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에서 고통의 치유
1.반야심경(般若心經)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요소가 다 공한 진리를 비추어 보아 모든 괴로움을 여의었느니라"이다. "관자재보살이 심오한 반야바라밀다행을 실천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사리불이 관자재보살에서 어떻게 실천하여서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음으로써 반야심경이 설해진다." '반야'란 분별하지 않고 연기하는 모든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고, '바라밀'이란 건너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오온(五蘊)이 공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혜를 통해서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가서 어리석음과 괴로움의 길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1권(ABC, K0021 v5, p.1037a01)
"모든 현상이 공한 이 실상은 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느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감각, 지각, 경험, 인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닿이는 것, 법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과 내지 인식의 영역까지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 없앤 것까지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 없앤 것까지 없으며, 괴로움, 번뇌, 열반, 수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게 되어 뒤집힌 꿈 같은 망상을 멀리 여의고 마침내 열반을 이루며 삼세 제불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위없이 바르고 두루한 큰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반야심경은 고통의 원인과 치유에 대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욕망, 바르지 않는 견해들을 걷어내야 한다. 모든 중생에게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성품, 즉 불성을 다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의 눈을 가리고 고통속에 빠지게 하는 원인들을 수용하고 사라지게 하면 우리 역시 모든 현상이 공한 실상을 보게 될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이 공한 실상을 바로 비추어 보는 반야바라밀 수행은 인간존재의 모든 고통을 치유하고 우리를 위없는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2.십바라밀(十波羅蜜)
반야바라밀 수행에 대해서 붓다는 중생의 성질에 따라서 그에 맞게 적절한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화엄경』의 「보살명난품」에서 지수보살이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은 한 법으로는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할 수가 없어서 중생의 성질에 따라 적절한 법을 설하였습니다. 탐욕하는 중생에게는 보시(布施)를 가르치고, 바른 생활을 하지 않는 중생에게는 지계(持戒)를 가르치고, 게으른 중생에게는 정진(精進)을 가르치며, 마음이 혼란하기 쉬운 중생에게는 선정(禪定)을 가르치고,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지혜를 가르치며, 사랑이 없는 중생에게는 자애(慈愛)를 가르치고, 사람을 상해(傷害)하는 중생에게는 자비를 가르치며, 마음이 괴로운 중생에게는 기쁨을 가르치고, 애욕이 강한 중생에게는 버리는 마음을 가르칩니다."
이것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반야의 보리심을 일으켜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육바라밀을 닦고 익혀야 한다 했다.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즉 깨달음을 위한 수행체계이다. 이 수행체계는 여섯 가지인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반야바라밀이다.
이 방식에 대해서 차례로 구체적으로 볼 것이다. 육바라밀은 서광스님의 『치유하는 불교읽기』와 권오민의 『인도철학과 불교』 그리고 이중표의 『불교란 무엇인가』를 토대로 고찰해본다.
『육도집경(六度集經)』에 바라밀에 대해서 잘 정리되어 있다. 먼저 보시바라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보시바라밀이란 어떤 것인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기르고, 사견을 가진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 기꺼이 현명하게 가르쳐 사견에서 벗어나게 하며, 중생들을 보호하고 구제하되, 하늘을 넘고, 땅을 넘어 하해(河海)와 같이 널리 중생들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보시(布施)바라밀은 베푸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여기면서 보호하고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에게 맞도록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맞게 주는 것이다. "어떤 것을 주는가에 따라서 보시의 종류가 나뉘는데, 물질적인 것을 베풀면 재시(財施),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면 법시(法施), 두려움과 불안, 근심을 함께하고 도와주는 것은 무외시(無畏施)라고 한다." 베푼다는 것은 '나'라는 의식을 약화시키고 '나'라고 여기고 있는 몸과 마음의 틀로부터 벗어나도록 돕게 해주며,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어서, 연결시킴으로써 우리의 인식의 틀을 확장시켜 준다. 결국 보시는 우리의 탐욕과 화를 내려놓게 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도록 돕는다.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라는 선행에 집착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 바로 무주상의 보시고, 이것이 보시바라밀이다. 따라서 이것은 무아(無我)를 알고 실현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보시바라밀은 육바라밀의 핵심이며 완전한 육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다섯 바라밀이 잘 받쳐줘야 한다.
"지계바라밀이란 어떤 것인가? 미친듯이 어리석고 흉악하여 생명을 죽이기를 좋아하고, 탐욕으로 남의 것을 도둑질하고, 더러운 음행을 하고, 이간질하고, 사나운 말을 하고, 속이고, 아첨하고, 질투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부모를 불안하게 하는… 이와 같은 악행을 자신의 몸으로 포를 뜨고 젓을 담아 시장에 내다 팔지언정 결코 행하지 않고, 삼보를 믿고, 부모와 스승과 국왕과 사주의 네 가지 은혜에 보은하는 마음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두 번째는 지계(持戒)바라밀이다. 지계바라밀은 계율을 잘 지킨다는 뜻으로써 대표적으로 대승의 보살계에서는 10가지 계가 있는데,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욕설, 꾸며낸 말, 탐욕, 미워함, 어리석음을 떠나는 것과 같은 계가 있다.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자율적으로 판단하여서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정해진 계율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도, 이타행에 필요하다면 두려움 없이 실천해야 한다. 계(戒) 또한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을 지키라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화합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보시를 잘 행하기 위해서는 지계바라밀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보시를 하는데 있어서도 조화와 균형, 절도가 필요하기에 상황과 조건을 잘 파악해서 맞게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인욕바라밀이란 어떤 것인가? 보살이 깊이 사유해 보니 중생들은 어리석어서 교만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크게 생각하고 항상 남을 이기려고 한다. 벼슬이나 국토나 보기 좋은 것은 자기 혼자 차지하려고 한다. 그들을 살펴보면 어리석음이 있으며 탐욕과 질투가 있다. 마음속으로는 탐욕과 질투심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원한과 분노심을 일으키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그치지 않는다. …인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비를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보살은 항상 모든 부처님의 인욕의 힘으로 복을 삼아 성내는 악독한 생각을 멸하고, 자비로써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였다.…"
세 번째는 인욕(忍辱)바라밀이다. 인욕은 참고 인내하며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욕이 소극적으로 참고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 자비의 적극적인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속에서 우리의 탐욕, 화, 무지의 삼독(三毒) 중에서 특히나 분노하는 마음을 참고 다스리는 수행법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욕심을 내고 남의 것에 대해서 탐욕과 질투심을 가지고 어두운 상태로 윤회할 때, 보살은 이 점을 알고 인간들의 세상에서 인간들이 자신을 때리고 욕해도 끝까지 참아서 인간들이 가진 삿된 생각을 없애도록 돕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남에 대한 증오심을 그치고 모든 악연인 사람들을 좋은 인연으로 만드는 것이 인욕바라밀이다.
"정진바라밀이란 어떤 것인가? 깊은 도(道)에 전념하면서 그 도를 향해 나아감에 게으름이 없는 것이 정진이다. 눕거나, 앉거나, 길을 가거나, 눈으로는 항상 모든 것은 부처님들이 신령스러운 모습을 변화해서 자기 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보고, 귀로는 모든 소리를 항상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덕음(德音)으로 듣고, 코로는 도의 향기를 맡고, 입으로는 도를 말하고, 손으로는 도를 행하는 일을 받들고, 발로는 도의 집에 서서 그 뜻을 호흡지간에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
네 번째는 정진(精進)바라밀이다. 정진바라밀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생겨난 건강하지 않은 행위는 재발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건강하지 않은 행위는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 이미 생겨난 올바르고 건강한 행위는 잘 자라도록 부지런히 힘쓰는 것과 같은 올바른 노력이다." 따라서 나약함이 없는 부동심(不動心)의 실천이면서도 불퇴전(不退轉)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반적인 중생에게 정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보살의 정진은 집착이 없는 이타적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붓다가 열반하기전, 최후로 남기신 말씀은 "게으르지 말라. 열심히 정진하라."이다.
"선정바라밀이란 어떤 것인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하나로 하여 여러 착한 일에 합일하는 것이 선정이다. 선정에는 사선(四禪)이 있다."
다섯 번째 바라밀은 선정(禪定)바라밀이다. 선정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잡년이 제거되어 고요하게 집중하여 평화로운 상태이다. 따라서 세계의 실상이 무자성, 공임을 삼매로써 직관하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다. 보시바라밀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선정이 잘 나타나야 하는데, 선정바라밀은 보시를 행할 때 나의 자아의식이 사라지고,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사라진 평화로운 마음 상태라 볼 수 있다.
"모든 부처님 밑에서 가르침을 듣고 잘 받들며, 모든 선지식에게 친근하고 공경하며, 마음에 게으름이 없으며, 모든 사물을 바르게 관찰하여 진실한 선정에 들며, 모든 편견을 떠나서 진리의 바다를 건너며, 아무런 바람도 없이 봉사하는 여래의 길을 알아 모든 지혜를 갖추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반야(般若)의 완성입니다."
여섯 번째 바라밀은 반야(般若)바라밀이다. 반야는 뛰어난 지혜라는 뜻인데, 이는 연기(緣起)인 무아와 무상을 깨닫고 사유분별을 떠난 지혜이다. 따라서 지혜바라밀은 우리가 강력하게 쥐고 있는 '나'에 대해서 계속해서 집착하고 있는지 등 보시에서 나의 '자아'가 활동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확인한다.『육도집경』에서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법은 무상하기 때문에 사람의 수명은 매우 짧으며 항상 후세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누구나 태어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 따라서 영원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 이러한 무아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욕심에 가득 차서 보시할 줄 모르고 경에서 가르치는 도를 받들지 않는다. 그들은 선을 행한다고 해서 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을 행한다고 해서 무거운 재앙이 오는 것도 아니다고 하면서 방자한 마음으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몸을 버리고 죽으면 업에 의해 후세에 가서 태어나게 되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간탐하는 마음을 끊고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를 행하는 등의 육바라밀을 실천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은 무아에 대해서 자각하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의 바라밀을 잘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이 반야바라밀이 잘 뒷받침될 때, 보시바라밀을 잘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육바라밀을 하나하나 닦고 행할 때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육바라밀에 4가지 방편을 더해서 십바라밀로 확장시켰다. 기존의 육바라밀을 통해서는 깨달음에 대한 인식, 즉 너와 나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한 상태이다. 따라서 인식을 실제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하고 습으로 바꾸기 위해서 더해진 것이 바로 나머지인 방편(方便), 서원(願), 힘, 그리고 지혜(智)이다.
방편(方便)바라밀은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을 완성하는 것으로써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지혜를 직접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체득해 나아가는 것이다. 서원(願)은 방편바라밀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하여 중생들, 즉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역바라밀은 앞에서의 바라밀들을 통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자타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힘을 갖추도록 하여서 보살의 선한 이타행을 실천하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마지막인 지혜(智)바라밀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구제를 위하여 일체의 법을 완전하게 깨닫는 지혜를 말한다.
"십바라밀은 정리하면, 중생구제를 위한 수행, 부처님이 가르치신 불법을 깨닫기 위한 수행, 그리고 다시 깨달음을 기반으로 중생구제로 회향하는 수행이라는 3가지의 수행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십바라밀은 보시를 중심으로 나와 너의 경계를 벗어나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실천해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연결되어서 같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겉으로 서로 드러나 있는 삶의 모습이 달라 보이고, 업이 다르며 구분되어 있어 보이지만 모두 가지고 있는 괴로움과 마음은 동일하여서 십바라밀을 잘 수행하고 이해하게 되면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 우리 모두의 고통이 서로 이해가 되며, 수용되고,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과 자비심을 얻고,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3.보살(菩薩)
"대승불교는 반야의 지혜에 근거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을 무한히 펼쳐 나가는 보살의 불교라고 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에 대하여 그 존재의 실상을 드러내어 모든 중생들을 돌보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대승의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면서도 중생을 돕고 구원하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지혜를 깨달은 보살의 모습을 『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살은 무명을 떠나 보리심을 성취하며 청정한 마음으로 일체가 평등함을 관찰하여 존재의 진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업은 마치 꿈같고, 그림자 같고, 업보는 번개 같고, 인연에서 생긴 존재들은 메아리 같고, 보살행은 그림자 같다고 알며, 또 집착을 떠난 지혜의 눈이 열리는 곳, 보살의 활동은 언제나 늘 작용하면서도 조금도 작용함이 없어서 모든 존재에 있어서 둘이 아님을 깨달아서 보살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도달합니다."
보살은 그 누구든 될 수 있다. 따라서 성불하고자 하는 모든 중생은 보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보살은 큰 원을 세우고 있어서, 모든 중생들을 지혜로써 돕고자 한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이타의 서원으로 무장한 보살이 육바라밀 일을 통하여 지혜와 자비를 완성하였다. 또한 진실한 지혜와,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진실히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여 고통을 덜어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십바라밀을 잘 수행하게 되면 십바라밀의 핵심인 보시바라밀을 잘 수행하여 궁극의 모습, 깨달음으로 갈 것이다. 『화엄경』에서 보살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체 중생은 헤아릴 수 없는 악업을 거듭 짓고 있다. 또 숙업(宿業)을 거듭 반복하고 있다. 이 숙업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여래도 뵈올 수가 없으며, 정법을 듣지도 못한다. 나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 속에서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아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리라."
우리 인간의 모습은 앞에서도 계속 살펴봤듯, 고통속에서 헤매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본 보살은 큰 대원을 내며 중생들을 돕고자 한다. 『화엄경』의 「십행품」에서 어떤 사람이 보살에게 "수 없는 세계의 하나하나의 중생을 위해 당신은 천만억 년 동안 지옥의 고통을 받고 그 중생들로 하여금 열반에 들어가게 하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에 보살은 중생을 위해 지옥의 고통까지 받겠다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고통받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벗어나고자 한다면 바른 실상, 진리를 보아야 한다. 앞에서 우리가 법을 구하고, 진리를 구하려 할 때, 우리는 모두 보살이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였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연기하여 공(空)하다는 것이 바로 불교의 깨달음의 핵심이다. 『화엄경』 제3장 「보살명난품」에서 연기의 가르침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첫 질문으로 문수보살이 보수보살에게 어찌하여 여러 차별이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더니, 각수보살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지혜가 밝은 사람은 항상 적멸의 행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그대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신체를 안으로 관찰하여 보면, 도대체 나의 몸에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이 정확하게 관찰하는 사람은 자아(自我)가 있고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의 모든 부분을 관찰하여 보면, 어디에도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의 상태를 깨닫고 있는 사람은 마음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신체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깨닫고, 모든 것으로부터 공(空)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이 허망함을 알아 다시는 그 마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연기(緣起), 무상(無想), 무아(無我)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집착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이 될 때, 우리는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문수보살이 물었다.
"유마거사님, 병든 보살은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병이 난 보살은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의 이 병은 지난 세상의 허망한 생각과 잘못된 마음, 번뇌로부터 생긴 것이요, 진실한 법이 아니거늘 누가 이 병을 앓고 있는가?"
왜냐하면 사대(四大)가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을 육신이라고 하는데, 이 사대에는 주인이 없으므로 이 육신에 <나> 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병이 생긴 것은 <나>라는 상(相)의 집착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합니다."
『유마경』의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에서 볼 수 있듯, 계속해서 모든 경전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집착이다. '나'에 대한 집착이 우리가 가진 삿된 견해이며, '나'라는 생각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모든 글들이 머리로는, 지식적으로는 받아들여지나, 사실 진실로 깨닫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에 계속 의식하며 끊임없이 우리의 실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바라보게 하기위해서 거듭 강조하게 된다. 우리의 습기속에서, 육신에, 욕망에, 생각에 갇혀서 머무르지 않도록 계속해서 되새겨야 한다.
고통에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모든 중생들은 이러한 십바라밀을 갖추고 익혀야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진리에 집착하지 않고, 소망에 집착하지 않고, 선정에 집착하지 않고, 적정에 집착하지 않으며, 깊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또한 중생을 구제해서 얻는 덕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집착하는 순간, 다시 그것에 얽매여서 자유를 읽고 안주해버리며 다시 고통의 순환속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공(空)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기에 궁극적으로 진실한 것도 거짓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불교수행에서 고통의 의미 및 치유에 관한 고찰/ 이혜인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