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목회자가 초월적 능력을 지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느 유명한 외국의 부흥사는 자기 집을 전기 철조망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신변보호용 개들을 키우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특별히 유명인사병에 걸려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사생활 틈 사이로 불쑥 불쑥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의 옷자락을 만지기도 하고 덮치기도 하는 불상사가 계속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서 속의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이야기이다. 예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혈루병을 낳고자 했던 여성(막 5:25-34),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일까 해서 모여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행 5:15-16),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려는 사람들(행 19:12)이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에도 대중들의 이러한 열망은 목회자들 자신의 자기 이해와 상관없이 교회의 안과 밖에 살아 있음을 종종 보게 된다.
꼭 이적과 신유의 은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목회자에게서 초월적 세계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델, 곧 깊은 “영성”을 지닌 정신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찾고 싶어 하는 기대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교회의 목회자가 교회 행정이나 조직관리적인 기능에만 중요성을 부여하고, 다른 한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과 역사의 구원의 신비를 내면화하는 구도자적 자세, 또한 이러한 차원을 신앙 공동체에게 전해주는 “신비전수가”(mystagogue)로서의 기능을 외면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삶은 “빈들의 마른 풀”같이 메마르게 될 것이고, 갈급한 심령들은 왜곡된 신비주의, 즉 기복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신비주의적 신앙추구에 더욱 빠져들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은 어찌 보면 가장 “기본”이 되는 일들을 뒷전으로 한 채, 겉으로 당장 드러나 보이는 목표들을 성취하려고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달려온 “정신없음”에서 비롯할 수도 있다고 느껴진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려가지만(빌 3:13-14),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영성 훈련”의 중요성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기에 바울은 초기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깨어 있든지 자든지”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특성이라고 단언하였고, 후기 서신인 로마서에서도 우리 존재의 어느 일부가 아닌 “몸”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기독교인이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살전 5:10; 롬 12:1). 자신의 모든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생활이야말로 바울의 선교와 목회 사역 전체에 초지일관 흐르고 있는 기본이 된다는 점에서 바울의 영성 훈련을 추적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 번 근본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일상적 영성 훈련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두 가지 관념 때문에 바울의 개인적 영성생활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나는 이신칭의 교리이다.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은 개신교의 교리적 주춧돌이 되어왔다. 그러다 보니까 바울이 동시에 인간의 행위와 영성 훈련의 중요성을 얼마나 심각하게 강조하였는가 하는 것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전 5:6)는 말씀처럼, 바울은 개인과 공동체의 상호 의존성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 대한 연구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압도되어서, 개인적 차원의 삶에 대한 관심은 거의 부각되지 못하였다. 바울은 공동체가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개의 구성원이 모여 튼튼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도자인 자신부터 개인적으로 영적 생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고전 11:1; 살전 1:6).
무엇보다도 바울의 영성 훈련을 엿볼 수 있는 본문은 다음과 같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egkrateuetai)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5-27). 바울은 자신이 열성적으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교와 목회 활동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입증해주는 안전망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고린도 교회를 교육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로마서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강조하기보다는(롬 5:16,21),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집중적인 절제의 훈련을 강조한다. 이 “절제한다”는 동사는 바울이 실천하는 영성 훈련의 내용 즉 “금욕적 훈련”을 암시한다(이 동사는 성적 금욕과 관련되어서 고린도전서 7장 9절에 단 한 번 더 나타나고, 신약성서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바울이 영성 훈련에 대해서 어떠한 한 가지 방법을 절대화하지 않고(고전 7), 일반적인 금욕적 생활에 대해서 자세한 안내서를 제시하지도 않지만, 초기 기독교의 금욕주의 운동을 논할 때 흔히 사용하는 세 가지 지표, 즉 소유, 음식, 성 생활을 지표로 해서 바울의 개인적인 영적 생활을 추적해 볼 수 있겠다. 우선 바울은 노동하는 장인이었다. “천막을 만드는 자”(행 18:3)로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고 말한다(살전 2:9). 이러한 장인 생활은 도시 빈민의 절대 빈곤과는 다른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밤낮으로 일해야만 하는 계층에 속하였다. 바울 자신이 당시 많은 철학자들처럼 귀족 집안의 거주 교사로서 물질적으로 보다 안정된 생계를 꾸려나가는 흔한 길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질적 결핍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도의 생활은 일종의 자발적인 금욕적 행위로 볼 수 있다. 목회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교회의 도움도 거절하였다(고전 9:12). 그러나 그의 노동의 목표는 복음의 효과적 전파를 위한 “독립”적 삶이었으며, 가난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교회들의 선물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았으며(빌 4:15-16), 자신의 물질적 상황을 통해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것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고 고백한다(빌 4:11-13). 다음으로 바울의 식생활을 보면, 그는 금식 자체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먹지 못하고, 주리고, 굶는”(고전 4:11; 고후 6:5; 11:27) 경우를 언급하지만, 이것은 금식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선교 활동에서 견디어 내야 했던 난관의 일부로서의 배고픔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음식에 대한 태도를 고린도전서 8장 8절에서 추측해볼 수도 있다:“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바울이 성적으로 금욕의 생활을 하였고, 그의 사도적 생활 전체에 걸쳐서 독신으로 지냈다는 점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고전 7). 그는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 반문한다(고전 9:5). 그러나 그의 성적 순결의 삶은 관계성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남녀 선교 동역자들과의 관계에서 신실하고 풍요로운 우정의 삶을 풍성하게 누렸고(롬 16),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소위 양성적 권위를 통해서 목회적, 교육적 관계를 심화시켰다(살전 2:7,11).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삼대 복음서 원리라고 알려진 순종, 청빈, 순결은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일화에 기초하였다고 한다. 영생을 얻기 원하는 부자 관리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자 근심하고 떠나는 그를 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데서 이러한 원리들을 유추하였다는 것이다(눅 18:18-30). 그러나 바울 서신에 대한 고찰은 바울이 세상 속에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는 활동적 삶 속에서 이미 이러한 원리를 일상적으로 또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고 살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목회신학자 홈즈(Urban T. Holmes)는 성직안수 신학(the theology of ordination)을 추구하려고 할 때에 이러한 금욕적 훈련들이 그 자체가 결코 목적이 아니며 또한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도 없지만, 목사의 전문적 훈련을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도구적 수단으로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도, 자기 성찰, 분별, 그리고 기독교적 사고
기도가 바울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바울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기도는 영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는 점이다:“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바울은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친다(고전 14:19). 또한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고는 기도가 보다 전인적인 자기 성찰과 분별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살전 5:17). 바울은 정신 발전과정에 있어서 소위 “단계”에 대해서나, 또한 “양심“(고후 1:12; 4:2; 5:11)과 개인적 ”판단“(고전 10:15; 11:13)에 있어서 미리 결정된 안내지침을 주지는 않지만, 십자가 사건에 기초한 새로운 인식론적 상황에서 유래하는 자기 성찰과 분별력에 대해서는 여러 모양으로 강조하고 있다.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고후 2:17; 4:2; 12:19) 일종의 내면화된 자기 성찰의 훈련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또는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살전 2:4). 그러므로 바울은 성만찬에 임할 때에도 “자기를 살피고”나서 임하라고 권고한다(고전 11:28). 자신을 “살피는 것”은 주께 판단받지 않기 위함이다(고전 11:31).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믿음 안에 서 있는가 스스로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고후 13:5).
바울에게 있어서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말하고(고전 14:18) 삼층천에 혹은 낙원에 다녀오는 신비체험의 경험이 있으면서도(고후 12:2,4),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생각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사탄은 기독교인들의 절제력 부족을 이용하기도 하지만(고전 7:5), “생각”(noema)을 공략한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다. 사탄은 믿는 자들의 생각을 유혹해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게 한다(고후 11:2-3). 사탄은 불신자들의 생각을 경직시키고 가리우는 일을 통해서 그들을 조정한다(고후 3:14; 4:4). 사탄은 신자들의 허를 지르거나 혹은 속일 수 있는 자기 고유의 생각 혹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후 2:11). 그러므로 사도의 임무 중 하나는 신자들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를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고후 10:5). 바울은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자들의 마음과 함께 생각을 지키도록 기도한다(빌 4:7). 그러므로 사도는 공동체를 사탄의 공략으로부터 보호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하도록 하며, 사탄이 신자들의 의지적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적/지적인 차원을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신앙공동체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논쟁적 상황 속에서지만 바울은 심지어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지식에 뒤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11:6). 물론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하는 사도적 사명을 위해서 사용된다(고후 10:4-5). 이렇듯 바울이 기독교적 “생각”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알버트 슈바이처는 바울을 “기독교적 사고의 수호성인”이라고까지 불렀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
공동체의 영적 안내자로서 바울은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앙의 길을 제시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thanatos)은 단순히 신체적 종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난 피조 세계의 모든 세력을 가리키는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5:18-19; 6:23; 8:19-22). 죽음은 묵시문학적인 종말의 전쟁에 있어서 의인화된 마지막 장애물이다(고전 15:25-26).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를 인식하면서도 우리는 바울이 자연적인 생명의 단절에 대해서 보인 태도를 찾아낼 수 있다. 바울의 고난은 종종 유사 사망 경험(near-death experience)에 근접하였는데(고후 1:8-10; 6:9; 11:23; 비 4:16-5:15; 7:10), 죽음의 권세를 이김으로써 생사의 경계를 초월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바울은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였다(고후 5:6-9; 빌 1:21-24).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바울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실재는 자신의 생사가 아니라 주님이었다. 그러므로 “거하든지 떠나든지”(고후 5:9), “살든지 죽든지”(빌1:20), “깨든지 자든지”(살전 5:10), “먹든지 마시든지”(고전 10:31), “미쳤어도… 정신이 온전하여도”(고후 5:13)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걸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지라는 확신이 바울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생사의 경계가 무너져 상호 회통하는 경지에 이른 바울의 의식의 지평을 보여준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고전 15:31; 비. 고후 4:10-11; 갈 2:20; 빌 3:10).
맺는 말
중세의 위대한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은근히 사도 바울을 폄하하였다:“교사들은 사랑을 찬미하면서 위대한 말들을 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1-2)라고 말한 사도 바울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초연함(detachment)을 모든 사랑보다도 높이 찬양한다. 첫째, 사랑에 있어서 제일 좋은 점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나를 몰고 간다는 점인데, 초연함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도록 하나님을 몰아간다… 둘째, 내가 초연함을 사랑보다 찬양하는 이유는 사랑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겪어내도록 하지만, 초연함은 내가 하나님만을 받아들이는 경지로 나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는 바울의 “사랑”은 이 세상에 대한 감각적 집착과 심지어 자신의 죽음으로부터도 “초연”한 굳건한 영성 훈련의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바울이 강조한 기독교적 사고와 분별력은 한국교회 공동체나 지도자 모두에게 절박한 훈련이라고 보여진다. 20세기 초반에 한 선교사는 한국교회를 분석하며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말을 유창하게 잘하지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능력이 약하고, 질문의 가치에 대해서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관찰하였다. 목회자는 교회 내적으로는 교인들의 영적 지도자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정신적 지도자들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모든 논의가 극단적인 종교현상처럼, 즉 교리주의적, 흑백논리적 대립으로 진행되며, 특히 사이버 공간에서 진행되는 무분별한 공격적 언사들은 개개인의 정신적 독립성마저 짓밟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우려가 들린다. 혹자는 지성인이 죽은 사회라고 한탄한다. 목회자는 사회적으로 종교적 지도자이며 또한 지성인이 아닌가. 올해 봄에 실시한 어느 신학연구소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3% 이상이 “우리 주변에 품위와 자격이 없는 성직자가 너무 많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명화와 전쟁과 그리고 목사님들은 멀리서 볼수록 좋다는 냉소적인 농담들도 오간다. 한국역사 속에서 훌륭한 목사님들이 교회를 포함한 사회의 지도자로서 쌓아오신 공적의 탑은 어디에 가고 오늘날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바울에 의하면 뜨거운 성령의 체험은 신앙 안에서 지성적 사고와 분별력을 동반한다. 영성과 지성의 지나친 이원론적 분리는 “기저귀 신학(Diaper Theology)”에 교인들을 묶어 놓고 목회자들을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롬 12:2).
중세 신비가들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여서 더 깊은 신앙의 자리에 이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삶의 자리는 그 자체가 “어두운 밤”이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저해하는 제도화된 조직사회, 자본주의의 물신 숭배, 개개인의 고유한 가치를 도외시하는 소비문화적 관계양식, 비인간적 경쟁에 기초한 성공제일주의 등 현대문화가 지닌 어둠의 그림자는 정치적 경제적 스트레스와 함께 한국의 현대인들을 소외시키고 질식시키고 있다. 성장제일만을 목표로 하면서 교인 개개인들이 처한 현대성의 “사막”에 대한 통찰이 없는 “교회주의”(churchianity)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교회가 지닌 문화변혁의 사명은 우선 교회 속으로 깊이 침투해 있는 현대문화의 병폐들을 변화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신앙 공동체의 문화 변혁은 기독교인 개개인의 인간성의 치유와 전반적인 삶의 변화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변혁은 목회자들이 성숙한 신앙적 인간성의 표징이 되는 데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목회는 향기”라는 것을 깨달으셨다는 어느 은퇴 목사님의 고백이 생각난다. 목회라는 종합예술의 기본은 목회자의 향기로운 인격이라는 여운을 남기는 말씀이었다. 모쪼록 바울의 영성생활에 관한 본문의 고찰이 어둠 속에서 빛이 되어야 하는 목회자들의 생활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