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17경비대 방위병 전우회 소식
대한민국 남자들은 평생 한 번 다니는 고등학교나 대학은 명문고나 명문대학을 나와야 하고 평생 한 번 가는 군대도 해병대나 특전사, 아니면 장교로 가거나 최소한 현역으로는 가야 사회생활 하면서 평생 동안 complex 없이 살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위 세 가지 중 하나도 제대로 못 갖춘 것 같다.
전라북도 출신으로서는 고등학교도 전주고나 남성고 정도는 다녔어야 밖에서 명문고 출신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나 싶다.
호남인재벌판의 명문 전주고의 경우 지금까지 배출된 전/현직 국회의원이 무려 50명이고, 전/현직 장차관도 40여명이나 된다. 그리고 법조인은 무려 500여명을 배출한 명문고다.
남성고의 경우도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초창기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여 전/현직 국회의원 20여명과 전/현직 장차관도 20명 이상 그리고 판/검사 등 많은 법조인을 배출한 익산의 명문사학이다.
나는 전라고를 다녔다. 우리 전라고 출신 많은 동문들은 전라고를 명문고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개교 이래 장관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이제 겨우 국회의원 한 명 배출한 전라고를 세상 사람들이 명문학교로 인정해 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전라고를 졸업하던 1979년도에 전라고에서 전북대 합격자를 300명 이상 배출시켰다
대학도 나는 제때 다니지 못하고 내 나이 27세에 방송대에 입학하여 다녔으니 명문대를 나오지도 못했다.
우리가 군대에 입대할 1981년도에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많은 젊은 대학생들의 데모를 하니까 대학생들을 먼저 현역입영자원으로 징집시키다보니 신체등급이 건장하지 못한 나 같은 고졸이하는 대부분 3급 보충역으로 방위병으로 소집되었다
오늘은 군대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서두가 길어졌다.
우리나라에는 현역을 제대한 후에도 옛 전우들이 모여 해병전우회, 특전사전우회, ROTC동기회 등 많은 전우회를 조직하여 같은 전우들끼리 친목을 다지거나 봉사활동 등을 하며 우리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해병전우회 같은 경우 지역별로 모임이 체계적으로 잘되어 있으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우범지역 자율방법, 출근시간 혼잡도로 교통정리, 그리고 대민지원 등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전우회 중에 방위병 전우회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방위병 시절에 함께 복무했던 익산 17경비대대 49기 방위병 전우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 그림】어제는 집안에 제사가 있어 익산에를 다녀왔다. 익산역에 도착하니 시간 여유가 좀 있어 예전 17경비대대가 있었던 약촌5거리 인근을 찾아갔다.
【아래 그림】저기 보이는 아파트 뒤로 부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이 지역은 전부 개발되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아래 그림】저 앞에 보이는 도로는 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고 당시 많은 방위병들이 저 도로 위로 자전거 뒤에 검정 도시락가방을 메달고 페달을 밟으며 달렸다.
【아래 그림】저 동네에는 당시 막걸리나 소주를 팔던 선술집들이 있었다.
당시에 하루 종일 부대에서 고참들한테 부대끼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같은 기수 동료들과 선술집에 들려서 소주 한 잔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며 달랬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막걸리 한 주전자에 400원을 주면 안주까지 주었다. 소주는 한 병에 500원을 주면 마찬가지로 안주는 공짜였다.
【아래 그림】당시에도 익산공단에 보석단지가 있었다.
【아래 그림】당시에 출퇴근시간에 이 지역은 공단지역이라 많은 여공들이 있었지만 우리 같은 방위병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아래 그림】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단지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아래 그림】서울은 아직 목련이 필 때가 안 된 것 같은데 이곳은 남쪽이라 그런지 벌써 목련이 피었다.
【아래 그림】목련을 바라보니 추웠던 겨울은 어느덧 지나고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향기가 느껴진다.
【아래 그림】꽃은 봄을 알리고, 봄은 꽃을 맞는다. 이곳은 따뜻 날씨로 인하여 이른 봄이 이른 봄꽃을 피우고 있다.
【아래 그림】아파트 단지 내 저곳 정도에 17경비대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아래 그림】이곳에도 목련나무 한 그루가 새하얀 목련화를 피우고 있다.
이렇듯 작년에 갔던 자연의 계절 봄은 한번 갔더라도 금년에 새봄으로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인생의 봄날은 한번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아래 그림】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가 옛 부대에 대한 추억을 대신해 주는듯하다.
【아래 그림】수줍은 새악시 같은 하얀 목련화 향기도 좋아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꽃이다.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
【아래 그림】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
【아래 그림】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
【아래 그림】 ♪♪그대처럼 순결하게 그대처럼 강인하게~ ♪♬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
【아래 그림】목련은 봄을 대표하는 꽃이다.
옥처럼 깨끗하고 소중한 나무라 해서 “옥수(玉樹)” 옥 같은 꽃에 난초 같은 향기가 있다 해서 “옥란(玉蘭)” 난초 같은 나무라 해서 “목란(木蘭)” 꽃봉우리가 모두 북쪽을 향했다 해서 “북향화(北向花)” 꽃 봉우리가 붓끝을 닮았다 해서 "목필(木筆)" 나무에 피는 크고 탐스러운 연꽃이라 해서 “목련(木蓮)” 등으로 불리어 진다.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
【아래 그림】아파트 단지 내에는 개나리도 봄을 알리며 그 노란 원색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래서 개나리를 봄맞이꽃 ‘영춘화(迎春化)’라 부르지 않나 싶다.
향연의 계절 봄! 축제의 계절에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며 아름답지 않은 바람이 어디 있을까
【아래 그림】산수유도 꽃 폭죽을 터트리며 봄을 알리고 있다.
향연의 계절 봄!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한껏 피어있는 봄꽃들 속에서 오늘도 내일이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아래 그림】나는 약촌5거리 방문을 마치고 집안에 제사가 있어 형님 댁에 머물고 있는데 오늘따라 우연히 동이리에서 17경비대 모임을 한다고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나는 잠깐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왔다. 내가 모임장소에 갔을 때는 친구들은 이미 1차를 마치고 2차를 가려던 참이라 나는 2차 단란주점에서 합류하였다. 어두운 곳에서 카메라 플래시 충전이 덜 되어서 그런지 사진들이 엉망이다.
【아래 그림】김도중 친구는 나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에다 17경비대 49기 동기로 나와 인연이 많은 친구다 당시 이 친구가 49기 57명을 대표해서 대대장께 전입신고를 하였다.
【아래 그림】손상선 친구는 당시 야무지고 똘똘해서 해병대를 지원해서 갔더라도 잘 했을 친구다.
우리 경비대 방위병들은 소집 해제 후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우리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래 그림】단란주점에서 Serving하시는 분께 사진을 부탁했는데 각도가 잘 맞지 않게 나왔다.
방위병 제도는 징집대상자가 1970년대 초부터 현역징집수요를 초과하게 됨에 따라 잉여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병역의무의 형평을 유지하기 위하여 채택된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병역제도였다.
【아래 그림】익산 17경비대 49기는 당시 57명이었다. 현재 모임에 참여하는 인원은 약 10여명이다.
동원령이 선포되거나 전쟁 또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복무중인 방위병은 병력의 손실보충에 동원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95년부터 공익근무요원제도를 신설됨에 따라 방위병제도는 폐지되었다.
【아래 그림】익산 17경비대 49기는 10여명은 약 10년 이상 격월로 전우회 모임을 갖고 있다.
방위병은 군부대나 예비군부대에서 병사업무나 민방위업무의 보조요원으로서 근무하거나 주요시설의 경계근무를 주로 하였다.
방위병의 신분은 소집기간 중 실역복무중인 군인과 같기 때문에 ‘군법’ 적용대상이었다.
【아래 그림】대한민국 방위병 출신 중 전우회가 있는 곳은 익산 17경비대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방위라도 받은 사람은 작대기 하나를 ‘일병’이라느니 작대기 두 개를 ‘이병’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래 그림】우리 방위병들은 군복(개구리복) 입고 찍은 변변히 내놓을 만한 사진 한 장 없다.
방위병 중에서 제일 출세하신 분은 이완구 총리가 아닌가 싶다. 이 분은 육군 방위병 출신으로 경찰에 입문하여 충남경찰청장인 치안감에까지 오르신 분이다.
같은 방위병 출신끼리 다툼이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몇 년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박원순 후보 병역"과 관련하여 당사자 모두가 방위병 출신이거나 방위병 출신을 남편으로 둔 후보였다.
박원순 후보는 6개월 방위 출신이었다. 당시 이를 물고 늘어졌던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12개월 방위병 출신이었다.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의 남편(판사) 또한 ‘6개월 방위’ 출신이었단다.
【아래 그림】해병대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
그럼 우린 한 번 방위병은 영원한 방위병이어야 하는가? Once a weekend warrior, Always a weekend warrior?
"Weekend Warrior"란 뜻은 주말에 근무하는 병사를 말하는데 우리나라 방위병들은 주중에 근무하고 주말에는 쉰다. 그러나 미국에서 정규군이 아닌 예비 병력을 영어로 "Weekend Warrior" 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위병을 "Weekend Warrior" 라고 번역한 것 같다.
【아래 그림】남자들은 평생 한 번 가는 고등학교도 명문고를 다녀야 하고, 군대도 해병대나 특전사 같이 멋진 군대를 가야한다.
해병대는 군대시절 고된 훈련과 고참들의 심한 얼차려로 힘든 군대생활을 하지만 군 제대 후 사회에 나오면 평생 해병 전우로써 군대얘기만 나오면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
반면에 방위병 출신들은 군대 얘기만 나오면 기가 죽어 평생을 살아야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남자라면 평생 한 번가는 고등학교도 명문고를 나오던지 아니면 군대라도 해병대나 특전사 같은 멋진 군대를 나와야 한다.
【아래 그림】해병대는 군가를 불러도 멋지게 머리 위에서 시작해 배꼽까지 내려오며 위에서 아래로 주~~욱 내리며 쳐대는 "해병대 박수"를 치면서 부른다
♪♪흘러가는 강물 위에 편지를 띄우고-~ ♪♬
그런데 예전에 17경비대 고참들이 졸병들에게 ‘좌로굴러’ ‘우로굴러’ 얼차려를 줄때 산울림의 “개구쟁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바꿔서 부르게 했다.
♪♪“우리같이 놀아요 뜀을 뛰며 공을 차며 놀아요 ~~~ 나무에 오를래 하늘에 오를래 개구장이“~ ♪♬를
♪♪“우리같이 굴러요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굴러요 ~~~ 나무에 오를래 하늘에 오를래 좆도 방위“~ ♪♬ 로 바꿔서 부르게 하면
굴리는 고참들이나 구르고 있는 우리들이나 속으로 킥킥거리며 부른다.
【아래 그림】방위병은 영어로 "Weekend Warrior"이지 “Arbeit Soldier(알바 병사)"가 아니다
“귀신 잡는 해병”이란 해병대 영화가 있었다. 우리 방위들에겐 “마지막 방위(The Last Defense)”라는 코믹 영화가 있었다.
필리핀 현지의 어느 지방에서 한국 근로자 20여명이 게릴라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엄청난 몸값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대응, 우리 군부대에서는 황급히 다섯 명의 특수부대 요원을 차출하게 되는데 그 과정 중 어느 해커의 장난(?)으로 어처구니 없게도 방위들이 필리핀 오지에 파견되기에 이른다는 코믹한 영화다
【아래 그림】‘방위병’이란 “향토방위와 후방근무지원을 수행하기 위해 소집된 병역 자원”을 말하며 방위병 중에는 여러 종류의 방위병들이 있었다.
익산의 17경비대대 방위병들은 “전투방위병”들이었다.
우리 17경비대대 방위병들은 흔히 얘기하는 ‘꽃방위’도 아니고, ‘좆도방위’도 아니며 ‘똥방위’는 더더욱 아니었다.
차라리 ‘UDT(우리 동네 특공대)’나 ‘KGB(코리아 국토 방위)’라 불러다오.
【아래 그림】당시 익산 17경비대대의 임무는 만경강 일대인 삼례다리에서 목천포다리에 이르는 구간을 적의 침투로부터 방어하는 임무였다. (아래 사진들은 2013년도 추석 때 디카로 담은 사진이다)
【아래 그림】당시 17경비대 1중대는 목천포다리가 주요 경계지역이었다.
【아래 그림】당시 17경비대 2중대는 삼례다리가 주요 경계지역이었다.
【아래 그림】당시 고참들은 250cc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도 장교처럼 기르고 군복도 장교복 입고 출퇴근 하였다.
【아래 그림】당시 어느 날인가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이띠기에 사는 고참집에 가서 벼 배주고 저녁을 먹고 그 집에서 잠도 하룻밤 자고 다음날에도 벼 배주고 일요일 오후에 퇴근한 적도 있었다.
【아래 그림】당시 방위병 대상자로 17경비대로 온 친구들 중에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친구들이 많았다.
또한 어린 나이에 일찍 공장에서 기술배우고 그곳에서 여자를 만나 일찍 동거에 들어가 자녀가 있는 친구들도 많았다.
【아래 그림】그러다 보니 먹고살기 힘들어 토요일 퇴근 후 공장에서 일하다 월요일 출근하려면 고참들이 괴롭히고 돈이나 가져오라고 하니까 힘들어서 월요일에 출근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아래 그림】방위병들은 무난 결근이 바로 탈영이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기수 친구들이 집을 방문하여 달래서 다음날 데려오기도 한 적이 있었다.
【아래 그림】당시에 경비대 부대장은 소령이었고 두 개 중대가 있었는데 중대장은 육군 상사였다. 그 후 중대장은 3사 출신 중위로 바뀌었다.
【아래 그림】당시 경비대는 전투부대였기 때문에 고산에 있는 사격장에 가서 베트남전 영화에서 람보가 들고 다니던 ‘M60’ 사격연습도 하고 그랬다
【아래 그림】경비대에서 훈련 받는 방위병은 현역병과 대등한 업무를 수행하며 야간행군도 하며 내부 군기도 엄격했다. 당시 우리는 익산 공단에 있는 17경비대를 출발하여 삼기면을 경유하여 금마면로 돌아오는 100리 야간 행군도 실시하였다.
【아래 그림】1970~80년대 한반도 남쪽의 군사요충지와 해안선을 물샐 틈 없이 경계하면서도 주민들과의 친밀도가 여타 어느 군대보다 높았던 특수부대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해안방위병들이었다
【아래 그림】당시 세간에는 김일성이 섣불리 남침을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숫자 파악이 전혀 안 되는 정체불명의 특수부대와 그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 속의 도시락(폭탄)이 두려워서였다는 믿기 어려운 농담 같은 이야기도 떠돌아 다녔다.
【아래 그림】나는 비록 방위병 출신이지만 주변에 장군도 있고 영관 장교 친구들도 많다. 아래 그림은 전라고 동창인 장기영 장군과 찍은 사진이다.
【아래 그림】나는 비록 방위병 출신이지만 공군 대령 출신인 고교동창생도 있다.
【아래 그림】나는 비록 방위병 출신이지만 수방사 헌병대부단장 출신 동창도 있다.
【아래 그림】나는 비록 방위병 출신이지만 계룡대에 현재 현역으로 근무하는 육군 대령인 중학교 동창도 있다.
【마치면서】
방위병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청년기일 때 병역자원이 넘쳐서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군복무 방식이었다. 그리고 베이비부머 세대가 병역의무를 모두 이행한 뒤에는 방위병 제도도 자연히 폐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도 베이비부머 세대라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젊은 날의 한 시절을 보냈다. 내가 해병대나 특전사 출신이면 좋겠지만 내가 방위병 출신이라고 해서 그런 사실을 숨기고 싶은 생각도 없다. 물론 방위병 시절이 즐겁진 않았으나 서글프지만도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현역병이든 방위병이든 결국 조국의 부름을 받고 나가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사회에 들어와 우리사회 구성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별도 그렇다 나는 명문고나 명문대 출신은 아니지만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왔고,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국가에 근로소득세도 많이 내고 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싶다.
익산 17경비대 1중대 49기 이화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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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익산 역사의 한페이지를 보았습니다
17경비대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전엔 공수방위라 했던것같은데 ᆢ
수고하셨습니다
화구는 나와의 인연이 많아서 17경비대도 같이 다니면서 고생도 징하게 했는데,
이제는 옛추억이 돼 버렸군. 수고했네 화구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