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의 도입부는 서스펜스 스릴러나 필름 누아르처럼 음울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현상중인 사진관의 인화지처럼 물에 잠긴 몇 장의 사진들. 길에 쓰러진 미미의 초점 흐려진 처연한 눈빛.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로우키 조명의 영상과 공포스런 분위기를 형성하는 음향. 명멸하는 네온사인과 그림자 드리워진 사내의 흐릿한 얼굴. 관객들은 전개될 이야기가 살인사건의 내막에 대한 것을 거란 막연하고도 평범한 짐작을 지레 하게 된다. 이명세 감독은 그런 우리의 섣부른 기대를 뒤집어버리고 제도화된 욕망을 저버린다. 이 작품은 범인을 쫓는데 관심있는 영화가 아니다. 실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는 영화이다.
프리츠 랑이 연출한 동명의 1933년 작과는 어떠한 연관도 없다. 감독은 연출론을 두고 꿈에서 히치콕이 나타나 'M'을 새긴 책을 주고 갔다고 증언한다. 그건 영화의 모든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안개 자욱한(misty)이거나 기억(memory)이거나, 미스터리(mystery)이거나 멜로(melo)이거나 혹은 M을 어미의 철자로 하는 모든 요소들일 수도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전체를 명확히 설명해주지 못하는 모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어느 단어도 전체를 명료히 정리해주지 못한다. 알파벳 'M'은 히치콕이 말했다면 '맥거핀'이고 오슨 웰스가 말했다면 케인의 '로즈버드'다. 영화를 사소한 디테일들의 퍼즐 짜깁기로 해석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아보인다. 영화의 비주얼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잘 짜여진 일정한 논리의 바탕에서 엮이는 의미를 함축한 상징이라기 보다는 형태와 색체 자체로 어떤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순수한 장치에 가깝다.
영화는 관객들의 무의식적이고 구태의연한 영화 관람 태도를 공격한다. 무성영화나 연극무대에서의 연기처럼 과장된 동작이 타영상작품에선 관습화되어 남발되는 표정의 클로즈업에 의존하지 않고도 높은 밀도의 감정을 뿜어낸다. 독특한 연기스타일은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이 보여준 연기를 꼼꼼히 살펴보고 검토한 후 설정한 것같다. 짙은 안개와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의 눈부심. 빛과 그림자, 색채와 음영의 강렬한 대조로 구축한 몽환적인 비주얼 스타일은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더없이 적절한 시각적 형식일 것이다. <M>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젊은 소설가의 아이디어가 완전히 고갈되었다. 그의 이름은 민우(강동원). 남자가 거처하는 아파트는 지독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의 주거로 알 맞은, 번뜩이는 섬광과 정적에 휩싸인 무시무시한 공간이다.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난 그의 눈에 처음 잡히는 옷걸이의 옷을 관객은 잠시 그를 미행하는 살인자의 의상착의로 착각한다. 겉으론 평온해보이지만 위태로운 약혼녀 은혜(공효진)와의 관계와 원고를 재촉하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수다쟁이 출판사 관계자와 재력을 과시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을 권하는 경박스런 장인(송영창)이 연이어 목전에 나타난다. 민우는 한 순간도 편하지 않다. 그는 현실의 중압감과 위선, 스스로의 작가적 욕망과 이를 따라오지 못하는 결과물에 대한 불만족으로 지쳐버린 남자다. 민우의 신경질적인 강박증은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제를 기억하기 위해 오늘을 모조리 소모해버림으로서 현재를 과거의 선으로, 죽음의 선으로 이끌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묘사된다. 딜레마에 처한 그는 조언을 듣고싶어한다. 절필하기 직전의 그의 걸음 뒤를 미미가 따라 다닌다. 언제나 그의 등 뒤에 그녀가 있음에도 민우는 그녀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다.
침침하고 좁은 골목에 자리한 '루팡(Lupin)'이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민우는 자신을 이상형처럼 좋아서 따라오는 여인을 본다. 이연희가 연기하는 미미는 청순하다. 아름답고 순수하면서도 대답은 내주지만 질문은 하지 않는다. 미미는 여성을 이상화한 비현실적 존재이다. 그녀는 범인(凡人)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야외 카페에서 민우가 미미의 외침을 따라 집어든 마우스를 내려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행동을 자세히 본 영리한 관객이라면 이 지점에서 미미를 현실의 인물이라 믿지 않게된다. 아마 그녀는 민우의 유년 시절 기억 자체이며 혹은 무의식 속에서만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영적인 무언가일 거란 과감한 추측도 가능해진다.(우리는 이점을 영화의 결정적인 부분에서 재삼 확인하게 된다) 유령과도 같은 존재의 등장이 묘하게도 관객에게 공포감이 아닌 감상적인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민우의 마음은 그녀를 뮤즈로 삼아 그녀가 보내는 무조건적인(그리고 가상의) 성원에서 위안과 영감을 얻는다. 막다른 벽에 직면해 소설을 쓸 수 없게된 작가는 미미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남자는 처음엔 미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불현듯 낮이 익다는 느낌은 받는다. 언제 그녀를 만났던 것일까. 민우는 기를 쓰고 아득히 멀어진 옛 기억을 쫓는다.
영화는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를 미꾸라지 헤엄치듯 넘나든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색채로 채워진 공간은 깨어있는 현실, 어둠 속에서 사물의 윤곽이 언뜻 비치는 공간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로 인식해도 좋을 뜻 하지만 감독은 루팡바의 성냥갑처럼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고 출현하는 도구를 배치하여 경계를 불분명하게 흐리는 스나크로 활용함으로서 가상과 실제의 관계를 한 번 더 꼬아놓는다. 민우는 그날 정말 카페에 갔던 것일까. 지금 깨어있는 이 순간도 꿈은 아닐까.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이고 민우의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투덜대는 이들이 있지만 나는 조금도 어렵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굳이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M>은 우리에게 현실과 환상이 각기 다른 영역으로 괴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백일몽(白日夢)처럼 현실에는 꿈이 포개어져 있으며 거기에 눈뜰때 우리의 삶은 보다 풍족하고 아름다워진다고 주장한다. 민우의 꿈은 순수했던 청소년기의 추억이고 첫사랑의 기억이다. 현실 세계의 이미지, 기억 속의 이미지, 만들어낸 소설 속의 이미지 이 세가지가 중첩되어 이명세가 만들었던 영화중 가장 지적이고 구조가 정교한 <M>의 내부로 빨려 들어온다.
이명세는 컷을 나누기보다는 카메라를 움직인다. 그는 공간을 잘 활용한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애용하는 테크닉중 하나는 배졍의 사물에 포커스를 맞추고는 접근하면서 프레임 속의 또 다른 프레임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것이다. 주객과 공간의 전이를 통한 액자식 구성. 횟집의 액자나 루팡바가 자리한 골목의 버려진 거울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인물의 뒷모습이나 그림자를 두고 롱테이크로 끈다는지, 인물이 사라진 빈 공간을 응시하는 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와 닮아있다. 그는 관객에게 트릭을 선보이고 설명하는 듯하다가 관객을 속이는 영화의 마술사다. 그는 끝까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관했다고는 하지만, <M>은 그가 심중 깊숙히 감독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관객의 어리둥절함을 기뻐하고 있음을 감추지는 못한다. 인물들이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려는 동선을 뒤따라가면서 카메라는 같은 공간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횟집에서의 장면은 출판사 관계자와 장인과의 만남으로 반복되더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민우의 소설 속 이야기로 다시금 변주된다. 도시의 거리나 루팡바,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동일자의 영겁회귀. 기억의 보건은 반복이라는 모티브. 민우가 뛰어다니는 골목길을 미미 역시 그대로 답습한다.(이 장면은 미미의 존재가 민우의 기억임을, 골목길을 찾은 두 사람이 실은 동일인물의 다른 외피임을 입증한다) 미로처럼 같은 자소를 오가길 번복하는 중에 세월의 풍파에 바스러지고 조각난 기억들은 점차 원형을 되찾아간다. 동창회에 참석해서 미미의 죽음을 알게된 민우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한다. 억압된 기억은 망각의 층위를 뚫고 나오려한다. 민우는 미미와의 추억이 서린 그때의 교실과 미장원을 찾는다.
창 밖에서 미장원과 교실 내부를 들여다보는 이 회상의 독특한 시점은 민우가 과거를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안타까움을 담은 것일 터이다. 누구나 경험은 했지만 쉽게 잊어버리곤 하는 옛날의 흔적들. 카메라는 창 밖에서 미장원 실내를 들여다보고 비누를 포함해 사물 개개의 모습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일일이 훑어간다. 대부분의 장면이 세트에서 촬영되었다. 감독은 세트를 자신의 꿈과 소망, 상상과 추억의 흔적들로 채워진 정감있는 공간으로 꾸며놓는다. 배우만이 아니라 장면 속의 환경에까지 감독의 섬세한 관심이 미친다. 모든 미장센이 세밀히 준비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단편적인 영상들은 머릿 속을 때리는 번갯불처럼 이따금씩 뇌리속에 떠올라 민우를, 그리고 우리를 슬프게 할 것이다. 인상깊은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구축된 공간은 사라져버린 과거의 꿈과 환상, 추억을 그리지만 그건 단순히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한 새로운 시공간이며 더이상 현재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실재와 환상을 컷을 나누지 않고 자아와 또다른 자아를 한 프레임에 배치하며, 종종 와이프나 페이드로 처리하여 이분법적인 통속성을 파괴하는 대담한 파격성) 미장원집 딸 미미와의 설레는 데이트. 이명세가 <첫 사랑(1993)>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초기작에서 애용했던 데이트의 도구인 자전거가 보인다. 필자는 이와 흡사한 이미지를 본 적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해변의 석양을 구경하는 장면은 분명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만춘(1949)>에 대한 오마주이다. 저무는 해변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민우와 미미 사이에 놓이는 푸르스름한 보름달의 이미지가 실은 영사기의 불빛이라는 가벼운 트릭은 이명세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필자는 이상하게도 이 장면에서 문득 루이스 부뉴엘의 악명높은 초현실주의 단편 <안달루시아의 개(1928)>의 눈자위 면도날 절단 장면을 생각했다) 미미를 매웅하고는 데이트의 여운에 젖어 뜰 앞에서 잔상을 남기며 빙글빙글 베자리를 맴도는 민우의 자전거가 사라지면 현재의 민우가 그림자에서 미장원 앞으로 성큼 걸어나온다. 추억을 함께 했던 사람은 없지만 그 장소만은 남아있다. 시간의 가변성과 존재의 지속성, 두 개의 모순이 겹치고, 우리의 소망은 환영의 형태로 현재에 과거를 불러온다.
추격이라는 기본적인 설정은 작품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M>에서의 추격은 민우가 풋풋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회상의 과정, 그리고 미미를 어둠의 저편에서 덮치고 팽개치는 정체모를 우산 든 사나이와의 숨바꼭질, 두 가지 양상으로 나뉜다. 전자는 소설로써 기억을 재구성하는 민우의 글쓰기로, 후자는 우산든 사나이와 미미 사이에 벌어지는 숨이 벅차는 도주와 뜀박질의 연속으로 그려진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지지 않는 이 우산든 인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자의 몽타주는 마치 장이머우의 <홍등(1991)>에서 베일에 휩싸인 대인처럼 끝내 생김새가 뚜렷히 밝혀지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차림새는 영화의 시작에서 민우의 아파트에 걸려있던 복장이고 그의 우산 손잡이는 루팡바에서 다시 발견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미의 가는 길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만으로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그의 정체는 따라잡힌 미미의 핸드백에 담긴 물건이 사라지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본디 우리의 기억이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 희미해지고 파편이 되는 것. 우산 든 사내는 '망각'의 상징, 시각적 아이콘이다. 기억을 의식의 층위로 끌어올리려는 취재와 기억을 침식하고 무의식의 어둠 속으로 깊숙히 끌어내리려는 상반된 형태의 추격이 겹치며 영화에 치열한 긴박감을 조성한다. 기억을 추적하려는 집념의 배후로는 망각에게 역추적당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자리하는 것이다. 장 콕토였다면 아마도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거울은 죽음의 사신이 오가는 관문입니다. 평생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죽음의 사신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이 두 가지의 추격과 도주가 외나무 다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장소, 꿈과 현실을 매개하고 기억과 망각을 중재하는 만남의 장소가 루팡바이다. 루팡바 역시 영화에서 세번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연극무대에서나 쓰일 법한 팔로우 핀 라이트가 비치는 가운데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바다 깊숙히 잠수하는 것처럼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임을 암시하는 차분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카페 주인(전무송)의 존재는 이 장면에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불어넣는다.(그는 마치 산 자에게 망자와의 면회를 잠시 허락하는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구식 축음기에 레코드판이 놓인다. 익숙해진 멜로디가 들리고 미리 약속이라도 되었다는 듯 손님들 모두가 짐을 싸서 떠나기 시작한다. 주인을 제외하고는 민우와 미미 단 둘이 남는다. 이곳에서야, 그리고 이제서야 산 자와 죽은 자,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 기억과 실재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민우는 바의 진열장 앞에서 역광으로 빛을 등지고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있는데 반해 미미는 및은 편의 어둠 속에 자리해있어 얼굴은 핏기없이 푸르스름해보인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만년작 <꿈(1990)>의 한 단편에서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병사의 창백한 혼령이 연상된다. 미미를 앞에 두고 재회의 기쁨과 알아보지 못한 미안함이 혼재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민우의 표정은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1931)>에서 작은 방랑자가 소녀를 마주보며 지었던 표정을 상기하게 한다. 프리즈 프레임으로 편집한 대화 장면에서 강동원과 이연희의 표정은 무척이나 표현주의적이다. 이명세의 영화는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를 볼 때 우리가 얻는 정서적 반응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진실하다.
철학적으로 우리는 하이데거가 '있는 것'과 '존재함' 사이의 차이에 대해 강변했던 바를 잊으면 아니된다. 스릴러와 멜로드라마의 이중적인 외피를 취하고는 있지만 <M>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존재에 대한 영화다.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에 쉽사리 동참하지 못하고,지층 아래 서서히 진행되던 변화가 가시화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를 알아채게 된다. 카페주인의 말처럼 세월이 흘러서 우리가 알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전화번호가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의식은 지나간 과거에 머물러 쉽사리 떠나질 못하고, 기억 속 제자리에 떠나간 사람들의 추억은 소중히 남게 될 터. 분명 그들은 지금 우리 곁에 부재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민우에게 있어 미미와의 추억은 그가 늙어서 휜칠한 외모가 변하더라도 민우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자아와 의식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한, 불변하는 젊음의 환영 그대로일 것이다(미미의 외모에 대해 완전히 똑같다던 민우의 대사를 상기하라) 기억하는 한 미미는 민우의 추억 속에 뮤즈의 형태로서 살아있을 것이고 망각의 늪에 침윤한다면 미미는 유령으로서도 죽은 것이다. 기억함으로서 우리는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존재의 영원성을 확보할 수 있게된다.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근원적인 질서에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그나마 벌일 수 있는 항의와 투쟁이다. 그리고 꿈이 있다. 꿈은 우리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타협이며, 성취하지 못한 소망을 가상으로나마 충족시켜줌으로서 우리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준다. 이명세 감독은 꿈이 허상이므로 부질없다는 식으로 그 위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겨울 때 삶의 활력이 되는 꿈의 기능과 위력을 충분히 알고 있으며 관객들에게 꿈꾸기를 권장한다. 이명세 스타일의 영화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러닝타임이 흘러가는 동안 준비되어온 꿈과 추억의 시공간이 완성되어 목적에 이르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명세 스타일의 영화가 가장 슬픈 순간은 위안이 되어주었던 그 가상의 시공간이 다시 도래하는 현실의 중압감으로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다시 새벽이 동트면서 연인과 함께 했던 꿈에서의 모든 것이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다. 허공중에 덧없이 스러지는 여름밤의 하나비(花火)처럼.
모리스 르블랑이 애용했던 추리 소설의 캐릭터 이름을 차용했듯 추리 소설과 흡사한 플롯을 활용하는 이상, 미미가 죽었음믕 확인하는 장면이 반드시 삽입되어야 한다. 8월 20일 둘이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 교통사고로 미미는 죽은다. 사고의 순간 몸에서 혼령이 빠져나오듯 미미가 뒤로 튕겨져 나간다. 민우는 영문을 모른채 통화중인 전화만 재촉할 뿐이다. 대상을 보다 넓은 시야에서 들여다보기 위해 내려다보는 구도를 취하다보니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은 우산을 쓴 채 손과 다리만 떠다니는 것처럼 묘사된다. 타인의 일에는 무관심한 방관자들의 세계에서 미미의 마지막 길은 외롭고 서글프다. 보도블럭이 깨진 인도에 물이 고이고 고인 물에 달이 비친다. 깨진 거울에 반사되는 달빛을 포착했던 <첫 사랑(1993)>의 한 장면처럼. 정철의 [장진주사]에서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란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섬뜩하리만치 선연한 저승의 이미지가 비극적인 정조를 더해준다. 어린 민우의 모습과 성인이 된 민우의 모습이 달빛 스미는 창가에 다볼브로 교차하며 시간의 흐름과 그럼에도 유지되는 기억의 지속성, 의식의 동일성을 나레이션없이 설명해준다.(여기서 또다른 문제를 제기해보자. 우리는 진정 연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연인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념을 사랑하는 것일까)
민우는 동거를 그만두고 짐을 싸서 나가려는 은혜를 붙잡는다. 빛에 따라 사물의 인상이 잘라져 보임을 이용한 빛의 액션. 번개가 명멸하는 실내공간에서 은혜의 얼굴에 순간 미미의 얼굴이 겹친다. 은혜의 마음 속 목소리에 미미의 목소리가 겹치며 똑같은 말을 속삭인다. 첫사랑이란 단지 남며가 서로를 잊지못하는 그런 단순한게 아니다. 한 인간에게는 현재에 도달하기까지의 편력 혹은 연대기가 있기마련이고 그로서 형성된 자아의 틀 안에서 대부분의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쓰기가 마무리지어질 무렵 장인은 민우에게 딸을 부탁하며 거액의 수표를 건넨다. 자기 방면의 직업에서나 곧 시작될 결혼생활에서 민우의 장래는 창창하다. 그에게는 미래가 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면 현실에서의 그의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가. 민우는 망각과 헤어짐, 죽음에 대한 집착에 갇혀있으나 그럼에도 미미는 존재를 거의 잃어가고 있다. 헤어질 시간이다. 이건 필연적이다. 태초의 신이 인간에게 점지해준 불가피하고 불가해한 이별 그리고 망각의 운명. 민우의 기억과 미미의 유령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시간이 모두 흘러갔음을 인지하고 있다. 상대 여성을 갈구했지만 그녀를 잃었음을 후회하면서도 이것이 순리임을 알고있는 남자의 분위기가 정확히 표출된다. "당신을 오래 사랑할 줄 알았는데, 이제 나는 떠나야 합니다.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떠남으로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미미의 독백이다. 민우의 꿈 속에서 다시 만난 미미는 가지 말라는 절규어린 외침을 뿌리치고 무심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 장면은 어둡고 침침한 지하철에 앉아 슬퍼하는 미미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지하철은 자전거와 시계처럼(그리고 왕자웨이의 <2046>에서처럼) 시간의 유동성을 상징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객석에 우산 든 사나이가 동승하며 눈물을 훔친다. 미미는 망각의 선을 타게 된 것이다. 민우는 과거를 다시 쓰려 애씀으로서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 그는 이승에서 그녀를, 그녀는 저승에서 그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나는 죽었다. 내 이름은 미미" 애처로운 소녀의 독백이 사그라들듯 귓가에 울리며 쥐구멍에 볕들 듯 빛이 내리쬐던 루팡바 거리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민우와 은혜는 소설이야기를 하며 푸른 해변가에 앉아있다. 디졸브한 해안가에 두 연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텅 빈 해변만이 남는다. 등장인물이 머물던 공간과 떠난 후 비어버린 공간의 대비. 이 사진적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훗날 민우는 은혜와 있었던 일을 미미에게 그랬듯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며 살아가지 않을까하는. 작가는 뮤즈에 의해 꿈의 세계에 들어섰다가 작품을 마치면서 그 기억과 이별하는 것으로 그의 추적 취재, 혼돈의 오디세이는 마무리된다.
민우와 미미의 사진찍기가 유년기의 소꿈장난처럼 단란한 한 때도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과거를 떠올릴 때 손쉽게 동원하는 수단이 사진이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의 모습을 발견한다. 녹슨 필름통에 담긴 손상된 네거티브 필름처럼 두어번 끊기고 살짝 노이즈가 그어진다. 설레는 이 순간 오래도록 추억으로 간직하고픈 미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도 사진기의 플래시는 미미가 자세를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에만 터진다. 시간은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시점에 기억을 제공한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서 소설은 완결되고 사랑은 끝난다. 영화는 과거에 누렸던 행복에 대한 향수를 미묘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포착해낸다. 이명세 감독은 <M>에서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행복했던 추억, 그 자체의 성질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M>은 작게는 행복을 찾았을 때마다 품게되는 희망과 행복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슬픔에 대한 영화이다.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얼굴빛을 잊지 않으려는 뒤돌아선 오르페우스의 희망과 절망에 대한 영화이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깨어있는 정신으로 보내는 동안, 연인과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소중히 만들었던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우리의 뇌리 속에서 늙지도 변하지도 않는 영원으로 그들의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픈 한편으론 기분이 좋다. 그것이 밝은 미래에의 약속 못지않은 우리 삶의 위안이다. 세상에 달콤한 인생 따위는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생애 달콤했던 순간을 되돌이켜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첫댓글 거대한 영화평! 정말 심취해서 잘 보았습니다~~ 이 글만 보면 M에 대해 울 감독님보다도 훨씬 심도있게 알고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