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 없는 꿈/김행숙-
어떻게 하면, 당신이 원하는 꿈을 꿀 수 있을까? 물결처럼 베개를 높이고, 낮추고......
나는 당신이 꾸는 꿈을 꾸고 싶다. 밤새 내가 하는 일은 잠든 당신의 얼굴을 뜯어보듯 관찰하며,
파고들듯 탐구하며......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얼굴을...... 파헤치고 싶다.
삶이 우리를 서서히 갈라놓았다면 죽음은 우리를 와락 끌어안을 것이다. 삶이 죽음을 모르는 만
큼 죽음도 삶을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단단한 씨앗 속으로 다시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뿌리가 제 꽃을 모르는 만큼 꽃도 제 뿌리를 모르는 것이다. 그
것은 별빛이 별빛에 닿듯 까마득히 먼 거리인 것이다.
당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느껴보았다. 쿵, 쿵, 쿵......
계속, 계속해서 그것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오른발이 없어지는 동안에 왼발이 생기네, 왼
발이 없어지는 동안에 오른발이 생기네, 오른발이 없어지는 동안에......
쿵, 쿵, 쿵...... 그것은 폭설처럼 거칠고 깊은 잠에 빠진 어느 마을을 빗장처럼 가로지르며 홀로
걸어가는 복면한 도둑과 같은 것이다. 계속, 계속, 계속해서 그것은 저쪽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훔친 물건을 되돌려주기 위해 다음 날 밤을 기다리게 될 도둑이 있었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
은......
어떻게 하면, 당신의 담장을 넘어 당신이 원치 않는 꿈을 꿀 수 있을까? 당신의 목구멍을 긁으며
마침내 빠져나오는...... 저 한 자루 과도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달콤한 액체를 나는 맛보고
싶다.
과연 당신은 그곳에 무슨 열매를 깎아놓았을까. 나는 당신이 꾸는 꿈을 꾸고 싶다.
당신의 꿈속에서 내가 모르는 내 얼굴을...... 죽이고 싶다. 붉은 껍질을, 붉은 껍질을...... 하염없
이 떨어뜨리고 싶다.
꿈속에서 나는 늘 진지했다. 꿈속에서 나는 한 번도 농담을 한 적이 없다.
-한여름 밤의 꿈/김지요-
깜깜한 바닷가, 밤 한 칸을 빌린다 후줄근해진 여자가 부려진다 지친 저녁을 실어 나르는 바퀴
소리들 배경으로 깔린다 간간이 파도소리가 발가락을 간질이고 아스팔트 위 누각엔 잠이 고이
지 않는다 카톡 카톡 토막 난 잠,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소스라친다 여자는 파도소리와 뒤엉키며
무시로 체위를 바꾼다 또 다시 벨소리 남자는 남자의 말을 여자는 여자의 언어만을 쏟아낸다 다
른 행성에서 온 교신처럼
치사량의 온기를 위해 여분의 베개를 부탁한다 여주인은 소란스러운 이 별에 숨어든 자가 없는
지 힐끔, 방안을 스캔한다 베개를 끌어당겨 안는다 애써 아름다운 해안선을 상상한다 졸리운 물
살이 종아리에 차오른다 아이들의 비명이 귓바퀴를 찌른다 터질 듯 한 고요와 간헐적 소음이 샴
쌍둥이처럼 얼굴을 바꾼다 책을 읽는다 덮는다 차라리 밤바다로 뛰쳐나갈까 생각한다 여자, 남
자, 밤, 섬, 혼자
지리멸렬한 무대, 지상에서의 ‘쉼’을 꿈꾸는 그녀의 모노드라마
-꿈속의 꿈/김형영-
어젯밤 꿈속에서 사랑한 그녀가
옛날 그 소녀였던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여자였던가.
아니면……
(꿈은 빠르기도 하지.)
깨어보니 알다가도 모르겠네.
꿈속에서 내가 사랑한
그 소녀도 꿈속에서 나를 사랑했을까.
꿈이 현실 같다고 아무리 우겨도
꿈속에서 꿈을 꿀 때면
하느님과 닮으려는 나도
미카엘의 꿈을 꿀 수 있으련만.
오늘 밤엔 꿈을 기록해봐야지.
휴대전화를 꺼내 동영상에 남겨놔야지.
놀라운 일이지만
꿈을 현실로 바꿔봐야지.
-꿈만 같은 날/이명자-
기장 연세요양병원 305호
배처럼 떠있는 침대에서
종일 출렁거리는 엄마
멀미를 하고 토하고 꼬꾸라져
울다가 웃다가
여기가 고향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잠들지 못하고
허공에서
불을 지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내일은 일어나 들에 갈 거라고
천수경이 너덜너덜 닳아지도록
기도하는 우리 엄마
마을 사람들 모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사는
지금이 꿈만 같다고
맑은 눈물을
내 손등에 떨구어주신다
-꿈결과같이/정현종-
맑은 저녁 석양에
하늘의 구름이 발그레하여
너무 이뻐
그 빛깔 하나로
이 세상이 액면 그대로 딴세상인데,
다시
그 우주적 숨결의 가락
그 자연의 채색의 비밀 아래로
인간 석양 하나 걸어가면서
오래된 시간의 속삭임을 듣는다
오랜 시간의 지층이 그 스스로를 듣는 듯이.
그 속삭임은 깊은 눈동자
그 눈동자는 깊은 속삭임이거니
그러한 오래된 시간의 육체가 느끼는
마음 안팎 사물의 실감이여.
보는 일이 광활하여 아득하고
듣는 일이 또한 심연이며는
그 실감에 닿을 수도 있으리.
그렇게 안팎이 모두 아득한 데를
나는 걸어간다 꿈결과같이.
-돌연사를 꿈꾸다/박미라-
강진 백련사로 동백꽃 보러 갔지요
꽃은 이미 지는 중이어서 길 위에 낭자합니다
너무 늦게 온 나는 고개 푹 숙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있었습니다
죽음이 이만큼만 황홀하다면
서슴없이 그대를 버릴 것도 같습니다
듣기로는 이맘때면 동백나무 숲에서
수상한 울음소리 들린다고 해요
울고 있는 것이 나무인지 꽃인지 혹은 둘이 함께인지
모르지요 강진 앞바다를 떠돌던 다산의 혼백이
밤바람을 핑계로 다녀가는 길인지도 모르지요
한 시절 정인으로 살았던 그의 발목에 매달려
나 아직 이렇게 울울창창하다고
어린애처럼 눈물 뚝뚝 떨구는지도 모르지요
사실은 꽃도 잎도 다 그만두고
다산의 흔적도 백련사 흙담장도 다 그만두고
순간을 백 년처럼 늙어 흙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지요
제 살점 뚝뚝 떨어지는 환장할 봄날을
이제 그만 견디고 싶은지도 모르지요
누구라도 선 채로 죽고 싶을 때가 더러 있겠지요
-달이 꾸는 꿈/김혜순-
달 어머니가 국을 푸신다
퍼올리는 국자마다 달덩이 하나씩
폭풍우 끝난 밤
달 아기들이 밥상 아래
둥글게 앉아 있다
그 집은 문을 닫아도
달 냄새 멀리까지 퍼지는 집
꿈 냄새 요란한 여자의 집
사람들은 꿈 속에 나타난 달
어머니에게 오줌을 누고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돼지처럼 구석으로 몰아대고
엉덩이를 때리고
달 아기들은 문 밖에서 울고
그러나 아무도 달이 꾸는 꿈
속의 꿈인 줄도 모르고
(당신의 꿈속은 내 밤 속의 낮
내 몸이 당신 꿈으로 환해지나이다)
달 어머니 탯줄을 자르시고
썰물처럼 떠나가는 날
밤 부엉이 한 마리
창밖 어두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어두운 내 몸 속을 노리고
나는 또 달 어머니 퍼주시는 국 한 그릇
빈집처럼 기다리고
달 어머니 머리 풀고 어디어디 다녀오시는지
그건 아무도 모르고
-일곱 번 꿈이 휜다/백현국-
7번 국도는 바다 쪽으로
한쪽 솔기가 터진 저문 풍경이다
소멸의 단꿈에 젖은 폐선들이 집어등을 끄고
번져오는 절망을 너그럽게 몸에 들였다
어류를 좇던 푸른 길이 닫힌 후
뚫어진 그물처럼 한평생이 새는 중이었다
포구와 이별하는 불빛들은 자꾸만 멀어지는데
동트는 새벽까지 팽팽한 닻줄을 풀었다 감는
갈매기의 날갯죽지 밑으로
일곱 번 휜 꿈을 바닷속으로 자꾸 밀어 넣었다
소금기를 벗기면 비린내뿐인 이야기들
종일 출렁거려도 지워지지 않는
파도 문신이 깊은 풍문들이다
일곱 바다를 건너야 칠금산 간다
일곱 번 꿈이 휘어야 수미산 간다
바다를 깊숙이 휘감은 동해 7번 국도는
파도 문신이 깊어 종일 출렁거린다
-후회는 한여름 낮의 꿈/천양희-
후회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가진 것이 바람 소리 물소리밖에 없어
새를 헤아려본 적도 있다
아베르 강을 생각하다
물결을 놓친 적 또 있다
한 생각이 새로이 집을 짓고
한 생각이 있던 집을 허물어
무엇을 해도 하는 것이 후회밖에 없어
나는 아직도 아픈 신발을 신고
어디로 가고 있나
그래도 하늘은 아무것도 슬프지 않고
바람은 아무것도 안타깝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춤추는 자와 춤을 구별하겠는가
햇살은 햇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무심한 한여름 낮
어느 구름이 바람때문에 흩어지겠나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궁색한 궁리를 한다 해도
내가 아무리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만 생각하자 해도
나는 계속계속 생각하게 되지
생각해보면 후회는 내가 지은 그늘 농사이기도 한 것
매미가 운다
인생이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에서.
-조신(調信)의 꿈/김인육-
꽃을 생각한다
한 열혈 사내의 최후를 생각한다
제 모가지를 뚫어 콸콸 쏟아지는 피를
뜨겁게 꽃으로 피워내던 사나이
그 처절한 격정을, 열애를, 생각한다
다 버리고, 본원마저 버리고
오로지 표적했던 단 하나의 꿈
참 우습구나
굶주리고 헐벗고 빌어먹는 동안
거추장스런 것이 바로 당신이었다니!
그 혐오의 실재가 사랑이었다니!
지우자
허무의 나, 이율배반의 나
햇볕 켜켜이 알몸으로 나를 말리자
극한으로 가벼워져서 마침내 내가 나를 잊을 때까지
간을 꺼내고
부질없이 쿵쾅대던 심장도 꺼내고
세상 앞에 무릎 꿇린 저 아귀 같은 창자도 마침내 꺼내고
하루, 하루, 가벼워져
어느 가을날 문득 투명한 바람이 되자
잠자리의 날개처럼, 나
꽃 피는 봄날의 반짝이는 여백이 되자
속절없는 한 생을 비우고
눈 뜨면 이미 아닌, 꿈의 생을 지우고
저 부신 적멸로 가자
사랑아, 너도 같이 그렇게 가자!
-장제사(裝蹄師)의 꿈/오현정-
신발이 닳아 미끄러질 때쯤 그는 말에게 신발을 신기기로 작정했다
화덕에 쇠를 달구고 취직이 안 되는 나라를 두들겼다
뜨거운 화로는 봄꽃 향에 꼬리를 들고 지려대는 암말의 생식기
벌어졌다 닫혔다 하는 꽃잎을 보자 격렬하게 날뛰는 씨 수마였다
말보다 못한 삶의 고삐를 아무리 단단히 쥐어도
희망은 귀를 바짝 뒤집고 띠꺼운 표정이었다
갈기를 늘어뜨린 말이 힘없이 울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어디가 아픈지 마음끼리 부딪히며 알았다
말굽을 깎을 때 비로소 뒷골목의 어둠이 삭제되고 세상의 밝은 무늬가 떠올랐다
눈망울이 젖은 말에게 딱 맞는 편자를 장착할 때 그는 왠지 사람이 좋아졌다
말의 이빨에 물려 멍이 들고 살이 찢어져도 재갈은 감추어둔 채
어마어마하게 큰 무엇이 되고 싶었던 야생의 망아지 같았던 그
1초도 채 안 돼 사라져버리는 신기루마냥
단단해진 말의 가슴과 엉덩이를 흐뭇이 쓰다듬었다
너무 간절해서 긴 목으로 두 눈을 높이 매단 짐승 한 마리
제 자신보다 훨씬 멀리 내다본다는 걸 알았다
-봄날의 꿈/박해옥-
춘정에 몸을 꼬는 햇살들
노란 새 옷에 배시시 눈웃음치며
냉큼 들어와 단풍색 카펫에 들어 눕는다
아슴 아슴 봄 햇살에
돌 축담 사이 연산홍 처럼
바람난 햇살에 몸을 내줘 버렸다
그대의 눈빛은 새물내가 나는구려
그대는 올 봄도
서랍속 수퍼더블 복권처럼
내 가슴을 설레게 할건가요
내가 아직 새새스럽긴 하나
성질이야 어련 무던하니
멧부리 만치야 그대를 탐하리까
우듬진 계곡에 촉촉히 운무가 내리고
산내리 바람이 사랫길 다다르면
농부의 자부지에도 줏대잡이 되어주고
모듬살이 서러운 사람들
드잡이질 않게 해주오
따끈하니 조악거리다
섶벌처럼 햇살 떠나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회벽의 오후
앞마당 목련나무도 삐죽대는데
후림 비둘기 쏘삭거림에
우선하다 싶던 속알이 다시 동티나
푸리죽죽한 풀섶에
다시 우루루 몰려드는
방파제 새벽 안개 같은 봄날의 꿈이여
-꿈/김미옥-
어느 날부턴가 거실 벽에 붙은 뻐꾸기시계가 울지 않았다
나는 뒤 뚜껑을 열고 울음을 집어 넣는다
그제야 뻐꾸기는
뻐꾹 뻐꾹……
나는 맞은편 소파에 누워 뻐꾸기 소리 들으며 잠이 들었다
밭둑에 칡넝쿨 서리서리 엉켜있었다
메밀꽃이 별처럼 고왔다
감나무 아래가 어둑어둑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무얼 잡수시는 것일까
개미가 까맣게 어머니의 발등으로 모여들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무논에서
아버지가 허리를 묻고 계셨다
하늘은 군데군데 파랗고 구름은 군데군데 발갰다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뻐꾹 뻐꾹……
“엄마~! 밥 주세요”
뻐꾸기 같은 아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다
-꿈이니까/김개미-
꿈을 꾸는 게 좋아
꿈속의 나는 거울 속의 나와 달라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내 부모라서
나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아
가짜라서, 사랑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생기지 않아
꿈을 꾸는 게 좋아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
일이 잘 안 돼도 울지 않아
여기 이 시간 이 나라가 아니라서 좋아
신처럼 공중에 떠서
세상을 내려다보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 없어
꿈을 꾸는 게 좋아
집이 활활 타도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면
꽃을 가꾸는 엄마가 있어
귀신에게 잡아먹혀도 죽지 않고
빨간 자두를 치마폭 가득 담아
꿈을 꾸는 게 좋아
물이 펄펄 끓는 솥에
아빠를 밀어 넣고 솥뚜껑을 닫아도
진짜야,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가짜 아빠가 술을 마시고 진짜 아빠가 되면
새로운 가짜 아빠가 내 앞에 나타나
-식물의 꿈/이현호-
삶을 이렇게 슬프게 만들 때
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잭 케루악, 「길 위에서」에서
이유는 묻지 않을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각의 슬픔이 있다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밤새 손가락 한 마디쯤 자라 있는
식물의 기묘함 같은 것
유독 눈을 끔벅이지 않고 우는
네 얼굴은 어느 슬픔의 사투리일까
내게는 겨울이면 동쪽 바다를 찾는
내 것만의 비통이 있고
우리에겐 서로의 짭조름한 입술을 훔치던
그 여름밤의 기도가 있다
너를 슬쩍 알아챈 적도 있었다, 새점(占)을 보듯이
신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는 어린애처럼 인간을 붙들고 있다고 믿은 때가 있고
네가 내게 짓는 말은 신이 사람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지만
묻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우리에게는 발목을 묻고 사는 각자의 습지와
저마다의 귓속에서 곤잠을 자는
신의 옹알이가 있어
왜 그러느냐고 이유도 없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이
곁을 더듬대는 꿈을 번갈아 자주 꾸었을 뿐
똑바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만 물을 삼키는 관엽식물의 기묘한 표정을 알아듣는다
-고양이의 꿈/이장희-
시내 위에 돌다리
다리 아래 버드나무
봄 안개 어리인 시냇가에 푸른 고양이
곱다랗게 단장하고 빗겨 있소 울고 있소
기름진 꼬리를 쳐들고
밝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지요.
푸른 고양이는 물오른 버드나무에 스르르 올라가
버들가지를 않고 버들가지를 흔들며
또 목놓아 웁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칼날이 은같이 번쩍이더니
푸른 고양이도 볼 수 없고
꽃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저 쓸쓸한 모래 위에 선혈이 흘러 있소.
-나쁜 꿈의 행방/강윤미-
나쁜 꿈을 꾸는 동안
꿈만 빼고 모든 것들은 정말 나쁜 것이 된다 잠은
점과 점을 이어 길을 만든다
나쁜 외계인 나쁜 괴물 나쁜 옛 애인
나쁜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나를 잊고
정말 나빠지고 싶어 발버둥 친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은 소용 없다
목을 조르고 손과 발을 침대 기둥에 묶어버리는
착한 엄마를 이겨야 끝나는 게임
이곳에선 선하고 어여쁜 것들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나쁜 것들이 이제 나쁘지 않게 된다
내 몸은 온갖 얼굴을 가진 동물이 되어
가장 이상적인 나쁜 세계를 향해 구부리고 밀치고 매달린다
나뭇가지의 숨을 서서히 죽이며 타고 오르는 덩굴 잎
채식주의자만 있는 식탁에서 나는
손에 흐르는 피를 묻히며
고기를 굽고 튀기고 볶고 익혀낸다
꿈에서 깨면
죄책감이 갑자기 생겨날까 봐, 한 번 더 잠을 깨워
나쁜 꿈이라는 보자기에 나쁜 꿈을 동여맨다
점과 점으로 뒤엉킨 어여쁜 나의 나쁜 꿈을
언젠가 풀 수 없다는 마음으로
나는 풀고 있다
-꿈아, 무정한 꿈아/ 노혜봉-
젖은 베 행주 (외할머니 눈물로 젖은 마음골짜기 같은), 마른 면 행주 (외할머니 바짝 마른 하
얀 젖가슴 같은), 빨락 종이, 가위. 반질한 맏물고추를 도마에 놓고 위 아래로 알맞게 잘라낸다.
원기둥꼴이 된 붉은 고추의 안팎 칼자국이 다른, 뱃속까지 잘 익은 노란 꿈씨를 털어낸다.
독립운동 힘 보태는 남편한테 노잣돈 넉넉히 챙겨 보내지 못했던 일에 늘 싸아한 가슴, 고추 살
을 겹쳐 놓은 채 칼로 가느다랗게 채를 썬다 매운 냄새가 코끝까지 아리다. 바람처럼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남편의 입맛을 위해, 좋아했던 준치 민어 생선조림, 물쑥나물, 말린 가지나물, 그
위에 몇 올 올려놓았던 동글동글한 실고추들, 손끝들.
(꿈아, 꿈아, 무정한 꿈아, 오시는 님을 보내는 꿈아, 잠이 든 나를 깨워나 주지)
뼈 저릿저릿 치운 세월도 은발에 하얗게 삭은, 할머니의 간절한 가위질은 그리움 달래는 싹둑
'소리, 실고추 갈무리 해 둔 금빛 같은 시간들이 마련한 속 소리도 들린다.
올해가 광복 70돐. (바이올린을 잘 켰던) 외할아버지 이름은 잊혀진 꿈 속 사진 두어 장뿐, 블
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빠른 흘림체 마지막 편지 한 통뿐, 행방불명 된 흔적들.
문구점에서 내가 사 온 빨락 종이는 꼬깃꼬깃한 백년의 시간을 알뜰살뜰 비쳐준다, 한결 맵게
채쳐 갈무리 할 것들, 상스럽다. 희나리 지스러기는 제쳐 버리고, 맛깔스럽게 마음에 간직해 둘
저 멋, 제 둘레를 동글동글 붉게 물들일 예스러운 차림, 실고추.
-나무, 연어를 꿈꾸다/백소연-
햇살 한 줌 기이다란 그림자 들어 올린다
비탈에 선 사람주나무
동파에 찢긴 겨드랑이 사이로
텃새 한 마리 푸두둥 날아돈다
한 번의 비행 위해 수백 수천 날개 짓 번뜩인다
온몸 밀어 올린 목안 잠긴 말
바람 찬 칼날 에워싼다
유연은 필연의 연속적 주체이어서
홍안에 싸인 문장 건너다보면 공중 부양하는
질깃한 활화산 온통 적멸보궁이다
늑골 가득 광풍 지나간 흔적 역력한 능선
나도 한때 한 폭 걸음 미끌려 계곡 깊었을까
셈이 급한 중량 그늘 아래 우뚝우뚝 멈춰 선다
저마다 행선지 알 수 없는 휘우듬한 것
캄캄한 잠 찢는 뿌리 깊은
우듬지, 부활을 꿈꾼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