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정진하라. 우리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면
나무끼리 비벼 불씨를 얻고자 할 때 나무가 달궈지기도
전에 그만두는 것과 같아 끝내 불씨를 얻지 못한다.”
일타는 수행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원칙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마을로 탁발을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암자에서 사방 40리 밖에
있었으므로 동구불출을 지키려면 탁발을 나갈 수 없었다. 물론 10리 터울로 화전민
농가가 한 채 한 채 있긴 했지만 그 집들은 오히려 일타가 도와주어야 할 만큼 어렵게
사는 곤궁한 화전민들이었다.
일타가 갈 수 있는 데는 홍제사까지 뿐이었다. 도솔암은 홍제사의 산내암자일뿐더러
양식이 떨어지면 홍제사로 가서 걸망에 넣어오거나 홍제사 비구니스님들이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홍제사 살림이 큰절처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퇴락한 홍제사도 암자처럼 작은 절이었다. 법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법당과
작은 대중방과 창고가 한데 딸린 인법당이었다.
불교정화를 하러 서울로 갔던 비구니스님들이 홍제사로 돌아온 것은 일타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탁발을 나가지 않는 일타에게 양식 걱정을 덜어주었다. 특히 인홍은 일타의
속가 어머니인 성호를 잘 알고 있었다. 인홍은 성호가 자신보다 나이 많고 한문을
깨쳤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홍은 일타의 연비를 보고 감동하여 일타가
수행하는 데 자신이 외호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장좌불와에 들어간 일타는 졸음이 오면 자신의 무릎을 꼬집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래도 졸음을 견디기가 힘들어지면 암자 마당으로 나와 한산시를 크게 외웠다.
밥을 말해도 끝내 배부르지 않고
옷을 말해도 추위를 면하지 못하네.
배부르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추위를 면하려면 옷을 입어야 하네.
깊이 생각해 헤아릴 줄 모르고
다만 부처 구하기 어렵다 말할 뿐
마음 한 번 돌리면 곧 부처니라
아예 멀리 밖에서 구하지 말라.
說食終不飽 說衣不免寒 설식종불포 설의불면한
飽喫須是飯 著衣方免寒 포끽수시반 착의방면한
不解審思量 祇道求佛難 불해심사량 기도구불난
廻心卽是佛 莫向外頭看 회심즉시불 막향외두간
경전을 공부하기보다 참선하여 깨쳐야 마음의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다는
한산시를 외다보면 수마가 물러갔다. 그래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꾸벅꾸벅
꺾이고 침이 무릎에 떨어지면 홍제사로 내려갔다. 달빛을 이용하여 가는 길이라지만
산길이 끊어진 곳에서는 계곡물 속의 바위를 타고 가야 하므로 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미끄러운 바위에서 넘어지면 바로 계곡물 속으로 처박히었다. 발가락이
부러지고 정강이가 으깨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통증보다 수마가 더 맹렬하게 일타를
괴롭혔다. 한밤중에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고 다녔으므로 일타 모습은 귀신의
모습이었다.
한밤중에 홍제사 마당에서 만난 비구니스님들이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일타는 따뜻한 목소리로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인홍의 권유도 뿌리치고 다시
도솔암으로 올랐다. 그렇게 악전고투 끝에 졸음이 물러가면 도솔암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동구불출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차츰 수마가 물러갔다. 한밤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도 정신이 가을 연못물처럼 맑았다. 그럴 때마다 일타는 스스로 고요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한산시를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내 전생에 너무 어리석었기에
오늘 이렇게 깨치지 못했다.
또 오늘 이렇게 구차한 것은
모두 전생에 지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 또 닦지 않으면
내생에 또한 본래와 같으리.
양쪽 언덕에 모두 배가 없으면
아득한 저 바다 어이 건너리.
生前太愚癡 不爲今日悟 생전태우치 불위금일오
今日如許貧 總是前生作 금일여허빈 총시전생작
今日又不修 來生還如故 금일우불수 내생환여고
兩岸各無船 渺渺難濟度 양안각무선 묘묘난제도
깨치지 못한 오늘의 모습을 참회하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오늘 부지런히
정진하겠다는 맹세의 시이기도 한 한산시를 외우게 되면 흥이 났다.
마음에 감흥이 일면 서울을 떠날 때 걸망 속에 챙겨온 『유교경(遺敎經)』도
꺼내 외웠다.
“부지런히 정진하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라.
우리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면,
그것은 마치 나무끼리 비비어 불씨를 얻고자 할 때
나무가 달구어지기도 전에 그만 두는 것과 같다.
그는 아무리 불씨를 얻으려 해도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다.
선지식을 만나려면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잊지 않고 생각하면 온갖 번뇌의 도둑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생각을 모아 마음에 두라.
바른 생각을 잃게 되면 모든 공덕을 잃지만,
생각하는 힘이 굳세면 비록 오욕의 소굴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완전 무장하고 싸움터에 나가면 두려울 것이 없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마음은 선정에 들 것이다.
마음이 선정에 들면 세상의 생멸하는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선정을 부지런히 익혀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물을 아끼는 집에서는 둑이나 못을 잘 관리하듯이,
우리들도 지혜의 물을 채우려면
선정을 잘 익혀 물이 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요하고 무위(無爲) 안락을 얻고자 한다면 안팎의 시끄러움을 떠나 홀로
한가로운 곳에 머물라. 마음속의 온갖 분별 망상과 바깥의 여러 대상과 환경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괴로움의 근본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제석천도 공경할 것이다.
무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리로부터 괴로움을 받는다.
약한 나무에 많은 새떼가 앉으면 그 가지가 부러질 염려가 있는 것과 같다.
또 세상일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여러 가지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가리켜 멀리 떠남(遠離)이라 한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고뇌도 많다.
그러나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근심 걱정도 적다.
또 욕심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해서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각박하지 않다.
그래서 마침내는 고뇌가 말끔히 사라진 해탈의 경지에 들게 되니
이것을 가리켜 소욕(少欲)이라 한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안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가난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부유하다.
이것을 가리켜 지족(知足)이라 한다.”
이처럼 한없이 맑은 정신으로 시와 경전을 외우며 밤을 새우는 어떤 날에는 바깥의
동정이 감지됐다. 누군가가 왔다가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산짐승이 불빛을 찾아 방문 앞에까지 왔다가 가는가 싶어 문을 열고 보면
아무 흔적도 없었다. 산 위에 둥그런 달이 떠 있거나 낙엽이 마당에서 뒹굴고 있거나
백설이 난분분 난분분 내려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무언가가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시각에는 신장(神將)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늘도 스님 경 읽는 소리를 잘 들었다.
기분 좋게 잘 공양받았으니 날이 새기 전에 어서 돌아가자.”
신장들이 모였다 사라지는 느낌이 드는 날은 하루 종일 힘이 솟았다.
적막한 밤이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두렵지도 않았다.
일타 자신을 지켜주는 신장들이 방문 앞까지 왔다가 갔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날 밤에는 신장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일타는 선정에 든 자신도
따라 웃을 때가 있었다.
“허허허.”
그럴 때 일타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어디서 온 신장이오?”
“태백산을 지키는 신장이오.”
“왜 밤에만 나타나는 것이오?”
“낮에는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있으니 보지 못할 수밖에요.”
“아니, 왜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스님 경 외우는 소리를 듣느라고 잠을 자지 못했으니
낮 동안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오.”
밤에는 바람처럼 영(靈)으로 돌아다니다가 낮에는 곰이나 다람쥐 등등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상 때문인지 일타는 낮 동안
산짐승을 볼 때마다 한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방문을 열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면 다람쥐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 안으로
들어와 일타의 친구가 돼주었다. 처음에는 무릎까지만 오르더니 일타와 친해지자
어깨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갔다가 쪼르르 내려오곤 했다.
하루 한 끼 하는 공양 뒤에는 박새가 방안으로 들어와 일타의 머리를 쪼기도 했다.
그러면 저절로 식곤증이 달아났다. 그러니 일타 무릎에 올라 앞발을 들고 합장하는
다람쥐나 식곤증을 달아나게 하는 박새를 볼 때마다 태백산에 지키고 있는 신장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람쥐와 박새가 보이지 않는 겨울철이면 곰이 나타났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미곰과 새끼곰이 암자 가까이까지 왔다. 어미곰이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가
쿵쿵 뛰어내리며 재주를 부렸다. 입이 뾰족한 너구리가 암자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지나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일타는 묘기를 부리는 곰보다 사람을 더 좋아했다. 한 철 먹을 양식을
도솔암에 들여놓고는 홍제사마저 내려가지 않게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어쩌다 약초꾼을 만나게 되면 법당의 부처님인 듯 반가웠다.
일타는 약초꾼을 도솔암 방으로 불러들여 부처님께 마지 올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밥도 해주고 차도 끓여주었다.
“어디서 왔소.”
“영주에서 왔습니다. 홍제사에 들렀는데 도솔암에 도인이 한 분 계신다기에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이이고, 누가 나보고 도인이라고 합디까?
난 신선처럼 고고하게 사는 도인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는 수도자일 뿐이에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귀신도 부르고 산신령님하고 얘기도 나누는 도인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시고 계신 것을 보니 제가 산신각에서
본 산신령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저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약초꾼은 일타를 보고서는 도인이라고 우겼다. 일타는 크게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산신각에 들어가면 무슨 기도를 합니까?”
“제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산삼을 캐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내가 이 산에서 본 것은 더덕이나 도라지 밖에 없소.
그러니 나는 큰스님이 아니라 아직 작은 스님일 뿐이오. 하하하.”
일타는 약초꾼을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해서 차를 우려내 주었다.
“큰스님, 더덕이나 도라지는 저도 많이 캤습니다.
정말 산삼이 있는 곳을 모르겠습니까?
도인스님들은 천리 밖을 내다보는 천안통이 있다던데요.”
“사람마다 찾고자 하는 인연이 다 다른가봅니다.”
“스님이 찾고자 하는 인연은 무엇입니까?”
“맨땅 위에 누워 있더라도 참으로 편안한 무위안락이지요.
다른 말로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약초꾼은 일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일타는 약초꾼이 무슨 엉뚱한 말을
하더라도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본 지 서너 달 만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는 사람이 그리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성묘를 하고 가는지
흰 두루마기 자락이 나무 숲 사이로 희끗희끗 하더니 곧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약초꾼이 일어서며 말했다.
“아참, 큰스님.”
“무엇이오?”
“홍제사 비구니스님들이 큰스님께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이오?”
“법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해야지요. 내려가거든 그리 전해주십시오.”
일타는 홍제사에서 법문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뒷날로 미루었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아직은 스님들을 상대로 법문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공부는 이제 겨우 동정일여의 경지에 다다랐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오매일여, 몽중일여까지 가야만 했다.
일타는 동정일여의 경지를 스스로 점검하곤 했다. 신장을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나 지금 약초꾼과 얘기를 주고받는 순간에도 화두가 끊어지는 일이 없이 순일했다.
〈계속〉
<3>
“의식적으로 화두를 들 것도 없었다. 차를 마시면 자신이
차가 되고, 밥을 보면 자신이 밥이 되고, 암자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바람소리가 되었다.”
도솔암 주위도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암자 마당가 한쪽에 자라난 모란의 꽃봉오리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봄볕을 받는 밭뙈기에서는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워 올랐고, 산비탈에 자생하는 산복숭아 꽃도 만개하여 붉은 빛깔을 흘리고 있었다. 일타는 암자 옆에 있는 단샘(甘泉)으로 나가 찬물을 떠와 끓이지 않고 녹차 잎을 띄워 우려 마셨다. 그래도 차 맛과 향은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고 성성한 화두까지 적셨다. 며칠째 일타의 몸과 화두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몽중일여(夢中一如).
좌선하는 동안 꾸벅 존 뒤 짧은 꿈을 꾸면서도 화두는 달아나지 않고 들려 있었다. 수마가 집적거려도 이제는 화두가 도망가는 법이 없었다.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언제나 밝게 비추었다. 한 달 전 봄을 시샘하는 폭설이 내린 날부터 그랬다. 눈이 마루까지 쌓여 방문이 잘 열리지 않았던 그날부터 화두는 맑은 의식으로 좌선할 때뿐만 아니라 졸거나 깜박 잠이 든 순간에도 일타 자신의 몸과 혼연일체가 됐다.
‘아, 조사들이 말한 몽중일여와 숙면일여(熟眠一如)가 이러한 것이었구나.’
며칠 전부터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잠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곧잘 좌선한 채로 잠깐 동안 졸거나 아예 눈을 붙이곤 했는데 그것마저 없어졌다.
가부좌를 틀고 있으면 하루가 무심히 한 순간에 지나갔다. 자신을 붙잡았던 시간이
없어지고 자신이 놓여 있는 공간만 있을 뿐이었다. 망상이 붙지 못하고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하고 평안했다.
이제는 의식적으로 화두를 들 것도 없었다. 문득 자신이 화두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화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먹고 마시고 보는 것이 순간순간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
차를 마시면 자신이 차가 되고, 밥을 보면 자신이 밥이 되고, 암자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바람소리가 되었다.
암자 밖에서 이리 저리 포행을 하다가 구름을 쳐다볼 때는 자신이 구름이 되고,
봄이 아우성치는 산을 보면 자신이 산이 됐다. 뿐만 아니라 흐르는 계곡물을 보면
자신이 계곡물이 되었다.
‘나, 일타라고 고집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의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날 밤은 의식이 유난히 개울물처럼 맑았다. 차갑기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같았다. 의식은 허공처럼 투명하게 깨어 있었고, 가슴은 봄볕이 내리쬐는 것처럼
따뜻했다. 이미 일타의 의식은 방안의 시간을 벗어나 무한대의 허공에 닿아 있었다.
그런 상태로 하룻밤이 몰록 찰나에 지나가버렸다. 가부좌를 풀고 방문을 열자,
햇볕이 방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룻밤이 꿈결처럼 지난 한낮이었다.
그런데 일타에게 받아들여지는 시각은 어제의 낯익은 한낮이 아니었다. 새롭게 태어난
우주의 한낮이었다.
‘어제의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그대로이나 어제의 세상이
아니잖은가. 태백산이 비로자나부처님처럼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만발한 모란꽃의 향기가 암자 마당을 적시고 있었다. 마당가 너머 비탈에 핀
야생화들도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저 분은 부처님이 아니신가. 모란꽃을 연꽃이듯 들고 계시는 저 분은 부처님이
아니신가. 아,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더 할 일이 없구나.’
일타의 눈에는 분명 부처님이 모란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마하가섭에게 꽃을
보이신 것처럼 일타를 향해 모란꽃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일타는 미소를 지었다.
전주 법성원에서 염화시중이란 화두를 든 지 실로 5년만인 1956년 음력 3월 23일의
오도였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밝은 빛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頓忘一夜過
時空何所有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
환희심에 저절로 읊조려진 깨달음의 노래였다. 일타는 모란꽃을 무심히 보다가
단샘으로 가 표주박에 찬물을 한 가득 담아 마셨다. 감로수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단샘 물의 찬 기운이 온몸을 휘돌자 주변의 산 것들이 선명하게 눈에 잡혔다.
단샘 위로 쳐진 물푸레나무 가지에서는 박새들이 날아와 짹짹짹 소리쳤고,
돌담 위로는 다람쥐가 나타나 달렸다.
단샘을 보니 새삼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자신을 내어 주면서도 주었다는 마음 없이
주고 있는 단샘이었다. 부처님이 『금강경』에 설한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
(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바로 그것이었다.
‘저 물 한 방울이 샘을 타고 넘어 흘러가 만물을 살리는구나. 저 감로의 샘이야말로
관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이구나. 그렇다. 모름지기 수행자란 감로의 샘이 되어 중생을
살리는 보살이 되어야 하리.’
일타는 또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했다.
외로운 산봉우리에서도 한가롭고 평안하네
산새들은 나를 특별히 노래 부르고
소슬한 솔바람소리 청량하기 그지없도다
이 가운데 단샘 물은 길이 스스로 흐르리.
일타는 자신 속으로 진리가 들어왔음을 확신했다. 부처님의 모든 법이 자신 속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순간순간 걸림이 없었고, 들끓던 망상이 환희로 바뀌었다.
잘난 사람노릇 벗어버리고 비로소 못난 중노릇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이후 일타는 하안거를 맞이한 홍제사를 가끔 내려가 법문을 했다.
홍제사에 많은 대중이 모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홍을 찾아온 20대의
비구니들이 대여섯 명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홍제사로 들어온 비구니들이었다.
인홍은 일타보다 속가 나이로 20여 년 연상이었으나 일타에게 깍듯하게 존댓말로
대했다. 일타가 지난봄에 오도한 사실이 이미 홍제사 대중 사이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일타스님, 법문을 해주시니 우리 대중들이 많이들 좋아합니다.”
“홍제사 스님들이 어찌나 열심히 참선을 하는지 인홍스님을 닮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대중에게 늘 말하지요. 나를 닮지 말고 한암 큰스님이나 성철 노장님을
닮으라고 말합니다.”
“한암 큰스님이 스님의 계사(戒師)라고 했던가요.”
“제가 월정사 지장암으로 출가할 때 저에게 계를 주신 큰스님이지요.”
“인자하신 한암 큰스님께서 수행자로서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설 자리를 가르쳐주신 분이니 얼마나 큰 가피입니까.”
“한암 스님이야말로 우리 불가에 큰 선지식이지요.”
“한암 큰스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1925년인가, 봉은사 조실로 계시다가
오대산으로 들어오시면서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오대산으로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수행자가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다 말씀했다고 여겨집니다.”
인홍이 찾아가는 자리는 늘 선방이었다. 해방 후부터 1950년 동안거까지는 만공이
깨달음을 얻었던 덕숭산 정혜사에 있었고, 성철이 잠시 머물렀던 월내 묘관음사,
6.25전쟁 중에는 봉암사 백련암에서 정진을 했던 것이다.
“특히 1949년 내 나이 42세 때였어요. 묘관음사로 가 성철 노장님을 만난 이후
불퇴전의 용맹심을 얻었지요.”
성철은 자신의 가풍대로 인홍을 보자마자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묘관음사에 도착한
인홍이 법당으로 먼저 들어가 참배한 뒤, 연못가를 거니는 성철을 찾아 인사하려고
하자 성철은 쌀쌀맞게 손을 저었다.
“내가 누군데 절을 할라꼬 그러노.”
“성철 노장님 아니십니까.”
“성철이 누군고.”
“앞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 잘 찾아보그래이.”
인홍이 무안하여 망설이자 성철은 인홍의 등을 떠밀어 연못으로 밀어뜨렸다.
한겨울의 연못에 빠진 인홍은 겨우 연못가로 나왔지만 승복은 이미 흠뻑 젖어
살얼음이 끼었다. 그러나 인홍은 묘관음사 객사에 들어갈 생각은 않고 젖은 승복을
입은 채 연못가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자비로운 한암 회상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홍은 날벼락을 맞은 듯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신심이 솟구쳤고 다시
출가한 것 같은 변화를 느꼈던 것이다.
이후 인홍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들이 다 피난 가버리고 없는 봉암사
백련암으로 들어가 가행정진을 했다. 기필코 성불하리라는 대분심(大忿心)을 냈다.
공비들이 총을 들이밀고 협박했지만 인홍은 불퇴전의 정진력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오히려 공비들은 인홍의 가행정진에 놀라워하며 “암자에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협조하겠습니다” 하고 물러갔던 것이다.
훗날 성철은 이와 같이 정진한 인홍을 가리켜 “인홍은 법당 기둥 같은 스님이다”고
격려하고 인가했을 정도였다.
일타는 포행 시간을 이용하여 홍제사를 날마다 내려올 때도 있었다. 법문하는 날이
아니었지만 한 비구니가 측은해서였다. 별명이 ‘아픈 중’으로 불리던 비구니의 건강이
궁금해서였다. 인홍이 출가했던 월정사 지장암에서 온 그 비구니는 복막결핵이란
중병에 걸려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비추는 곳을 찾아 앉아서 쓰러져 있곤 했다.
몸은 야윌 대로 야위어 갈대처럼 말라 있었고, 얼굴 빛깔은 바랜 창호지 같았다.
일어설 기운도 없어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저 아픈 중이 살 수 있을까. 혹시 내일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자비심이 많은 일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홍제사를 내려와 그 비구니의 건강을
걱정했다. 인홍의 얘기가 믿기기 않았다. 월정사 지장암에서 살던 열다섯 사미니 때만
해도 풀을 베어 하루 50짐씩 지게로 나르던 여장군처럼 건강한 체질이었는데,
17살 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수년째 ‘아픈 중’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비구니는 죽지 않고 하루하루 잘 버티어 냈다. 인홍은 성철에게 화두를
탄 인연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비구니가 절을 할 만큼 건강했을 때
무려 3만 배를 하고 성철에게 화두를 탄 인연이 있는데, 그때 성철은 목침을 들고서
그 비구니의 손끝을 내리칠 기세로 “지금 당장 죽어도 화두만 들 것이냐”고
다그쳤다는 것이었다.
일타는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그 비구니스님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신심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화두를 잘 챙겨야 해요.”
“네.”
“살고 죽는 일에 끄달리지 말고 늘 화두를 챙겨야 합니다.”
초가을이 되어 태백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자, 또 한 비구니가 홍제사로 왔다.
성철의 딸 불필이었다. 그때까지 성철의 가르침을 받아 행자 생활을 했지만 아직
법명을 받지 못해 ‘수경’으로 불리던 초보 수행자였다.
불필은 “태백산 홍제사 인홍에게 가라”는 성철의 명을 받고 오는 길이었다. 불필이
홍제사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이 태백산 능선에 걸려 있었다. 낮 동안 산으로 흩어졌던
홍제사 비구니 대중들이 저녁을 맞이하여 걸망에 약초를 가득 담고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불필의 눈에는 평소에 동경하던 모습이었으므로 가슴이 뛰었다.
다음날부터 불필은 대중들과 같이 낮에는 호미를 들고 밤에는 대중 방에서 정진했다.
낮에는 고구마 밭에 나가서 고구마를 캐고 밤에는 대중 방에 앉아 화두 들고 가부좌를
틀었던 것이다. 불필은 차츰 태백산의 기운에 훈습되어 갔다. 태백산은 수행자에게
신심을 솟구치게 하는 안성맞춤의 산이었던 것이다.
불필은 도솔암으로 올라가 일타의 법문을 듣고 내려오기도 했다.
일타는 마산 성주사로 가 성철의 회상에서 동안거를 한 철 난 적이 있으므로 불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성철을 쏙 빼닮은 불필을 보면 성주사에서 겨울을 났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동안거가 시작되었다. 불필은 인홍에게 방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대중 방에서 수행하는 것보다는 죽기를 각오하고 속가 아버지 성철처럼 ‘문 없는 문’
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인홍은 대중들과 상의한 후 허락을 했다. 당시 대중으로서는
성우, 묘경, 혜춘, 인성, 무렴, ‘아픈 중’으로 불린 현각 등이었다.
불필에게 허락된 방은 창고로 쓰는 작은 골방이었다. 초여름에 캔 감자가 방 한쪽에 쌓여 있고, 양식이 저장돼 있어 공양 때마다 스님들이 들락거렸지만 불필은 개의치 않고
‘일주일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단식과 잠을 자지는 않는 가행정진이었다.
그러나 불필은 이틀 만에 타의로 그만 두었다. 한 스님이 “저렇게 하다간 큰 병을 얻어 평생 수행을 못하게 된다”고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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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녜ㅡㅡㅡㅡㅡㅡㅡㅡ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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