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의 온도
김진숙
노을을 펼쳐두고 함께 걷던 언젠가
당신은 길가에 핀 달맞이꽃이 궁금하고
나는 또 괭이갈매기 겨드랑이가 외롭고
다른 곳을 볼 때마다 깨진 거울 같았지만
떨림이 사라졌다고 멀어진 게 아니란 걸
밑바닥 그림자마저 우린 이미 닮아가는 걸
곁을 준다는 건 서쪽을 내어주는 일
마주한 저녁상에 끼륵끼륵 안부를 묻는
새들도 눈치챘을까, 내 안에 사는 당신
영어 공부
김종연
혹서와 혹한이 한날한시 찾아왔다
옹알이 겨우 하다 닫혀버린 입술 사이
어느 해 인해전술처럼
밀어넣고 밀어넣고
반항도 항복도 소심하게 처리됐다
온몸의 세포들에 번역기를 달아놓고
증발과 결빙의 언어
끌어안고 끌어안고
단기 기억 장기 기억 온데를 들쑤셔도
단서 하나 찾지 못해 허탈한 저녁 무렵
쉰넷의 늙은 학생이
건진 단어 enjoy!
수국 궁전
김진숙
겹겹이 쌓아 올린 유월의 저 모퉁이
눈물의 건축술은 얼마나 또 위대한가
핏발선 파른하늘에 다녀가신 어머니
어머니 우시는 모습 몰래 본 적 있었다
병정 같은 헉꽃을 지키고 선 아침나절
끝까지 살아생전에 이유를 묻지 못했다
人
박화남
흙을 필사적으로 잡아당긴 흔적이다
태풍에 맞서다가 허리 꺾인 참나무
나무들 중심을 잡고
두 팔 벌려 안는다
오로지 참 길만을 꼿꼿하게 지켜서
人처럼 더 살겠다 저렇게 기댄 채로
누군가 받쳐주는 일
알면서도 못했다
-《나래시조》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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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調의맛과˚˚˚멋
김진숙 시인의 <서쪽의 온도> 외
안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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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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