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 선생님! “제가 어떻케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슴니까?”
하고 묻는 것이엇슴니다. 그거야 계명을 지키면 될 것 아니냐, 하고 예수님도 가
볍게 대답 하셨슴니다. 그당시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살면,
죽은후 절대자의 권능으로 다시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수 있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청년이 육체적으로 않 죽는 방법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몸이 늙어 죽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으로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 어떤 계명 말입니까? ” 하고, 또 묻는 것이엇 씁니다. 유대인
이면, 십계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다시 한번 계명을 차근차근 말씀해 주셧슴니다.
“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
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마지막에 “ 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계명은 십계명에 없고, 예수님이 이 청년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계명이 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 해서는 안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청년에게
영생의 길을 말해 주는데, 영생과 깊은 관련을 갖인, 神에 관한 계명은 한 마디도
말씀 않하시고, 모두 인간에 관한 계명만 말해 주신 점입니다. 십 계명의 앞 부분은,
“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 , .... , .... , 안식일을 지켜라,” 등, 모두
신에 관한 계명 들 인데 말입니다.
이 점을 미루어 생각 해 보면, 인간이 영생을 얻는데, 神의 역할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이 청년은, 놀랍게도, “ 그런 건 이미 다 지켯습니다.”
하는 것이엇슴니다. 빙글 빙글 돌리지 마시고, 선생님은 알고 있을 터이니, 그걸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자기 한테 거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 하려는 무 의식적인
본능이 있슴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나오자, 예수님도 정색을 하시며, 영생의 길을 가르처 주셧씁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은, 자기 네 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목적(출세, 영생)에
관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요. 그레서 예수님이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모든 신경을 곤두 세웠슴니다.
“ 네가 온전 하고져 하면, 너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果然( 과연 ) ! ,...... 명답 이심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렇케 멋진 대답이 순발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경지가
얼마나 한량 없는가를 가이 짐작케 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과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줄 몰랏씁니다. 이 청년이 모른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제자들이 그 뜻을 모른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네들이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의 말씀은, 일단, 고대로 성경 책에 옮겨
놓는 경향을 많이 발견 할 수 있으니 까요.
첫째, “ 네가 온전 하고자 하면,” 이란 말이중요 합니다.
이 말은, 네가 진정으로, 완벽 하게, 영생 하기를 원한다면, 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
하면, 계명을 지키라는 말은, 인간이 영생을 얻는 필요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말 입니
다. 어느 정도 필요한 조건 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둘째, “ 재산을 다 팔아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은, 그렇케 중요한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영생을 얻으려면, 그 정도의 열의는 있어야 한다, 는 정도의 비중이 실린 말
입니다.
이 청년은 애석 하게도, 재산이 많은 지라, 이 대목에서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소지가충분한 말입니다.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 주엇쓰니, 얼마나 착하고 갸륵한 일을 한 것 입니까? 그 댓가로 하나님이 어여삐
여겨,영생을 준다는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런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셋째, 진짜 영생의 key는 “ 나를 따르라.” 는 말속에 있슴니다.
이 말은, 제자들처럼 그냥 예수님을 따라 다니라는 말이 아님니다.
이말의 참뜻은, 네가 진정으로 영생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과 같은 人格이 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같은 경지에 들어야, 사망의 권세을 이기고,영생을
얻을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는 못했으나,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베드로 라는 제자가 용기를 내어, “ 저희 들은 재산은 별로 없지만, 모두 버리고
주님을 따랐슴니다. 그런즉 저희는 무엇을 얻으리있까? “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 심니다. 제자들에게 별로 해 주신 것이
없는 예수님 으로서는, 무언가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동고 동락을 같이
하는 제자 들이 측은해 보이 셧을 것입니다. 그레서 위로겸 축복의 말을 따듯하게
해 주셧씀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때,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 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상당히 난해한 말입니다 만, “ 세상이 새롭게 된다.” 는 말에
초점을 맟추신다면, 해석이 가능 할줄 앎니다.
( 예수님은 구약 사상이 온전 하지 못하다고 보시고, 새로 완전케 하시려는 개혁가
십니다.이럴때 보수 세력과의 갈등은 필연입니다. 이때 벌써 예수님은 자신의 하시는
일의 험난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개혁가는 항상 핍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은 사상이 인류에게 인정될때가 바로 “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바로 “인류의 참 스승”이 엇다고 하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때입니다. 이 때가 오면, 나를 따르는 너희도, 영광의 보좌에 앉자, 지금 우리를
핍박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거라는, 인간적인 怨望(원망) 조의 말씀
이 심니다. 죽음이란 절망적인 상태를 내다 보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기에
가야만 하는, 한 聖人의 고뇌가 스며나는 대목입니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경지는 어떻킬레 영생을 얻엇고, 이 청년은 왜 영생
을 얻지 못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아주 솔직하고, 인간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서술 할 것 같으면, 육체 적으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다면, 영생의 문제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영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형이상학 적인 욕구가 있다면, 그 충족 수단 또한 역사상에 나타
나기 마련입니다.
인류의 영생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을 충족 시켜주는, 하나의 대표적인 假設(가설)의
예가 바로, 믿음를 필수 조건으로 하는, 일종의 종교 형태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난,
유태교( 모세교, 구약성경)라고 보는 학자도 있슬수 있겠슴니다.
절대자를 상정하여, 그의 힘을 빌려서, 영생을 얻고자 합니다. 이러한 해결 책은
인류에게, 희망과 善(선)하게 살아야하는 이유 까지 주는 멋진 발상 이엇씀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발달 하면서, 인간에 대한 그 한계와, 그 생성의 비밀을 알아
버린 것입니다.
그레서, 인간은 영생의 해결 책을, 인간 밖에서 찾아 보려는 대신, 인간 속에서 그
해결 책을 탐구 했던 것입니다.
고타마 싯따르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같은 분 들은, 인간의 認識(인식) 능력 속에
해결의 key가 있음을 에저녘에 발견하고, 인간의 자유를 극 대화 시켜, 영생의 문제
를 대체로 성공적으로 해결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부자 청년은 지금, 영생 하고자 하는 욕망, 죽음, 時間의 굴레에 얽메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욕망으로 부터의 자유,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 시간 으로부터 자유
스러워 지셨을 뿐 아니라, 사상( 생각 )으로 부터도 자유스러워 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살아있는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죽은 후 같은 것은 , 어린
애기처럼, 죽음의 개념이 의식 속에서 없어 진것처럼, 문제로 부각 되지를 않함니다.
이 청년이 진정 영생을 얻으려면, 眞理가 너희를 自由케 한다 했으니, 많은 진리를
깨달아서, 영생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 스러워 지는 길 뿐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가르처 준 영생의 길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 마태복음;19장;16~28 )
첫댓글위의 글을 읽으면서 그 주장이 개신교회의 율법 폐기론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니 전율함을 느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 까지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계시록 14장의 세천사의 기별을 이새대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불교에서 성경을 이용하여 가장 큰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 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위의 글을 읽으면서 그 주장이 개신교회의 율법 폐기론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니 전율함을 느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 까지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계시록 14장의 세천사의 기별을 이새대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불교에서 성경을 이용하여 가장 큰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 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탐자님, 기독교인은 스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승려라고 불려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사람들에게 배워 목사님에게는 목사라고 부르고 신부에게는 신부님, 중에게는 스님이라고 불러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중에 대한 표준어는 '승려'입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