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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룡이 수호하는 화엄도량
부석사-6
1300년 화엄법륜 이어온 福善의 도량
화마 없는 터전…『화엄경』 강설, 구름처럼 사람 몰려 해동화엄 근본 도량…가람 배치 미타정토 따라 건립
![]() ▲ <사진설명>태백산 영주
부석사의 전경. 의상 대사는 선묘룡의 신통으로 이곳에 화엄도량의 터전을 열었다.(사진제공=영주장애인복지관장 도륜 스님.)
영주의 봉황산 중턱에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가 세워진 것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이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로 13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전하는 부석사의 창건설화는 이렇습니다.
귀국 후에 산천을 편력하던
의상은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그리고 마소의 접근도 어려운 곳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한 이곳은 참으로 법륜을
굴릴 곳인데도 어찌하여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들이 500명이나 모여 있을까?” 의상은 또 조용히 생각했습니다. “대화엄교는 복선(福善)의
땅이 아니면 흥하지 못 한다.” 그때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면서 수호하고 있던 선묘룡(善妙龍)이 의상의 생각을 몰래 알고, 곧 허공중에서 큰
신변을 일으켜 넓이 1 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가람 위를 덮고 떨어질듯 말듯 했습니다. 놀란 여러 승려들은 갈 바를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의상은 드디어 이 절에 들어가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화엄경』을 강의함에 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징적 의미를 새겨볼 필요는 있습니다. 한 마리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며 신라로 왔던 선묘, 그는 이제 의상의 부석사 창건을 돕기 위해 부석(浮石)으로 변하여 권종이부(權宗異部)의
승려들을 축출했다는 이야기에는 선묘룡이 의상의 화엄전교를 돕고 화엄도량을 수호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권종이부를
법상종(法相宗)에 속한 승려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화엄종의 진실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꾸며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던 의상이 무엇 때문에 궁벽한 이곳에 머무르고자 했을지 궁금합니다.
의상은 이곳을 전쟁의 화를
피하고 조용히 수도할 수 있는 터전으로 판단했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다니던 의상이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법륜을 굴릴 좋은 터전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은 누구 못지않게
전쟁의 참화를 목격했습니다. 서기 668년에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서 일단 삼국통일은 이루어졌지만, 백제나 고구려 유민들의 신라에 패한
반항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는가 하면, 부석사가 창건되던 바로 직전까지도 당나라와의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의상이 왜 영주 땅에 부석사를 창건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석사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서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정의 뜻을 필요 이상으로 주목하여, 부석사의 창건이 마치 국가의 정치적 목적, 특히 전제왕권의 강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인 양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의상의 일차적 목적은 화엄교의 전파에 있었습니다. 부석사가 창건된 문무왕 16년은 당나라와의 오랜 전쟁도 끝나
평온을 찾은 때입니다.
따라서 이때에 와서 절을 지어도 좋다는 국가의 승인을 얻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부석사를
창건해서 『화엄경』을 강의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기록은 의상이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강설하고 제자들을 교육했던 사실과
부합합니다. 궁벽한 태백산에서의 그의 교화는 신라 사회에 널리 소문이 퍼져서 국왕이 그를 더욱 공경하게 되고 가난한 백성들의 입에까지 그의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습니다. 부석사에서의 의상의 화엄전교가 성황을 이루었음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불법을 전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사실이나, 국왕이 그를 공경하여 토지와 노비를 이 절에 주려고 했다는 것 등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을 도와서 천리
이국땅에 오게 된 선묘의 넋은 13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석사를 지키면서 살고 있으니, 이 절의 무량수전 밑에 묻어 있는 석용이 그것입니다.
아미타불 바로 밑에서부터 머리 부분이 시작하여 선묘정에 그 꼬리 부분이 묻혀 있다고 하는 이 석용은 선묘화룡의 설화를 한층 더 실감나게 설명해
줍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현재 부석사에는 선묘정이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의 동쪽에 있는 선묘정에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우물에는 선묘룡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선묘의 넋이 변하여 되었다는 부석은 지금도 무량수전 뒤편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자연 반석으로서 석괴 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습니다.
지금은 이 반석이 공중에 떠 있다고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공중에 떠 있지도 않은 돌을 왜 부석이라 하느냐고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에 집착한 무리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이 돌이 공중에
떠다녔다는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만입니다. 지금도 부석사에는 선묘의 상을 봉안한 선묘각이 있습니다.
사찰 경내에 여인상을
모신 경우는 오직 부석사뿐입니다. 그러나 선묘는 세속적인 사랑을 못 잊어 신라까지 따라온 여인은 아닙니다. 해동화엄시조 의상과 화엄의 근본도량을
수호하는 화엄신중으로서 오늘도 부석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의상은 정토신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부석사는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람배치는 미타정토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석사의 석단은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 크게 세 구획으로 나누고 구체적으로는
9단으로 구분됩니다.
이는 관무량수경에 토대하는 구품왕생(九品往生)을 의미하고, 안양루(安養樓)를 지나서,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이르러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 있도록 배치된 것도 정토신앙과 관계됩니다. 남향의 무량수전에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동향으로 봉안한 법당의 구조는 일생
서방의 극락세계를 향하여 앉았다는 의상의 정토신앙과도 통합니다. 불상을 모신 건물 안에는 오직 아미타불상만을 조성해 모시고 보처보살(補處菩薩)은
없고, 또한 탑도 세우지 아니했습니다. 이에 대해 의상은 말했습니다. “스승 지엄이 말씀했습니다. 일승(一乘)의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고
시방정토(十方淨土)로써 근본을 삼아, 생멸의 모습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이르기를, 혹 아미타·관세음보살을 보고
관정수기(灌頂授記)한다는 것은 모든 법계의 보처를 확충하여 보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지 않고 보궐이 없을 때이기에
보처보살을 봉안하지도 영탑을 세우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일승(一乘)의 깊은 뜻입니다.” 스승 지엄이 이와 같이 의상에게 전했기에, 의상은 지엄의
뜻을 법사(法嗣)에게 전했고, 또한 원융국사 결응(決凝 : 964-1053)에까지 미쳤습니다.
의상은 오로지 안양(安養)을
희구했기에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의상조사는 오로지 안양(安養)을 구하여, 평생 서쪽을 등지지 않고 앉았습니다.
그 제자 중에 죄를 범한 한 비구가 있어, 법에 의해 그를 물리치매, 무리들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유행하면서도 스승을 사모해서
상을 만들어 지니고 다녔습니다. 스승이 그 소식을 듣고 불러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약 진실로 나를 억념한다면, 나는 일생 동안
서쪽을 등지지 않고 앉는데, 상도 역시 감응할 것이다.”
이에 그 상을 서쪽을 등지게 했지만, 상이 스스로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해
앉았습니다. 스승이 그를 훌륭하게 여겨, 죄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에 전하는 이 이야기로 의상의 지극한
정토신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572년 개판의 염불작법(念佛作法)에는 의상이 지었다는 서방가(西方歌)가 전하는데, 이는 10장의 경기체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방가는 후대인이 짓고 의상에 가탁했을 수도 있고, 의상이 지었던 것이 13세기경에 경기체가 형식으로 변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서방가의 가사 대부분이 소아미타경(小阿彌陀經)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의상은 소아미타경(小阿彌陀經義記) 1권을 저술한 바
있습니다. 서방가는 일승적(一乘的) 정토신앙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 또한 의상의 정토신앙과 궤를 같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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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그 전등의 묘업(妙業)-7
소백산의 華嚴會上 신라 넘어 中·日에 영향
자비로우면서 엄격한 스승…오진·지통·표훈 등 10대 제자
남겨 황복사·부석사·추동에서 화엄 강의…『법계도인』 고려로 이어져
![]() ▲ <사진설명>경북 영주
부석사에서 바라본 소백산 전경. 의상 대사는 소백산에서 처음으로 화엄회상을 열었다.(사진제공=영주장애인복지관장 도륜 스님.)
해동화엄의 초조(初祖), 부처님의 후신(後身) 등으로 추앙되어 왔고, 또한 성인(聖人)으로 존경되기도 했던 의상법사, 그가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화엄대교(華嚴大敎)를 전함으로써, 진리의 빛을 신라 사회에 두루 비춰주었던 은혜 때문입니다. 최치원이
‘전등(傳燈)의 묘업(妙業)’이라고 했던 것도,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의상전교(義湘傳敎)’라는 제목을 설정하고, “온갖 꽃 캐어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소백산이 같은 봄이구나”라고 찬양했던 뜻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의상은 676년(문무왕 16)에 소백산
부석사를 창건함으로서 화엄대교를 전할 복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 절을 중심으로 전개한 그의 전교 활동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리고 훗날 일본에도 영향을 준, 실로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파하고 있을 때, 그를 공경한 국왕이 노비와
토지를 주겠다고 제의했던 일과 의상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을 들은 진정(眞定)이라는 가난한 젊은이가 그의 문하로 달려가 머리를 깎았던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의상이 소백산에서 밝힌 법등(法燈)이 신라 사회를 두루 비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이 신라에서 화엄을 전하기
20여 년이 되던 어느 해에 동문 법장(法藏)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귀향하신 후, 화엄을 천명하고
법계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거듭 선양하여,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롭게 하신다고 하오니 기쁨은 더욱 큽니다. 이 로써 여래(如來)
멸후(滅後)에 불일(佛日)이 휘황하게 빛나고 법륜(法輪)이 다시 굴러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한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낸 편지였습니다. 법장의 편지 또한 의상의 전교활동이 어떠했던가를 잘 알게 해 줍니다.
의상은 소백산에 밝힌 화엄교의 등불이 신라에 두루 비칠 것을 염원했고, 그 법등이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은
교단의 조직과 확대, 제자 교육 등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백산에서 밝힌 그 하나의 등불이 열로 백으로 불어나고 세월의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타는 무진등(無盡燈)이 되었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는 참으로 큰 인연입니다. 진리가 이로 인해 더욱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는 있어도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기 어렵고, 훌륭한 스승이 있어도 발심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법. 그러나 의상은
그 이름만을 훔친 스승이 아니었고, 그 제자들 또한 배움만을 취하고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화엄대교는 더욱 빛날 수 있었습니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부석사에서, 그리고 소백산의 추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화엄을 강의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의 저서 『법계도(法界圖)』를, 또
어떤 때는 『화엄경』을 강의했고, 그리고 법장의 『탐현기(探玄記)』 20권을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40일을 기약하여 강설한 경우도 있고, 장장
90일 동안 강의에 전념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방황하는 나그네가 옛 고향집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었고, 이름에만
집착하는 이들로 하여금,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진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깊은 뜻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우리들 오척(五尺)의 범상한 몸,
이것이 곧 법신(法身) 그 자체임을 깨우치려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해 물어 올 때면, 의상은 급히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살핀 다음에 의문 나는 점을 술술 풀어주되, 의문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게 계발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상은 제자들에게 항상 훈계했습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잘 쓰도록 하라.” 그리고 “언제나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의상의 제자 교육에 임하는 참으로 진지하고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의상은 법장의 『탐현기』 20권을 진정(眞定), 상원(相元), 양원(亮元), 표훈(表訓) 등의 제자에게 각각 5권씩 나누어
강의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에 앞서 10일 동안 문을 닫아걸고 자신이 스스로 탐구·검토하는 성의를 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탁본으로 인하여 탁이 나오는 것이요, 도끼자루를 가져야 도끼자루를 베는 것이니, 각기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 것’을 당부하던 의상의 모습에서 진정한 스승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의상이 제자 교육에 쏟은 정성 못지않게
그 제자들 또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에게 끊임없이 물었고, 배운 바를 부지런히 기록했으며, 또한 실천에 옮겼습니다. 『지통기(智通記』와
『도신장(道身章)』 등은 제자 지통과 도신이 각각 스승의 강의를 기록하여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지통기』는 소백산 추동에서 많은 제자들이 운집한
중에 90일 동안 계속된 『화엄경』 강의를 기록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승의 말씀만을 기록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스승 의상으로부터 『법계도』를 배울 때, 표훈과 진정은 각각 자기의 견해를 적어 스승으로부터 옳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통은 태백산의 미리암굴(彌理岩窟)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아, ‘삼세(三世)가 일제(一際)’라는 법문을 깨닫고, 스승을 찾아 이를 말씀드려,
이미 그릇이 완성되었음을 인정받아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전해받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훗날에도 계승되어 의상의 몇 대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법계도』를 연구하여, 『법융기(法融記)』, 『진수기(眞秀記)』, 『원통기(圓通記)』 등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고려 때에는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으로 집대성되기도 했습니다. 의상이 제자를 대하는 태도가 언제나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단호하고 엄격한
일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문도 중에 잘못을 저지른 한 비구가 있어서, 법에 의해 그를 내쫓으니 대중을 떠나 타방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당시 화엄교단의 엄격한 기강을 엿보게 해줍니다.
의상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십대제자는 더욱 유명했습니다.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를 ‘십성제자(十聖弟子)’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송고승전』 중의 의상전에서는 지통(智通), 표훈(表訓), 범체(梵體), 도신(道身) 등을 등당도오자(登堂都奧者)라고 하면서, 이들은 모두 큰
알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날아간 가유라조(迦留羅鳥)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치원은 『법장화상전』에서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을 특별히
의상의 사영(四英)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응연(凝然)(1240-1321)도 1295년에 지은 『화엄법계의경(華嚴法界義鏡)』에서
“의상에게는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 사영이 있었는데, 이들을 상족(上足)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범체(梵體)는 의상의 직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법융(法融)의 제자로 9세기 전반에 활동한 부석사의 승려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도신(道身)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도신이 의상의 직제자였음은 그가 스승의 강의를 기록한 『도신장(道身章)』 2권을 남긴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 책에 지엄과 의상의 문답, 의상과
그 제자들과의 문답 등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도 도신이 의상의 직제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적(義寂)을 의상의 제자로 보기에는 의문이
따릅니다. 일찍이 신라의 도증(道證)이 유식학의 육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강조한 바 있는 의적은 아무래도 법상종의 승려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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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義持)의 실천신앙 - 8
『법계도』 저자 밝히지 않음은 만법 주인없는 도리
드러낸 것
지엄은 의상에게 의지(義持), 법장에게 문지(文持)호 내려 신앙적·실천적
성향이 강한 의상의 곧은 의로움 높이 평가
![]() ▲ <사진설명>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중국 종남산 지상사 경내. 사진제공=한국불교연구원
의상에게는 의지라는 호가 있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승 지엄이 지어 준 호이기에 더욱 소중한데도 말입니다. 의상이 종남산의 지엄문하에서 수업할 때 동문 중에는
법장(法藏, 643~712)이 있었습니다. 법장은 의상보다 18세 연하의 후배였고, 출가 이전의 행자였는데 그 스승이 입적한 2년 뒤인 28세에
머리를 깎고 수계하고,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습니다. 지엄은 지상사에서 화엄을 배우던 제자 의상과 법장에게 각각 ‘의지(義持)’와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이는 체원(體元)의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에 보이는 기록입니다. 의상은 수행자적인
실천수행에 그 장점이 있고 법장은 학자적인 이론 탐구에 뛰어났음을 스승은 간파했던 것 같습니다. 스승의 눈에는 제자들의 사람됨이나 장점 혹은
단점까지도 잘 보이는 법입니다. 훌륭한 스승이라면 제자들 각자가 가진 특장을 잘 살려서 발양할 수 있도록 마땅히 지도할 것입니다. 의상의 교학
및 신앙적인 특징은 스승이 그에게 준 ‘의지(義持)’라는 호에 잘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호 의지가 의미하듯, 의상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기보다는 신앙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가 부석사, 낙산사 등을 창건하고 많은 제자들에게 화엄교를 전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기 자료에 의하면, 의상은 설한 바와 같이 실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 강의하는 일 이외에는 부지런히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수행자로서의 의상의 자세는 분명하고 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삼법의(三法衣)와 정병(淨甁)과 발우 이외에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의는 맨 안에 입는 안타회와 그 위에 입는 울다라승, 그리고 맨 위에 입는 승가리, 즉 가사를 말합니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는 병으로 항상 몸에 차고 다니면서 정수(淨手)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삼의일발(三衣一鉢), 즉 삼의와 하나의 바루는 승려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임을 감안하면, 의상은 꼭 필요한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승려들이 가질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은 세 가지의 옷과 발우 하나뿐이었으니, 의상은 이를 지켰던 것입니다. 국왕이 의상에게 토지와 노비를 시여하고자 하매, 그는 이를 굳이
사양하면서 토지나 노비는 『열반경』에서 규정한 부정한 재물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국왕에게 “빈도는 우경(盂耕)으로도 자족하다”고
했습니다. 의상의 이와 같은 자세를 당나라의 법장이나 신라의 경흥(憬興)과 비교해 보면, 수행자로서 의상의 인격은 더욱 돋보입니다. 법장은
측천무후로부터 호사스러운 보시를 받았고, 경흥은 화려하게 장식한 말을 타고 궁중에 출입했습니다. 신문왕 때의 국사 경흥은 말의 안장과 갓과 심,
모두가 화려하게 장식하여 행인들이 길을 비켰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초라한 거사로부터 충고를 받고서야 반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흥도
의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고승입니다. 의상은 평소에 몸을 세수한 후에 수건으로 닦지 않고 저절로 마르도록 기다렸다고 하는데, 이는 의정의
세예법(洗穢法)을 실천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의상의 청정한 몸가짐 등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의상은『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고서도 일부러 저자명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다는 연기의 도리를
나타내기 위한 때문”이라고 스스로 해명했습니다. 이는 의상이 말과 같이 실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는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상은 일생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쪽을 등지고 앉는 법이 없었다는 기록으로도 그가 얼마나 철저한 수행자며 실천적 신앙인이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의상은『화엄일승법계도』 1권 『입법계품초기』1권『화엄십문간법관』1권 『소아미타경의기』1권 등의
저서와「백화도량발원문」 「일승발원문」 「투사례」 「서방가」등의 게송을 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의상의 저작을 법장의 50여 부, 원효의 100여
부, 경흥의 40여 부 저술 등과 비교해 보면 의상의 경우는 대단히 적은 편입니다. 이 사실은 그가 실천을 통하여 불법의 진의를 체현하려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의상의 저술이 많지 않았던 사실과 아울러 1권의 분량을 넘어서는 저술이 한 종류도 없음 또한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화엄일승법계도』의 경우, 『법계도』에 그 자신의 약소(略疏)를 합친 것인데도 그 분량은 적은 편이고, 이 저서의 중심인 법성게는
겨우 210자의 짤막한 게송입니다.『화엄경』의 내용을 7언 30구의 짧은 게송에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의상의 『법계도』 저술에 대하여
박인량(朴寅亮)은 해동화엄시조부석존자찬(海東華嚴始祖浮石尊者讚)에서 “촌문(寸紋)으로도 비단은 알 수 있고, 하나의 털로도 봉을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의상은 『법계도』 이외에는 저술한 것이 없지만, 온 솥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하다.”고
평했습니다.
『소아미타경의기』1권은 현존하지 않지만, 이 또한 짧은 저술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경전 자체가 매우 짧은
것임에 유의할 때, 그 뜻을 요약해 쓴 의기가 길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 문장이 짧기는 게송류도
마찬가지입니다.「백화도량발원문」은 약 260여 자,「일승발원문」은 336자,「투사례」는 656자,「서방가」는 636자입니다. 200자 원고지
3장이 넘는 게송이 없습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의상은 장편의 주석이나 논설을 쓰기보다는 짧은 게송류의 글을 더 즐겨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경향은 제자 교육에도 보입니다. 표훈과 진정 등 10여 명의 제자가 의상으로부터 법계도인을 배우고 있을
때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답할 때도 의상은 긴 말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의상이 많은 말을 하기보다 짧은 게송류를 더 좋아했던 것은
언어의 본질적인 한계를 의식한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스승 지엄의 교훈을 충실히 따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엄과 그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문답이
전합니다.
지엄사가 돌아가기 10일 전에 학도들이 나아가 물었습니다. 그 때 지엄사가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경 중의
일미진중함시방세계(一微塵中含十方世界) 및 무량겁즉일념(無量劫卽一念) 등의 말을 너희들은 무엇으로써 보느냐?” 대중이 아뢰어
말했습니다.「연기법(緣起法)은 자성(自性)이 없기에 소(小)는 소에 머물지 아니하고, 대(大)는 대에 머물지 않으며, 단(短)은 단에 머물지
않고, 장(長)은 장에 머물지 않는 때문입니다.”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그러나 아직 설익었다.” 물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마라. 다만 하나만 말하면 되니까.”
이는 『도신장(道身章)』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도신장』은 의상의 강의를 제자 도신이 기록한 것입니다. 아마도 의상이 당나라 유학 시절 스승으로부터 배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직접
전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당시 지엄 문하에는 의상도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말을 늘어놓는 제자에게, 아직도 설익었다고 하면서, 다만 하나만
말하면 된다고 가르쳤던 지엄의 교훈은 의상에게도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지엄의 화엄교학은 그 글이 번거롭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점에 유의할 때 많지 않은 저술과 게송(偈頌)류의 짧은 글을 남긴 의상의 화엄교학에는 스승 지엄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의상이 많은 글을 쓰기보다 게송류의 적은 글을 더 즐겨 쓴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일차적 이유는 의상이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것 보다는
실천적이고 신앙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그의 관심이 하근기인(下根機人)의 교화에 있었던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근기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말은 오히려 번거롭습니다. 한두 가지 간단한 교훈이라도 오래 생각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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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진정(眞定)과 그 어머니 - 9
어머니 권유로 출가 … 의상 上首제자로 추앙
진정 출가는 어머니 구도심 아들 효성이 함께 빚은 감동 구도기
![]() ▲ <사진설명>부석사
범종각 앞에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붉은 목련. (사진제공 = 한국불교연구원)
의상스님이 부석사에서 설법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마음으로 기뻐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고,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 복역의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의 효성은 남달랐던 젊은이였습니다. 이 젊은이가
홀어머니와 이별하고 출가하는 장면을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고했습니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나 빠른데, 효도를 다 마친 후면 역시 늦지 않겠느냐? 어찌 내 생전에 네가 가서 불도를
알았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속히 가는 것이 옳겠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곁에 있을 뿐인데, 어찌 차마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 나를
위하여 출가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온갖 풍성한 음식으로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간에서 빌어서 생활하더라도 또한 타고난 수명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니, 꼭 나에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일랑 하지 마라.”
아들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어머니는 즉시 일어나 쌀자루를 거꾸로 터니 쌀이 일곱 되가 있었는데, 그 날로 밥을
다 짓고 말했습니다.
“네가 도중에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염려된다. 내 눈 앞에서 당장 그 하나를 먹고 나머지 여섯을
싸 가지고 빨리 떠나도록 하라.”
아들이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습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며칠간의 양식까지 전부 싸 가지고 간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세 번 사양하고 세 번 권했습니다. 진정은 어머니의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길을 떠나 밤낮으로 갔습니다.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법명을 진정(眞定)이라고 했습니다.
진정이 어머니의 단호한 뜻을 어길
수 없어서, 그 날로 출가하는 장면은 참으로 감격적입니다. 어머니의 강렬한 구도심과 아들의 효성이 돋보이는 기록입니다. 진정은 부지런히 수행하고
화엄교학을 공부하여 의상의 십대제자에 포함되었습니다. 진정과 표훈 등 10여 명의 제자가 의상으로부터 『법계도』를 배울 때, 스승이 지은
사구게(四句偈)에 대하여 진정은 삼문(三門)을 지어서 해석하고 표훈은 오관(五觀)을 지어서 해석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출가
3년 만에 진정은 어머니의 부고에 접했습니다. 그는 7일 동안 선정에 들어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스승 의상에게
아뢰었습니다. 이에 의상은 진정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화엄경』을 강의했습니다. 의상은 제자를 거느리고 소백산의 추동(錐洞)으로 가서
풀을 엮어 초막을 짓고 90일 동안이나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합니다. 이 때 추동에는 3천명이나 모였다고 하지만, 이는 많은 제자들이 설법을
들었다는 의미이고, 실제의 숫자는 아닐 것입니다. 착실한 제자 지통(智通)이 스승의 강의 요지를 정리하여 두 권의 책을 만들어 이름을
『추동기(錐洞記)』라 하여 세상에 유통시켰다고도 합니다. 강의를 끝나자 그 어머니는 진정의 꿈에 나타나서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했다.”고
말했다고도 합니다.
이처럼 의상이 진정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90일 동안이나 『화엄경』을 강의했던 것은 망설이는 아들을
책려하여 출가하도록 했던 그 어머니의 장한 뜻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 법회는 무리 3천 명이 모였다고 할 정도로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의상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화엄경』을 자주 강의했습니다. 태백산 대로방(大蘆房)에서의 강의와 부석사 40일회 등의 법회가 그 경우입니다.
90일에 걸친 추동법회는 40일회에 비해 두 배가 넘는 기간이 소요된 것이었습니다. 추동은 현재 풍기읍의 영전동으로 지금은 송곳골로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영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과수원으로 변했습니다.
의상의 제자들 중에는 스승의 강의
내용을 기록해 책으로 펴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의상은 이런 경우에도 제자의 이름을 따라서 서명을 삼거나, 강의가 이루어진 장소에 의해 책
이름을 붙이기도 했을 뿐, 자신을 저자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도신장(道身章)』은 제자의 이름을 따른 경우이고, 『추동기』는 지명을 따른
것입니다. 『자체불관논(自體佛觀論)』이란 책도 의상의 강의를 어느 제자가 정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상은 자신이 지은 『화엄일승법계도』에
저자를 명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는 연기의 도리를 나타내기 위한 의도였다고 해명했습니다.
이 경우를 보면, 의상이 그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서명을 제자의 이름을 따라서 붙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추동기』는
『화엄추동기(華嚴錐洞記)』, 『추혈기(錐穴記)』, 『추혈문답(錐洞問答)』, 『지통기(智通記)』, 『지통문답(智通問答)』 등 여러 이칭이
있었습니다. 여러 이칭 중에서도 『추동문답』, 『지통문답』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서명에 문답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이 주목되는데, 이
책의 구성이 문답의 형식으로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균여의 저서에 인용되어 전하는 『추동기』는 문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추동기』는 의상의 강의를 따라서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기에 문장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고, 신라의 방언이 섞여 있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의천(義天)은 “당시 이 책을 엮은이가 문체에 익숙하지 못해서 문장이 촌스럽고, 방언이 섞여 있어서 장래에 군자가 마땅히
윤색을 가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이장용(1201∼1272)은 이 책에 윤색을 가하여 『화엄추동기』라는 제목으로 유통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추동기』는 고려 후기까지 전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유통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균여의
저서와 『법계도기총수록』에 『추동기『가 15회 정도 인용되어 그 단편적인 일문이 전할 뿐입니다 (16매).
그런데 저는 몇 년
전에 『추동기』가 『화엄경문답』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전해오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일본에는 저자가 법장(法藏 ; 643-712)으로 명기된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 2권이 고대로부터 전해오고 있습니다. 교넨(凝然 : 1240-1321)은 『화엄경문답』이 후인의 위작임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책의 필격(筆格)이 극히 조잡하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방영(芳英 ; 1764-1828)은 위작설을
부인하면서 『화엄경문답』의 문장이 고르지 못한 것은 법장의 여러 저술 중에서도 가장 먼저 쓰여 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는 방영의 이 설에 착안하여 『화엄경문답』의 인용서, 용어, 필격 등을 검토하여 역시 이 책을 법장의 초기 저작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학계에서 『화엄경문답』의 신라 성립설이 대두했습니다.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는 『화엄경문답』을 문체와 인용의
측면에서 검토하여, 이 책은 법장의 저작이 아니라 의상의 문답을 제자가 기록한 것이라는 보다 분명한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추동기』의 일문(逸文)은 『화엄경문답』과 거의 일치합니다. 『추동기』는 균여의 저술에 12회, 『법계도기총수록』에 3회, 모두 15차례
인용되어 전합니다. 저는 『추동기』의 일문 모두가 『화엄경문답』에 포함되어 있는 문장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화엄경문답』이 『추동기』의
이본(異本)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의상이 『화엄경』을 강의한 내용의 165 문답이 그대로 수록된 『추동기』의 이본이 현존하고
있음은 다행스럽고도 반가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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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지통(智通) - 10
노비로 출가… ‘추동기’ 남긴 의상의 十聖 제자
『삼국유사』 『석화엄교분기원통초』 에 행적 남겨 까마귀가 출가 권유…의상에게서
『법계도』 전수
![]() ▲ <사진설명>비로봉에서
바라본 소백산 전경.
오늘은 의상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분인 지통(智通)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이량공(伊亮公) 댁의 종이었는데, 7살 때인 용삭 초년(661, 문무왕 원년)에 출가했다고 합니다. 이 해는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때입니다. 그는 의상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낭지(朗智)의 제자였습니다. 그의 출가와 수계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합니다.
7세 어린 나이에 출가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영취산에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지통은 이에 따라 영취산을 찾아가서 골짜기 안의 나무 밑에서 쉬다가 문득 이상한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나는 보현보살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 이에 계를 베푼 후에 숨어버렸습니다. 지통은 마음이 막힘없이 넓어지고 문득
지혜가 두루 통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길을 가다가 한 승려를 만나 낭지스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그는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낭지를
찾느냐?” 지통이 까마귀가 말한 내용을 자세히 말하니 그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낭지인데, 지금 집 앞에 또한 까마귀가
와서 거룩한 아이가 오고 있으니, 나가서 영접하라고 하므로 와서 맞이하는 것이다.”
이에 손을 잡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신령스러운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나에게로 오게 했고, 또 나에게 알려서 너를 맞이하게 했다. 이것은 무슨 좋은 징조일까? 아마 신령이 몰래
도우신 듯하다. 이 산의 주인은 곧 변재천녀(辯才天女)라고 전해온다.” 지통은 그 말을 듣고 울면서 감사하고 스님에게 귀의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낭지가 지통에게 계를 주려고 함에 지통이 말했습니다. “저는 동구 아래에서 이미 보현보살로부터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낭지는
탄식하였습니다. “잘 했구나. 너는 이미 보살의 만분(滿分)의 계를 받았구나. 나는 태어난 후로 아침저녁 조심하면서 은근히 보현보살 만나기를
염원해 왔으나 오히려 정성이 감동되지 못하였는데, 이제 너는 이미 계를 받았으니, 나는 너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겠구나.” 도리어 낭지가 지통에게
예를 드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나무를 보현수(普賢樹)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통이 말했습니다. “법사께서 여기 오신 것이 오래된 듯합니다.”
낭지가 답했습니다.
“법흥왕 정미(14년, 527)에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았는데, 지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 즉위 원년 신유(661)이니, 이로 미루어 연수를 계산하면 이미 135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삼국유사』 기록입니다. 지통은 이량공의 가노(家奴)였다고 하니,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신라에서의 출가는 엄격한 골품제사회에서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천진공(天眞公)의 가노 우조(憂助)도 일곱 살에 출가하여 혜공(惠空)이라는 고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통은 일곱 살 어린 나이에 까마귀가 출가를 권하면서 당시의 대표적 고승인 낭지의 문하로 인도했고, 낭지를 찾아가는 길에 이미 그는
현신(現身)한 보현보살로부터 계를 받고, 또한 낭지로부터도 도리어 예를 받았다고 하니, 그는 특별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의 총명함과 열렬한 구도심이 크게 강조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취산에서 수행한 지가 이미 135년이나 되었다는
낭지보다도 먼저 일곱 살 지통이 보현보살의 감응을 받았다는 것도 지통의 위대성을 강조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효도 낭지의
문하에서 여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통은 오히려 낭지가 예를 표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라고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낭지는 영취산 혁목암에 오래 머물면서 항상 『법화경』을 강의하던 특이한 승려였습니다. 영취산은 울산의 범서면 굴화리와 청량면 율리, 그리고
무거동 사이에 있습니다. 이 산의 남쪽인 율리의 안영축마을에는 영취사지가 있고, 동구에는 지통곡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전하고 있습니다.
보현보살에게서 계 받아
지통은 후에 의상의 처소로 가서 화엄교학을 배우고 고명하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현화(玄化)에 이바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한 676년(문무왕 16) 이후에 제자가 되었을
것인데, 이 때 지통은 22세의 청년 승려였고, 고승 낭지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배운 이후이니, 의상의 여러 제자 중에서도 출중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됩니다.
『삼국유사』에는 지통을 원효와 함께 큰 성인으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지통은 의상의 문하로 옮긴 후 부석사
사십일회(四十日會), 소백산의 추동구십일회(錐洞九十日會), 태백산 대로방(大蘆房) 등지에서 스승 의상의 강의를 친히 들었습니다. 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에는 지통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신라승 지통은 의상대덕의 십성(十聖)제자 중의 한
사람이입니다. 태백산 미리암굴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큰 돼지가 굴의 입구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통은
평상시와 같이 목각존상에게 정성을 다해 예했더니, 그 상(像)이 말했습니다. “굴 앞을 지나간 돼지는 네 과거의 몸이고, 나는 곧 네 미래
과보로서의 불(佛)이다.” 지통은 이 말을 듣고 삼세(三世)가 일제(一際)라는 법문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후에 의상대덕을 찾아 이를
이야기했는데, 스승은 그의 그릇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고 마침내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지통은 의상의
십성제자, 의상 문하 사영(四英)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의상의 상족 제자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의상이 그에게
법계도인을 주었던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의상이 소백산 추동에서 행한 90일 동안의 『화엄경』 강의를 듣고서 정리한
『추동기(錐洞記)』 2권은 유명했습니다.
원효와 함께 고승으로 추앙
스승의 강의에
따라 그 요긴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의상이 추동에서 『화엄경』을 강의한 것은 돌아간 진정(眞定)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 시간에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추동기(錐洞記)』는 추동이라는 지명에서 취한 것이고, 또 이를 정리한
사람의 법명을 따라 『지통기(智通記)』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원래 신라 방언으로 쓰여 졌던 『추동기』를 이장용(李藏用 ; 1201-1272)이
다시 윤색하여 유통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통기』는 고려후기부터 국내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저는 일본에 전해진 『화엄경문답』 곧
『지통기』의 이본(異本)이라는 사실을 10여 년 전에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린 바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상이 입적한 702년에 지통은 48세였습니다. 따라서 지통은 8세기 전반에도 활동했을 것이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적어서
유감입니다.
의상이 90일 동안이나 『화엄경』을 강의했고, 이를 토대로 지통이 『추동기』를 저술했던 소백산의 추동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추동(곧 송곳골)은 지금 풍기읍의 영전동(靈田洞)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영전사(靈田寺)가 있었는데,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자손들이 이곳에 종택(宗宅)을 지으면서 잔존하던 불상, 석탑, 석비 등을 땅 속에 묻어 버렸다고 합니다.
1896년에 그 종택은 풍기 서부동으로 옮겨갔지만 절터는 더욱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풍기군수 유달준(兪達俊)은 당간지주를
깨뜨려 자신의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는데, 그 남은 뿌리가 1925년경까지 남아 있었다고도 합니다. 1924년에 석불 1구를 이 절터에서
발굴했는데, 6·25 동란으로 풍기읍내의 포교당인 영전사로 이 불상을 옮겨서 봉안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옛 절터에 있던 탑재 및 불상, 대좌
등도 함께 옮겨 놓았는데,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아미타불로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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