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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임(따밥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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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님들의 이야기 스크랩 태백산 도솔암
혜인 추천 0 조회 406 13.05.22 19:37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54

 

   제 11장 태백산 도솔암

 

“스님은 왜 빈 암자를 가시려고 합니까.”
“죽을 각오로 정진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스님, 가지 마십시오. 어찌 사시려고 들어가십니까.”
“죽기를 각오한 사람에게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일타는 봉화읍에 도착하자마자 멍석에 약초를 펴놓고 파는 허름한 약초가게에 들러 도솔암 가는 길을 물었다. 마침 약초가게 주인은 봉화군 소천면 홍점골 출신이었다. 가게 주인 역시 6.25 전쟁 중에 홍점골에서 읍으로 이사한 약초꾼이었다.

 

“홍제사 밑 홍점골에서 살았지요. 스님, 도솔암은 홍제사에서도 10리 계곡을 올라가야 합니다. 가파른 계곡에는 길이 없습니다. 바윗돌에 난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올라가야 도솔암에 이릅니다.”
“처사님, 도솔암에는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비구니스님이 한두 분 계셨는데 아마 지금은 안 계실 겁니다. 홍제사도 비구니스님들이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다들 어디로 갔습니까.”
“불교정화 한다고 비구니스님들 모두가 서울에 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약초꾼인 가게주인은 홍제사와 도솔암의 소식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도 약초를 캐러 그곳을 자주 드나드는 모양이었다.

 

“비구니스님들도 떠나는 마당에 스님은 왜 빈 암자를 가시려고 합니까.”
“죽을 각오로 정진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약초꾼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스님, 가지 마십시오. 우리 같은 속인도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나오는 판에 어찌 사시려고 들어가십니까.”
“죽기를 각오한 사람에게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도솔암과 무슨 깊은 인연이라도 있습니까.”
“늘 얘기를 들어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하긴 약초를 캐러 다니면서 스님들에게 들은 얘기지만 태백산 제일의 명당이 바로

도솔암이라고 합니다. 도솔암에서 수행하시는 분들 모두가 도인이 됐다고 합니다.”

 

일타도 은사 고경에게 도솔암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도솔암은 띳집암자로 이어져오다가 허술한 띳집마저 무너져 1893년 암자를 중창할

때 통도사 환담(幻潭)이 20냥을 시주한 바 있는데, 일타에게는 그 환담이 절집 촌수로

따지자면 증조(曾祖)가 되었다.

“스님께서는 오늘 꼭 그곳으로 가셔야만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러자 약초꾼이 홍제사까지만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제가 지름길을 압니다. 마침 저도 묵은 밭에 심어놓은 더덕을 캐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잘됐습니다.”

일타는 합장하며 말했다.

 

“초행길어서 고생길이 될 뻔했는데 함께 가주신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고맙긴요. 제가 나고 자란 고향에 가는 길인데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향 분들이 있습니까.”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쟁 중에 경찰이 강제로 이주시켰으니까요. 다들 논밭을

다 그냥 놔두고 태백산 밖으로 나왔지요.”

일타는 약초꾼을 길동무 삼아 길을 나섰다. 약초꾼은 망태 속에 호미와 낫 등을 챙겨

넣고 일타보다 반걸음 앞서 걸었다. 억새꽃은 울퉁불퉁한 산길 가에 무더기로 피어나

한낮의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일타는 개울을 가로지는 첫 번째 돌다리를 건넌 뒤

물었다. “도솔암에는 어떤 도인들이 계셨습니까.”
“홍제사 밑에 살 때 들은 얘깁니다. 저는 뵙지는 못했습니다만 해방 전에는 만공

큰스님도 도솔암에 계셨다고 합니다.”
“만공 큰스님께서 도솔암에 계셨다는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일타가 통도사에서 들었던 만공에 대한 얘기는 이러했다. 만공도 도솔암을 찾아 홀로

정진한 적이 있었다. 도솔암은 그때나 지금이나 선객들 사이에 참선과 기도가 잘 되는

암자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예부터 선객들은 금강산의 마하연과

오대산의 적멸보궁과 태백산의 도솔암을 들러 한 철이라도 참선 정진하기 위해 원을

세우고 만행했다.

 

그런데 세 곳 중에서 태백산 도솔암이 가장 찾아가기가 어렵고 험한 까닭에 암자는

빌 때가 많았다. 만공이 갔을 때도 도솔암은 비어 있었다. 무쇠 솥이 하나 걸린 부엌에

땔감은 조금 있었으나 단지에는 쌀이 한 톨도 없었다. 만공은 암자 오른쪽에 있는

샘으로 가 찬물을 마시고 나서 탁발한 쌀 한 되박을 걸망 속에서 꺼내 밥을 지었다.

 

밥을 다 짓고 나서였다. 김치를 꺼내려고 김칫독을 보았으나 텅 비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반찬거리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암자 뒤에 빈 소금가마니

하나뿐이었다. 소금가마니 속에는 소금이 한 줌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만공은

소금가마니 겉에 쌓인 먼저를 털어내고 칼로 가마니 밑을 베어내 물에 담갔다.

그러자 짠맛이 우러나왔다. 그 물을 밥에 뿌리어 간을 맞추니 밥이 꿀맛으로 변했다.

그러나 쌀 한 되로 지은 무쇠 솥 속의 밥은 3일 만에 떨어졌다.

 

 밤낮 없이 참선 정진을 하다가 허기지면 떠먹곤 하던 밥이 누룽지까지 동이 났던

것이다. 밥 대신 물을 마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빈속으로 참선하다 보니 정신이

흐려지고 화두가 달아났다.

별 수 없이 만공은 도솔암을 내려와 탁발을 나섰다. 화전민이 사는 농가는 도솔암에서

10리 터울로 드문드문 한 채씩밖에 없었다. 만공은 한 화전민 농가의 사립문 밖에서

목탁을 쳤다.

“지나가는 중 밥 좀 주시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마침 농가 마루에는 중년 부부와 네댓 살로 보이는 아들이 시래기국에 조밥을 말아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모른 체하던 중년 부부가 목탁을 쳐대는 만공을 흘깃

쳐다보더니 아이에게 시래기국밥을 한 그릇 보내왔다.

아이는 밑이 터진 핫바지를 입고 있었다. 작은 고추가 어정어정 걸을 때마다

달랑거렸다. 그런데 마당을 내려서는 아이의 달랑거리는 고추가 시래기국밥에

담가졌다. 아이는 그것도 모르고 오다가 수염이 덥수룩하고 키가 큰 만공을 보더니

무서워서 그릇을 마당에 놓고 달아났다.

시장했던 만공은 아이의 고추가 담가졌던 시래기국밥을 단숨에 비웠다.

 다 먹고 나서는 합장하며 한 마디 했다.

 

“고추 담근 좁쌀 시래기국밥! 천하의 진미로다. 이보다 맛있는 공양을 어디서 또

먹어볼까. 과연 도솔암 정진의 영험이 크긴 크구나.”

일타는 약초꾼에게 만공의 일화를 얘기해 주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기 고추가 담긴 좁쌀 국밥을 맛있게 드신 만공스님의 도력이 어떻습니까.

마음을 자재하게 굴리신 도인 중에 도인이십니다.”
“아무리 배가 고팠다 해도 우리 같은 속인은 더러워서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도인은 다릅니다. 더럽고 깨끗하다는 시비가 없습니다. 밥은 진리를 구하는

약일뿐입니다. 만공스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맛있게 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만공스님에게는 먹는 밥이 그대로 법이 되는 것입니다.”
“스님, 밥이 법이 된다는 말입니까.”

약초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 중들은 진리를 법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수행자가 밥을 먹는 것은 단순히

시장기를 해결하고자 먹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기 위해 먹는다는 것입니다.”

 

일타와 약초꾼은 오후 늦게 홍제사에 도착했다. 약초꾼의 말대로 홍제사는 텅 비어

있었다. 마당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마루에는 먼지가 허옇게 쌓여 있었다.

스님이 떠난 빈 절을 보면서 일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비구니스님들마저 정화를 한다고 절을 비워 놓고 없으니 부처님이 뭐라고 하실까.

무엇이 참 정화인가. 빼앗긴 절 찾아오는 것보다 마음 깨치는 것이 참 정화가 아닐

것인가.’

일타가 망연히 서 있자, 약초꾼이 말했다.

 

“스님, 오늘은 여기서 머물지요. 아마 도솔암도 사정은 이럴 것입니다.”
“아닙니다. 망설일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약초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보나마나 도솔암에는 식량도 반찬도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 저의 옛집에

숨겨둔 쌀과 반찬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공양하시지요.”
“저는 지금 도솔암으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래도 약초꾼은 자신이 살던 옛집에 쌀과 반찬거리를 숨겨두었으니 일타더러 양식을

마련해 올라가라고 말했다.

“양식을 조금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내일 올라가시지요.”


“처사님, 도솔암 올라가는 입구만 가르쳐 주시지요. 혼자 가겠습니다.”
“허허. 스님들 고집은 아무도 꺾지 못한다니까요.”

약초꾼이 홍제사 왼쪽으로 난 산길을 앞서 걸었다. 배추와 무가 심어진 밭뙈기를

지나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하나 나타났다. 홍제사 뒤쪽 태백산에서 소천면으로

흘러가는 계곡물이었다. 그 계곡물에 또 하나의 작은 계곡물이 만나고 있었는데,

바로 그 합수되는 지점이 바로 도솔암 가는 입구였다.

 

“스님, 저 계곡을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갈 수 있겠습니까.”
“처사님, 계곡만 타고 오르면 됩니까.”
“사람들의 발자국을 놓치지 마시고 계곡을 타고 가다 보면 언뜻언뜻 산길이 나옵니다.

계곡을 몇 번 이 쪽 저 쪽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사람 발자국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스님 걸음으로 아마 1시간쯤 오르면 암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약초꾼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한 동안 계곡을 오르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초행자로서는 어두워지면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약초꾼 말대로 도솔암 가는 길은

‘길 없는 길’이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이 바로 산길이었다.

“스님, 도솔암에 양식이 하나도 없으면 바로 저의 옛집으로 내려오셔야 합니다.”
“봉화읍으로 바로 가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일주일 정도 홍점골에 있다가 내려가려고 합니다. 밭에 심은 더덕도

지금 캐지 않으면 멧돼지가 다 파먹고 맙니다.”
“멧돼지가 더덕도 파먹습니까.”
“더덕을 아주 좋아합니다. 더덕을 맛들인 멧돼지는 밭을 다 엎어놓고 만답니다.”

약초꾼은 계곡이 끝난 지점에서 돌아섰다.

 

“스님, 여기서부터는 길을 잃을 위험이 없습니다. 저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시면

도솔암에 이릅니다.”
“암자 사정을 보고 나서 한번 내려가겠습니다.”

일타는 약초꾼과 헤어져 편한 마음으로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은 계곡과 달리

가파르지 않고 완만했다. 청랭한 공기가 콧속을 상쾌하게 했다. 해발 1천 미터쯤

다다른 느낌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전망이 트여 갑갑하지도 않았다.

구름이 걸린 산 정상으로 오를수록 봉화 쪽으로 뻗어나간 산들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일타는 도솔암이라고 쓴 판자간판 아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도솔암은 흰 구름

한 자락이 덮인 산중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원효대사가 낮에는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들들과 밤에는 둥그런 밝은 달과 이웃해서 살았음직한 암자 같았다.

도솔암에 사는 것만으로도 도가 닦이고 번뇌가 사라져 마음은 차디찬 재와 다름없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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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는 첫눈에 반했다. 적어도 십년은 도솔암에서 두문불출하며 살 것 같았다.

암자 마당에 올라 주변의 산봉우리들을 둘러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왠지 전생에도

수행을 했던 암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초꾼 말대로 도솔암도 홍제사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당장 먹을 양식과

반찬이 있었다. 부엌의 쌀단지에는 쌀이 서너 되쯤 남아 있었고, 고추장단지 속에도

맛있게 삭은 고추장이 들어 있었다. 또한 신장단 탁자 밑에는 귀한 설탕도 한 봉지

있었다.

‘부엌살림이 이 정도면 수지맞은 것 아닌가. 게다가 허공에 펼쳐진 산봉우리들이 내

기분에 딱 맞으니 이보다 좋은 인연이 어디 있을까. 한 십년은 뭉개고 정진해야지.’

 

일타는 오대산 서대 염불암에서 했던 것처럼 도솔암과 빈 홍제사를 오르내리며

오후불식에다 장좌불와를 하기로 스스로 정했다.

겨울을 무사히 난 다음해 봄 일타는 문득 시정(詩情)이 일어 이른바 입산시를

흥얼거렸다.

 

높은 산과 넓은 물길 피하지 아니하고
헐레벌떡 이곳까지 온 뜻이 무엇인가
결정코 일대사인연을 밝히고자 하여
손가락을 태우며 계와 원을 세웠도다
나는 금일로부터 십년을 기약하여
하산하지 않고 오로지 정진하리니
이 본분의 업을 발명하지 못한다면
천상을 돌아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不憚山高水闊路 得得來到何所以
決欲究明一段事 燃指燃香立戒願
吾從今日限十年 更不下山要專精
若未發明本家業 飛天上何所用

1955년 일타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계속〉


 

<2>

“부지런히 정진하라. 우리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면
 나무끼리 비벼 불씨를 얻고자 할 때 나무가 달궈지기도
 전에 그만두는 것과 같아 끝내 불씨를 얻지 못한다.”

 

일타는 수행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원칙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마을로 탁발을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암자에서 사방 40리 밖에

있었으므로 동구불출을 지키려면 탁발을 나갈 수 없었다. 물론 10리 터울로 화전민

농가가 한 채 한 채 있긴 했지만 그 집들은 오히려 일타가 도와주어야 할 만큼 어렵게

사는 곤궁한 화전민들이었다.

 

일타가 갈 수 있는 데는 홍제사까지 뿐이었다. 도솔암은 홍제사의 산내암자일뿐더러

양식이 떨어지면 홍제사로 가서 걸망에 넣어오거나 홍제사 비구니스님들이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홍제사 살림이 큰절처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퇴락한 홍제사도 암자처럼 작은 절이었다. 법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법당과

작은 대중방과 창고가 한데 딸린 인법당이었다.

 

불교정화를 하러 서울로 갔던 비구니스님들이 홍제사로 돌아온 것은 일타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탁발을 나가지 않는 일타에게 양식 걱정을 덜어주었다. 특히 인홍은 일타의

속가 어머니인 성호를 잘 알고 있었다. 인홍은 성호가 자신보다 나이 많고 한문을

깨쳤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홍은 일타의 연비를 보고 감동하여 일타가

수행하는 데 자신이 외호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장좌불와에 들어간 일타는 졸음이 오면 자신의 무릎을 꼬집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래도 졸음을 견디기가 힘들어지면 암자 마당으로 나와 한산시를 크게 외웠다.

 

밥을 말해도 끝내 배부르지 않고
옷을 말해도 추위를 면하지 못하네.
배부르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추위를 면하려면 옷을 입어야 하네.
깊이 생각해 헤아릴 줄 모르고
다만 부처 구하기 어렵다 말할 뿐
마음 한 번 돌리면 곧 부처니라
아예 멀리 밖에서 구하지 말라.


說食終不飽   說衣不免寒     설식종불포   설의불면한
飽喫須是飯   著衣方免寒     포끽수시반   착의방면한
不解審思量   祇道求佛難     불해심사량   기도구불난
廻心卽是佛   莫向外頭看     회심즉시불   막향외두간

 

경전을 공부하기보다 참선하여 깨쳐야 마음의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다는

한산시를 외다보면 수마가 물러갔다. 그래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꾸벅꾸벅

꺾이고 침이 무릎에 떨어지면 홍제사로 내려갔다. 달빛을 이용하여 가는 길이라지만

산길이 끊어진 곳에서는 계곡물 속의 바위를 타고 가야 하므로 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미끄러운 바위에서 넘어지면 바로 계곡물 속으로 처박히었다. 발가락이

부러지고 정강이가 으깨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통증보다 수마가 더 맹렬하게 일타를

괴롭혔다. 한밤중에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고 다녔으므로 일타 모습은 귀신의

모습이었다.

 

한밤중에 홍제사 마당에서 만난 비구니스님들이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일타는 따뜻한 목소리로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인홍의 권유도 뿌리치고 다시

도솔암으로 올랐다. 그렇게 악전고투 끝에 졸음이 물러가면 도솔암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었다.

 

동구불출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차츰 수마가 물러갔다. 한밤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도 정신이 가을 연못물처럼 맑았다. 그럴 때마다 일타는 스스로 고요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한산시를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내 전생에 너무 어리석었기에
오늘 이렇게 깨치지 못했다.
또 오늘 이렇게 구차한 것은
모두 전생에 지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 또 닦지 않으면
내생에 또한 본래와 같으리.
양쪽 언덕에 모두 배가 없으면
아득한 저 바다 어이 건너리.


生前太愚癡   不爲今日悟    생전태우치   불위금일오
今日如許貧   總是前生作    금일여허빈   총시전생작
今日又不修   來生還如故    금일우불수   내생환여고
兩岸各無船   渺渺難濟度    양안각무선   묘묘난제도

 

깨치지 못한 오늘의 모습을 참회하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오늘 부지런히

정진하겠다는 맹세의 시이기도 한 한산시를 외우게 되면 흥이 났다.

마음에 감흥이 일면 서울을 떠날 때 걸망 속에 챙겨온 『유교경(遺敎經)』도

꺼내 외웠다.

 

“부지런히 정진하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라.

  우리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면,

  그것은 마치 나무끼리 비비어 불씨를 얻고자 할 때

  나무가 달구어지기도 전에 그만 두는 것과 같다.

  그는 아무리 불씨를 얻으려 해도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다.

 

  선지식을 만나려면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잊지 않고 생각하면 온갖 번뇌의 도둑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생각을 모아 마음에 두라.

  바른 생각을 잃게 되면 모든 공덕을 잃지만,

  생각하는 힘이 굳세면 비록 오욕의 소굴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완전 무장하고 싸움터에 나가면 두려울 것이 없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마음은 선정에 들 것이다.

  마음이 선정에 들면 세상의 생멸하는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선정을 부지런히 익혀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물을 아끼는 집에서는 둑이나 못을 잘 관리하듯이,

  우리들도 지혜의 물을 채우려면

  선정을 잘 익혀 물이 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요하고 무위(無爲) 안락을 얻고자 한다면 안팎의 시끄러움을 떠나 홀로

  한가로운 곳에 머물라.  마음속의 온갖 분별 망상과 바깥의 여러 대상과 환경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괴로움의 근본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제석천도 공경할 것이다.

  무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리로부터 괴로움을 받는다.

  약한 나무에 많은 새떼가 앉으면 그 가지가 부러질 염려가 있는 것과 같다.

  또 세상일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여러 가지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가리켜 멀리 떠남(遠離)이라 한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고뇌도 많다.

  그러나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근심 걱정도 적다.

  또 욕심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해서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각박하지 않다.

  그래서 마침내는 고뇌가 말끔히 사라진 해탈의 경지에 들게 되니

  이것을 가리켜 소욕(少欲)이라 한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안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가난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부유하다.

  이것을 가리켜 지족(知足)이라 한다.”

 

이처럼 한없이 맑은 정신으로 시와 경전을 외우며 밤을 새우는 어떤 날에는 바깥의

동정이 감지됐다. 누군가가 왔다가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산짐승이 불빛을 찾아 방문 앞에까지 왔다가 가는가 싶어 문을 열고 보면

아무 흔적도 없었다. 산 위에 둥그런 달이 떠 있거나 낙엽이 마당에서 뒹굴고 있거나

백설이 난분분 난분분 내려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무언가가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시각에는 신장(神將)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늘도 스님 경 읽는 소리를 잘 들었다.

  기분 좋게 잘 공양받았으니 날이 새기 전에 어서 돌아가자.”

 

신장들이 모였다 사라지는 느낌이 드는 날은 하루 종일 힘이 솟았다.

적막한 밤이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두렵지도 않았다.

일타 자신을 지켜주는 신장들이 방문 앞까지 왔다가 갔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날 밤에는 신장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일타는 선정에 든 자신도

따라 웃을 때가 있었다.

 

“허허허.”

 

그럴 때 일타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어디서 온 신장이오?”
“태백산을 지키는 신장이오.”
“왜 밤에만 나타나는 것이오?”
“낮에는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있으니 보지 못할 수밖에요.”
“아니, 왜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스님 경 외우는 소리를 듣느라고 잠을 자지 못했으니

 낮 동안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오.”

 

밤에는 바람처럼 영(靈)으로 돌아다니다가 낮에는 곰이나 다람쥐 등등 산짐승

몸속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상 때문인지 일타는 낮 동안

산짐승을 볼 때마다 한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방문을 열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면 다람쥐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 안으로

들어와 일타의 친구가 돼주었다. 처음에는 무릎까지만 오르더니 일타와 친해지자

어깨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갔다가 쪼르르 내려오곤 했다.

 

하루 한 끼 하는 공양 뒤에는 박새가 방안으로 들어와 일타의 머리를 쪼기도 했다.

그러면 저절로 식곤증이 달아났다. 그러니 일타 무릎에 올라 앞발을 들고 합장하는

다람쥐나 식곤증을 달아나게 하는 박새를 볼 때마다 태백산에 지키고 있는 신장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람쥐와 박새가 보이지 않는 겨울철이면 곰이 나타났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미곰과 새끼곰이 암자 가까이까지 왔다. 어미곰이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가

쿵쿵 뛰어내리며 재주를 부렸다. 입이 뾰족한 너구리가 암자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지나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일타는 묘기를 부리는 곰보다 사람을 더 좋아했다. 한 철 먹을 양식을

도솔암에 들여놓고는 홍제사마저 내려가지 않게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어쩌다 약초꾼을 만나게 되면 법당의 부처님인 듯 반가웠다.

일타는 약초꾼을 도솔암 방으로 불러들여 부처님께 마지 올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밥도 해주고 차도 끓여주었다.

 

“어디서 왔소.”
“영주에서 왔습니다. 홍제사에 들렀는데 도솔암에 도인이 한 분 계신다기에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이이고, 누가 나보고 도인이라고 합디까?

  난 신선처럼 고고하게 사는 도인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는 수도자일 뿐이에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귀신도 부르고 산신령님하고 얘기도 나누는 도인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시고 계신 것을 보니 제가 산신각에서

 본 산신령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저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약초꾼은 일타를 보고서는 도인이라고 우겼다. 일타는 크게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산신각에 들어가면 무슨 기도를 합니까?”
“제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산삼을 캐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내가 이 산에서 본 것은 더덕이나 도라지 밖에 없소.

  그러니 나는 큰스님이 아니라 아직 작은 스님일 뿐이오. 하하하.”


일타는 약초꾼을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해서 차를 우려내 주었다.


“큰스님, 더덕이나 도라지는 저도 많이 캤습니다.

 정말 산삼이 있는 곳을 모르겠습니까?

 도인스님들은 천리 밖을 내다보는 천안통이 있다던데요.”
“사람마다 찾고자 하는 인연이 다 다른가봅니다.”
“스님이 찾고자 하는 인연은 무엇입니까?”
“맨땅 위에 누워 있더라도 참으로 편안한 무위안락이지요.

 다른 말로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약초꾼은 일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일타는 약초꾼이 무슨 엉뚱한 말을

하더라도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본 지 서너 달 만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는 사람이 그리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성묘를 하고 가는지

흰 두루마기 자락이 나무 숲 사이로 희끗희끗 하더니 곧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약초꾼이 일어서며 말했다.

 

“아참, 큰스님.”
“무엇이오?”
“홍제사 비구니스님들이 큰스님께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이오?”
“법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면 해야지요. 내려가거든 그리 전해주십시오.”

 

일타는 홍제사에서 법문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뒷날로 미루었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아직은 스님들을 상대로 법문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공부는 이제 겨우 동정일여의 경지에 다다랐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오매일여, 몽중일여까지 가야만 했다.

 

일타는 동정일여의 경지를 스스로 점검하곤 했다. 신장을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나 지금 약초꾼과 얘기를 주고받는 순간에도 화두가 끊어지는 일이 없이 순일했다.

 

〈계속〉

<3>

“의식적으로 화두를 들 것도 없었다. 차를 마시면 자신이
차가 되고, 밥을 보면 자신이 밥이 되고, 암자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바람소리가 되었다.”

도솔암 주위도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암자 마당가 한쪽에 자라난 모란의 꽃봉오리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봄볕을 받는 밭뙈기에서는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워 올랐고, 산비탈에 자생하는 산복숭아 꽃도 만개하여 붉은 빛깔을 흘리고 있었다. 일타는 암자 옆에 있는 단샘(甘泉)으로 나가 찬물을 떠와 끓이지 않고 녹차 잎을 띄워 우려 마셨다. 그래도 차 맛과 향은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고 성성한 화두까지 적셨다. 며칠째 일타의 몸과 화두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몽중일여(夢中一如).

좌선하는 동안 꾸벅 존 뒤 짧은 꿈을 꾸면서도 화두는 달아나지 않고 들려 있었다. 수마가 집적거려도 이제는 화두가 도망가는 법이 없었다.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언제나 밝게 비추었다. 한 달 전 봄을 시샘하는 폭설이 내린 날부터 그랬다. 눈이 마루까지 쌓여 방문이 잘 열리지 않았던 그날부터 화두는 맑은 의식으로 좌선할 때뿐만 아니라 졸거나 깜박 잠이 든 순간에도 일타 자신의 몸과 혼연일체가 됐다.

‘아, 조사들이 말한 몽중일여와 숙면일여(熟眠一如)가 이러한 것이었구나.’

며칠 전부터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잠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곧잘 좌선한 채로 잠깐 동안 졸거나 아예 눈을 붙이곤 했는데 그것마저 없어졌다.

가부좌를 틀고 있으면 하루가 무심히 한 순간에 지나갔다. 자신을 붙잡았던 시간이

없어지고 자신이 놓여 있는 공간만 있을 뿐이었다. 망상이 붙지 못하고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하고 평안했다.

이제는 의식적으로 화두를 들 것도 없었다. 문득 자신이 화두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화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먹고 마시고 보는 것이 순간순간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

차를 마시면 자신이 차가 되고, 밥을 보면 자신이 밥이 되고, 암자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바람소리가 되었다.

암자 밖에서 이리 저리 포행을 하다가 구름을 쳐다볼 때는 자신이 구름이 되고,

봄이 아우성치는 산을 보면 자신이 산이 됐다. 뿐만 아니라 흐르는 계곡물을 보면

자신이 계곡물이 되었다.

‘나, 일타라고 고집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의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그날 밤은 의식이 유난히 개울물처럼 맑았다. 차갑기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같았다. 의식은 허공처럼 투명하게 깨어 있었고, 가슴은 봄볕이 내리쬐는 것처럼

따뜻했다. 이미 일타의 의식은 방안의 시간을 벗어나 무한대의 허공에 닿아 있었다.

그런 상태로 하룻밤이 몰록 찰나에 지나가버렸다. 가부좌를 풀고 방문을 열자,

햇볕이 방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룻밤이 꿈결처럼 지난 한낮이었다.

그런데 일타에게 받아들여지는 시각은 어제의 낯익은 한낮이 아니었다. 새롭게 태어난

우주의 한낮이었다.

‘어제의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그대로이나 어제의 세상이

아니잖은가. 태백산이 비로자나부처님처럼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만발한 모란꽃의 향기가 암자 마당을 적시고 있었다. 마당가 너머 비탈에 핀

야생화들도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저 분은 부처님이 아니신가. 모란꽃을 연꽃이듯 들고 계시는 저 분은 부처님이

아니신가. 아,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더 할 일이 없구나.’

일타의 눈에는 분명 부처님이 모란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마하가섭에게 꽃을

보이신 것처럼 일타를 향해 모란꽃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일타는 미소를 지었다.

전주 법성원에서 염화시중이란 화두를 든 지 실로 5년만인 1956년 음력 3월 23일의

오도였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밝은 빛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頓忘一夜過
時空何所有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

환희심에 저절로 읊조려진 깨달음의 노래였다. 일타는 모란꽃을 무심히 보다가

단샘으로 가 표주박에 찬물을 한 가득 담아 마셨다. 감로수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단샘 물의 찬 기운이 온몸을 휘돌자 주변의 산 것들이 선명하게 눈에 잡혔다.

단샘 위로 쳐진 물푸레나무 가지에서는 박새들이 날아와 짹짹짹 소리쳤고,

돌담 위로는 다람쥐가 나타나 달렸다.

단샘을 보니 새삼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자신을 내어 주면서도 주었다는 마음 없이

주고 있는 단샘이었다. 부처님이 『금강경』에 설한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

(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바로 그것이었다.

‘저 물 한 방울이 샘을 타고 넘어 흘러가 만물을 살리는구나. 저 감로의 샘이야말로

관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이구나. 그렇다. 모름지기 수행자란 감로의 샘이 되어 중생을

살리는 보살이 되어야 하리.’

일타는 또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했다.

 

외로운 산봉우리에서도 한가롭고 평안하네
산새들은 나를 특별히 노래 부르고
소슬한 솔바람소리 청량하기 그지없도다
이 가운데 단샘 물은 길이 스스로 흐르리.

 

일타는 자신 속으로 진리가 들어왔음을 확신했다. 부처님의 모든 법이 자신 속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순간순간 걸림이 없었고, 들끓던 망상이 환희로 바뀌었다.

잘난 사람노릇 벗어버리고 비로소 못난 중노릇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이후 일타는 하안거를 맞이한 홍제사를 가끔 내려가 법문을 했다.

홍제사에 많은 대중이 모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홍을 찾아온 20대의

비구니들이 대여섯 명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홍제사로 들어온 비구니들이었다.

인홍은 일타보다 속가 나이로 20여 년 연상이었으나 일타에게 깍듯하게 존댓말로

대했다. 일타가 지난봄에 오도한 사실이 이미 홍제사 대중 사이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일타스님, 법문을 해주시니 우리 대중들이 많이들 좋아합니다.”
“홍제사 스님들이 어찌나 열심히 참선을 하는지 인홍스님을 닮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대중에게 늘 말하지요. 나를 닮지 말고 한암 큰스님이나 성철 노장님을

닮으라고 말합니다.”
“한암 큰스님이 스님의 계사(戒師)라고 했던가요.”
“제가 월정사 지장암으로 출가할 때 저에게 계를 주신 큰스님이지요.”
“인자하신 한암 큰스님께서 수행자로서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설 자리를 가르쳐주신 분이니 얼마나 큰 가피입니까.”
“한암 스님이야말로 우리 불가에 큰 선지식이지요.”
“한암 큰스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1925년인가, 봉은사 조실로 계시다가

오대산으로 들어오시면서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오대산으로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수행자가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다 말씀했다고 여겨집니다.”

인홍이 찾아가는 자리는 늘 선방이었다. 해방 후부터 1950년 동안거까지는 만공이

깨달음을 얻었던 덕숭산 정혜사에 있었고, 성철이 잠시 머물렀던 월내 묘관음사,

6.25전쟁 중에는 봉암사 백련암에서 정진을 했던 것이다.

“특히 1949년 내 나이 42세 때였어요. 묘관음사로 가 성철 노장님을 만난 이후

불퇴전의 용맹심을 얻었지요.”

성철은 자신의 가풍대로 인홍을 보자마자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묘관음사에 도착한

인홍이 법당으로 먼저 들어가 참배한 뒤, 연못가를 거니는 성철을 찾아 인사하려고

하자 성철은 쌀쌀맞게 손을 저었다.

“내가 누군데 절을 할라꼬 그러노.”
“성철 노장님 아니십니까.”
“성철이 누군고.”
“앞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 잘 찾아보그래이.”

인홍이 무안하여 망설이자 성철은 인홍의 등을 떠밀어 연못으로 밀어뜨렸다.

한겨울의 연못에 빠진 인홍은 겨우 연못가로 나왔지만 승복은 이미 흠뻑 젖어

살얼음이 끼었다. 그러나 인홍은 묘관음사 객사에 들어갈 생각은 않고 젖은 승복을

입은 채 연못가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자비로운 한암 회상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홍은 날벼락을 맞은 듯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신심이 솟구쳤고 다시

출가한 것 같은 변화를 느꼈던 것이다.

이후 인홍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들이 다 피난 가버리고 없는 봉암사

백련암으로 들어가 가행정진을 했다. 기필코 성불하리라는 대분심(大忿心)을 냈다.

공비들이 총을 들이밀고 협박했지만 인홍은 불퇴전의 정진력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오히려 공비들은 인홍의 가행정진에 놀라워하며 “암자에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협조하겠습니다” 하고 물러갔던 것이다.

훗날 성철은 이와 같이 정진한 인홍을 가리켜 “인홍은 법당 기둥 같은 스님이다”고

격려하고 인가했을 정도였다.

일타는 포행 시간을 이용하여 홍제사를 날마다 내려올 때도 있었다. 법문하는 날이

아니었지만 한 비구니가 측은해서였다. 별명이 ‘아픈 중’으로 불리던 비구니의 건강이

궁금해서였다. 인홍이 출가했던 월정사 지장암에서 온 그 비구니는 복막결핵이란

중병에 걸려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비추는 곳을 찾아 앉아서 쓰러져 있곤 했다.

몸은 야윌 대로 야위어 갈대처럼 말라 있었고, 얼굴 빛깔은 바랜 창호지 같았다.

일어설 기운도 없어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저 아픈 중이 살 수 있을까. 혹시 내일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자비심이 많은 일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홍제사를 내려와 그 비구니의 건강을

걱정했다. 인홍의 얘기가 믿기기 않았다. 월정사 지장암에서 살던 열다섯 사미니 때만

해도 풀을 베어 하루 50짐씩 지게로 나르던 여장군처럼 건강한 체질이었는데,

17살 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수년째 ‘아픈 중’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비구니는 죽지 않고 하루하루 잘 버티어 냈다. 인홍은 성철에게 화두를

탄 인연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비구니가 절을 할 만큼 건강했을 때

무려 3만 배를 하고 성철에게 화두를 탄 인연이 있는데, 그때 성철은 목침을 들고서

그 비구니의 손끝을 내리칠 기세로 “지금 당장 죽어도 화두만 들 것이냐”고

다그쳤다는 것이었다.
일타는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그 비구니스님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신심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화두를 잘 챙겨야 해요.”
“네.”
“살고 죽는 일에 끄달리지 말고 늘 화두를 챙겨야 합니다.”

초가을이 되어 태백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자, 또 한 비구니가 홍제사로 왔다.

성철의 딸 불필이었다. 그때까지 성철의 가르침을 받아 행자 생활을 했지만 아직

법명을 받지 못해 ‘수경’으로 불리던 초보 수행자였다.

불필은 “태백산 홍제사 인홍에게 가라”는 성철의 명을 받고 오는 길이었다. 불필이

홍제사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이 태백산 능선에 걸려 있었다. 낮 동안 산으로 흩어졌던

홍제사 비구니 대중들이 저녁을 맞이하여 걸망에 약초를 가득 담고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불필의 눈에는 평소에 동경하던 모습이었으므로 가슴이 뛰었다.

다음날부터 불필은 대중들과 같이 낮에는 호미를 들고 밤에는 대중 방에서 정진했다.

낮에는 고구마 밭에 나가서 고구마를 캐고 밤에는 대중 방에 앉아 화두 들고 가부좌를

틀었던 것이다. 불필은 차츰 태백산의 기운에 훈습되어 갔다. 태백산은 수행자에게

신심을 솟구치게 하는 안성맞춤의 산이었던 것이다.

불필은 도솔암으로 올라가 일타의 법문을 듣고 내려오기도 했다.

일타는 마산 성주사로 가 성철의 회상에서 동안거를 한 철 난 적이 있으므로 불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성철을 쏙 빼닮은 불필을 보면 성주사에서 겨울을 났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동안거가 시작되었다. 불필은 인홍에게 방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대중 방에서 수행하는 것보다는 죽기를 각오하고 속가 아버지 성철처럼 ‘문 없는 문’

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인홍은 대중들과 상의한 후 허락을 했다. 당시 대중으로서는

성우, 묘경, 혜춘, 인성, 무렴, ‘아픈 중’으로 불린 현각 등이었다.

불필에게 허락된 방은 창고로 쓰는 작은 골방이었다. 초여름에 캔 감자가 방 한쪽에 쌓여 있고, 양식이 저장돼 있어 공양 때마다 스님들이 들락거렸지만 불필은 개의치 않고

‘일주일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단식과 잠을 자지는 않는 가행정진이었다.

그러나 불필은 이틀 만에 타의로 그만 두었다. 한 스님이 “저렇게 하다간 큰 병을 얻어 평생 수행을 못하게 된다”고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4>

   

“몇 번이나 청산에 꽃이 피었다 졌다 하는 것을 보았느냐
봄이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고개를 한번 돌아보니 천지가 눈꽃으로 희어버렸더라.”

1957년.

석남사 주지를 맡게 된 인홍은 홍제사를 떠났다. 홍제사 비구니 대중도 뿔뿔이 흩어졌다. 대중 중에 현각과 불필 등은 인홍을 따라 석남사로 갔고, 나머지 비구니는 각자 인연 따라 다른 절을 찾아 갔다.

홍제사는 잠시 비었지만 곧 태백산 기운과 산세를 좋아하는 비구들이 대여섯 명 들어와서 대중을 이루었다. 법전이 ‘따로 살지 말고 모여 살자’고 제의하여 서암, 지유, 석주 등이 흩어져 수행하다가 홍제사로 들어왔던 것이다.

일타는 도솔암에 그대로 있으려고 했지만 법전이 도솔암까지 올라와 홍제사로 내려오기를 간청하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전은 일타보다 세속의 나이로는 서너 살 위였지만 출가한 연도가 같은, 즉 승랍(僧臘)이 같았으므로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도반이었던 것이다.

“일타스님, 우리 홍제사에서 신심 나게 정진 한 번 해보십시다.”
“도솔암을 비우란 말입니까.”
“우리가 어느 시절에 함께 만나 대중생활을 수 있겠소. 그러니 이번 기회에 맑은 스님들과 정진해보자는 것이지요.”

일타는 끝내 법전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성철을 만나러 통영의 천제굴에 갔다가 도반이 된 법전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저는 한두 철만 나고 도솔암으로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일타는 도솔암이나 홍제사나 태백산 홍점골 안에 있는 절이므로 동구불출의 원칙에 위배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인홍이 머물 때도 양식을 조달하러 홍제사까지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다. 더구나 홍제사에 모인 비구 대중들 모두 언젠가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대들보 같은 소중한 선지식들이라고 생각했다.

“홍제사에 오신 스님들과 함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법전스님, 감사합니다.”
“일타스님, 참으로 잘 결정하셨습니다.”

도솔암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직도 인홍이 있는 줄 알고 홍제사를 찾아온 비구니들이 도솔암으로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마침 비구니 두 사람이 도솔암을 지킨다고 하니 잘 됐지 뭡니까.”

다음날 일타는 걸망에 승복과 발우만 넣고 홍제사로 내려갔다. 서암이 망태에 무언가를 뜯어 담고 있다가 일타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일타수좌, 어서 와요.”
“스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약초를 뜯고 계십니까.”
“약초가 아니에요. 산토끼가 먹는 풀인데 사람에게는 나물이 돼요. 스님들에게 맛있는 반찬 해주려고 뜯고 있어요.”

그러면서 서암이 밭둑에 난 풀을 한두 잎 뜯더니 씹어 먹었다.

“스님, 독풀도 있잖습니까.”
“독풀도 작게 먹으면 오히려 약이 돼요. 산짐승들은 우리 인간처럼 절대로 욕심을 부려 많이 먹지 않습니다. 약이 될 만큼만 조금 먹으니 독풀들하고 공생 공존하는 것이지요.”

일타가 우두커니 서 있자, 서암이 자신보다 12살 아래인 일타에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서암은 다른 스님들에게도 농담을 잘했다.

“일타수좌, 혼 빠진 할미가 딸네집 건네 보듯 하고 있지 말고 어서 절로 갑시다. 하하하.”
“네, 서암스님.”
“스님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요. 절은 절하는 곳이 아닙니까. 하하하.”

그날 밤 큰방에 모여 소임을 짰다. 가장 연장자인 서암에게는 소임을 맡기지 않았다. 선방으로 치자면 특별한 소임 없이 대중과 함께 정진하는 한주(閑主)인 셈이었다. 누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각자 자신이 정했다. 법전이 먼저 자신이 맡고자 하는 소임을 말했다.

“저는 부목을 맡겠습니다. 산비탈에 넘어진 썩은 나무둥치를 줍고 톱질해서 울타리 밑에 장작 쌓는 실력이야 저를 따를 분이 있겠습니까.”

지유도 나서 말했다.

“저는 공양주 소임을 맡겠습니다. 양식을 잘 마련하여 여러분께 부처님 마지 올리듯 따뜻한 밥을 해 올리겠습니다.”

석주도 조용히 말했다.

“제가 할 일은 채공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태백산 약초와 나물을 캐다가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법전이 일타를 지목하여 말했다.

“일타스님은 이야기를 잘하니 신도를 맞이하는 지객을 맡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스님이 말했다.

“일타스님은 염불이 최고라고 금오스님께서 칭찬하시더이다. 그러니 부전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타가 진주 응석사에서 부전 소임을 볼 때 염불기도를 7일 동안 밤낮으로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응석사 조실인 금오가 일타를 불러 크게 칭찬했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지객과 부전을 동시에 맡아달라고 하자 일타는 부담스럽기도 하여 대답을 못했다.

“일타스님, 두 가지 소임을 맡게 된 거 축하드립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으니 맡기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일타는 지객과 부전 소임을 함께 맡기로 하고 안거에 들어갔다.

안거는 선방 청규에 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웠다. 좁은 선방에는 돌아가면서 한 사람만 들어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각자 소임대로 나무를 하거나 반찬거리를 구하거나 멀리서 온 신도를 맞이하여 설법을 했다.

대중은 서로 이야기하면서 신심을 돋우기도 했다. 서암이 한 얘기도 대중에게 울림이 컸다. 서암이 탁발을 다니면서 경험한 얘기였다.

서암이 탁발하려고 한 곳은 마을의 부잣집이 아니었다. 마을 입구의 후미진 산모퉁이에 움막을 만들어 사는 거지촌으로 가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다. 목탁 소리가 시끄러웠던지, 한 사내거지가 움막의 거적때기를 들추고 나와 서암을 쳐다보았다. 서암은 염불을 끝내고 나서 한 마디 했다.

“적선(積善)하시오.”

적선이란 선을 쌓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거지는 보시하라는 말로 알아듣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얻어먹는 거지가 스님께 줄 것이 어디 있겠소. 동냥해온 식은 밥이 조금 있을 뿐이니 저 마을의 부잣집으로 가보시오.”
“먹다 남은 밥이라도 좋으니 적선하시오.”

순간, 거지가 ‘내가 스님에게 밥을 줄 때도 있네’ 하고 중얼거리면서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피식 웃으며 나왔다. 그때 서암은 거지의 얼굴을 보고 ‘탁발 한번 잘했다’는 만족감이 들었다. 식은 밥 한 덩이보다 거지의 행복해하는 표정을 탁발한 것 같았던 것이다.

서암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일타가 말했다.

“가섭존자도 부처님 살아계실 때 스님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거지처럼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일타수좌, 가섭존자도 탁발하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단 말인가요. 아무튼 일타수좌는 박식하다니까.”
“경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일타수좌,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일타는 그 자리에서 얘기를 꺼냈다. 이럴 때 창고 한쪽은 지대방이 되었다. 석주가 아궁이에서 구어 온 군고구마로 허기를 달래면서 대중들은 언제나 일타의 구수한 얘기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가섭과 아난은 탁발하러 정사(精舍)를 나섰다. 그런데 가섭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로 가려 하였고, 아난은 부자들이 사는 저잣거리로 가려 하였다. 두 사람은 탁발을 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서로의 마음속에 각각 의문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섭의 의문은 아난이 왜 ‘부잣집만 골라 탁발하는가’였고, 아난의 의문은 가섭이 왜 ‘가난한 집만을 골라 탁발하는가’였다. 마침내 아난이 정색하며 가섭에 물었다.

“가섭존자여, 왜 가난한 집만 골라 탁발하는 것입니까.”
“아난존자여,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과거에 남을 위하여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내생에는 행복해지라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가섭이 아난에게 물었다.

“아난존자여, 왜 부잣집만 찾아가 탁발하는 것이오. 가난한 이를 멀리하고 부자만 가까이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지 않겠소.”
“가섭존자여,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탐욕의 늪에 빠지기가 더 쉽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가진 것을 베푸는 보시의 기쁨을 알도록 부자들만 찾아 탁발하고 있는 것이오.”

두 사람은 논쟁을 중지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탁발한 다음 정사로 돌아갔다. 그런데 두 사람의 얘기를 들은 부처님은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차별 없는 마음을 강조할 뿐이었다.

“부처의 마음이란 큰 자비심이니라. 차별을 두지 않는 자비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니라.”

가섭과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날 탁발을 나갈 때는 서로 가던 곳을 바꾸어 갔다.

서암(西庵).

1914년에 경북 풍기읍 금계동에서 태어난 스님은 아버지 송동식이 독립 운동가였으므로 가족이 화전민으로 숨어 살며 거처를 옮겨 다녔는데, 스님은 그런 역경 속에서도 틈틈이 공부하여 11세에 예천의 사설학원인 대창학원에 입학하여 소사를 하며 어렵게 졸업하였다.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다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1928년에 서악사로 출가하는데, 이후 김룡사로 가 몇 개월 동안 행자생활을 한 뒤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여 비구계를 받았는데, 탐구심이 많은 스님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폐결핵 환자가 되어 3년 만에 중퇴하고 귀국하고 만다. 국내로 돌아와서는 김룡사에서 요양한 뒤 금강산 묘향산 등으로 행각에 나섰다가 1943년 31세 때에는 문경 대승사로 돌아와 성철, 청담, 우봉, 윤포산 등과 함께 정진하였다. 이때 폐결핵이 완치되었고 1945년 조국이 해방되던 해에는 예천에서 포교당을 1년 간 운영하며 청년불교 활동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대분심을 내어 계룡산 갑사 바위굴로 들어가 한 달간 단식정진에 들어갔다.

그때 스님은 처음으로 견성(見性)을 하였다. 바위굴에서 좌선하던 어느 날이었다. 밤낮으로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더니 생사의 경계마저 한갓 그림자처럼 휙 지나가는 것이 눈앞에 보였다. 스님은 참된 선리(禪理)를 맛보고 대발심하여 즉시 해인사 선방으로 갔다가 1949년에는 지리산 칠불암으로 들어가 금오, 도림 등 7, 8명의 수좌들과 ‘공부하다 죽어도 좋다’고 서약하고 목숨을 내어놓는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이후 문경 원적사와 봉암사를 오가며 수좌들과 정진하던 중 전쟁이 나 헤어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불교정화운동 5인대표로 활동하였고, 다시 참선하는 수좌로 돌아와 도봉사 천축사에서 1년간 무문관에 들었다가 김룡사 금선대로 가 정진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김룡사 금선대는 스님이 홍제사로 오기 전까지의 1인 선방이었던 것이다.

말수가 적은 법전은 대중에게 구수한 얘기를 하기보다는 시를 지어 대중에게 돌렸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찾아와 태백산에 산지사방으로 눈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문득 시흥이 일어 지은 시였다.

내가 묵묵하고 말없는 너에게 묻고자 한다
몇 번이나 청산에 꽃이 피었다 졌다 하는 것을 보았느냐
봄이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고개를 한번 돌아보니 천지가 눈꽃으로 희어버렸더라.

동안거를 끝낸 홍제사 대중들은 또 다시 구름처럼 바람처럼 각자 만행을 떠났다. 법전은 홍제사보다 더 깊은 사자암으로, 석주와 지유는 다른 절로, 일타는 도솔암으로 갔다. 또한 불교정화운동의 5인대표로 활동한바 있는 서암은 동산과 청담 등의 권유로 경북 종무원장을 맡아 홍제사를 떠났다.

도솔암에 오른 일타는 다시 작년의 방식대로 정진했다. 도인으로 소문이 나자 안동뿐만 아니라 부산의 신도들이 도솔암에 올랐다가 가곤 했다. 일타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았다. 스님이나 신도가 밤중에 올라오면 손전등을 켜고 마중을 나가기도 하고, 악몽과 액운에 시달리는 신도가 천도재를 원하면 재를 지내주기도 했다.

일타는 다시 삭발하고 수염을 깎았다. 신도들이 자꾸 도솔암으로 찾아오니 승려로서 위의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산과 습득처럼 산중에서 홀로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찾아오는 스님과 신도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솔암에 오른 지 6년.

일타는 도솔암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이제 도솔암을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일타는 동구불출에서 벗어나 걸림 없는 운수승처럼 만행을 하고 싶었다.

 

 

* 홍제사골과 백련암 도솔암 홍제암

1. 찾아 가는 길 :
봉화에서 태백방향으로 가다가 황평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며

들어가다보면 홍점마을 성황당앞에 차를 주차하고

다리건너 좌측으로 100여 미터 올라가면

 좌측 계고건너 희미한 등산로가 보인다

등산로를 따라 1시간 이상올라가면 백련암이 나타나고

백련암 앞으로 지나 좌측 등산로로 올라가 능선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비룡산이다

비룡산에 정상을 지나 한참 내려 가다 보면 우측으로

내려가는 희미한 길을 유심히 보고 내려가면 도솔암에 도착한다

도솔암에서 홍세암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안보인다

우리는 도솔암 우물앞으로 지나가 전망대 같은 곳에서 길이 없어지므로 바로 전에서

우측 비탈길로 내려갔다

골짜기로 계속 내려가면 주골자기를 만난다,

길이 있는데 아마 도솔암에서 내려오는 길인듯 하다

계속 내려오면 홍점계곡을 만나고 계곡따라 내려 가다 보면 홍제암이 나오고

내려가면 처음 올라가던 홍점 마을로 내려온다

 

○ 태백산 도솔암

경북 봉화군 소천면 고선리 태백산(1.569m) 줄기인 비룡산(1.129m)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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