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0일 토요일 – 홍성, 흐리다가 가끔씩 많은 비
아침에 기상해 창밖을 보니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이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홍성 지방은 오전과 오후에 비가 내린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오랜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기에 비가 내린다는 것은 무척 기쁘고 반가운 일인데, 모처럼 아내와 즐거운 여행을 기대하고 홍성에 내려왔는데 오늘 비가 내리는 것이 영 달갑지 만은 않다. 하지만 비로 인해 오늘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침 시간을 이용해 홍성읍내에 있는 여러 문화 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래서 아침 6시 20분 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6시 30분을 숙소를 출발해 약 10분 정도를 걸어 6시 40분에 홍성읍 고암리에 위치한 <장군상 오거리>에 도착했다. 이곳 오거리에는 홍성 출신인 김좌진 장군을 기념하기 위한 <김좌진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왼손에는 칼을 들고 오른손의 검지로 북쪽을 가리키는 모습에서 김좌진 장군의 늠름한 기상을 엿볼 수 있는데, 동상 아래에 있는 게시판에 적혀 있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좌진 장군(1889-1930)은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1907년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 기호흥학회에 가입하여 신학문 교육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집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여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1919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3,300여 명을 섬멸하는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전쟁사에 길이 빛날 승리를 이끌어냈다. 장군이 31세 때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가납연대를 섬멸시킬 때의 무장한 위용으로 독립군 총사령관의 늠름한 기상과 나라) 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후 6시 50분 즈음에 김좌진 장군 동상을 출발, 약 10여 분을 걸어 오전 7시 즈음에 홍성군청의 동쪽에 위치한 조양문(朝陽門)에 도착했다. 이 문은 홍주읍성(洪州邑城)의 동문(東門)으로 조선 1870년(고종7년)에 목사 한응필(韓應弼)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門樓)이다. 홍주읍성의 문은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하는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친필로 현판을 하사하였다. 북문은 역대 목사(牧使)나 영장(營將)들이 문루(門樓)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 때는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되었다. 1906년(광무10)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군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하였으나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되었고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후 7시 15분에 조양문을 출발해 근처에 있는 <홍주성 역사공원>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홍성을 대표하는 홍주성(洪州城)이 있는데, 이곳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홍주성(洪州城)은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길이 약 1,772m의 성벽 가운데 약 800m의 석축 성벽이 남아 있고, 현재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서문·북문, 그리고 아문과 산성이 포함되어 있다. 처음 축조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조선 초기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각 관읍의 읍성을 새로운 규식에 맞추어 수축하게 하였을 때, 이 성도 1451년(문종 1)에 새로 수축되었다. 이때에는 문이 4개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래는 3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구조상 남문이 없는 것은 특이하며 북문에는 문루가 없다. 그때 성의 규모는 성 둘레 4,856척, 높이 11척이었으며, 성첩 608개, 적대 6개가 설치되었고, 성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현종 때 한계수가 중수하였고, 1824년(순조 24)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李憲圭)가 수리하였다고 수리기적비에 전한다. 이후, 1870년(고종 7) 목사 한응필이 조양문·경의문·망화문·관영을 지었는데, 이 중 조양문 현판은 대원군이 친필을 하사하였다. 현재의 조양문은 1975년 완전 해체, 복원된 것이다. 이 성은 1895년 동학 농민운동 때 많은 동학교도가 처형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안병찬 등이 이듬해 5월 19일 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6문의 화포로 공격하여 덕산으로 퇴각시키고 점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1978년 10월 7일 이 지역에서 발생한 강도 5°의 지진으로 성곽의 일부가 붕괴되어 1979년부터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1982년 부분적인 보수를 완료한 바 있다.
오전 7시 18분 즈음에 홍주성에 도착해, 먼저 홍성군청 앞에 위치한 <홍주아문(洪州衙門)>을 둘러보았다. 이 문은 조선시대 홍주목(洪州牧)의 동헌(東軒)인 안회당(安懷堂)의 바깥문으로서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읍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읍성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의 문루를 설치할 때 같이 세운 것이다. 이 문에 걸려 있는 홍주아문이란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써서 내려주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홍주아문은 정면 5칸으로 된 것이 특징으로 중앙에는 문루를 세울 때처럼 장주초석 위에 기둥을 세웠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도 가장 크고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어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후에는 <홍주읍성 감옥>을 둘러보았다. 옥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형벌을 집행하기 전에 수용하는 시설로 감옥 또는 원옥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형조, 한성부, 사헌부, 병조, 승정원, 지방관청 등에 부설되었다. 홍주읍성 내에는 1872년에 제작된 홍주지도를 통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홍주읍성 옥은 1895년 설치된 홍주재판소가 1913년 홍주재판소와 검사국이 이전하면서 훼철된 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과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이 홍성읍 월산리로 이전한 후, 홍성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2012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홍주읍성 감옥에서는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1791-1869)가 계속되는 동안, 천주교 신자들이 많은 박해와 고초를 겪었는데 모두 113명의 신자들이 이곳에서 교수형과 옥사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순교성지로 평가받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후에는 <홍주읍성 우물터>을 둘러보았다. 이 우물은 2005년 홍성지원과 홍성지청이 원산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식수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1481년(성종12년)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홍주읍성 안 3개 우물 중 하나로 추정된다. 우물의 모습은 1872년에 제작된 「홍주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옛 홍성지원과 홍성지청이 홍성읍 월산리로 이전한 후에는 폐공되었다가, 2012년 홍성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외형을 보수하였다.
이후에는 근처에 있는 정자 <홍주정(洪州亭)>에 앉아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근처에 있는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 등의 비석들을 둘러보았다. 이후에는 근처에 있는 홍화문(洪化門)을 둘러보았다. 홍화문에 대해 2013년 12월 5일 인터넷 기사를 통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홍성 홍주읍성 남문 ‘홍화문’ 복원- 충남 홍성군 홍주읍성 남문인 ‘홍화문’이 복원됐다. 사업비 15억원이 투입된 남문 복원사업은 문루 약 40㎡, 여장 55m를 복원하는 것으로 소광장 346㎡, 남문진입로 122m, 배수로 석축 정비 등이 함께 진행됐다. 군은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남문 터 발굴조사를 벌여 과거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2012년 11월부터 복원공사에 착수했다. 명칭은 설문조사 등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으로 결정했다.
이후에는 근처에 있는 <병오항일의병기념비(丙午抗日義兵記念碑)>을 둘러본 후, 근처에 있는 <손곡시비(蓀谷詩碑)>를 둘러보았다. 손곡 이달(1539∼1612, 추정)은 조선시대 중기 한시의 대가로,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시문으로 달래며 제자 교육에 힘썼다.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를 가르쳤으며 '홍길동전' 을 지은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후에는 근처에 있는 홍주동헌(洪州東軒) 안회당(安懷堂)을 둘러보았다. 홍주목(洪州牧)은 충남 서해안 가운데에 위치한 홍성의 옛이름으로 조선 초 행정구역 개편 시 주변 19개 군현을 관할하던 지역의 중심지였다. 안회당은 홍주목 관아의 동헌(東軒)으로 22칸의 목조 기와집이다. 1977년 해체 복원중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78년(숙종4)에 처음 지어졌고, 1870년(고종7) 한응필 목사가 크게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동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안회당’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안회당이라는 현판은 흥성대원군이 하사(下賜)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안회당이라는 이름은 논어의 ‘노자안지(老子安之) 붕우신지(朋友信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안회는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현판은 광복 이후 분실되어 1991년에 안회당을 보수하면서 현판과 당기(堂記)를 새로 제작하였다.
이후에는 근처에 있는 정자 여하정(余何亭)을 둘러보았다. 여하정은 안회당(安懷堂)의 뒤뜰에 있는 작은 연못에 세워진 정자이다. 1896년 고종33 이승우(李勝宇) 관찰사가 옛 청수정(淸水亭)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역대 홍주목사들이 관아 일을 돌보다가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육각형의 나무기둥 6개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기둥에는 오언시(五言詩)가 주련(柱聯)으로 각 2개씩 총 12개가 걸려 있다. 작은 규모의 정자이지만, 고목과 연못의 연꽃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이후에는 홍주성의 바깥 산책로를 따라 약 10여 분을 이동해 오전 8시 20분 즈음에 조양문 앞에 도착했다. 이후 빠른 발걸음으로 약 12분 정도를 이동해 8시 32분에 숙소에 도착했고, 서둘러 체크아웃을 한 후 근처의 홍성버스터미널로 이동해 8시 40분에 홍성 남당항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약 50분을 달려 오전 9시 30분에 남당리에서 하차했다. 그리고 아침 식사는 어제 구입한 빵으로 은아와 버스 안에서 간단하게 했고,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해 우리가 남당리에서 하차했을 때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첫댓글 6월 20일 토요일 아침, 남당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홍성읍내에 있는 조양문과 홍주성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홍성읍내에도 여러가지 역사유적지와 볼거리가 가득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