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목요카페 ----------------------------------------------------------------------김명아
세상은 텍스트고 우주는 도서관이다
<나의 체험적 시론>을 통해 제가 이충이 선생님께 어떻게 시를 배웠는지 읽어보고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취향과 경험에서 비롯된 선생님들의 시선과 평론가들의 눈을 통해 감상 순간에 다가오는 여운의 감정들을 ‘시적 풍크툼punctum’으로 어떻게 말하게 되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체험적 시론
세상은 텍스트고 우주는 도서관이라고 했다. 주위를 관찰하며 다가오는 질문들, 우주의 소리에 따라 관점을 달리해 볼 수 있을까? 몰입함으로써 성장하는 순환의 과정, 내면의 깊은 곳에서 느끼는 충만함에 집중하고 싶다. 삶의 지도는 살아온 습관과 품성, 문화에 따라 길을 내며 오늘도 계속 수정되고 있다.
누구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며 ‘프레임의 법칙’처럼 어떤 틀을 가지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결과도 달라지며 우연의 결합과 해체가 비약과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에서 질문의 크기는 ‘삶의 크기’라고 할 수 있으며 말의 정서도 알 수 있다. 내면의 풍경을 은유와 상징으로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시를 쓸 때마다 밀려오는 망막함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구를 만나고 내 주위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이 바뀌듯 어떤 텍스트를 만나느냐에 따라 시가 바뀐다고 배웠다.
생각이 바뀌고 관점이 확장됨으로써 상징과 비유로 알레고리allegory 시킬 수도 있으며 뒤집고 비틀고, 거꾸로 보는 역발상의 눈을 키우지만 고민이 깊어질 때가 많다. 감정의 코드, 바탕은 같지만 디테일하게 뜻을 겹치고 다르게 쓰기 위해 ‘시를 만들어 내는 기술poietike’을 익히고 있다.
새롭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신만의 관점을 키우고 성장하기 위해 발상의 전환,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지 내면세계를 들여다본다.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텍스트를 몇 번이고 뒤집고 베끼고 훔쳐보라고 하셨던가. 통섭과 융합의 눈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좋은 시를 필사하고 눈으로, 머리로 또 소리 내어서 읽어본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입에서 걸리는 시어와 리듬을 찾아내고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말이 아닌 문장으로 쓰는 것이기에 문어체로 우리글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어야 된다고 배웠다. 상상하는 만큼 달라지듯 설명하지 말고 질문하며 숨어 있는 이미지를 찾아가는 새로운 길이 시인으로서의 기본자세가 아닌가 싶다. 또한 시어의 선택은 인격으로 표현된다는 점을 기억하며 무엇을, 왜, 어떻게 만들지 항상 자신에게 심사숙고하며 되묻고 있다.
패러디시법을 처음 배울 때는 모방과 모반, 시간과 공간, 은유와 상징을 바탕으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어 사차원의 옷을 입혀 보았었다. 메타텍스트 함으로써 모티브를 얻고 사유와 치유의 시를 문어체로 잘 표현해 ‘오늘의 시’를 쓰기 위해 퇴고를 거듭하며 시 한 편의 비주얼, 형식을 갖추어 행과 연에서 리듬감을 살려내고 일상어로 스토리텔링 할 수 있는지 다시 묻는다. 예술적인 감성 위에 비전과 환상을 뒤섞어 이미지로 그려내고 동사를 활용해 의인화시키고 호흡을 길게 함으로써 재해석, 재창조되는 과정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되는 일은 지금도 버겁다. 깊게 읽어내고 비판적,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과 허구를 버무린 파타포(pataphor), 가상과 현실의 세계가 중첩된 곳에서 시를 쓰기 위해 책을 읽고 메모를 거듭하며 여행, 철학, 종교의 힘도 빌리고 있다. 감수성의 바탕에 사유를 넣고 낯설게 뜻 겹치기를 하고 임팩트(impoct)를 찾는다. 공명을 일으키기 위해 스토리텔링하며 자연의 흐름과 얼굴에서 기호와 신호를 읽어내며 소통하고자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움직이고 싶다.
‘손은 몸 밖에 나와 있는 뇌’라는 것을 기억하며 손이 리듬감 있게 쓸 수 있을 때까지, 시의 울림이 손끝을 지나 심장에 다다를 때까지 노력하고자 한다.
# 첫 번째 시집『붉은 악보』해설은 이충이 선생님께서 써주셨고 나호열, 이동희 교수님께서도 [이계절이시집]과 [시인조명]에서 평을 해주셨습니다.
「붉은 악보」
출항을 기다리는 여수항 오동도등대 마을에서
첫 불을 밝히고 화물선 모여들고
썰소리 돌아오는 바다를 듣는다
신발코는 모두 집 쪽으로 돌려놓은
손길을 따라 지금도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불빛을 따라 해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어딘가에서부터 나를 깨우는
곁에 앉아 토닥이는 손짓이 있다
몇 해가 흘렀을까
눈길 닿는 곳마다 솟대 세우고
비와 천둥을 부르며 감겨든다
차오르는 목울대, 웅크린 어둠살 너머
붉은 해가 떠오른다
법당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지난여름 햇살이 꽃살문으로 출렁인다
밤낮이 갈마들고 향초는 불을 물고
솟아오르듯 번진다 나비가 좇던 악보
망설이다 삼켜버린 음표, 붉은 악보가
하늘에 펼쳐졌다 내려놓은
그러나 달려온 얼굴이다
*『붉은 악보』는 ‘꿈꾸는 의식과 미학적 상상력’으로 이루어졌다. 대상이나 사물을 통해 얻어진 이미지를 조합하여 새로운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시는 리얼리티 픽션이나 리얼리티 드림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렇게 진실과 환상을 보여주는 시는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시는 형식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음악처럼 리듬을 타고 전개되는 장면들이 서로 관계하고 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언어선택이 중요하다. 시가 언어를 바꾸면 시의 수사법이 바꿔진다. 모든 것이 바꿔지는 과정을 통해 사회의 방향도 바꿔진다. 특히 대상을 역동적인 묘사로 전개해 나가며 끊임없이 일관된 질문을 던지고 대답한다. 또한 대상의 내면을 파헤쳐 가며 여러 각도의 시선을 겹쳐놓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머리와 가슴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는데 이는 맥락의 이탈을 거부하면서 꿈을 꾸게 하는 리얼과 환상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충이 선생님)
*존재의 탐문探問과 언어의 탈주, 언어를 매개로 하는 시는 결코 존재의 전모를 밝힐 수 없고 의미를 확정할 수도 없다. 시인은 기껏해야 유동流動하는 세계와 범주화되는 의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활동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바로 이 지점, 유동하는 세계를 감지하는 순간에 제어되지 않은 채로 튀어 오르는 언어를 빌어 존재의 섬광을 느끼는 것이 시인이 수행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붉은 악보』는 존재가 항존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감각으로 기억된다는 사태의 중첩된 기록이다. 『붉은 악보』는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계를 변화의 양상으로 보기 때문에 시인의 확고한 자유의지가 집적되어 있다.
어느 시 보다도 서정抒情이 도드라지고 표현[詩行]의 압축미가 정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논리성에까지 짜임새를 갖춤으로써 독자들에게 안도와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희망을 상징하는 해(태양)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악보를 담고 있다. 유기적으로 전환되는 진경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지의 꿈이 아니라 이미 “달려온 얼굴”이기에절실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호열 교수님)
*모든 시는 새로운 사람 이야기며 이 작품은 사람의 삶이 음악일 수 있고, 그 음악이 빛으로 승화되면서 사람살이의 모습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울려 퍼지는 한 폭의 대형화를 완성해 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붉은’이라는 형용사가 그려내는 색채 감각과 ‘악보’라는 시각적 형태가 그려내는 청각적 울림의 형상들이 묘하게 어울리면서, 사람살이의 모습들을 합주해 내는 느낌이다. 흔히 공감각이라는 말들을 시에 적용시키지만, 사람살이의 모습들은 본래부터 공감각적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따로 떼어서 공감각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작품이 그려내는 ‘마음 그림’은 이미 소리와 색채가 조화되어 울리는 교향곡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기쁨의 뱃노래, 혹은 상실의 아픔을 아로새긴 얼굴이거나, 그런 선택과 공감은 순전히 독자의 몫일 따름이다.(이동희 교수님)
「부서진 피아노」
문, 빛을 토했다 입구가 막혔다
먼지 속으로 떠도는 잠, 잠, 잠
손끝에서 무딘 날이 자랐다 마디마디
늘어지는, 자리가 엉켜들었다
벽을 더듬는다 줄이 잡혔다 웅크린
손가락을 걸었다 방이 들썩거린다
통로는 어디일까 줄을 따라가 볼까
굳어버린 소리, 벽에 갇혔다 두 팔을
껴안는다 손톱은 하나씩 빠지고
풀려나지 못한 벽이 흐느낀다
첫 햇살을 빌려 출구를 두드리며
굽이치는 숨을 달랜다 차분히
제자리를 찾아 내려온 건반
피아노, 혼자 자고 혼자 깨고 혼자 논다
이 시는 지루한 일상을 깨뜨리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문’으로 ‘빛’이 들어올 수 없게 ‘입구가 막혔다’. 언제나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를 가진 우리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의 ‘먼지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출구’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출구’가 어느 쪽이냐고 자신을 향해 묻고 묻는다. 시를 최고로 만드는 것은 예술적 표현력과 수사법이고 형식과 형태의 아름다움이다. ‘통로는 어디일까’라고 자문하는 이 시의 전개 형식도 아름답지만 수준 높은 회화처럼 펼쳐진 형태가 우리를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다 준다. ‘부서진 피아노’의 ‘잠’은 그의 ‘무딘’ 손톱으로 자라나 나중에는 ‘마디마디’가 ‘늘어지’고 손가락이 ‘엉켜’든다. 누군가가 ‘줄’에 ‘손가락을 걸’자 ‘방이 들썩거’리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줄’에 의지한다. 그리고 ‘굳어버린’ 의식과 ‘벽에’ 갇혀버린 무의식을 ‘두 팔’로 ‘껴안는다’. (이충이 선생님)
「비의 그물」
주말을 베고 누웠다 기계가 멈추고
작업장은 폐쇄되었다
귀를 막고 손발을 묶었을까
깨어나 보니 아무도 없다
물을 긷고 씨를 뿌렸다
손짓하는 소리를 보며 내 앞에 펼쳐진
같으면서도 다른, 손이 되어버린
발가락 사이로 두 팔이 있다
땅을 두드리며 봄을 만나러 갈 때
끝나지 않은 볼레로가 흘렀다
줄을 허리에 묶어 중심으로 돌리며
이끌어 주는, 퍼즐조각을 맞추듯 눈을 읽는다
아무도 들이지 못했던 저녁 문 사이로
주말이 열리고 있다
쉬지 않고 몸을 풀던 소나기가
멈추었을까 비의 그물을 씌우자
축축한 비늘이 떨어져 내린다
물거울이 깨지고 물거품이 인다
젖은 어깨를 일으켜 세웠다
위의 시는 첫 연부터 상징적 이미지들로 환유가 되는 특징이 있다. ‘주말을 베고 누웠다’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이미지들이 역설적이게도 매우 현실적이다. ‘기계가 멈추고/ 작업장이 폐쇄되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는 불편한 진실이 담겨있다. ‘귀를 막고 손을 묶었을까’. 삶의 아이러니야말로 삶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깨어보니 아무도 없다’. 정교한 언어 밑에 숨어있는 부조리의 이미지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이충이 선생님)
「눌러주세요」
무엇을 보고 싶을까요 시스템이 완성되었어요 눌러주세요 반자동의 의미는 아시겠죠 가끔은 선택이 필요하거든요 문이 열렸네요 거리가 보여요 살랑살랑 치마가 다리를 올리고 두터운 점퍼는 골목으로 숨어드네요 두 남자가 기타를 메고 노래하며 코믹멘트를 보네요 거리공연은 그물을 던져 팔을 잡았어요 한바탕 웃고나자 입벌린 검은 배낭이 지폐를 먹고 싶어 해요 이웃에 봄이 쓱싹 칠해지길 바라며 풀어진 나사를 조이고 방향을 바꿔봐요
휘파람을 불며 용달차가 신나게 달려요 찰랑거리던 햇살도 빤히 쳐다보네요 선이 그어져 있어요 언제부터인지 둔중한 무게가 비켜서고 싶어 해요 가지각색의 안경을 써보고 싶으세요 거꾸로 가는 시계도 있고 고장난 시계도 있어요 가보지 못한 곳을 볼 수 있는 기회죠 눌러주세요 안면찰과상을 입은 자존심이 울고 있어요 나오지 못한 자국이 간헐천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융단폭격을 맞은 곳도 있네요 흉터를 핥으며 선잠 깨우는 손을 잡아요 바다 너머 배꼽 내놓은 섬이 보이네요 재잘거리는 웃음소리, 아침을 여는 소리예요 단추를 채우고 기린 목을 타고 올라 커다란 눈으로 보고 싶네요
한 번 더 눌러주세요 보이지 않거든요 창가에 앉은 놋그릇에 달이 보여요 감사해요 맑은 달은 꿈을 꾸고 있네요 눈맞춤을 하기 위해 다리를 놓아야겠어요 물처럼 흘러갈 수 있겠죠 같은 창에 서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네요
이 시는 땅속에 감추어진 물과 같다. 땅을 파서 그 물을 샘솟게 한다. 상상력은 흙과 바위 아래 갇혀있다. 시인은 종이 위에 글을 삽 삼아 샘을 향해 파내려 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 가령, 나무. 돌. 자동차. 건물 등 모두가 그 대상이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상상력과 삶의 경험을 통해 의미를 가지게 되며 비일상적인 것도 우화寓話적으로 표현된다.
김명아가 시에서 제시하는 것은 복제된 현실이 아니라 진실을 찾는 시각이다. ‘무엇을 보고 싶을까요’에 우리는 멈추어 선다. 우리는 숨죽이려 했거나 눈감으려 했던 장면과 뒤엉킨 일상을 벗어날 수 없다. 시를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고통을 감내하면서 문을 찾고 있는데 문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수많은 문은 사람이 만든 상처일 수 있다. 문은 이미 제 몸속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내고 다니는 문이 상처이듯 시인에게 상처는 그리움이다. 시인은 그 그리움을 통해 상처를 치유한다. (이충이 선생님)
「합니다 사이에 팝니다」
웃음이 남아 있는 볼트를 사고 화장이 지워진 너트를 팔았다 꿈이 깨는 날 톱니바퀴는 필요 없었다
짧은치마를 팔고 긴 다리를 샀다 배꼽티를 팔 때 배꼽을 사고 귀마개를 팔 때 귀를 샀다 안경을 팔면서 눈을 샀고 마스크를 팔 땐 입을 샀다 그러나 긴 다리를 살 때 발은 사지 못했고 배꼽은 사면서 말라버렸고 귀를 살 땐 들리지 않았다 눈을 살 땐 보이지 않았고 입 속에는 이가 없었다
바늘 없는 괘종시계가 울린다 오후 1시, 서둘러 문을 연다 ‘파마세일 합니다’ 등판을 지고 물결파마가 출렁이고 베이비파마가 기어 다녔다 눈썹을 짧게 심고 깜박이는 눈꺼풀 위로 ‘속눈썹 합니다’ 간판은 머리를 자르고 있다
안개꽃 한 다발을 안고 4D 영화를 볼 때 흔들리는 의자에 앉았다 타는 냄새 속에 물방울이 튀었고 안경은 벗지 못했다 물 묻은 선잠을 자다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만을 판다는 간판을 내걸었다 잠가지지 않는 문을 열고 배달된 시래기뭉치를 볶아 비빔밥을 만들었다
접시를 깨트리며 냄비를 팔고 찌그러진 냄비를 펴며 접시를 팔았다 냄비우동에 조개를 빼고 시장을 오가는 행인의 다리를 걸고 젓가락을 들었다 멈췄다 불어터진 면발을 세며 귀퉁이로 몰려드는, 건너야 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늘리며 넘어졌다
이 시는 역설적 기법이 돋보인다. 이 시에서 ‘사이’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전혀 낯설고 새로운 길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여러 갈래 길 중 하나다. 세상은 뒤죽박죽이고 일상은 매사가 엇박자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절망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세상 밖으로 건너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합니다’와 ‘팝니다’ 사이의 욕망은 ‘물 묻은 선잠을 자다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 식단을 준비하는 것처럼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배달된 시래기뭉치’처럼 우리의 신경세포를 유사하게 만들어버린다. ‘비빔밥’ 같은 ‘사이’의 욕망은 지친 일상에 이미지를 덧칠하며 변주하고 재해석되다가 끝내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하게 만든다. 그것이 ‘접시를 깨뜨리며 냄비를 팔고 찌그러진 냄비를 펴며 접시’를 파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며 날마다 어긋나는 일상에서 계속되는 여러 가지 선택의 길이다. (이충이 선생님)
맞물림이 없는 세계는 인과론이 무용한 헛도는 세계이다. 사실 우리가 꾸는 꿈은 관계와 유대로 맞물려 있는 사회적 인간의 결과물이다. 그 꿈이 깨졌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한 어느 순간에 시인이 인과론의 사슬에서 풀려났다는 것이다. “짧은 치마를 팔고 긴 다리를 샀다 배꼽티를 팔 때 배꼽을 사고 귀마개를 팔 때 귀를 샀다”나 “건너야 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늘리며 넘어졌다”부분과 같은 진술은 관계와 유대의 사슬이 끊어졌을 때의 공황恐慌상태를 직시하는 표현들이다. 이 시에서 암시하고 있는 바, ‘팔고 사는’ 행위는 사회적 약속이지만 또한 인과를 벗어난 존재의 비극이기도 하다. 팔고 사는 행위는 선후의 관계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마주침이며 엇갈림이다. 욕망이 완성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욕망이 거세되는 순간이다. 건너가야 할(생존) 신호가 짧음에도 횡단보도를 늘리는(세속적 자아의 욕망)이 아이러니야말로 힘들게 조우해야 할(이미 조우했을지도 모를) 존재인 것이다. (나호열 교수님)
발상의 역전 현상을 새롭게 전개하고 있어, 보는 이의 눈꺼풀을 한 겹 벗겨내는 즐거움이 있다. “웃음이 남아 있는 볼트를 사고 화장이 지워진 너트를 팔았다 꿈이 깨는 날 톱니바퀴는 필요 없었다”는 작품의 첫 구절을 읽으면서 단박에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비본질적 삶의 방식이 아프게 다가왔다. 현실적 자아에 충실 하느라 본질적 자아를 포기했다로 읽혔기 때문이다. (이동희 교수님)
「그것을 아는지」
이를테면 들쑤신 개미집이 잿더미로 변하고 흘러가던 강물이
얼어붙은 수면 위로 나뒹구는 돌멩이를 잠든 거울에 던졌는지
그러니까 가장 오래된 나미브사막에서 수혈된 붉은
사막의 속살을 바람의 채찍 받으며 타조가 달리고 있는지
어쩌다 질주할 수 없는 유목민의 밤하늘을
타조 깃털 두르고 포식자의 눈을 피해 걸어 나올 수 있는지
어디쯤에서 먹구름 몰려오고 기다리는 우기가 찾아와
깃털로 알을 품고 일어나 부화 된 숨소리 들을 수 있는지
누군가 찾는 이 있어 모퉁이 가로등 기침하고 벨이 울리고
머뭇거리다 숨어드는 헛꽃을 부르는 신호 들을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가을 빗소리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북소리 들으며 주저앉은 횡단보도를 깨울 수 있는지
언제부턴가 불씨 나누던 땅의 눈꺼풀이 감기고
심장에 도착한 마지막 얼굴 위해 무릎 내어줄 수 있는지
아직도 창턱 넘어 반사된 달빛 넝쿨이 새벽이슬에 숨을 불어
넣고 터널 속을 빠져나오는 뒷모습 비춰주고 있는지
그렇게 얼음기둥 세우고 벼랑으로 내딛던 웃자란 망설임 몰려와
여름밤 폭죽 소리 한가운데 집 한 채 세우는지
*모든 시는 질문이다. (세 번째 시집 『담다·닮다』 수록 / 이동희 교수님)
문학은 인생의 해답을 제시하는 글쓰기가 아니다. 문학 작품은 인생의 길에 놓인 정답지가 아니다. 다만 문학적 말하기[글쓰기]는 무엇이 알고 싶은 건지, 질문의 길 안내 역할일 뿐이다.
이 작품은 아홉 개의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질문만 있지 대답-정답-해답은 없는 글쓰기[말하기]다. 이 질문을 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독자의 질문도 함께 던져진 셈이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묻는가?”이다.
매우 재미있는 발상이요, 질문법이다. 가만히 뜯어보노라면 이런 질문법이 담고 있을, 질문하는 자와 질문을 받는 자의 관계가 결국은 순환관계에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질문하는 자가 곧 질문을 받는 자이며, 질문을 받는 자가 곧 질문하는 자이다. 우리는 항상 보는 대로만 보려 하고, 들리는 대로만 들으려 하는 타성적 존재다. 그런 인식방법에 길들여짐으로써 보이지 않는 실상을 외면하게 되고, 들리지 않는 생명의 소리를 무시하게 된다. 나[자아]는 이렇게 보고 있는데, 너[타자]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세계 인식에 대한 고정관념에 파열음을 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블베이스 앙상블」
-바시오나 아모로사
더블베이스가 비행을 시작한다
기댄 듯 붙잡은 듯 흔들거린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춤추듯 호흡하며
수직의 현을 탔다 거장의 팔은
악기를 안고 도약하듯 해와 달을 넘나들며
천천히 변주된 선율을 연주했다
짧고 굵은 활이 현을 그었다 떼었을까
울림통은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들려주었고 벌판에 중후한 몸통으로
키다리신사는 섬세한 귀를 열었다
피치카토 주법으로 코끼리를 데려오거나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이 현 위에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마지막 악장이 끝날 때까지
관객과 호흡하며 치닫던 더블베이스는
박수를 녹여냈을까 휘파람을 반죽한
달의 눈물은 건기의 물웅덩이를 채우고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장거리 전화를 붙들고 푸른 문으로 사라졌다
“더블베이스가 비행을 시작한다”고 그 연주의 시작을 알린다. 그 육중한 몸매가 비행飛行하려면 얼마나 힘찬 발진의 에너지를 내공해야 염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가히 짐작할 만하다. “피치카토 주법으로 코끼리를 데려오거나/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이 현 위에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면서 더블베이스만으로 이루어내는 앙상블의 미학을 형상화한다. 그러니까, 허공으로 사라지고야 말 운명인 더블베이스의 몸매를 시의 영혼으로 살려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앙상블에 노출된 시적 정서가 도달한 세계가 있어 비로소 ‘음악의 시’가 아니라, ‘시의 음악’으로서 새로움의 가능성을 보인다.
문학적 진실이 따로 있지 않다. 문학 작품은 ‘깊은 사유’와 ‘예술적 감동’이라는 두 축에 의지해서 독자의 정신세계와 심미안에 일대 파문을 일으키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 (세 번째 시집 작품 / 이동희 교수님)
# 두 번째 시집『물 속의 잠』은 조영미 시인과 최준 시인님의 해설로 살펴보겠습니다
*유동流動하는 은유로 새긴 길의 궤적들로 『물 속의 잠』을 읽던 중에 문득 궁금해졌다. 시라는 문학장 안에서 개성과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 시 쓰기는 타고난 운명인가, 아니면 후천적인 노력인가. 시 쓰기가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는 시인도 있을 테고 의지라 여기는 시인도 있을 텐데, 그러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 시가 지식과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감정과 감성의 산물이라면 기질은 분명 타고나야만 한다. 여기에 노력과 공부가 덧대어지면 그는 비로소 시인으로 불리는 것이 아닐까. 시행들에 올올이 배어 있는 감성은 시인의 타고난 기재이며 시집의 해설자가 적절하게 언급했듯이 은유로 점철된 표현들은 시인의 지난한 노력의 결과일 테다. 습작 과정에서 익힌 자신의 시적 전략으로도 여겨지는 이러한 양상은 시집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 다음의 시를 읽으면서부터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준 시인)
「물거울 속으로」
아스팔트 위로 저녁이 끼어들었다 빗방울 뛰어가고 발자국 바쁘다 차창 밖으로 매달린 안경, 지하철도는 사다리 타기를 하고 남아 있는 밤이 계산되었다 바퀴의 질주, 맨홀뚜껑이 열렸을까 바텐더가 바쁘다 투명한 유리잔의 곡선은 불빛을 부르고 마디를 꺾었다 풀어헤친 목소리, 진한 꽃물을 마신다 오늘, 물비늘 열고 나온 강을 허리에 감았을까 몰려다니는 천둥을 품었을까 불빛 내리고 길을 접는다 금이 간 물거울 속으로 다시 밤을 쓴다 둥근 어깨는 아직 물 위에 떠 있다
시를 읽는 독자는 시가 자신의 정서에 모종의 파동을 일으켜주기를 기대한다. 흔히 공감이라고들 뭉뚱그려 지칭하는 독자의 소박한 바람을 시가 충족시켜 주었을 때, 그 시는 좋은 시가 된다. 그런데 위의 시는 독자를 혼돈으로 이끈다. 독자를 시의 말들 속으로 손잡아 데려가는 게 아니라, 시의 외곽에서 서성이게 만든다. 낯섦이 도처에 질펀하다. 도시의 삶을 사는 독자일지라도 이 시는 역시 외지다. 시인의 전략적 실패인가. 독자의 무지인가. 한 편의 시를 쓸 때, 시인은 나름의 시적 의도를 가지고 이를 시에서 실행한다. 독자를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시인들은 자신만의 의지가 있다.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독자가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는가 이해하지 못하는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미지의 다수가 한 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걸 명민하고 영악한 시인은 먼저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전제된 불가능을 두고 고민할 필요가 시인에게는 없다. 문제는 독자다. 독자는 무수한 집단인 듯하지만 기실은 모두가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한 편의 시에 각기 대응하는 일대일 대응관계다. 그러니 독자보다는 늘 시인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한 독자가 한 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시인은 고민하지 않는다
우선, 아스팔트는 길이자 도시의 은유일 테다. 이 은유의 도시에 저녁이 오고 비가 내린다. 귀가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빗소리에 섞인다. 시는 기교적인 표현의 연속이다. 이 표현은 계속되고 반복되는 일상이 어제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늘 저녁이라는 현재는 어제를 반복하고 답습한다. 시간에 매달려서 부유하는 삶들은 어제와 오늘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게 현실이고 일상이고 삶이다. 그렇지만 이 모호함, 난해함 속에는 한 시인이 고슴도치처럼 몸을 도사리고 숨어 있다. 눈이 어두움으로 해서 촉수가 더없이 예민해진 시인의 감각이 도시의 저녁과 만난다. 시각의 새로움은 자신의 삶과 의식을 통찰, 통섭한 다음의 문제다. (최준 시인)
「물의 계단」
철없는 고둥들 고물고물 기어가는 갯바위,
등껍질 무거워 물때를 기다린다
종아리 드러낸, 갯벌의 치맛폭에 숨어
금이 간 손바닥, 큰 눈 되어 바삐 움직이는
열 손가락, 시시로 실망하고 때때로 웃어대며
찾아 헤맨다 갯바위 물울덩이에 놀란
눈알고둥 모여 있고 촉수 내민 말미잘 보인다
고둥껍데기 뒤집어 쓴 집게가 지나가고
뻘밭 짊어진 해질녁, 수평선을 훔쳐본다
밀물로 덧입혀지는 모래벌판,
솟구치는 파도소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의 계단 오르며 오늘을 잡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바닷가 문턱은
내일의 모래문자가 새겨져
밀려오는 파도와 모래뭉치 사이로
새로운 길을 낸다 길을 알린다
시집 도처에 배경으로 깔려 있는 풍부한 물의 이미지들은 그러니까, 시인의 내면에 생래적으로 배어들어 있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표출된 결과이기도 하겠다. 이러한 시인이 바라보는 바다는 수평의 이미지가 아니라 수직의 이미지다. 평범하거나 편편하지 않다. 넓이가 아닌, 깊이와 높이다. 밀물과 썰물의 간만의 차는 “계단”을 이룬다. 썰물이 진 바닷가의 풍경은 “종아리 드러낸, 갯벌” 이다. 이 갯벌에 나간 화자는 여인이고, 여인의 삶에는 물때의 길이 있다. 물의 연구자인 시인은 물을 다양하게 삶과 연관 지어 변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물에 의지해 살아가는 삶을 노래한다. 밀물과 썰물의 자연현상에 의지하는 삶이 이루어내는 층위의 질서는 의식할 수 없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최준 시인)
「땅의 지문」
포말이 잠길 무렵, 땅의 지문을 지우고
변명하는 뿌리를 잘랐을까
물의 저녁이 붉어졌다
막아선 바다와 끊어진 길 위에 서 있다
발밑 티눈은 자라고 손발이 작았다
엎드린 저녁이 꿈틀거렸다 헝클어진
머리 숲에 똑딱단추 떨어지고
깨진 돋보기는 무단횡단을 한다
어둠을 굴리던 바큇자국이 사라진다
언젠가 와 닿을 곳에서 떠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전화기 속의 목젖을 응시하고
말라가는 시계, 갇혀있는 풍경소리,
썰물 위에 낮잠 자는 배, 무풍지대로 돌아간다
물그림자를 따라 휘도는 젖빛 하늘,
집으로 향하는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고
건너가야 할, 꿰뚫고 지나가야 할 길 위로
뒤엉킨 발자국, 얼굴 없는 물살이 빠르다
젖어드는 발 부풀어 오르는 동안 물빛이 붉다
위도는 높아지고 빗속을 걷고 있다 달아난 혀를 끌고 나와 울었다 질척거리는 길, 전동휠체어가 굴러 간다 지우고 풀어헤친, 닫힌 오후를 소개하자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재채기, 배꼽이 빠져나갔다 동공이 커진다
형용사보다 동사를 사랑하는 시인의 시집은 말이 아닌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일이 들춰내지 않더라도 신체의 일부분인 손과 발은 역동적인 시인의 의식을 대변한다. 물의 이미지로 출렁거리는 “길”은 움직임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삶의 길’을, 곧 생을 은유한다. 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저마다의 삶의 길이며 의지에 따라 손발이 움직이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이 추상적인 생의 길 위에 시인의 의식이 놓여 있다. 결국은 “전동휠체어”에 의지하게 되는 생일지라도 생의 길은, 시인의 전언에 따르자면, 벽을 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최준 시인)
「벽」
벽을 넘는다 모두 벽이다 커다란 입을 가진 벽 뒤엔 또 다른 창살이 있다 줄자를 가지고 토막 난 밤을 건널 때마다 어깨 통증이 왔다 질주하는 회전목마에서 뛰어내렸다
흐르는 강은 낙관을 허락하지 않았고 모래 한 줌 빌려주며 단단한 이야기를 쓰게 하고 실어증을 앓았다 감나무에 걸린 얼룩진 얼굴이 떨어지고 밤낮으로 보안 손님이 찾아왔다 묶어둔 저녁은 뒤꿈치가 없다
분침과 시침이 떨어져 나가고 표류하는, 달려드는 벽 앞에서 연결통로는 목이 짧았다 크기가 다른 창마다 불빛이 새어나오고 목청을 높였을까 오후 다섯 시의 그림자가 숨을 죽인다 밀어내는 벽 앞에서 배인 자리는 잇몸을 드러냈고 가시 박힌 손이 벽을 넘고 있다
시인은 현실(상황)에 복무할 의무가 없다. 영혼이 자유로운 자, 언어를 매만지며 언어로 홀로 놀이하는 존재다. 설령 그가 불친절할지라도 시인인 그는 사회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비난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 생은 물과 다름없으며 물과 같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손발을 지닌 육체이다. 시인은 이 육체를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읽어내는 눈을 지녔다. 은유는 시인의 칼이고, 잘 벼린 시인의 칼날은 우리의 의식을 해부하는 예리한 도구이다. 삶에서 시를 발라내고 의식의 내면이 숨겨놓은 가시를 건져내었다. (최준 시인)
「봄의 중심에서」
겨울 끝난 줄 알고 땅속 파헤치다 손끝에 동상이 걸렸다 홍매화 피었다는 소문 들리고 돌아나온 발걸음은 겨울 모서리를 지났다는 햇살의 귀띔이었다 지나온 속사정 듣지도 않고 빛샘으로 다가온 성급한 문 열었을까 바퀴의 굴대를 잡고 늘 같은 자리에서 봄의 어깨에 기대어 초록신호를 기다린다
벚꽃무더기 속으로 한발 다가섰다 동공이 흔들린다 빌렸던 외투 벗어두고 눈썹에 내려앉은 꽃잎 밀쳐내며 혀를 묶고 종아리 걷어 올린 맨발, 봄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하늘 가까이 가고 싶어 스카이라운지를 예약하고 더 이상 떠나보낼 것이 없을 때 문득 가야 할 곳이 보였다 뒤돌아설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봄의 중심에서」는 마치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은 듯 화자의 숨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지나온 속사정”과 “뒤돌아설 수도 멈출 수도 없는” 현재의 상황은 어떤 것일까. 무엇이 “성급한 문 열”게 했을까. 왜 화자는 “늘 같은 자리에서” 봄의 신호를 기다리고만 있었을까. 그리고 왜 “더 이상 떠나보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가야 할 곳이 보였”는데 어쩌자고 안절부절 못할까. 이처럼 물음에 대한 궁금증 유발은 타 장르에 곧잘 영감을 준다. 때문에 한 편의 시는 다양한 측면에서 재해석되어야 하고, 그것은 다시 누군가의 손끝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시가 함축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이미지를 던져주는 것은 그것의 행과 연에 의해 가능해진다. 일반적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상상력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조영미 시인)
「길을 읽는다」
1.
등 굽은 소나무 벼랑 끝에 서 있었을까
붉은 비늘 벗겨지고 흩날린다
둥지로 돌아가는 길, 도로와 철도는 키를 재며
자동차를 몰고 온다 숲이 들썩인다
달려오는 불빛, 길이 끊겼다
네 다리가 얼어붙고 로드 킬,
내리꽂히는 빛에 매달린 혀
깃털이 나부끼고 발톱은 뽑혔다
떠돌고 헤매다 찾지 못한
야생의 길을 갈 뿐 뒤돌아보지 못한
길의 발설을 들었을까
생태통로가 신호를 보낸다.
2.
발소리 큰 아이들은 집을 깨우고
준비된 어깨는 넓었다
바람의 허리는 짧았을까
거리를 떠돌던 가로등이 번진다
어스름 깔린 낙원상가 뒷골목,
분칠한 올빼미 아줌마 큰 귀를 열고
손을 흔들었을까 심야다방은 치마를 두르고
가로등 밑 가판대는 은빛 팔짱을 낀다
누가 부르는 걸까 넘어진 도시에 홀로 남겨졌다
겨울 지느러미를 흔들며 집이 늙어간다
연체료는 늘어나고 잔등으로 남았다
시의 언어에서 ‘길’은 곧잘 우리네 ‘삶’과 동의어로 읽힌다. 우리는 길을 통해 삶을 의인화하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 많은 이야깃거리를 문학적으로 완성해 내고자 한다. 이 시에는 삶의 두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실상 우리네 삶은 언제 로드 킬 당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길의 발설”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호와도 같다. “생태통로가” 보내는 “신호”는 길바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위에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는 “올빼미 아줌마”의 늘어나는 연체료도 더불어 있음이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볼 부분이 화자의 태도다.
화자는 길 위의 삶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참혹한 죽음을 대면하고서도 “야생의 길을 갈 뿐 뒤돌아보지” 않는다. 또한 “넘어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집이 늙어간다”는 언술처럼 화자는 일련의 이미지를 그려낼 뿐 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읽는 이로 하여금 사고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서정성을 담보한 새로운 소통의 공감대를 요구한다. 은유적 기법으로 대상을 객관화해 이미지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조영미 시인)
「귀향歸鄕」
흙비가 내린다 빗발은 굵어지고 뒤엉킨
군화는 길 위에 놓여있고
몇 번의 겨울이 지나갔을까 빛을 삼킨
저녁이 기어와 앉았다 태어나지 못한 웃음
먼 안쪽, 저 어루만지는 햇살은 서럽다
신열을 재촉하던 웃비가 다녀가고
사방천지 뒤섞이는 굽잇길, 돌이킬 수 없는
암류, 목이 길어지는 밤마다 숫눈길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떠도는 구름이 되어
그날을 부른다 돌아가지 못한, 고향 길에 얹은
시선은 벌판을 달리고 봄마다 새순으로 자라
물결쳐 왔다 말없는 강을 더듬거린다
꽃봉오리 열어주며 못다 핀 꽃자리에 나무를
심는다 끝 모를 길 끌려가며 괴불노리개를
품었던가 노리개가 밤하늘을 걷는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자 덫에 거린
아침을 매달고 절규하는 한낮, 품을 열어주던
고향을 그린다 귀향굿을 한다 흰나비 떼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넘실대는 날갯짓,
이제 왔나 밥 묵자 땅을 흔들던 흰나비,
묘비 앞에 오롯이 앉아있다
한 편의 시가 한 폭의 그림처럼 읽혀지고 그려지는 것은 시의 구조에 연유한다. 부연하자면 「귀향」은 “이제 왔나 밥 묵자”라는 4연의 메시지를 위한 이미지 만들기다. 누구에게나 돌아가 안식을 취하고 싶은 곳이 있고, 그곳에서 같이 “밥 묵”을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아침을 매달고 절규하는 한낮”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귀향」은 절규하는 현대인의 아픔을 그린 것으로 읽혀지고 그려진다. 모든 예술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있고, 방법은 다양하다. 시인이 어떠한 방법을 택하든 그것은 결국 시인이 열망하는 그 무엇에 다가가는 일이다. 그 열망이 정점을 향해 내닫는 과정이야말로 시 쓰기의 전부가 아닐까 싶다. (조영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