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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심사 / 조춘호
고양시에서 퇴직한 여교장 열댓 명이 당일 여행을 떠났다. ‘2018 태안 세계 튤립 축제’장을 거쳐 내 고향 서산의 가야산 자락 개심사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서울 서부역에서 출발하는 ‘아름여행’ 버스는 관광객의 설레는 마음을 나타내주는 듯 물큰 터질 것 같이 잘 익은 자두색이었다.
그날은 71세 되는 나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이른 아침 차 시간을 대느라 미역국도 못 먹고 서둘렀다. 튤립 꽃구경보다 어린 시절 추억 서린 개심사에 나의 몸과 마음은 들뜨고 있었다. “개심사 하면 겹사구라지요.” 가이드는 주먹만 한 왕벚꽃이 유명한 곳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미 꽃이 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내게 그곳은 벚꽃 구경과는 상관없는 곳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안면도 축제장에 도착했다. 백만 송이 튤립을 마음껏 즐기며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꽃게탕 점심 후 버스를 타고 개심사로 향했다. 그 길 위로는 60년 전 나의 6학년 소풍날이 파노라마로 날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봄·가을 소풍은 학교에서 어슴프레 건너다 보이는 팔봉산으로 갔다. 어쩌다 호리 갯바위가 널려있는 ‘우럴목’으로 가기도 했지만 주로 팔봉산 아래 절까지 걸어 올라가는 게 단골 코스였다. 사는 곳이 팔봉면이니 오로지 그 산, 그 바다뿐이었다. 그러나 6학년 때만은 멀리 소풍을 보냈다. 이른바 졸업반 수학여행인 셈이었다. 먼 곳이래 봤자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서산군 사람들이 제일로 여기는 운산면에 있는 개심사였다. 백제 의자왕 때 혜감慧鑑국사가 지었다는 그 절을 우리는 신라 시대 경주 불국사 다음가는 유명한 절이라고 여겼다.
6학년 150여명은 그 개심사 수학여행의 꿈에 부풀었다. 선생님은 여행비를 걷었는데 대절해서 타고 가는 트럭 차비였다. 그러나 여자만으로 구성된 우리 3반은 49명 중 21명이 그 돈을 내지 못했다. 남자반인 1반과, 혼성 2반은 그래도 우리 반보다 훨씬 많이 냈다. 지금 생각하면 반별로 가정의 빈부 차이가 아니고 그 시절 시골에서 딸과 아들 차별 대우였다.
세 반 합해서 여비를 낸 100여명은 손꼽아 수학여행의 날을 기다렸지만 차비를 못 낸 50여명은 부풀던 꿈을 접어야 했다.
드디어 개심사 가는 날 아침, 트럭 두 대가 학교 앞 신작로에서 부릉거렸다.
“야, 도라꾸 왔다. 저기, 저기 봐! 제무시(GMC) 왔어.”
버스는 구경도 못해 본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처음으로 국방색 트럭이나마 타보게 되는 아이들은 마냥 신바람이 났다. 선생님은 줄을 세워 하나씩 부축하여 올라가게 했다. 승차 순서는 나이순으로 제일 어린 끝 번호부터였다. 우리 반에는 14살짜리 아이들이 제일 많았다. 나는 조기입학으로 12살이었기에 제일 먼저 탔다. 큰 키를 작게 보이려고 구부정하게 다니는 17살까지도 있어서 그 아이들은 맨 나중에 타게 되었다.
또 하나의 트럭에도 혼성반인 2반의 여자들을 먼저 태웠다. 그 차에는 실제 나이보다 호적이 늦어졌다는 D가 맨 먼저 탔다고 했다. 그는 트럭에 오르자 운전석 뒤편에 놓인 석유통이 확 눈에 띄었다. 주유소가 없던 시절 기름이 떨어지면 운전기사가 직접 넣도록 싣고 다니는 예비용 석유통이었다. 그 통은 의자 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옳지, 모두 서서 가야 하지만 나는 여기 앉아 간다!’
석유통 특석을 차지한 기쁨이 컸다. 아이들이 부러워해도 양보할 수 없었다. 올 때도 먼저 맡은 임자란 명분으로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터덜거리는 트럭 위의 양철통 모서리는 여린 살성에 찰과상을 안겼다. 다녀온 후 약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허벅지와 엉덩이 상처가 아물기까지 한동안 고생을 했노라고 D는 그때 추억을 지금도 이야기하며 웃곤 한다.
비포장 80리 길에서 트럭은 몹시 덜컹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려도 시루의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탄 우리는 쓰러지지 않았다. 멀미하는 아이들의 구토물마저도 휙휙 시원스레 날아갔다. 지금 같았으면 노래라도 불렀으련만 그저 처음 차 타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흙먼지 뒤집어 써가며 인지면을 거쳐 서산 읍내와 해미면을 지나니 개심사가 있는 운산면에 도착,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차에서 내려 반별로 줄을 서서 큼직한 돌이 박힌 계단을 올라갔다. 한참이나 오르니 솔숲 사이로 기와지붕들이 보였다.
“와, 개심사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5층 석탑이 있었다. 마당 둘레에도 자연석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 아기자기한 전각과 누각들이 많이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기와지붕 밑에 한자로 써서 걸어놓은 현판들은 읽을 수 없었다. 다만 벽과 기둥은 녹청, 노랑, 붉은빛으로 화려했다. 그 건물들이 한집안 식구같이 어우러져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가 매년 소풍 가는 팔봉산 절과는 너무 딴 세상의 사찰이었다.
팔봉산 절은 초가 움막이었다. 단칸방 안에 지팡이인지 작대기인지 들고 서 있는 하얀 산신령 같은 한 분을 부처님이라고 모신 곳이었다. 그런데 개심사 대웅전 안에는 교과서 사진에서나 보았던 커다란 금부처님이 앉아 있고 옆에도 작은 부처님이 또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노란 금빛이 눈부실 정도였다. 곳곳을 기웃거리며 들여다보아도 이름 모를 울긋불긋한 보살상인지 불상들이 표정도 각각 다른 채 무수하게 많았다. 아! 절은 이래야만 진짜 절인가보다 했다.
다 둘러 본 후 대웅전 석탑 앞에서 세 반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산 읍내의 ‘천연사진관’ 곱슬머리 사장님이 어깨에 메고 온 사진기 다리를 세워놓고 여기 봐라, 저기 봐라! 코치를 했다. 반별로도 찍었다. 우리 3반 28명은 멋진 배경을 찾아 석축 위에 나란히 서고 사진기사는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찍었다.
반별 촬영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모두 나무 그늘을 찾아 끼리끼리 앉아 도시락을 싼 소청 보자기를 풀었다. 학교에는 꽁보리밥을 싸 오던 아이들도 소풍날이라고 특별히 하얀 쌀밥을 가져왔다. 밥을 먹기 전 어떤 애는 “고수레!”하며 아까운 쌀밥 한 숟갈을 낭떠러지 밑으로 퍼 던졌다. 밥 말고 특별히 밀가루 개떡을 쪄온 아이도 있어 서로 나눠 먹었다. 그러나 달걀을 삶아온 아이는 의기양양 조금씩 베물어 가며 혼자 야금거렸다. 일 년에 한두 번, 먹을 둥 말 둥 한 계란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였다. 우리 반에서도 말수 없는 A가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여기 있다는데….”
“…?”
할머니 슬하에서 학교 다니는 A였다. 언젠가 그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 비밀인 듯이 귓속말로 들려주던 말이 생각났다.
“A 엄마는 중이래. 밤에만 살짝 왔다가 다음 날 이른 새벽에 몰래 간대.”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눈이 크게 떠졌었는데 그 엄마가 여기 개심사에 있다니!
아마 A는 내가 반장이라고 그랬는지 몰라도 내게만 살짝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 엄마 얼굴은 알아?”
동네 아이들 말대로라면 한밤중에 잘 때 왔다가 새벽에 간다니 잘 모를 것도 같았다. 그는 안다는 대답 대신 어설픈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A는 아버지가 6·25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엄마는 개가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곤궁하던 그 시절 여자는 딸 하나도 키울 능력이 못 되었다. 고뇌 끝에 불교 입문을 결단, 입산하겠다고 모진 마음을 먹었다. 시가의 허락을 받은 후 한창 재롱을 부리는 자식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승려의 길로 떠났다. 하지만 떼어놓은 단 하나 어린 핏줄,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 그러나 그토록 딸이 보고 싶어도 출가한 여인이 승복을 입고 대낮에 동네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엄마가 여기 개심사에 있다니! 나는 큰 과제를 안은 것 같았다.
“그럼 엄마 보고 가야지! 찾아보자. 엄마 이름이 뭐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성이 조 씨인 것만 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든 찾아서 A가 엄마를 만나고 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구경은 관심도 없었다. 절 경내에 승복의 그림자가 나타나는지만 둘레 거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우리처럼 소풍 온 중학생들의 교복만 보였다.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선생님께 말씀드려보자고 했다. 그러나 A는 싫다고 했다. 별수 없이 계속 두리번대기만 했으나 승복을 입은 사람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돌계단 아래쪽으로도 내려가 보자고 했다. 점심 먹고 종구라기로 물을 떠서 마시던 옹달샘 쪽이었다. A와 둘이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샘물 곁에서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두 명의 동자승이 보였다.
“와, 까까 애기중이다!”
큰 행운을 맞은 것 같이 갑자기 힘이 솟으며 반가웠다.
조심스레 그들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 웃으면서 말을 주고받으며 쌀을 씻고 있었다. 첫 인사말도 건네지 않은 채 다짜고짜 물었다. 그저 엄마를 얼른 찾아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 그뿐이었다.
“여기 개심사에 성이 조 씨인 중, 있슈?”
동자삭발을 한 그들은 반질반질 윤기 나는 푸르스름한 머리에 마냥 얼굴도 맑고 심성도 고와 보였다. 그런데 들은 척을 안 했다. 묻는 소리를 못 들었나?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 등 뒤에서 한동안 대답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랑곳도 없었다. 표주박으로 연신 물을 떠서 쌀뜨물을 쏟아내며 자기들만의 대화만 계속했다. 안타깝고 머쓱해졌다. 한참 후에 다시 용기를 냈다. 아까보다는 더 큰 소리로 물었다.
“저기…. 여기에 조 씨 성 가진 중, 있나유?”
분명히 들었을 법도 한데 마찬가지였다. 정말 못 들었을까? 여전히 웃으며 소곤소곤 자기들의 이야기만 했다.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 그럴 수가 없었다.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다. 야속한 마음에 힘이 쏘옥 빠져버리니 세 번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매가리가 풀린 채 한참 동안 그들 등만 바라보며 혹시나 하고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기대는 헛것이었다. 말없이 곁에 서 있던 A는 태연자약한 듯 보였지만 어쩌면 올 때부터 엄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 바래고 왔을 것이다.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낙담하는 나를 위로하듯 “괜찮아.” 담담하게 말했다. 어쩜 A는 그렇게 어른스럽게 의연한 모습이었을까.
동자승이 보였을 땐 단박에 엄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기뻐했건만 싸워보지도 못한 패잔병처럼 돌아서 다시 돌계단을 올라왔다. 허공에서 뜬구름을 붙잡으려 했나 허허롭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그날 소풍은 둘만의 비밀로 무겁게 끝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을 물을 수도 있었다. 그때도 있었는지 모르나 종무소를 찾아갈 수도 있었다. 아니면 동자승 어깨를 툭툭 쳐서라도 알아내고 A가 엄마를 만나도록 해야 했었는데 왜 그렇게 못했는지! 촌뜨기에 철부지 12살 초등생 나이로는 힘에 부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을 꼽아본다면 무엇보다도 내가 부른 호칭이 문제였을 것이 틀림없다. 성철 스님은 자신을 ‘땡중’이라며 스님이라고 부르면 호통을 쳤다고 하지만 일부 승려들은 스님이라고 불러야 마주한다는 걸 어느 책에서 읽어 본 적이 있다.
도대체 ‘조 씨 중’이 뭐란 말인가! 법명은 몰랐을지라도 ‘조씨 성 가지신 스님’이라고 왜 그러지 못했는지, 아무리 초등생이라지만 동자승들은 스님들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 철없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이나 우리나 어리긴 비슷했겠으나 불자의 자존심이 있을 텐데 밑도 끝도 없이 조 씨 중만 찾는 우리가 역겨웠을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의 묻는 소리를 들었다 해도 대꾸 상대로 여기지 않았을 것 같다.
우리 마을에서는 팔봉산 절의 보살처럼 목탁 든 까까머리가 바랑을 지고 마을로 내려와 시주 쌀을 얻어 가면 으레 팔봉산 ‘코뺑뺑이’중이 왔다 갔다고 했지 스님이란 호칭은 그 누구의 입에서도 부른 바 없었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도 모두 그저 중으로 따라 불렀다.
다만 사회시간에 배운 서산대사 원효대사 원광법사 등은 유명한 승려니까 국사 대사 법사 선사의 호칭을 붙이는 것으로 알았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저학년도 아닌 6학년생이 스님이란 일반적인 존칭 표현도 못 했던 걸 생각하면 숙맥도 유분수. 지금까지도 그 무지가 몹시 부끄럽다. 그리고 그 동자승들에게 미안하다.
12살 그 아련했던 추억을 안고 60년 만에 찾아온 개심사. 그런데 입구부터가 딴판이었다. 두릅을 비롯한 산나물을 파는 아낙네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가야산에서 캤다는 팔뚝만 한 칡뿌리 장사들도 눈에 띄었다. 어릴 적 동네에서 캐 먹던 칡뿌리는 손가락 크기였는데 어떻게 자라면 저리 클까? 감탄하면서 울창한 적송 그늘을 따라 돌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개심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리도 아프고 숨도 찼다. 그럴 리 없으련만 초등학교 시절과는 너무 다르게 높아진 산길 같았다. 나이 든 내 몸을 인정했다. 그렇게 가쁜 숨을 쉬면서도 옆 사람에게 트럭 수학여행 추억을 말하며 올라갔다. 왜 트럭을 탔냐고 의아해했다. 나 같은 팔봉산 밑의 촌놈이 아니고 어릴 적 이미 버스를 타본 동료들, 그런 가난한 시골의 추억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드디어 울창한 노송 사이로 개심사가 보였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되었다는 대웅보전. 어릴 적 그렇게 컸던 대웅전이 웬일인지 아담한 건축물로 앉아 있었다. 서로 마주 보던 사찰당우堂宇들의 읽을 수 없었던 한자 현판들도 모두 눈에 들어왔다. 특히 <상왕산개심사 象王山 開心寺> 라고 안양루에 걸린 편액이 눈에 띄었다. 근대 명필로 알려진 해강 김규진의 글씨라고 했다. 여학교 때는 더러운 마음을 고친다는 고칠 개改자에 마음 심心, 개심사改心寺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칠 개改가 아니고 마음을 씻고 洗心洞, 마음을 열면서 오르라는 뜻을 가진 열 개開자, 개심사 開心寺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사찰 당우堂宇의 현판도, 불상도 아닌 옹달샘 우물에 가 있었다. 60여 년이 흘러서인지 주변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지만 경내 아래로 A와 돌계단을 내려갔던 기억을 더듬어 혼자 내려갔다. 우물 장소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옹달샘은 어디로 가고 슬레이트 지붕이 햇살을 막고 있는 ‘감로수’가 있었다. 동자승이 앉아 쌀뜨물을 흘려보내던 주변도 시멘트 물길로 보수되어 있고 그 앞에는 종구라기나 동자승이 쓰던 표주박 대신 손잡이 달린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가 걸려 있었다. 주마등처럼 지난날을 떠 올리며 한참 동안 서서 우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건만 변함없이 여전히 검고 흰 그 맑은 샘물.
그 물 위로 60년 전 A와 나의 모습이 비쳤다. 애틋하던 그 날은 그 자리에 아직도 머물러 있었다.
운명이런가, 엄마의 뒤를 따라 스님이 된 A.
세상의 길이 그렇게 많건만 모든 것 다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택한 친구!
“A야! 나 여기 개심사 왔어.”
싸한 뭉클함이 가슴을 메웠다.
‘마음 씻고 洗心, 마음 열고 開心 혜안으로 세상을 보자. 이 개심사에서!’
그러나 떨쳐 낼 수 없는 애잔한 마음은 눈앞의 감로수처럼 계속 솟아나고 있었다.
엄마는 입열반하셨을 테고, 이제 엄마 대신 노스님이 되었을 A….
“어느 절에 있는지 큰 스님이 되었을 네가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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