추억에 잠겨 마음에 애상이 일어나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천전교주는 사부의 이야기가 전연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사부님! 둘째 사형이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저는 사부님의 말씀을 전연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젊은 사제의 질문은 아랑곳없이 여전히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가! 나는 청목(靑木)이 세상을 속이는 도적의 무리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그의 공력은 정말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들은 천전교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렇지 않습니다. 청목의 제자 운학은 나이가 어려서 나와 비교되려면 몇십 년이 지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공력은 훌륭합니다. 청목이 어찌 세상을 속이는 도적의 무리겠습니까? 사부님의 말씀은 무엇을 뜻하시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네 말은 틀렸어! 지난날 나도 골짜기에서 청목을 만난 일이 있다. 청목은 나를 보자, 슬쩍 몸을 피하는 것이 분명히 나와의 싸움을 피하고 있는 것 같단 말야!』
이 사부의 말을 들은 천전교주는 다시
『어떻든 청목의 제자 운학의 공력은 보통이 아닙니다.』
하며 말하는 교주의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감돌기 시작한다.
사부는 별안간 무릎을 탁 치면서
『좋아, 그가 둘째 사형의 아들이든 아니든 상관할 것 없이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누구 말이죠?』
교주는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사부를 쳐다보면서 다시 묻자 노인은
『청목의 제자 운학이 말야!』
이렇게 말하는 노인의 볼은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다시 말을 이어 나간다.
『아가, 너 저쪽을 보아라.』
하면서 손가락으로 침사곡 골짜기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를 가리킨다.
노인은 다시
『저 모래사장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괴상한 바위가 보이느냐?』
사형령주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예, 틀림없이 보입니다.』
『저 바위에 의지하면 너는 틀림없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다.』
사부의 이런 말을 교주는 전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부라는 노인은 몹시 격동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으며 갑자기 교주의 어깨를 짚고서는 큰 소리로
『아가, 너는 반드시 그를 해 치워야 한다. 즉 그 운학이란 놈이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지 못하게 해 주어야 한단 말이다!』
사부의 이 말을 들은 교주는 점점 의아심이 생겨서 놀라는 척하다가
『사부님! 저도 그 놈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귀찮은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
『운학이란 놈은 그 무공이 보통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듣는 교주의 눈에는 두려움과 수심이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였다. 교주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운학이란 놈은 선천기공(先天氣功)이 몸에 익어 있기 때문에 혹시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을까 하여서…… 지금 그와 싸운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뭐라고?』
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 금시라도 어떤 손속을 쓸 것 같은 눈치다.
천전교주는
『사부님! 그런 뜻이 아니라 제 실력을 그가 눈치 챌까 두려워서……』
하는 교주의 말은 분명히 자신이 먼저 한 말을 변명하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음흉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띠우면서
『나의 계획대로만 하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사부라는 노인은 무릎을 꿇고 손에 들은 나뭇가지로 땅 위에 하나의 원을 그리면서
『이것이 침사곡이다!』
하더니 다시 네모를 그려 가리키면서
『이것이 곧 높이 치솟은 괴상하고 험악한 산이다. 그리고 보아라! 이곳에서 골짜기까지는 꼭 세 발짝의 넓이이다.』
여기까지 말을 끝마친 노인은 음흉스러운 눈웃음을 치면서 천전교주를 바라보았다.
천전교주는 천성이 총명했기 때문에 사부의 말을 듣고서는 벌써 무엇인가 알아 차렸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백양삼현(白羊三顯)의 술법을 쓰란 말씀이죠?』
하는 교주의 눈동자는 이지(理智)에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만족하다는 듯이 껄껄거리고 웃으면서
『과연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훌륭한 제자로다.』
말하는 노인은 사뭇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백양삼현의 제일장(第一掌)은 무엇이지?』
사부가 엄숙하게 묻자, 교주는 공손히 읍하면서
『일각격천(一角擊天)이올시다.』
대답을 들은 노인은 나뭇가지로 자기가 그려 놓은 네모의 한 점을 가리키면서
『응. 운학은 반드시 퇴로를 찾아 이곳으로 물러 날 것이다. 제이장(第二掌)은?』
『쌍고각축(雙羔角逐)입니다.』
대답을 들은 노인은 만족한 듯이
『운학이란 놈은 이곳에 이른 다음에 다시 한발 뒤로 물러서게 될 것이다. 제삼장(第三掌)은?』
『삼양개태(三羊開泰)입니다.』
『운학이란 놈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옆길로 빠져 나갈 수가 있겠느냐?』
노인은 잠시 하던 말을 멈추더니
『그러나 그 놈이 다시 뒤로 물러 설 약간의 여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第四掌)에 운학이란 놈은 전력을 다하여 반격하여 올 것이다. 그러나 핫, 핫, 핫!』
하며 노인의 웃는 모습을 보자 교주는
『그러나 물러설 수 있는 것은 세 발자국뿐입니다.』
『아가! 너는 단번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골짜기의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기 시작하였다.
운학은 어금니를 꽉 물고 하삼제와 같이 그렇게 영리하고 맑은 이지에 빛나는 눈동자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여기저기 흩어진 바위틈을 타고 산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산 위에 서자
(한(韓) 형님은 왜 오시지 않을까?)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자니까, 검은 그림자가 바위틈에서 나타났다.
그 검은 그림자는 얼굴에 꺼먼 복면을 하고 키가 훌쩍하게 큰 천전교주(天全教主)였다.
운학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저런 요사한 도적 놈! 내 너를 살려둘 것 같으냐?)
운학의 마음에는 심한 고통이 일면서 또 다시 하삼제(何三弟)의 모습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천전교주는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날려 골짜기 옆으로 가고 있었다.
운학은 노하여 소리치면서 그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천전교주는 운학이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자, 온 몸의 경공술을 발휘하여 화살과 같이 몸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쫓기고 쫓는 두 사람의 경공술은 정말 당시 무림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무서운 위력을 갖고 있었다.
뒤 쫓는 운학의 마음은 초조하여져서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부러워하는 선천기공을 발휘하기 시작하니 그의 몸에서 윙 윙!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학은 천전교주가 침사곡으로 몸을 피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네 놈이 골짜기를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소리치는 운학의 온 몸에서는 뜨거운 피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천전교주를 놓친다면 요동치는 붉은 피를 토하고 죽을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운학은 두 다리를 교차 시켜가면서 오른쪽에 있는 돌 뒤에 몸을 정지시켰다.
지금가지 달려오던 경공의 힘을 갑자기 멈추니 그의 몸은 강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같이 흔들거렸다.
마치 그가 달리는 모습은 한 마리의 큰 대붕(大鵬)이 하늘을 나는 것같이 보였다.
천전교주의 눈에서는 아주 흉악스러운 광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놈, 잘 만났다!』
표독스럽게 외치는 그는 갑자기 두 손의 손바닥을 뒤집으면서 일 장을 쳐 나갔다.
바로 일각경천(一角擎天)의 술법이다.
이 때 돌 위에 서 있던 운학의 몸은 아직 중심을 잡아 안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교주의 일각경천의 장풍을 맞고서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섬으로써 무난히 그의 공격을 피할 수가 있었다.
천전교주는 자기의 사부와 계획하였던 일이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것을 알자, 황급히 쌍고각축(雙羔角逐)의 술법으로 운학을 공격하였다.
운학은 그의 모진 장풍 속에서도 천부의 기지를 발휘하여 몸을 지탱하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 놈이 이따위 초식으로 나를 공격하여도 뒤로 한 발자국만 몸을 피하면 된다는 것을 저놈도 알고 있을 터인데 계속해서 공격하여 오는 것을 보니 나를 절벽가에까지 물러나도록 하여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 같은데 사잇길도 없고…… )
운학은 재빨리 몸을 날려 바위 위로 뛰어 올랐으나, 몸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교주의 무서운 장풍이 쳐 들어왔다.
운학은 바로 자기의 등 뒤가 천하가 한결같이 무서워하는 침사곡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윙……』
하는 소리를 내면서 사나운 바람이 골짜기에서 치 솟아 불어와 운학을 엄습하니, 운학은 깜짝 놀라면서 등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려 오는 것을 느꼈다.
이 때 운학은 교주의 쌍고각축의 술법을 접하자 그 이치가 먼젓번의 일각경천의 술법과 같은 이치라는 것을 금시에 알아 차렸으나, 그 힘이 일각경천의 술법보다 배나 강함을 느꼈다.
순간 운학은 자기가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한 발도 물러서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어떤 초식을 써서 그에게 반격을 가해야 할는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전진교 제삼십삼대의 고수 운학의 무학(武學)은 정말 심오하였다.
그는 천전교의 초식을 접하자, 아직도 천전교주의 일초(一招)가 남아 있다는 것을 즉각 알아 차렸다.
운학은 마음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저 놈의 나머지 일 장만 피하면은 나는 바로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순간 운학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하여 버렸다.
왜냐하면 그의 발은 절벽에서 불과 한 발짝밖에 되지 않는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는 반 발도 물러 설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운학이 예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반격할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때 천전교주의 제삼장 삼양개태(三羊開泰)의 술법이 운학을 노려 공격하여 왔다.
운학의 바로 등 뒤에서는 귀신이 울부짖는 것 같은 사나운 회오리바람이 쉬지 않고 불고 있었다.
그러나 운학의 머리카락은 꼿꼿이 하늘을 향하여 치솟았으며 옷자락이 일제히 휘날리기 시작하니 그의 왼손 손바닥에서는 노호하는 파도와 같은 선천기공의 장풍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몸은 그 자리를 맴돌면서 절벽가에 축을 만들었다.
그는 맴도는 힘을 강대하기 이를 데 없는 미는 힘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운학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허헝! 허헝!』
하는 부르짖음만이 들려 나올 뿐이다.
운학의 이 무서운 선천기공에 몰린 교주는 두어 발자국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뒷걸음질 치던 교주는 바위를 잘못 디뎌 잔돌이 깔려 있는 수풀 속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운학은 여전히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이 때 별안간
『우르릉!』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가 서 있는 바위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즉 운학이 선천기공을 운행하며 맴도는 힘을 이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때는 보름이 지난 사경(四更)이었다. 밝고 맑은 달빛은 교교하게 땅 위를 비추고 있었다.
침사곡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도 밝은 달빛을 받아 모래사장 위에 긴 그림자를 끌고 있었다.
천하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침사곡은 다시 적막을 되찾아 고요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