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의 향수
-일산호수공원/차용국
* 월간시 126호(2024. 7)
하류의 강에 봄이 오면, 한강 둔치의 물오른 능수버들 새순은 기운차고, 강변의 평화누리길은 흩날리며 반짝이는 벚꽃으로 환하다. 하류의 강을 투덜투덜 저어온 내 구형 자전거는 주엽역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호수공원으로 들어간다.
‘주엽注葉’은 한강으로 흘러가는 개울물에 나뭇잎이 떠내려간다고 부른 마을 이름이다. 마을 이름이 다소 서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일산에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에 주엽마을에는 큰 나무가 많았고,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개울이 여럿 있었다. 그 개울물은 저마다 낮은 구릉과 들을 스치면서 흐르다가 합치고 또 합해지면서 세勢를 키우고, 저지대의 들판과 습지를 흘러 흘러 하류의 한강에 합수合水한다.
그는 주엽역 호수공원 입구 분수대 오른쪽 길가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나는 분수대를 보고 오른쪽 길로 달렸다. 한참을 양옆을 기웃거리며 달렸는데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전화했다. 그는 여전히 분수대 오른쪽 길가에서 기다린다고 말했다. 나도 분수대 오른쪽 길을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아,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는 분수대 오른쪽 길가에서 기다리고, 나는 오른쪽 길을 달리고 있는데, 그 오른쪽에서 우리는 서로를 볼 수가 없다니.
결국 그와 나는 분수대 중앙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던 길을 되돌려 분수대로 다시 왔다. 그가 보였다. 나는 그와 분수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와 그는 공원 안쪽에 있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내가 달린 길은 왼쪽이었다. 그러니까 공원에 들어올 때 바깥에서 바라본 분수대 오른쪽은 안쪽에서 보면 왼쪽이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보이는 오른쪽을 이해하고 말하고 들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하고 듣는 사람마다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다르다. 말이 세상의 사물을 규정하고 말로 세상과 소통할 때, 말은 고정된 불변의 진실이 아니어서, 말은 우리의 일관된 앎의 지표가 될 수 없다. 사람은 말을 지배하지도 못하고, 말에 지배받지도 않는다.
메타세콰이어 가지에도 새순이 꽃처럼 피어난다. 꽃피듯 돋아나는 새순은 연초록 색깔 그대로 꽃이다. 벚꽃이 떠다니는 호수의 물결은 봄빛에 들뜨고, 등꽃은 신록을 배경으로 환하다. 기둥을 감고 올라 지붕을 덮은 등꽃은 보랏빛과 흰빛으로 천장에 매달린 전등처럼 환하고, 꽃의 향기는 다정한 사람의 향수처럼 환하다.
등꽃의 꽃말은 ‘사랑의 결합’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한 농부에게 착하고 예쁜 딸 둘이 있었다. 자매는 한 사람의 화랑을 사랑했다. 어느 날 전쟁터로 나가게 된 화랑을 배웅하러 나온 자매는 그때 서야 한 사람을 둘이서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후 남매가 사랑했던 화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슬픔에 빠진 남매는 사랑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이듬해 남매가 빠져 죽은 연못가에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나서 서로 의지하며 꽃을 피웠다. 언니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 보랏빛 꽃을 피우고, 동생은 왼쪽으로 감고 올라가 흰빛 꽃을 피웠다.
자매의 지극한 사랑과 슬픔을 전하는 이 설화를 생각할 때면, 화사한 등꽃의 자태와 향기가 마치 화해와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잠재태潛在態를 드러내는 것만 같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갈등이 아예 없을 수야 없겠지만, 상대를 꼭 배척排斥과 제거除去의 대상으로만 보아야 할 일은 아닐 것이다. 갈등을 화해로 승화昇華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서로에게 빈, 그래서 허전한 좌우의 옆구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닐는지. 좌쪽과 우쪽,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감고 오르면서 비로소 하나의 든든한 줄기로 거듭나서 저토록 환한 향기를 선사膳賜하는 등꽃처럼.
전통정원에 피는 모란꽃은 은근히 환하다. 모란꽃은 빨강·분홍·흰빛 등으로 피는데, 어느 색 꽃이든 모란꽃 본래의 품격을 잃지 않으며 환하다. 모란의 꽃말은 ‘성실과 부귀’라고 한다. 모란은 속이 깊고 알찬 꽃이다. 화사한 꽃잎이 겹겹으로 복주머니처럼 감싼 꽃 속에서, 모란의 꽃술은 오래 다져진 성품 그대로 황금빛으로 환하다. 그래서였을까 옛사람들은 모란꽃을 ‘부귀화富貴花’라고 부르며 집안의 햇빛 고운 자리에 심고 바라보기를 즐겼다.
모란꽃에는 꿀이 많지 않아 많은 벌과 나비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모란꽃은 호들갑스럽게 들뜬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아마도 이런 오해는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 태종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를 보내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며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 왕이 죽기 전에 신하들이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는 것을 아셨습니까?”라고 묻자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일연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을 모아 기록한 『삼국유사』 「기이권紀異卷」의 이 대목은 정치적이면서 문학적인 언술로 들린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때가 고려 충렬왕 7년(1281)이니,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의 모란꽃 일화는 수백 년 동안 윤색潤色과 각색脚色을 거친 말로 전해졌을 터이다. 그 말은 정치사로 보면 비과학적이며 허망虛妄한 역사가 되고, 문학사로 보면 은유와 상징으로 채워진 허구의 세계가 된다. 정치는 현실의 진실을 말하고 문학은 허구의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은 정치의 허상에 열광하고 문학의 실상을 외면한다.
5월의 장미정원은 찾아가기 쉽다. 장미의 향기는 멀리까지 날아와서 길을 안내한다. 장미의 향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수십만의 장미꽃에서 저절로 드러낸 향기에 말은 길을 잃고 몽환夢幻에 빠지고 만다. 지금까지 알려진 장미의 수종은 1만 5천 종이 넘고, 그것마다 부르는 이름도 그처럼 많아서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애초부터 장미는 그냥 장미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장미의 생육生育과 용도用途는 덩굴장미처럼 울타리나 장미터널 만들기부터 관상용觀賞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꽃송이의 크기와 색깔 또한 다채로워서 일일이 다 말을 꺼내기가 민망하다. 장미는 꽃중의 꽃이다.
장미는 시원始原의 꽃이다. 하나님의 계율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샤론Sharon’에는 아직 꽃이 없었다. ‘샤론’은 히브리어로 ‘평야’를 뜻한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허락한 샤론의 땅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회개悔改하며 살았다.
옛날 샤론의 땅 유대 왕국에 아름다운 여인 지라가 살았다. 청년들은 지라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사모하는 마음에 애가 탔다. 어느 날 지라를 본 하무엔도 지라에게 반해서 지라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무엔은 힘이 세고 욕심이 많은 야심가였다. 사람들은 하무엔의 무례하고 난폭한 행동에 두려워했다. 지라는 하무엔의 사랑 고백을 거절했다. 지라는 하무엔의 거칠고 사려 깊지 않은 성격이 싫었다.
하무엔은 자신의 사랑 고백을 거절한 지라에게 앙심을 품고 지라가 마녀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마녀는 화형에 처해 지는 죄인이다. 결국 지라는 화형대에 올랐다. 장작더미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이를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지라를 가엾이 여겨 비를 내려 불을 껐다. 그때 불타던 장작에서 붉은 장미가, 불붙지 않은 장작에서 하얀 장미가 피어났다. 샤론의 땅에 처음 생겨난 꽃이다.
사람들은 에덴의 원죄를 등에 지고 샤론의 땅으로 내려와 사랑과 원죄를 낳으며 유전한다. 사람은 여전히 엇갈린 시원의 사랑을 꿈꾼다. 장미의 꽃말처럼 ‘불타는 사랑’을. 그것이 누군가에겐 축복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겐 비극이 되기도 한다.
꽃은 저마다 혼신의 본능으로 시원의 향수를 들어내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을 부른다. 그 유혹은 아득하고 치명적이어서 피할 수 있거나 거부할 수 없다. 사람들은 시원의 본능에 이끌려 사진을 찍고 기념한다.
꽃을 깊이 바라보는 것은 시원으로 통하는 태고의 문을 여는 일이다. 꽃을 바라보는 것은 진화의 생체시계를 거꾸로 돌려 생명의 모태를 찾아가는 향수다. 시원으로 가는 길은 아련하고 신비해서 뇌는 알 수 없고, 오로지 몸만이 그 향수를 기억해서 몸의 언어로만 그 비밀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 내 몸의 언어는 시원의 문을 향해 가까이 달려가고 싶어 안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