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후 여치(呂雉)는 흉노의 묵돌 선우에게서 온 편지를 조문 편지라고 생각하고 이를 펴서 읽어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흉노의 선우는 "나는 외롭고 쓸쓸한 처지라오. 흉노의 습한 땅(沮澤)에서 태어나 소와 말을 기르는 들판에서 자랐소. 수차례 변경에 드나들며 중국도 두루 한 번 유람해 보고 싶었다오. 그대도 홀로 되었고, 나도 홀로 된 몸인지라 피차 즐거울 일이 없으니 우리가 가진 것들로 빈자리를 채워봄이 어떠하오?"라고 써보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제수씨, 과부가 되어 적적하겠수. 여기 괜찮은 홀아비 하나 있는데 함께 놀아봄이 어떻겠소?"라는 말인 셈이다. 상중에 있는 한 나라의 황후에게 보내 온 서신으로서 너무도 무뢰하고 망측한 것이었다.
이에 여태후 여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길길이 날뛰며 흉노가 하는 짓들을 더이상 참고 볼 수 없다며 대신들을 불러모아서 '서신을 들고 온 흉노의 사신을 참수하여 죽이고, 흉노 정벌에 나설 것'을 명하였다. 이때 번쾌(樊噲)가 분을 못 참고 “신에게 10만 군사를 주신다면 흉노를 짖밟고 도륙을 내고 오겠겠습니다.”라고 나서며 말하였다. 번쾌는 유방의 동서로서 유방이 거병하기 전에 고향에서 이웃에 살던 자로 본래 개백정이었다. 유방과 전장을 오가며 유방 군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던 인물로 삼국지연의의 장비와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었다. 이때 중랑장(中郞將) 계포(季布)가 이를 제지하고 나섰다. “당장 번쾌의 목을 베셔야 합니다. 고제(유방)께서 흉노를 치러 나서셨을 때, 번쾌를 32만 한나라 군의 상장군으로 삼았지만 의욕이 앞서서 무작정 진격하다가 흉노의 계략에 속아 대패하고, 백등산에서 포위되었을 때도 번쾌는 이를 풀지 못하여 고제를 사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아직도 그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자들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번쾌가 또 분을 이기지 못하여 온 나라를 전란으로 몰고 들어가려고 망령되이 10만 군사로 흉노의 땅을 짖밟을 수 있다는 말하니 이는 폐하를 기만하는 말입니다. 흉노는 금수(禽獸)와 같은 자들이니 그들이 좋은 말 한다고 기뻐하실 필요가 없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도 그리 노여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짐승같은 흉노가 보내온 무뢰하기 이를 데 없는 편지에 너무 마음을 쓸 필요가 없으니 그냥 참고 넘어가자고 여태후를 달래는 말이었다.
여태후가 발끈해서 흉노를 치라고 명했지만 누가 보아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 분명했다. 몇 년 전에 내전 직후라 동원 가능했던 병력을 끌어모아 32만의 대군을 이끌고 황제 유방이 직접 나섰을 때도 총력전을 펴서도 일방적으로 밀려서 패배하였는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에는, 황제 유방도 세상을 떠나고 수많은 장수들을 토사구팽하여 죽인 후였고, 동원 가능한 병력들이, 오랜 내전과 흉노 정벌 전쟁으로 어린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이 근근히 경작하느라 피폐해진 농지를 돌보느라 바빠서 10만의 병력을 끌어모으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묵돌 선우의 편지에 '수차례 변경에 드나들며 중국도 두루 한 번 유람해 보고 싶었다오(數至邊境, 願遊中國)라고 적은 것이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어떻게 읽으면 빌미를 찾아서 중국으로 침략해 내려오고 싶다는 내용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라 한 조정에서 염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절감한 여태후는 계포의 말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하고, 굴욕적이지만 묵돌선우를 달래는 답서를 써서 보내게 했다. 장택(張澤)이 쓴 답신의 내용은 이러했다.
“선우께서 저(弊邑)를 기억하시고 서신을 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읽은 후에 제 마음은 두렵고 몹시 심란했습니다. 물러나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면 저는 이미 나이 들어 머리카락도 다 빠져서 숱도 별로 없고, 이도 여기저기 빠지고, 기력은 쇠하여 거동조차 불편한 몸입니다. 그러니 선우께서 제가 아직 쓸만한 여인이란 잘못된 말을 들으시고 이런 볼품없는 여인을 취하시려 한다는 망측한 말들을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 말에는 거짓이 없으니 너그럽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제게 있는 귀한 마차(御車) 2승(乘)과 이를 끄는 최상의 말 8필을 대신 바치오니, 가까이 두시고 날마다 사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單于不忘弊邑, 賜之以書, 弊邑恐懼. 退日自圖, 年老氣衰, 髮齒墮落, 行步失度, 單于過聽, 不足以自汙. 弊邑無罪, 宜在見赦. 竊有御車二乘, 馬二駟, 以奉常駕.」. 상중에 있는 과부에게 던진 희롱의 말에 대한 답신치고는 너무 굴욕적인 편지였다. 아마도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여치가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여인에게는 더이상 자존심 상하고 민망할 수 없는 표현들로 가득 찬 편지를 읽었다면 이를 쓴 장택을 잡아 죽이고 편지는 발송되지도 못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그날 밤, 황궁의 한 깊숙한 방의 침상에서 한 여인이 입을 틀어막고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남편 유방을 찾아서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겁 없이 전장을 누비고 다니던 여치였다. 남편 유방이 가족을 버리고 도주하여 항우에게 사로잡혔을 때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항우에게 눈을 부라리며 내 남편에게 잡혀 죽을 준비나 하라며 항우를 겁박하던 여치였다. 초한대전이 끝난 후, 훗날 화근이 될 수 있는 부하 장수들을 제거할 때도 유방이 그간의 정 때문에 단지 병권을 회수하는데 그치고 목숨은 살려두려고 주저주저할 때도 앞장서서 이들을 잡아죽이던 모진 여인이 여치였다. 당의 측천무후와 청의 서태후와 함께 중국 역사상 3대 악녀로 꼽히는 모질디 모진 여치가 흉노의 희롱 앞에서는 어쩔 수 있는게 하나도 없어서 분을 억눌러 참으며 모욕감에 한 없이 눈물을 쏟고 있는 것이다. 이 밤이 수천년의 중국 한족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북방 기마민족에게 짓밟히고 그 아래 무릎을 꿇는 일은 한족들에게는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만다. 훗날 세워지는 당 나라는 선비족 출신이 세운 나라이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패퇴하여 나라가 망한 수나라도 선비족의 나라이며, 청나라도 만주족의 나라이고, 원나라는 몽골족의 나라이고, 한족 사람들이 남쪽으로 도주하여 송나라를 세우게 만들고 이들을 압박하여 매년 불침 조건으로 현금을 수거해 가던 나라들이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였다. 오랜 중국 역사상 한족이 나라를 세우고 유지했던 시기가 대략 절반이 조금 넘은 정도이다. 중국 인구의 90프로가 넘는 한족의 마음의 고향인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흉노에게 무릎을 꿇은 후, 흉노의 왕실에 혼사 수요가 있을 때마다 한나라 황실에서 신부를 조달해 보내고, 매년 막대한 공물과 수많은 여인들을 보내면서도 변방에서는 계속적으로 흉노에게 약탈을 당하며 굴욕적인 세월을 보낸 것이 거의 80년에 달한다. 이 오랜 굴욕의 나날들은 한무제가 등극하며 끝나게 된다.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