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영문에서 형장을 받아 장살 당한 하느님의 종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
경남 진양군 사봉면에 위치한 사봉 무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자의 묘가 있다.
병인박해 때 진주 영문 안에 있는 마당에서 형장을 받아 장살당한 하느님의 종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다.
100년이 지난 후 광산 김씨 할머니의 도움으로 발견하였다.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 1822~1867)은 경상도 진주 허유 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 가문으로, 먼저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교리를 배워
41세 때인 1863년에 비로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가을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묵묵히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갔으며 그의 많은 가산은 적몰 당하였다.
가산 적몰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던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 주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시 옥에서 끌려 나와 무수히 매를 맞았으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그는 그날 밤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진주 영문 안에 있는 마당에서 형장을 받아 장살당한 것이다.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이었다. 순교한 뒤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던 그의 시신은 그때까지도
그의 몸이 굳지 않았고 얼굴에 화색이 있어 산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 후 고향 인근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그의 시신에서 머리는 잘려나간 채 몸통만 묻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무두묘(無頭墓)에 대한 설명이다.
무두묘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 그의 집안은 천주학쟁이로 몰려 풍비박산을 당했고 그가 묻힌 무두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완전히 잊혀 버렸다.
그러다가 1947년 문산 성당 서정도(徐廷道, 베르나르도, 1899~1964) 신부가 이 전설을 쫓아
이 일대를 집중 조사한 끝에 당시 최고령(94세) 할머니인 광산 김씨 할머니의 도움으로
2~3차례 무덤 발굴을 시도한 끝에 정말 목이 없는 무두묘를 발견함으로써 순교자 묘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묘는 무두묘가 최초로 발견된 텃밭에서 약 100m 떨어진 무촌리 뒷산으로 이장시켜
묘지를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정찬문이 순교한 감옥은 중앙 공설 시장 인근에 있었다.
실제로 대안동 큰길 동쪽엔 일제 시대까지 옥터가 있었다고 한다.
감옥은 중앙 시장과 옥봉 성당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감옥에서 정찬문과 윤봉문(尹鳳文, 요셉, 1852~1888)은 순교했고
구한선(具漢善, 타대오, 1844~1866) 순교자는 죽기까지 매를 맞은 곳이다.
그 외에도 숱한 교우들이 진주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 《치명일기(致命日記)》
《치명일기》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877분의 명단과 약전(略傳)을 기록한 책이다.
병인순교자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자료다. 만든 이는 당시 조선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였다.
1891년 착수하여 4년 뒤인 1895년 발간되었다.
순교자의 죽음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한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하여 증언하도록 했다.
그 뒤 공적 확인을 거쳐 최종 선별된 순교자가 877명이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24명이 1968년 복자 위에 올랐고 1984년 성인품을 받았다.
마산교구 순교자는 네 명이 등장한다. 정안당(안토니오), 구 다두(타대오), 신 말구(마르코), 오 야고보다.
▒ 전부 바쳐 전부 얻는 (허유고개에서) <김영수> ▒
남루한 나의 생애에도
가녀린 풀향내 스며들까요
하늘 품은 가슴들이 쉬어 가던 고개에는
여름 뜨거이 기울고 있습니다
전부 바쳐 전부 얻는 신비
속살 투명한 바람들이
깃발 펄럭이며 대지에 내립니다
내가 눈 떠서
사랑을 마음껏 아파할 수 있다면
아득히 해 지는 음향 속에서도
촛불 하나 그윽이 밝을 것입니다
무덤들 가에서는
백일홍들 진하게도 피었다 지며
영원의 문 틈에 꽂히고 있습니다
■ 순교자
◆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1822-1866년)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 집안에서 1822년에 태어난
정찬문 안토니오는 먼저 영세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니, 그때가 그의 나이 42세 때인 1863년이었다.
이후 안토니오는 3년 이상을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에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그도 그 해 가을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일가 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유혹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 안토니오는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어느 날 안토니오는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무수히 매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다음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안토니오가 순교한 뒤 그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이후 그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인근에 장사를 지낼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몸이 굳지 않았고, 얼굴에 화색이 있어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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