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기의 똥구멍을 핥는 “하양허씨 문경공파 종친회” cafe지기 허동순
2010.3.16 동 까페에 김문기선생 충의론이 실려 있다.
이 글의 내용은 김문기의 후손(김녕김씨 충의공파)들이 줄창 주장하는 것으로 허동순씨는 세조실록을 심도있게 연구하여 기록을 날조하고 억지 찬양을 늘어놓았다.
허동순씨는 하양허씨 문경공파 까페의 까페지기 인 것을 보면 허조의 후예인 듯한데 그렇다면 김문기와 허조가 찰 사돈 간이었다는 그 인연을 돈독히 지켜나가기 위해 김문기를 훌륭한 인물로 추켜세우는 일을 했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김문기후손들은 현대사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고
앞으로도 상당한 힘을 가진 가문으로 본다면 그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은 하양허씨네 가문에도 보탬이 되면 되었지 손해를 볼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은 뻔한 노릇이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다른 한 면을 간과한 면이 있다. 즉 사육신후손들에게 있어 김문기와 그의 후손들은 사육신을 욕보이고 능멸한 인물로 타도의 대상 이라는 사실을 지나쳤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김문기를 훌륭한 인물로 부각시킨 일은 김문기 후손들에게는 매우 잘한 일이지만 사육신후손들에게는 절망과 슬픔과 분노를 안기는 결과가 되었고
타도의 김문기와 함께 허동순 여도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충의론의 중요부분들에 대한 날조된 내용을 들춰보고자 하는데
이로서 김문기는 또다시 추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는 슬픈 날이 되는 것이다.
하양허씨 문경공파 종친회 김문기 선생(사육신) 충의론 - 허동순
○ 추강의 저질잡지 육신전
① 남효온(南孝溫)이 잘못 전(傳)해진 일부야언(一部野言)을 적어 육신(六臣)전(傳)을 이래(以來) 동(同)육신(六臣)전(傳)은 상하(上下)에 널리 읽혀졌습니다.
육신전(六臣傳) 유응부장군조(有應孚將軍條)는 이에 이어서 “서생(書生)들과 동모(同謀)한 것을 한탄(恨歎)하면서 물어볼 말이 있으면, 저 짐승같이 쓸모없는 선비들한테나 물어보라 하고 끝내 입을 다물고 불복(不服)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응부장군(兪應孚將軍)은 같은 분 입장(立場)에 누구보고 짐승 같다느니 쓸모없는 선비라느니 할 처지(處地)가 못됩니다. 이는 육신전(六臣傳)의 날조(捏造)된 집필(執筆)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소설도 아닌 근거(根據) 없고 추잡(醜雜)한 잡지(雜紙)였다고 보아야합니다.
- 남효온의 육신전이 떠도는 풍문만을 근거로 지어진 글이고 날조된 집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추잡한 잡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라고 하며 최악의 평을 했는데.
허동순씨는 추강 남효온선생이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고 그분의 저술인 추강집이 추잡한 잡지 정도였다는 판단의 근거는 무엇이며, 그럴만한 평가를 할 자질을 갖췄다고 생각하는가?
남효온은 세조의 왕위찬탈 패륜에 대해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생을 시문으로 주유했던 조선시대의 최고 선비이며 추강집은 중종대왕이 편찬하도록 하명할 만큼 선비들에게 정신적 교육적가치가 있는 글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느냐?
정조대왕 15년2월21일 어정배식록을 작성하는 실록에서 “문정공 남효온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문종비의 능)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 시키겠는가’ 하였습니다” 라는 기록을 남기면서 남효온과 그의 저서 육신전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그뿐이랴!
정조대왕은 육신전의 오류설에 대해 “성삼문은 아들이 다섯으로 큰아들이 원(元)이고, 유응부는 아들은 없고 딸을 둘 두었다고 하였는데, 삼문이 아들 다섯을 둔 것은 사실이나, 실록과 혼기에 실린 바로는 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없으며, 응부의 아들은 이름이 사수인데도 아들이 없는 것으로 쓰여 있다. 유성룡(柳成龍)이 ‘전해들은 말을 기록하다보니 오류를 면치 못하였다’고 말한 것도 대개 이러한 유형일 것이다.”라고 홍재전서에 기록으로 남겼다면
여(汝)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해설인가!
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8.11.11 편사기획실-800호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가 낸 민원에 대한 회신문에서 “유응부가 김문기로 바뀐 것이라면,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은 후로 500여 년간 이에 대한 오류지적이 없을 수 없다고 봅니다. 유성룡이 추강집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육신의 구성에 오류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했다.
이런 자료를 보면서 여의 생각은 어떠한가?
○ 육신명단 환원결정
② 결론(結論)이상(以上), ⑴, ⑵, ⑶항의 사료(史料)에 전거(典據)하여 판단(判斷)하건데 충의공(忠毅公) 김문기선생(金文起先生)를 현창(顯彰)하여야 된다고 사단(私斷)함.
-1977년 9월22일의 국사편찬위원회 회의 결론인 것은 맞다.
그러나 2008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관련 민원 회신문에서
7/15 편사기획실-405호. 9/16 편사기획실-645호. 10/2 편사기획실-706호.
10/2 편사기획실-709호. 11/27편사기획실-839호. 12/18편사기획실-899호.
2010.4/20 편사기획실445호 등 문서에서 김문기를 사육신과 같은 공적이 있다는 것이고,
사육신으로 판정한바 없고, 사육신이 아니라 삼중신의 한사람이다. 사육신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6인입니다.는 공식 의견을 제시하였다.
1977년 김재규의 억압에 의해 국사편찬위원들이 벌벌 떨면서 결론을 낸 것에 대해
사육신이라고 판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 국사편찬위원회의 최종결론을 몰랐는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하나? 말해보라!
○ 김문기 인품
③ 기우(氣宇)가 굉대(宏大)하고 천성(天性)이 고매(高邁)하며 성품(性品)이 통달(通達)한 달인(達人)이고 언어(言語)도 선(善)히 하며(문종실록(文宗實錄) 원년(元年) 정월(正月) 병오(조丙午條) 참조(參照)) 악(惡)을 미워하여 부정(不正) 불의(不義)를 용납(容納) 않는 강직(剛直)하고(문종실록(文宗實錄) 즉위년(卽位年) 9월(九月) 기미조(己未條)) 청렴(淸廉)하여(그의 遺詩(유시)에 사괴잔년빈차병(史愧殘年貧且病)이라 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김문기의 인품에 대해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버금가는 최고의 찬사를 붙여 보았지만 그 역시 실록을 날조해 해석한 것임을 스스로 알 것이다.
이 글에서 문종원년 9/18(기미 조)에 김문기 성질악(金文起 性疾惡)을
‘악을 미워하는’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한 해석이다. 정부의 고위직에 있는 선비치고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악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굳이 이 문구를 쓸 필요는 없는 문구인데 이날의 기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김문기는 천성이 고질적으로 사악하고’ 라는 해석이 맞다. 회의석상에서 혼자서만 말하고 이의가 있을 때는 반드시 말로서 이겨야 하고 주위에 남이 없는 것같이 했다. 는 문구와 연계해 보라.
사악하다는 해석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또, 세종3년 4/9 실록-권총의 재산을 탈취하려 했다는 기록,
문종2년 3/28 실록-천성이 탐하는 마음이 많아 재산이 많다는 이효경의 아들을 사위로 삼았다,
단종 즉위년 10/1 실록-황보인에게 아부한 연유로 양계지방의 중책을 맡았다. 고 해서 재물에 탐심이 많았고 아부를 일삼았음을 볼 수 있다.
그 뿐인가! 세종32년 윤1/17 실록-문기의 사위는 이효경의 아들인데 효경이 원래 미친병이 있어 그 아내가 음란하여 그 아우의 남편 이군생과 사통하였고 또 종놈과도 사통하였으므로 헌부에서 듣고 탄핵하려 했는데 문기의 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기도 또한 간통하였다.” 이 말인즉
김문기 딸의 시어미가 이군생은 물론 종놈들하고 간통하여 처벌하려 했으나 김문기가 사돈이고 더구나 김문기가 딸의 시어미와 간통한 일도 있고 해서 처벌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고금소총에나 나올법한 얘기지 않는가?
더 가소로운 것은 아들의 장모와 간통했다는 사실이다.
단종원년 9/27 실록-金文起 放浪不謹 以其子 娶權聃之女 乃聃潛通于 前妻朴氏所生也
김문기가 방랑기가 있어서 행동에 조심성이 없었다. 그 아들로서 권담의 딸에게 장가들게 했는데 이에 권담의 전처 박씨에게 가서 몰래 간통하여 낳은 딸인 것이다.
몰래 간통해서 낳은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외에 김문기의 딸(이효경의 며느리)이 시어미의 일이 처벌되지 않는 것을 보고 음경이 크다는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음탕한 짓을 했다는 수많은 기사는 소개하지 않겠다.
이런 사실이 왕조실록에 전해지고 있는데 고매하고 어떻다고 한다 해서 덮어질 수 있는 일이냐?
이 기사는 당시에 시중에 나도는 풍문이 함께 했던 일인데 이런 소문을 남효온이라고 왜 못 들었겠는가?
이런 파렴치하고 엽기적인 패륜아를 어찌 충신반열에 넣어 사육신속에 넣으며 ‘대현의 이름을 인멸 시키겠는가’를 외칠 수 있었겠느냐?
○ 단종복위운동 전말
④ 단종(端宗)때 형조판서(刑曹判書)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당해 반수양파(反首陽派)로 몰렸습니다.(육신사건(六臣事件)으로 순절(殉節)한 분 중 계유정난(癸酉靖難)때부터 반수양파(反首陽派)로 몰린 유일(唯一)한 분) 그러나 이징옥(李澄玉)의 난(亂)이 일자 그 평정(平定)의 책임(責任)을 맡은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나가 국방(國防)에 공(功)을 세웠습니다. 세조(世祖)때는 공조판서겸(工曹判書兼)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 심묵(沈黙)을 지키면서 단종복위모의(端宗復位謀議)를 주도(主導)하다가 逮捕(체포)되어서는 세조(世祖)의 모진 고문(拷問)에도 홀로 끝까지 굴복(屈服)하지 않고 폐구불답(閉口不答) 불복(不服)하고 처형(處刑)되었습니다.
-반수양파였고 이징옥의 난이일자 평정의 책임을 맡았다.
김문기가 마치 수양대군에게 항거했던 인물인양 소개하고 있으나 계유정난시에 아무런 벌을 받은일이 없었고, 이징옥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는 것은 수양대군이 믿을만한 인물이었기에 평정임무를 주었지 못믿을 사람에게 병권을 주어 난을 평정 하도록 하는 어리석은 짓을 했겠냐?
그놈이 또다시 변방의 군대를 이끌고 쳐 내려온다면 어떻게 하려고?
-단종복위 모의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굴복하지 않고 불복 처형되었다.
餘皆服招 惟文起不服을 들춰낸 글인데 바른 해석은 “모든 사람은 죄를 불었는데 오직 문기만 불지 않았다.” 즉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당하게 모의사실을 불었고 의롭게 죽어갔는데 오로지 문기만 거사에 가담 한 적이 없노라 비겁한 묵비권을 행사했다. 는 기록이지
홀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폐구 부답했다?
가소롭다. 얼굴이 간지럽지 않냐?
○ 단종복위 운동
⑤ 팽년(彭年) 삼문(三問)과 모의(謀議)하여 가로되, 다만 자네들을 안에서 일을 실패(失敗) 없이 이루도록하게. 나는 밖에서 병력(兵力)을 거느리지. 그러면 만약(萬若) 막는 자(者)가 있은들 어찌 이를 제압(制壓)하기 어려우랴!
-이 말이 뭘 하겠다는 것인지?
이날의 거사는 그저 육신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겠다는 것 아닌가? 즉 양쪽의 눈치를 봐서 유리한쪽으로 병력을 써도 쓰겠다는 눈치작전인데 그날 김문기가 병력을 이끌고 왔다면 운검을 폐했다 하더라도 거사는 실행되었을 것이다. 병력을 동원한다해 놓고 그는 그날 어디에 있었는가?
큰소리치면서 육신들과의 약속을 저버린 배신자 아닌가?
○ 단종충신 국문경위
⑥ 만고(萬古)의 충신(忠臣)이요 특립(特立)의 의지(意志)가 있었던 김문기선생(金文起先生)만은 [역적(逆賊)은 바로 너희거늘 상왕上王(단종端宗) 복위(復位)에 실패(失敗)하였으니, 죽일 뿐 더 묻지 말라] 하고 입을 다 문체 국문(鞫問)에 응(應)하지 않고 그 모진 국문(鞫問)을 끝내 참고 마침내 불복(不服) 순절(殉節)하셨습니다.
필경(畢竟) 위 육신전(六臣傳)의 유응부장군조(有應孚將軍條)의 불복(不服)은 김문기선생(金文起先生)의 불복(不服)이 오전(誤傳)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세조실록(世祖實錄) 2년(二年) 7월(七月) 무진조(戊辰條)에는 이계전(李季甸)이 이 개선생(李 塏先生)을 통(通)하여 권유((勸誘))받고도 거절(拒絶)한 점(點)에 비추면 김문기선생(金文起先生)이 자신(自身)의 가담(加擔)을 부인(否認)하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타인(他人)의 무관(無關)함을 밝힌 외(外)는 사직도모(社稷圖謀)만을 부인(否認)하고 진술(陳述)을 거부(拒否) 하고 함구(緘口)한 것입니다.)
-여의 글에서와 같이 폐구부답 했다는 사람이 웬 말이 그리 많았는가? 비겁하게 묵비권을 행사한 사람의 행동이 충에 열을 더했다고?
惟文起不服은 부끄러운 기록임을 알고 자중해라!
육신전은 형편없는 잡지수준이라면서 유응부조의 글을 빼앗아다 김문기가 한 말이라고 우겨대는 뻔뻔함은 또 무엇인가.
육신전은 철저하게 내치고 다른 논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 원래의 사육신
⑦ 세조(世祖)는 육신(六臣)사건(事件)을 치르고 나서 이들은 당대(當代)의 역신(逆臣)이지만 후세(後世)의 충신(忠臣)이라고 칭찬(稱讚)하고, 허 후선생(許 詡先生)(문과출신재상(文科出身宰相)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때 황보인(皇甫仁) 등(等)의 효수(梟首)를 반대(反對)하고 사사(賜死)됨)가 살았더라면[육신(六臣)이 칠신(七臣)이 될 뻔하였다]고 하였습니다.(正祖實錄 14년 2月 경오조 수일..... 전고대방 권4 사화 허후조 국조인물지 97혈 허후조 이조오백년야사 17혈)正祖實錄 十四年 二月 庚午條 數日..... 典故大方 卷四 士禍 許詡條 國朝人物誌 九十七頁 許詡條 李朝五百年野史 十七頁) 이로서도 세조(世祖)때 부터 이미 육신(六臣)이 꼽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결(結)코 육신전(六臣傳)에 의하여 비로소 꼽힌 것이 아니다.)
-세조가 말했다는 후세의 충신이라든지, 허후가 살았더라면 육신이 칠신이 되었을 것이라는 실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세조실록 어디에도 이 문구들은 없다, 그러면 어디에 이 실록문구가 있는 것인지 알아보자.
정조 15년2/21 어정배식록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是月庚戌, 史臣, 考實錄還奏, 益得其詳, 編成御定配食錄 ,至是敎曰 六臣之事, 所不敢詳, 而光廟有敎, 若曰後世之忠臣
이날 경술일에 사신(史臣)이 실록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아룀에 더욱 그 자상함을 얻게 되므로 어정배식록을 편성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러서 정조대왕이 하교하여 말씀하시기를 육신 사건은 감히 자상하지 않을 바랴? 그렇지만 세조께서 하교를 두었다면 이와 같이 후세의 충신이라고 말씀 하셨을 것이다. 라고 해서 세조가 한 말이 아니고 정조가 한 말인 것이다.
또 且況光廟聖敎若曰 若使許詡在者 六臣當爲七臣
또한 하물며 광묘(세조)의 성교로 이와 같이 만약 허후로 하여금 살아 있게 놔뒀더라면 六臣이 마땅히 七臣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씀 하였을 것이다. 로 해석되는 문구인 것이다.
이문구를 인용해 뭐? 세조가 한 말이기 때문에 세조 때에 이미 사육신이 꼽혀있었다고. 사관이 그렇게 분류해 놓은 것이라고?
개코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⑧ 유신이 장신을 우익으로 삼았는데 우익이었던 장신은 사육신에 낄 수가 없다.
-장신은 사육신에 낄 수가 없다는 기준은 무엇에 근거하며 어디에 있는 말인가. 그 근거를 밝히지 못한다면 이는 여의 일방적 주장이고 이야말로 개소리다.
영조12년 1/22이 기사를 보면
고(故)충신(忠臣) 송상현(宋象賢)·정발(鄭橃)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를 동래부(東萊府)의 성 안팎에 각기 세웠었는데, 서차(序次)가 전도(顚倒)되어 비로소 한 사우에다 합향(合享)하도록 명하였다. 고 하였고
승정원일기에서는
-東萊多士疏言 壬辰死節人 宋相賢文也 鄭撥武也 不可同享一祠 請二之 王曰 兪應孚豈不是武
同享六臣祠 不可以武而 貶其節也 斥不納-
“동래의 선비들이 상소하기를 임진년에 사절한 송상현은 문사이고 정발은 무사입니다. 한 사당에 같이 향사할 수 없으니 나누소서, 하니 왕께서 말씀하길 유응부(兪應孚)는 어찌 무사가 아니랴마는 육신사에 같이 향사한다. 무사라 하여 그 절의를 낮출 수 없다. 하고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허동수 여는
장신이 사육신에 낄 수가 없다는 주장이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지 밝히라
엉뚱한 괴변으로 그 근거를 호도하려 한다면 이는 위의 지적에서와 같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근거 모두를 부인하는 아집일 뿐이다.
밝힐 수 없다면 이 글을 쓴 것에 대해 사육신수호회 게시판에 정중한 사과의 글을 올리고 삭제를 해야 할 것이다.
김문기와 그 후손들의 똥구멍을 핥은 맛과 소감은 어떠한지 말해보라
첫댓글 허동순이란 놈이 어떤 놈인가? 미친놈이 미친소리를 했는데 이놈이 혹시 허용전 집안의 미친놈들이 아닌가? 천하의 오색잡놈 김문기 후손 전 헌법재판관 김진우가 떠벌리는 미친 말을 앵무새 같이 떠벌리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무식한 놈들이 무식한 말만 떠벌리고 있으니 허조도 그 후손에 의하여 개창이 나는구나! 허씨문중은 허용전 허동순 이 무식한 두놈에 의하여 박살이 나는구나! 애석하구나! 허후 허조는 저토록 절개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 허용전 허동순 이 두놈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못나 빠졌단 말인가? 하양 허씨 문중 망하는 것 순식간이구나!
하양허씨 게시판을 보면 세전가훈(世傳家訓) 이 있다 이 가훈 중에는 처사필공(處事必公)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선 반듯이 공정하게 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양허씨 문중 사람들은 이 가훈대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가이다 허용전과 허동순 이 두놈들의 하는 행태를 보면 노골적으로 천하의 오색잡놈 김문기후손들의 편들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런 행태를 보면 처사필공(處事必公)이란 가훈은 한마디로 개나발인 것이다. 말따로 행동따로 하는 것이 처사필공이냐? 이 짜식들아!
2012년 1월5일 카페에 기재된 내용물이 조작 된것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가계도 내용중 숙종때는 역사개요에 간단하게 성삼문등 사육신이 복관되고....만 기재되 있고 가장중요한 정조(1791년)때 大顯彰(區分編定한내용등)관계는 기재도 없고 천주교 박해등..... (1791년) 이것이 역사개요라고 기재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볼때는 왕에이름을 크릭하면 역사개요가 나오도록 1대에서27대 왕을 전부 기재된 내용이나 하필 중요한 부문이 없다는것은 무슨 의미 일가요? 허동순씨가 하양허씨라면 자기조상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허명이란 놈이 하양허씨 문중 사람입니까? 이놈은 불의한 김문기 후손편에 섰다가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깨꼴락 한 놈입니다, 사육신 선조의 분노의 저주가 내려졌던 것이지요 으~ 하하하 통쾌한 일이지 않습니까?
허동순씨와 許銘氏는 이제그만 진실을 알었으면 사육신후손들에게 공개사과 하고 하양허씨의 허후,허조선생 (계유정난 희생자이며 단종복위 희생자)의충절의 정신을 이어 받아 잘못된 과거가 청산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첫쩨 書誌학자인 前교수 허명(許銘)씨는 1977년당시 <백촌김문기선생육신묘역봉안추진위원장>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봉안토록 결정한 실수을 했기때문에 結者解之 次元에서 還元 시키는데 앞장을 서야 한다
두번쩨로 허동순씨가 운영하는 카페에 기재된 조선왕조 가계도에 正祖(1791)역사개요에 중요한 구분편정한내용이누락등이 고의로 한 짖이라 생각된다(2012년1월5일기재됨)
요지음 MBC 밤10시경 드라마 <빛과그림자>가 독재정권시절(70-80년) 악명높던 중앙정보부장과 날라가는새도 떨러트리는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못된짖 한것을 하나하나 파해치는것 같아서 재미가 있습니다 어디까지 드라마가 갈는지는 모르나 볼만합니다 (참고사항은 ,고령신씨들의 집단 소송을 제기 했다는 기사을보고... 내 소신을 밝힌 글에 댓글을 보시면 함니다)
성탕 반경의 글귀가 떠오릅니다. 날로 새로워지는 것도 품위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로 썩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무슨 뜻으로 글을 썼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여기는 정초헌씨처럼 넋두리나 하는 한가한 곳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말씀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격하고 몹쓸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는 좀더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로 그들의 부조리를 분석하여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답글을 올렸습니다.
일응 맞는 말 인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언어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저 점잖은 말로만 응대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저들이 그간 우리 사육신후손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아신다면 선생께서 보시듯 저급한 표현은 하지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육신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려는 것까지 방해를 해서 조상에게 제향마저 올리지 못하는 일을 당했습니다. 철천지 원수들 입니다. 그들에게 경어만을 써야 하는것이 육신의 후손다운 도리라 하신 것이군요. 참 어려운 말씀 하셨습니다. 그말씀이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 생각 하십니까? 사육신후손에게 꾸지람도 필요하지만 격려가 더 필요합니다.
정초헌씨 ! 정초헌씨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여기는 도학을 논하는 학당이 아닙니다 정초헌씨가 말하는 것은 지금 허용전씨나 허동순씨가 김문기후손편에 서서 사육신 후손들을 꾸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글을 점잖게 써야만 정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정초헌씨도 자기 글에 비판을 가하니까 곧 이성을 잃어버리고 흥분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초헌씨 말씀대로 우리도 처음엔 도학적으로 달래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정 반대로 죽이겠다고 협박을하고 고소를 했습니다 정초헌씨는 이런 일을 당하고도 점잖은 말로 계속 설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는 사육신 역사 전쟁의 현장
입니다 전장에서 인격을 얘기하고 도학을 말하는 것은 말장난 하자는 것이지요 정초헌씨 시간이 계시면 이 게시판 1번에서 273번 까지 쭉 ~ 읽어보시면 이 게시판의 철학을 이해하실 겁니다 아무튼 관심 가지고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썩어가는 社會不條理을 지키려는 鬱憤의 소리입니다 여러분들이 社會正義에 관하여 社會的 意識變化을 가져올수 있도록 正義로운 歷史 記錄을 지켜주세요 (새롭게 變化 할수없는것이 忠臣들의 얼이며 節義 입니다)
저급한 언어 표현과 언어폭력을 비난하는자 있는가 하면 역사기록인 오색잡놈,배신자 등에 데하여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니(김녕김씨측에서 인터넷 기록에 데해서 두려워 하지 않함)이상한 김녕김씨 집안과 학계 단체이다 1월 초에 "사육신공원"카페을 개설하였는데 카페지기는 ksms24守 이며 고산중학교24회동창회 라고 한다 내용을 보면 지능적으로 사육신공원내 홍보물 내용과 1977년도 김문기허묘을 봉안 하게된 내용이 마치 그데로 유지하겠다는 표현으로 쓴것같다
부정과타협하는자(아부하는자) 하양허씨 뿐인가? 서울시청과 동작구청장 도 있어요 또한 네이버 인터넷 사이드에 "사육신 김문기" 가 있어요 모두가 도덕 불감증 환자들만이 할수있는 행동을 합니다
좋은 내용이 많아 일부 복사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