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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하반기《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당선작
나무 라디오 (외 4편)
이이체
잎사귀들이 살고 있는 스피커, 한쪽의 귀가 없다.
나이테가 생기는 책상에 당신은 앉아 있다
주파수를 돌리자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허공은 종이를 찢어 한쪽 소리를 날려보낸다
나무로 된 음악은 숲을 기억한다.
모든 음악은 기억이 부르는 것
당신은 그것을 씨앗들에게 달아준다.
소리 없는 나뭇가지들,
뿌리들의 유쾌한 휘파람.
계절을 돌며 노래를 주파수를 녹음(錄音)하는 나무 라디오
뛰는 심장을 어루만지곤 했다
절벽에 뿌리를 내린 나무도 그와 같지
그것이 당신의 절규하는 첫 발음, 굽은 음색의 첫 싹
고사목 같은 목소리들이 자정을 알린다
스피커에서는 시퍼렇게 늙은 소리들이 절벽을 뛰어내렸지
소리를 채록하는 것은 나무들의 오랜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야
라디오의 청취자가 되는 거지
전파가 흘려주는 직유는 꼭 구부러져 있었네.
숲을 이루지 못한 소리들이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조용한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지 녹음하지 못한 울음들이 당신에게 갈 때,
스피커가 아닌 라디오를 끄지
절벽의 나무로 만든 스피커가 채록한 소리들은
다 휘어져 있지
기억해. 모든 소리들은 떨어지는 것들이야.
소규모 감정 공작실
어제 잊어버린 문장이야말로 완벽한 것임을 믿는다.
하얗게 질린 천장 아래로 기둥 하나가 내리뻗어 있고,
당신과 수작업으로 만든 감정들이 둘러앉아 있다.
나는 그것들을 내 눈의 무늬로 새긴다.
감정들을 만들고 전시해온 시간들이 지문을 닳게 했다.
담배를 피웠던 흔적도 남아 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해 물러 보이는 감정들과, 너무 오래되어 상해 버린 감정들 사이사이의 바닥에, 바닥에 세상에선 볼 수 없는 검은 꽃으로 흐드러진 담뱃재들이 내게 안녕 안녕 인사한다. 당신이 버려둔 담배도 있다. 담배를 끄려고 길게 비벼댄 자국들이 희끄무레하게 끌려간 주저흔의 골목길 같다.
일찌감치 잃어버린 웃음이 어떤 감정 위에 아로새겨져 있다.
저 똑바르게 각진 웃음들. 웃을 수 있느냐 너는 웃을 수 있느냐.
다른 감정들은 울음이나 일그러진 눈두덩이나 씩씩거리는 입술로 무늬를 갈음한 상태다.
기둥에 맞닿은 바닥은 너무 깊은 교접에 무너질 리도 없다.
벽에 없는 창문이 불러들이는 구름들
문장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잊어버리는 것은 나의 새로운 고질병,
나는 언제나 불모지에서 문장을 잃어버리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의 차이를 세공하는 버릇이 있다.
지문이 묻어나지 않게 되었으므로 수작업이 훨씬 수월하다.
새로운 감정들이란 퍽이나 밝은데 당신이 없다.
당신이 버려둔 담배는 오래 전에 넘어져 있다.
기둥이 되지 않겠다 기필코 쓰러지겠다.
말을 목구멍 아래로 넘긴다.
무늬가 없다는 건 올바른 일이지만 무늬가 없는 것일수록 삼키기 쉽다.
벽이 없는 창문에서 햇살이 들어온다.
빛의 줄기들은 창문을 찾는데 오래 걸렸을 것이다.
눈동자의 문신이 되어 상상하는 감정들을 본다.
내일은 빛이 돌아가는 순간에 있을 것이다.
공룡 스티커 박스
방바닥으로 바퀴벌레의 주검이 떨어졌다. 그 주위로 장례식을 치르듯 옷가지들이 모여 앉아 있지만 뼈에 맞는 옷가지는 없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동대문 쇼핑백들 끝으로 시선을 지나친다. 네모진 박스들로 쌓아올린 첨탑의 아랫도리, 초라한 귀퉁이에서 공룡 스티커들이 다닥다닥 붙은 어느 박스와 눈을 마주한다.
박스의 네모진 틈에서 뼛조각들의 썩은 냄새가 근조화환처럼 피고 있다. 바퀴벌레의 장례식은 나와 공룡 박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된다. 죽은 바퀴벌레는 차갑지만 나는 만지지 않는다.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처럼 지루한 건 없다.
공룡이 냉혈동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뼈를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
선풍기는 공룡 박스 냄새의 부고를 퍼뜨린다. 바람에도 모기들은 곡(哭)을 하며 현관문으로 향하고
살아서 걸어 들어오는 신발들. 뼈를 하얗게 내놓고 다니는 사람들.
뼈와 살은 서로를 옥죄는 상부상조
탑은 본시 먹구름 아래에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불현듯 박스들이 탑보다는 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현관문 저 편에서 소리가 죽는다. 뿌연 창문 뒤엔 애도하는 조기가 후두둑 물기를 떨군다. 거리가 한산하다. 박스 덩어리들 중에서 유독 공룡 박스가 높고 크다. 공룡 스티커의 탓인가, 그렇지만 공룡 박스의 밑은 바닥이다. 탑은 높을수록 좋은 법이다. 오래 전에서 공룡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룡들은 왜 뼈만 남겨두고 사라졌는지 묻고 싶으나 그만큼 늙고 오래된 것들은 없다.(실은 모두들 늙었다.) 바퀴벌레가 유일하게 그만한 노년이었으나 이미 죽었지 않나. 종신형의 고생물학이 끝맺자, 나는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개어놓으며 죽음을 피한다. 뼈를 내놓고 멀뚱멀뚱 널브러져 있는 신발들을 가지런히 눕힌다. 공룡들의 임종은 적요하다.
살짝 열린 현관문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기를 보며 관뚜껑을 닫는다.
바깥에서 장례식의 만취한 망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절그럭거리며 내 뼈들이 일어나 현관으로 간다.
자각몽(自覺夢)
밤처럼 흘러내려온 영화관의 말석을 마주보며 스크린이 깔렸다
자막은 나의 피부였다
본 적 없는 꿈이 영사기 바깥에 있었고 눈 먼
나에게 꿈은 이미 음악이었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야말로 가장 음악적이었다
노랫말이 끝날 무렵에야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이
감정 이상이고 내가 살아갈 날들이란
인생 같은 영화 한 편일 것임을 깨달았다
보이는 것만을 믿어 온 세월이 죄악이었고
나는 조조할인만큼도 용서받지 못했다
유배지에서는 자막을 읽을 수 없었음에도 나는 죄의
삯으로 눈이 보이는 순간들을 부여받았다
장면들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음악들은 각자의 면죄부를 흥얼거렸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까지, 나는
한 마디 대사조차 듣지 못했지만 노랫말은 존재했다는 걸 알았다
참으로 죽음 같은 장면들이었다
피부를 갖지 못한 음악들이 꿈을 꾸었으며
꿈속에서만 매진된 영화로 스크린은 피범벅이 되었다
용서받지 못한 이들은 면죄부를 연주할 수 없었다
이산(離散)
나비의 날개에서 봄이 접힌다. 휘몰아치는 나선계단의 말미에 붉게 빛나는 대문이 있다. 등(燈) 대신 피를 밝혀 놓은 문설주, 바닥엔 낮잠을 깨운 기와(起臥)가 즐비하다. 열린 문틈으로 노랗게 익은 마당이 펼쳐지고, 원근법으로 늘어진 시절이 덩그러니 누워 있다. 지붕 아래 과년한 나무들을 베어 지은 툇마루에 기녀들이 앉아 꽃잎들이 날아가는 쪽으로 눈길을 흘린다. 가장자리에서 가만히 타오르는 무화과나무, 불꽃이 몰래 살고 있는 나무의 후생이 푸르게 타오른다. 태양 대신 점점이 번쩍이는 꽃송이들이 하늘하늘 날아간다. 최후의 종교가 사랑방에서 단잠에 빠져 있다. 기녀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날개 같은 부채를 휘둘러 불꽃을 시들게 한다. 불현듯 별채에서 순례자들이 바람결에 통곡을 반주한다. 서까래가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어느 계절, 어느 시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순례를 가득 진 등짝들이 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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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소감 |
나는 쇄빙선과 잠수종 사이에 살았다. 메마른 열기에 바스러지는 피부는 사막의 모래알갱이들이었고 내 머릿속은 일렁이는 한기로 노상 하얀 전설이 되어 있었다. 쇄빙선은 출발하지 않았으며 기적소리가 하늘 끝자락까지 환하게 밝혀 놓았다. 시커멓게 익은 유충들은 잠수종의 안을 아물지 않은 상처 틈새처럼 기어 다녔다. 그 아득한 끝을 볼 수 있었으나 닿을 수는 없었다. 사이의 것들은 언제나 나를 배신했고 나는 나를 배신하는 것들만 붙잡았다. 끝은 볼 수 있었다. 맞닿는 것은 끝이 아니었다. 나는 더 긴 팔을 가지고 태어났어야 했다.
버려진 것들을 끌어안고 나를 기다리는 규진에게 오랜 이별의 답신을. 나를 보며 언제나 눈보라와 모래바람 속을 들쑤시고 다니는 무채색의 대진, 창훈, 귀헌, 호기야, 어릿어릿 웃을 수 있는 어깨를 청한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흰 옷자락이 오래되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색을 닮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생의 지표들 잊지 않겠습니다. 이름만으로 참신한 말들에 진배없는, 사랑하는 형과 동생, 그리고 가족들, 호명하지 못할 수많은 시집 같은 이름들. 정우영 선생님, 길잡이의 손을 버리고 도망쳐 온 제게 시를 일러주셨지요. 어쭙잖게 익어 버린 나의 팔에 여윈 칼질을 해주신 박해람 선생님, 말로 감당 못할 이 은혜를 형언해 버려서 죄송합니다. 더불어 부족한 언어들을 높이 사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마음을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내게 닿아 있지 않기에 내가 닿으려 하는 당신, 당신에게 이 깊은 눈물방울들을.
이이체(본명 : 이재훈) / 1988년 충북 청주 출생.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휴학 중.
주소 : 서울 관악구 봉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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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後感|
200여 분의 응모자들 가운데 예심을 거쳐 열 분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전체 응모자의 수나 전체적인 작품의 수준이 모두 예년에 비해 낮았다. 그러나 본심에 오른 열 분들은 모두 우리 시의 평균적인 수준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개 이십대에서 삼십대 초중반의 젊은 응모자들이었는데 이 현상이 《현대시》에만 국한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젊은 응모자들의 투고가 부쩍 많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본심에 오른 열 분은 가나다순으로 강동완, 김원옥, 김지율, 김환, 김효은, 박송이, 유민재, 이동규, 이이체(이재훈), 조영민 씨들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작품을 통독한 후 이 가운데 김환, 이동규, 이이체, 조영민 씨들의 작품을 놓고 최종적으로 논의하였다. 이 중 김환 씨는 최근 젊은 기성 시인들의 답습과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점, 이동규 씨는 과도한 관념의 노출 등이 지적되어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최종으로 남은 이이체, 조영민 씨를 놓고 다시 논의를 했다. 조영민 씨의 작품은 분출되는 시적 에너지와 유연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인 비유의 사용이 거슬렸다. 그에 비해 이이체 씨의 작품은 다른 응모자들과 견주어볼 때 개성과 만족할 만한 시적 수준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젊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때문에 잠시 망설이기도 하였으나, 논의 끝에 이이체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시단에 소개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조영민, 김환, 이동규 씨도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채(異彩)로운 이체(異體)들
이이체 씨를 추천한다. 이이체의 시는 문화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혼잡스럽게 뒤섞이는 특이한 풍경을 보여준다. 스피커에는 잎사귀들이 살고 있고 책상에는 나이테가 자란다. 그러니까 이 인공물들에는 자연의 세목들이 정령들처럼 뛰어놀고 있다. 뛰어논다고 했지만 그 역동성은 물상들 각각의 것이고 이질적인 물상들 사이에는 치명적인 어긋남이 변함없이 지속되어 그 활발한 움직임 자체를 의미 상실의 지속, 즉 죽음의 음울한 무도로 바꾸어버린다. “바퀴벌레의 장례식은 나와 공룡 박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된다”라는 구절이 지시하듯이 말이다. 이이체 시는 이렇게 ‘죽음처럼 어긋나 버린 상황’과 ‘흥분된 움직임’ 사이의 온갖 관계에 대한 성찰 및 실험에서 특별한 정서체들을 생산한다. 그 정서체들은 이미지이기도 하고, 이미지에 대한 운동화 된 상념이기도 하며, 또한 그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이기도 한데, ‘좌우지당간에’(!) 그 정서체들 안에는 동화와 이질성의 미묘한 변증법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생각해 보라. “자막은 나의 피부”라니! 세계는 자막을 통해서만 읽혀지는데, 그 자막은 나의 피부로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매우 이채로운 젊은 시인을 만나서 매우 기쁘다. (정과리)
늘 드리는 상투적인 말씀이지만, 본지에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리며, 당선자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 원구식, 정과리, 박주택, 오형엽
—《현대시》200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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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하반기《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당선작
쇄빙선 (외 4편)
이미화
세상의 추운 4시들이 몰려드는 해역들마다엔 아직 연어의 눈알들이 우두커니 말라간다.
마시다 만 잔처럼 해가 떠 있고
월기(月期) 마지막 날
죽은 잎사귀들을 묶어 정원을 쓸었다
쇄빙선 한 척이 느릿하게 빠져나가는오후, 봄은 파열음으로 물결 운(雲)이다.
날렵한 꼬리에 쌍떡잎머리를 하고 있는 봄
녹다 만 달의 조각이 돌 틈에 끼어 있다
후륜의 힘들이 프로펠러에 묻어 있고
씨앗들은 회전하는 방향을 가늠하고 있겠지.
범고래 떼 같은 햇살이 몰려오는 방향으로 봄꽃들은 서로 겹쳐서 선수각(船首角)을 만들지.
수로들은 소리만 남겨놓고 물관부들을 찾아간다.
북극의 계절은 지금
다리우스 달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햇살은 아직 뿌리가 부실하다.
가끔, 쌀쌀한 선단(船團)이 지나가는 4시
봄의 속지에는 아직 솎아내지 못한 두유과(豆油科) 같은 기미들이 무성하다.
밤, 달이 쇄빙선처럼 하늘을 깨트리며 지나간다.
인쇄소마다 뒤늦은 농법일지를 찍어내는 야근이 한창일 것 같다.
소금의 맛은 차가운 맛이고
달력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벽을 지나간다.
푸른 사과를 먹는 시간
푸른 사과는 연약한 잇몸을 좋아하지.
발뒤꿈치를 들면 사과의 꼭지부분이 약해진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눈이 내릴 때였고 눈물이 과육처럼 뭉쳐질 때였다.
낙과의 지점에서 한 남자가 바람에 편지를 쓸 때였다. 별의 시상식은 곧 시작되었다고 그 남자는 썼다. 눈 너머로 아홉별은 몰랐고 별 셋은 안다고 남자의 편지를 훔쳐 읽고는 흡족하게 내 비명을 닫았다. 그 때 막 벼랑을 닫기 위해 손을 뻗쳤는데, 빈손이 수신하는 곳에서 새떼가 출몰하고 불 냄새가 났다. 동물병원 유리창 너머에서는 고양이의 눈동자가 사과처럼 쩍 갈라졌다.
지붕 처마 밑 초록 종지기에 맑은 물이 고이자 모래 세알이 들어 있었다. 엽서 같은 저녁에 붉은 색칠한 버스를 탔고 소염제 같은 바람이 버스를 밀었다 지도에 없는 역에는 달다랗한 햇살이 비췄다 할머니들은 왼쪽 유방이 아프지 않아 쇠 맛 나는 사과가 먹고 싶다며 겨울의 빈 휴지 속을 들락거렸다.
트럭은 맥박을 넣고 달을 도시로 날랐다 겨울은 가방을 든 채 귀가 떨어졌다 소녀들은 손수건이 된 손바닥으로 나뭇잎 같은 귀를 문질렀다.
겨울은 모두 사과밭으로 몰려갔다.
하마다*
낙타사전을 보면 사막의 열쇠 혹은 모래의 낙관(落款)이라고 적혀 있다
흰 것은 모래, 검은 것은 밤
사막은 터번을 두르고 걷는다.
알파벳순으로 서 있는 제 그림자를 타고 내려오는 낙타의 짧은 쪽 다리에
몇 개의 내리막 무게가 내려진다.
죽은 것들의 털들만 모아 사막은 여우의 귀를 짠다.
소금과 함께 자라나는 사막 별들은 가장 오래된 허공표지판 문자들이고
한 번도 모래공장의 위치를 가리킨 적 없다
죽은 자의 혀를 잔등에 태우고 오는 낙타
모래의 반말이 풍선껌처럼 부푼다.
자오선의 윤곽을 바꾸며 옮겨 다니는 사막
바람의 눈엔 눈썹이 길다
우물과 낙타의 눈은 허공에서 건조되고 세상의 벽들은 그림을 덮고 잔다.
우리 기도는 양탄자 발음,
풍경만 남겨둔 바람의 단백질
이슬 덫에 그늘의 온도가 걸려든다.
간헐천에는 바람의 마스카라가 일교차로 먹고 산다.
새의 둥지를 두르고 걷는 낙타 북회귀선에는 잠두콩이 두 개의 생식기를 만드는 중
물구름에 사막과 모래자갈은 서로의 눈과 귀를 목에 건다.
사막건축법에는 바람의 권리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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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다 : 암반이 지표에 노출되어 바위 가루가 흩어져 있는 사막. 사막의 모래 공급원이다.
우리들의 공중 사용법
처음 공중을 뜯었을 때 그 속에는 새들의 울음을 받아 적거나 우기를 밴 구름 빛깔의 속지가 있었지.
계절풍은 곧 빠져나갈 간기(間期)를 쓸고 있었다.
공기 돌은 흩어지기를 좋아해서
자꾸 다른 손등을 탐냈었고
굴러 떨어지는 건 늘 오후여서 캄캄한 소리를 냈었다.
비어 있는 상자에서 빗소리들이 굴러다녔다.
서랍에 살며시 밀어 넣은 손등에 닿은 건 난서(亂書)였다
새들이 지그재그 몸을 그어대면
공중은 어둑하게 구겨지고
초록의 계절을 집으로 삼는 새들의 몸엔 지붕이 없어 음역을 덮고 잠들었었다.
날개는 예의여서 공중의 혈관이라고들 했다.
들판을 싫증내는 공중
간극에 집을 짓는 것들이 구름을 몰아가면 새의 집들이 일제히 부화기를 끝내고 날아오른다.
이미 짝 지어진 곡선과 곡선은 양쪽의 눈이다
우리의 시야는 리본모양의 안부에 묶여 있고
뜯다 만 공중에는 갸웃거리는 고개가 여럿 들어 있다
우리의 수줍음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손 모양 음표가 검은 구름을 불러 세운다.
우리는 독주(獨走)하는 방향,
마주치는 손바닥 사이에 살던 새, 그것은 우리들의 공중사용법이었다.
아슬아슬 공기 돌 하나가 톡 꺼지고
위아래가 없는 여름에 공중이 잠시 서 있다.
화각
바람의 눈동자를 빌려와 조리개 안에 넣는 것은
오래된 전통의 거푸집 같은 것이지요.
화각이 흉내 내는 조리개의 값,
초점막이 그어가는 저녁이 빛의 실틈을 통과한다.
참으로 눈부시군요.
반지 구름을 낀 신랑 신부는 중앙에 서서 사진기를 본다.
딸꾹질의 프레임에는 서약서들만 모아 놓은
책장을 넘기는 속독의 습관이 있군요.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서로 팽팽하게 시선을 모아오고
바람의 각은 혼자 굴러가는 풍선처럼
예식(禮式)을 기록하고 있군요.
바람은 늘 둥근 모양에서 터질 곳을 찾지요.
간혹, 집이 터지는 일이 일어나곤 하지만 실은 반지가 굴러가는
일이 더 잦지요.
팔짱 낀 저 무음의 리듬을 손끝에 묻히면
뷰 파인더 안으로 노을 몇 컷 흘러들어가 달그락 거린다
꼬깃꼬깃한 침묵들이 벼랑을 만드는 오늘은 양각의 날
달의 묵음처럼 뷰 파인더 안의 파장을 더듬어
햇살을 설정해 놓고 시간을 묻는다.
부유와 침몰 같은 상상의 간격을 조율한다.
어둠은 벌써 떨어지려하는데 빛 샘에 목이 부푼 햇살들을 가위질해 놓고
백년을 비워 놓고 달려온 후생이
사진기의 셔터를 찰칵 누른다.
잘려진 하객들이 우르르 흩어진다.
| 당선소감 |..................................................................................
오늘은 오전의 햇살이 찾아와 주었다. 눈부신 햇살로 얼굴을 찡그리는 호사를 누렸다. 문득 내 최초의 풍경이 이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더 어려지고 외로워졌다. 수저를 사용치 않고 말들을 주워 먹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창문이 생기고 나는 그곳으로 회기('회귀'의 오기?)의 길 하나를 가꾸고 닦았다. 노스탤지어nostalgia처럼 회귀에는 고통의 날씨들이 있었다. 저녁마다 누워서 손등을 보면 슬며시 그리움이 내려앉았다. 슬픈 얼굴을 가린 손등을 보여주었다.
많이 호명하고 많이 축하받고 싶었으나 접어두기로 한다. 대신 어린 유년을 불러 같이 놀고 싶다. 유년엔 언제나 비린내가 난다. 빨래를 할 때마다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는 이유는 걷어온 빨래에서 나는 비린내를 맡고 싶어서이다. 아이들과 섞이지 못한 유년의 나는 풀이 높게 자란 전차차고를 드나들었다. 저녁마다 풀독이 오른 종아리를 쓸면서 내 키는 하늘로 가까워졌다.
시는 내가 사람들과 섞이지 못한 부유이며 사람들의 오독 속에서 해명할 수 없었던 나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명분이다. 혼자 오르는 산에서 만난 키 낮은 꽃들이 안쓰러울 때마다 노스탤지어를 불렀다.
나는 낮게 핀 꽃이다. 발밑의 시간이다. 이제 결핍으로 일어서는 낮은 꽃이 되고 싶다.
서울예술대학의 김혜순 교수님, 채호기 교수님, 그리고 이원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낮은 꽃말들의 낯선 이름들을 호명하며 시의 안쪽으로 안착하게 해 주신 박해람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먼 등굣길에 멀리 보이던 지하철 4호선의 창밖 풍경들에게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일곱 살 내가 아버지에게 얻은 것이 시였음을 이제야 안다. 엄마의 산소 안쪽에 계시는 아버지께 이 영광을 올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이제 친정이 된 《현대시》에도 감사를 올립니다.
이제 내 안의 결핍들을 하나씩 고르면서 존재들의 아름다운 흔들림을 치열하게 쓰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결핍을 견디는 모모(某某)들, 말 못하는 눈물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뚝! 울지마!
이미화 / 1959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3학년 재학중
주소 : 서울시 용산구 산천동 리버힐삼성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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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選後感 |
이번 공모에는 약 200여 분들이 응모를 해왔다. 지난 공모에 비해 응모 편수는 좀 줄었다. 십대의 고등학교 응모자부터 육십대의 응모자까지 응모 연령도 다양했으며, 시의 경향 또한 다양했다.
예심을 거쳐 아홉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 우리레게 전달되었다. 본심에 오른 분들은 강연형, 김복희, 김유성, 김호성, 박민혁, 박채영, 백유진, 이미화, 황윤재 씨였다. 본심위원들은 오랜 고심 끝에 네 명의 응모자를 다시 선정했다. 김호성, 박민혁, 이미화, 황윤재 씨가 그들이다. 김호성의 「웰빙푸드 레시피」외 9편은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박민혁의 「안식년」외 9편은 순례의 욕망이라는 주제가, 황윤재 씨의 「발자국 상점」외 9편은 시를 안정적으로 조형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 몰개성이라고 할 만큼 기성 시인들의 시세계를 답습하는 데 그쳤다. 이미화 씨의 「쇄빙선」외 9편은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엇갈렸으나 오랜 토의 끝에 신인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새로운 시인으로 시단에 소개하기로 하였다.
이미화를 시인으로 추천한다. 최근 한 잡지를 읽으며 동일한 시적 분위기가 한 호를 채우고 있는 것에 적이 놀랐다. 소통의 문제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요즘처럼 첨예하게 ‘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드물었지 않았나에서이다. 요즘의 시적 경향을 ‘새로운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는 자성이 일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사가 그렇듯이 문학사 역시 내용과 사상에 기반하고 있기보다는 양식이나 기법에 치중한다. 이런 까닭으로 시가 기존의 규준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망은 기원적이고도 태생적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신인 투고 작품은 인생과 경험의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양식적인 미학’을 드러내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공감보다는 공유를, 내용보다는 형식을, 진중보다는 경쾌를 시적 의장으로 삼는다. 이번에 당선한 이미화 씨의 작품 역시 그렇다. 사물과 대상을 왜곡시켜 다성적인 의미를 이끌어 낸다거나 탈골과 결절과 같은 일탈의 어법을 통해 입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일련의 경향성을 반영한다. 「쇄빙선」은 얼음을 깨고 나가고 있는 배의 운동성을 삶의 운동성으로 치환하는 절제의 미를 보여준다. “연어의 눈알들이 우두커니 말라가”고 달력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벽을 지나가”는 “세상의 추운 4시들”은 뿌리가 부실한 세상이다. 몸에 붙은 비늘이 다 떨어지도록 물가에 가려 해도 가지 못하는 불모의 세상이다. 그런가하면 「푸른 사과를 먹는 시간」에서는 고통을 증식하는 육체에 이는 겨울의 감정을 건조하게, 「하마다」에서는 낙타의 사전 속에 적기되어 있는 기도의 풍경을 삭막하게 점묘한다. 낙하와 침몰의 윤곽을 터질듯이 보여주는 「우리들의 공중 사용법」과 「화각」에서도 여전히 ‘세상의 추운 4시’들은 출몰한다. 이미화 씨의 시는 자신 안의 것을 드러내어 교묘히 외적인 것에 촉탁하는 개성을 발휘한다. 오랜 연마의 경험을 통해 나오는 그의 시가 그의 앞길을 환하게 밝히기를 고대한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
본지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한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 원구식 박주택 오형엽 조강석
—《현대시》201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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